소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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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파는 해방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을 따라 입북한 소련 국적 한인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요직을 차지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5년 8월부터 1946년 9월까지 5차에 걸쳐 평양에 진입했으며, 1946년과 1948년 북조선로동당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을 지지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귀국하는 등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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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파 | |
|---|---|
| 소련파 | |
| 한글 | 소련파 |
| 한자 | 蘇聯派 |
| 로마자 표기 | MR식: Soryŏnp'a 2000년식: Soryeonpa |
2. 평양 진입
해방 직후 소련 군정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 국적의 한인 2세들이 북한으로 파견되었다.[3] 이들은 입북 시기에 따라 1진부터 5진까지 분류된다.
1945년 8월, 1진 40명이 소련군과 함께 평양에 들어왔다.[1]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첩보 활동 중 해방을 맞이한 요원, 그리고 민간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2진 53명이, 12월에는 허가이, 박의완, 방학세 등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될 인물들이 다수 포함된 3진이 평양에 도착했다.[1] 1946년 여름에는 기술자 및 간부 36명으로 구성된 4진, 9월에는 러시아어 교원 20명으로 구성된 5진이 평양에 도착했다.[1]
김일성이 속했던 제88국제여단 (소련) 출신의 고려인들도 소련파로 분류될 수 있다. 이들은 만주 빨치산 출신은 아니지만, 대부분 다른 소련파보다 먼저 김일성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고, 이후 소련파 숙청 때 함께 희생되었다.
소련파는 북한 사회 각 분야에 배치되었지만, 주로 지휘 계통의 2인자 역할을 맡았다.[1] 특히 내무성 관리가 많아 북한 경찰 및 공안 기관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1] 그러나 군사 분야에서는 대숙청으로 인해 고위 관료 출신이 적어 역할이 크지 않았다.[1] 한국 전쟁 당시 소련파 128명 중 48명이 군에 있었으나, 실제 전투 부대 지휘관은 1명뿐이었다.[1] 이들은 주로 본부, 기술, 관리 부서에서 근무하거나 장관급 직책을 맡았다.[1] 교육, 출판, 문화 분야에는 30명, 공업 경영에는 24명, 치안 및 사법 분야에는 16명, 당 및 정부 관리에는 각각 5명이 배치되었다.[1]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면서 소련파는 숙청되기 시작했다. 허가이는 1951년에 실각 후 사망했고, 박창옥 등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와 함께 숙청되었다.[1] 남일, 방학세 등 일부는 김일성을 지지하여 살아남았지만, 소련파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2. 1. 1진 (1945년 8월)
해방 직후 소련 군정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소련 국적 한인 2세로, 1945년 8월에 북한에 들어온 첫 번째 그룹이다.[3]1진은 총 40여 명 규모였다.[1] 여기에는 1945년 8월 9일 대일 전투에 앞서 첩보공작을 하다 해방을 맞은 박창옥, 한일무, 이학용, 김원길, 김성훈 등과 대일 전투에 참가한 정상진(해군 군관)[3][4], 최종학(대위), 최흥국(대위), 최표덕(중좌), 정학준(군관), 최왈렌친(상위)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인 1945년 8월 29일 소련 진주군 제25군 7부(군정치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강미하일 소좌, 오기찬 대위를 비롯한 전동혁(시인), 조기천(시인), 임하(극작가), 김세일(소설가), 김원봉, 김성화, 박기호, 이봉길 등 민간인들도 포함된다.
19세기, 함경도에 인접한 청나라 영토인 간도와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 조선인이 이주하게 되었다.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소련 시대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고려인). 그들 중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소련군(적군)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그 일부는 소련군의 조선 진주에 따라 조상의 땅으로 돌아와 경제 재건과 조선인민군 창설 등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율 (소련 해군 군인), 최종학 (소련군 대위), 체 발렌틴 (소련군 상위) 등 소련의 대일 참전에 참가한 사람들과 박창옥, 한일무, 이학룡, 김원길, 김성훈 등 조선에 파견되어 첩보 활동 중에 종전을 맞이한 사람들, 1945년 8월 29일에 소련군 제25군 정치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미하일 강 소좌, 오기찬 대위 등의 소련 군인과 전동혁 (시인), 조기천, 임하 (극작가), 김세일 (소설가), 김원봉 (조선 의용대의 김원봉과는 다른 인물), 김성화, 박기호, 이봉길 등 민간인 28명이 1진에 포함된다.[1]
2. 2. 2진 (1945년 10월)
1945년 10월 중순, 소련 사범대학 혹은 러시아어 학과 출신 박영빈, 김일, 박길용, 박태섭, 허학철, 천율, 박춘, 김단, 천의완, 오표돌, 박태준 등 53명이 소련파 2진으로 평양에 도착했다.[1]2. 3. 3진 (1945년 12월)
1945년 12월 초순 경 평양에 도착한 소련파 3진은 조만식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군 사령부가 소련 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치·행정에 경험이 있는 한인을 요청한 데 따라 파견되었다.[3] 이들은 이후 북한의 요직을 담당하게 된다.| 이름 | 직책 |
|---|---|
| 허가이 | 당부위원장 |
| 박의완 | 내각부수상 |
| 방학세 | 사회안전상 |
| 김재욱 | 평남도당위원장·군총정치국장 |
| 강상호 | 내무성 부상 |
| 이춘백 | 군정찰국장 |
| 김택영 | 사법성 부상 |
| 기석복 | 로동신문 주필 |
| 김승화 | 내각사무국장·건설상 |
| 김열 | 함북 도당위원장·공업성 부상 |
| 허빈 | 황북 도당위원장 |
| 김동철 | 최고재판소 부소장 |
| 김찬 | 조선은행 총재·재정성부상 |
| 김영수 | 도인민위원회 위원장 |
| 박영 | 도당위원장 |
| 정국록 | 민주조선 주필·정전위 수석대표 |
| 고희만 | 임업상·중앙당 부장 |
| 박창식 | 자강도인민위원장 |
| 안동수 | 사단정치부장 |
| 이동건 | 외무성 부상 |
3진은 후에 당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거물들이 많았다.[1]
2. 4. 4진 (1946년 여름)
1946년 여름, 소련파 제4진으로 기술자 및 간부 36명이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남일(인민군 총참모장·외무상·내각부수상), 장익환(교육성 부상), 김동학(최고검찰소 부소장), 박원무(전기성 부상), 김영삼(전기성 부상), 김학인(내각호위처장), 박일(김일성대 부총장), 김이노겐치(건설성 부상), 천치억(도로국장), 이문일(조선통신사 사장), 정철우(기갑여단장), 장주익(과학원 서기장) 등을 포함한다.[1]2. 5. 5진 (1946년 9월)
1946년 9월, 주로 러시아어 교원으로 구성된 20여 명이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소련파의 제5진으로 분류된다.[1]| 이름 | 직책 |
|---|---|
| 박병률 | 강동정치학원장 |
| 내무성 예심처장 | |
| 오기훈 | 체신성 부상 |
| 박 레오니드 | 수송대 대장 |
| 해군참모장 | |
| 장돈야 |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
| 강소피아 | 당중앙학교 교원 |
| 심수철 | 인민군 간부국 부국장 |
| 이황용 | 인민군 병기국장 |
| 김용수 | 출판지도국장 |
| 박일영 | 체코 대사 |
| 김광 | 무역성 부상 |
| 허익 | 중앙당학교장 |
2. 6. 88여단 출신 고려인
김일성과 함께 88여단에서 복무했던 소련 국적의 고려인들이다. 이들은 만주 빨치산 출신은 아니었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같이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입북하여 평양으로 왔다. 유성철 (인민군 작전국장), 최원 (인민군 정찰국장), 김창국 (인민군 정찰부국장), 이동화 (군의 총국장, 김일성 주치의) 등이 이에 속한다.[5]3. 북조선노동당 내 소련파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43명 중 소련파는 8명이었고, 1948년 2차 당대회에서는 67명 중 14명이 소련파로 선출되어[8] 빨치산파와 함께 중앙위원 수가 크게 늘며 김일성의 입지가 강화되었다.[9]
19세기, 함경도와 인접한 청나라 영토 간도와 러시아 영토 연해주로 조선인들이 이주했다.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은 소련 시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는데(고려인), 이들 중 일부는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소련군(적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이들 중 일부는 소련군의 조선 진주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와 경제 재건, 조선인민군 창설 등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참여했는데, 이들이 바로 소련파이다.
소련계 조선인의 입북은 제1진부터 제5진까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 진 | 시기 | 주요 인물 | 비고 |
|---|---|---|---|
| 제1진 | 1945년 8월 | 정율, 최종학, 체 발렌틴, 박창옥, 한일무, 이학룡, 김원길, 김성훈, 미하일 강, 오기찬, 전동혁, 임하, 김세일, 김원봉, 김성화, 박기호, 이봉길 등 | 소련의 대일 참전 참가자, 첩보 활동 중 종전 맞이한 사람들, 소련군 제25군 정치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인물, 민간인 포함 총 40명[1] |
| 제2진 | 1945년 10월 중순 | 박영빈, 김일, 박길룡, 박태섭, 허학철, 천율, 박춘, 김단, 천의완, 오 표트르, 박태준 등 | 사범대학과 러시아어학과 등을 졸업한 53명[1] |
| 제3진 | 1945년 12월 초순 | 허가이, 박의완, 방학세, 김재욱, 강상호, 이춘백, 김택영, 기석복, 김승화, 김열, 허빈, 김동철, 김찬, 김영수, 박영, 정국록, 고희만, 박창식, 안동수, 이동건 등 | 후에 당과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거물 다수 포함[1] |
| 제4진 | 1946년 여름 | 남일, 장익환, 김동학, 박원무, 김영삼, 김학인, 박일, 김 인노켄티, 천치억, 이문일, 정철우, 장 추이 등 | 기술자 및 간부 36명[1] |
| 제5진 | 1946년 9월 | 박병률, , 오기훈, 박 레오니드, , 장동야, 강 소피아, 심수철, 김연수, 박일영, 김광, 허익 등 | 주로 러시아어 교원 20명[1] |
1945년 9월, 제88독립여단에 근무했던 이동화, 박길남, 이청송, 전학준, 최흥국, 유성철 등이 소련 군함 푸가초프 호를 타고 원산에 입항했다.
소련계 조선인들은 주로 지도적인 직위에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지휘 계통의 2인자였다. 이들은 형사 경찰, 첩보 기관, 방첩 활동 등을 통합한 내무성 관리로 일하며 북한 경찰과 공안 기관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 전쟁 당시 128명의 소련파 중 48명이 군대에 있었으나, 실제로 전투 부대를 지휘한 것은 정철우 1명뿐이었다. 다수는 본부, 기술, 관리 부서에서 근무했지만, 약 19명은 장관급이었다. 교육, 출판, 문화 분야에는 30명, 공업 경영에는 장관 1명과 부(副)장관 9명을 포함한 24명, 치안, 경찰, 사법 분야에는 16명, 당 간부 5명, 외교관 2명을 포함한 정부 관리 5명이 종사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실패 이후 김일성이 권력 확립을 추구하면서 소련파의 중심 인물 허가이는 1951년에 실각 후 자살(변사)했다. 1956년 박창옥 등은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을 비판했으나(8월 종파 사건), 만주파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로 인해 소련파 약 500명은 소련으로 돌아갔고, 소련파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다만, 남일, 방학세 등은 김일성을 지지하여 숙청을 피했다.
3. 1. 1차 당대회 (1946년 8월)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 당시 선출된 중앙위원 43명 중 소련파는 허가이, 박창식, 김열, 김재욱, 태성수, 한일무, 전성화, 김영태 등 8명[6]으로, 대부분 친김일성 성향을 가진 국내파와 함께 빨치산파의 김일성을 지원하며 권력의 실세에 있었다.[7]3. 2. 2차 당대회 (1948년)
1948년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 67명 중 허가이, 박창옥, 김재욱, 김열, 한일무, 이희준, 김승화, 기석복, 태성수, 박창식, 이동화, 방학세, 김영수, 김찬 등 14명이 소련파로 선출되었다.[8] 이들은 빨치산파와 함께 중앙위원 수가 크게 늘어나며 김일성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9]4. 소련파의 역할과 영향
소련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던(고려인) 조선인들 중 일부는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소련군(적군)에 가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이들 중 일부는 소련군의 조선 진주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경제 재건과 조선인민군 창설 등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참여했는데, 이들이 바로 소련파이다.[1]
소련계 조선인의 입북은 제1진부터 제5진까지 나눌 수 있다.[1]
| 진 | 인원 | 주요 인물 및 역할 |
|---|---|---|
| 제1진 | 40명 | 정율, 최종학, 체 발렌틴 등 소련의 대일 참전 참가자, 박창옥, 한일무 등 첩보 활동 중 종전 맞이한 인물, 미하일 강 소좌 등 소련군 제25군 정치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간 인물, 전동혁, 임하, 김세일 등 민간인 포함[1] |
| 제2진 | 53명 | 박영빈, 김일, 박길룡, 박태섭 등 사범대학과 러시아어학과 졸업생[1] |
| 제3진 | 허가이, 박의완, 방학세, 김재욱 등 당과 정부 요직 차지한 인물 다수[1] | |
| 제4진 | 36명 | 남일, 장익환, 김동학, 박원무 등 기술자 및 간부[1] |
| 제5진 | 20명 | 박병률, 추광무, 오기훈, 박 레오니드, 김칠성, 장동야, 강 소피아, 심수철, 김연수, 박일영, 김광, 허익 등 주로 러시아어 교원[1] |
1945년 9월, 제88독립여단에 근무했던 이동화, 박길남, 이청송 등은 소련 군함 푸가초프 호를 타고 원산에 입항했다.
소련계 조선인들은 주로 지휘 계통의 2인자에 임명되었지만, 지도적인 직위에 임명되기도 했다. 많은 수가 내무성 관리로 북한 경찰과 공안 기관 설립에 기여했다. 방학세는 소련인 고문 G.M. 바라사노프의 지도 아래 억압적인 치안 기구를 세웠다. 1950년대 중반, 해외 첩보부는 전 소련 교원이며 전시 첩보원이었던 김춘상 (A.N. 니가이)이 이끌었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내무성 수장은 강상호였다.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 소속 조선 출신 고위 관료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에, 소련파가 북한 군사력 확립에 기여한 역할은 크지 않았다. 주로 정치 교화, 기술 관련 직, 행정 직에 종사했다. 최표덕은 허가이의 영향력으로 인민군으로 이적했다. 유성철, 박길남 등 소련군 정보부에 근무한 사람들도 인민군에 들어갔다.
한국 전쟁 중, 소련파 128명 중 48명이 군대에 있었지만, 실제로 전투 부대를 지휘한 것은 제17기갑사단장 정철우 (알렉세이 텐)뿐이었다. 많은 수가 본부나 기술, 관리 부서에서 근무했지만, 약 19명은 장관급이었다.
소련파는 교육, 출판, 문화 분야(30명), 공업 경영(24명), 치안, 경찰, 사법 분야(16명), 당(5명), 정부 관리 및 외교관(5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실패와 함께 김일성이 권력을 확립하면서, 소련파의 중심 인물인 허가이는 1951년에 실각 후 자살(변사)했다. 1956년 박창옥 등은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 비판(8월 종파 사건)을 하지만, 만주파와 갑산파의 반격으로 패배했다. 이 결과, 소련파 약 500명은 소련으로 귀국했고, 소련파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남일, 방학세 등은 소련계였지만 김일성을 지지하여 실각을 면했다.
5. 숙청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김일성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제거되면서, 소련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국 전쟁의 실패와 함께 김일성은 국내 권력을 확고히 하려 했고, 소련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허가이는 1951년에 실각 후 자살(변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창옥 등은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 비판을 시도했지만 (8월 종파 사건), 김일성 등 만주파와 당시 만주파와 동맹 관계였던 갑산파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 결과, 약 500명의 소련파가 소련으로 귀국했고, 소련파의 영향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남일, 방학세 등은 소련계였지만 김일성을 지지하여 숙청을 면했다.[10]
5. 1. 배경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 숭배가 비판된 것이 계기가 되어 수정주의를 받아들이고 정치적으로 세력화하여 최창익 등의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도전했으나[10]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2월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숙청되었다.5. 2. 경과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 숭배가 비판된 것을 계기로, 최창익 등의 연안파와 함께 수정주의를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세력화하여 김일성에 도전했으나[10] 1956년 8월 종파 사건과 12월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숙청되었다.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은[11] 북조선의 당정 고위직을 지낸 45명의 소련파에 대한 생사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유엔인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사, 유엔주재 남·북 대사 등에 제출한 바 있다.[12] 이 청원서가 제출된 직후, 소련파 생사확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을 찾은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의 정상진은 1955년 12월 문화선전성 부상(副相)으로 소련파 숙청 1차 대상에 포함된 4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13]
6. 주요 인물
1955년 12월,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소련파 숙청 1차 대상에 포함된 4명 중 한 명은 정상진이다.[13]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은 북조선의 당정 고위직을 지낸 45명의 소련파에 대한 생사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유엔인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사, 유엔주재 남·북 대사 등에 제출한 바 있다.[12]
소련계 조선인의 입북은 제1진부터 제5진으로 나눌 수 있으며 다음과 같다.
- 제1진(40명, 1945년 8월 29일): 정율, 최종학, 체 발렌틴 등 소련의 대일 참전에 참가한 사람들과 박창옥, 한일무 등 첩보 활동 중 종전을 맞이한 사람들, 미하일 강 소좌, 오기찬 대위 등의 소련 군인과 전동혁, 임해, 김세일, 김원봉, 김성화, 박기호, 이봉길 등 민간인.[1]
- 제2진(53명, 1945년 10월 중순): 박영빈, 김일, 박길룡, 박태섭, 허학철, 천율, 박춘, 김단, 천의완, 오 표트르, 박태준 등.[1]
- 제3진(1945년 12월 초): 허가이, 박의완, 방학세, 김재욱, 강상호, 이춘백, 김택영, 기석복, 김승화, 김열, 허빈, 김동철, 김찬, 김영수, 박영, 정국록, 고희만, 박창식, 안동수, 이동건 등.[1]
- 제4진(36명, 1946년 여름): 남일, 장익환, 김동학, 박원무, 김영삼, 김학인, 박일, 김 인노켄티, 천치억, 이문일, 정철우, 장 추이 등 기술자 및 간부.[1]
- 제5진(1946년 9월): 박병률, 추광무, 오기훈, 박 레오니드, 김칠성, 장동야, 강 소피아, 심수철, 김연수, 박일영, 김광, 허익 등 주로 러시아어 교원.[1]
1945년 9월, 제88독립여단에 근무했던 이동화 (소좌), 박길남 (대위), 이청송 (특무상사), 전학준 (상사), 최흥국 (병장), 유성철 (상등병), 이종인 (상등병), 정학준 (상등병), 김봉률, 문일이 소련 군함 푸가초프 호를 타고 원산에 입항했다.
소련계 조선인들은 주로 지휘 계통의 2인자, 내무성 관리, 북한 경찰과 공안 기관, 해외 첩보부, 군사력(정치 교화, 기술 관련, 행정 직)에 종사했다.
한국 전쟁 중, 소련계 조선인 128명 중 48명이 군대에 있었지만, 실제로 전투 부대를 지휘했던 것은 1명뿐이었다 (제17기갑사단장 정철우).
| 성명 | 별명 | 입북 시기 | 입북 전 경력 | 입북 이후 경력 | 8월 종파 사건 전후 동향 | ||
|---|---|---|---|---|---|---|---|
| 허가이 |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 1945년 12월 | 구역 당위원회 제2비서 | 당 중앙위원회 비서 | 1953년 숙청 | ||
| 박창옥 | 1945년 | 구역 당위원회 부장 | 부수상 | 숙청 | |||
| 김승화 | 1945년 12월 | 시 당위원회 부부장 | 건설상 | ||||
| 김열 | 1945년 12월 | 우즈베크 행정기관 근무 | 공업성 부상 | 숙청 | |||
| 기석복 | 1945년 12월 | 극동 교육출판국 부국장 | 문화선전성 부상 | 소련 귀국 | |||
| 박의완 | 이반 알카제비치 박 | 1945년 12월 | 시 당위원회 부장 | 부수상 | 숙청 | ||
| 박영빈 | 1945년 10월 | 교사 | 제25군 정치부 통역 | 소련 귀국 | |||
| 김재욱 | 김재욱, 김재욱 | 1945년 12월 | 구역 당 근무 | 총정치국장 대리 | 소련 귀국 | ||
| 태성수 | 1945년 12월 | 로동신문 주필 | |||||
| 방학세 | 니콜라이 이그나체비치 판 | 1945년 10월 | 정보기관 근무 | 내무상 | 김일성 지지 | ||
| 강상호 |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칸 | 1945년 가을 | 소련군 소위 | 내무 부상 | 소련 귀국 | ||
| 남일 | 야코프 페트로비치 남 | 1946년 여름 | 교사 | 교육 부상, 인민군 총참모장, 외무상 | 김일성 지지 | ||
| 정상진 | 정률, 유리 다니로비치 텐 | 1945년 | 소련 해군 병장 | 교육부장, 문화선전성 부상 | 1957년 소련 귀국 | ||
| 문일 | 유리 알렉세이비치 문 | 1945년 | 군인 | 김일성 비서 | 소련 귀국 | ||
| 최표덕 | 표트르 이바노비치 초이 | 1948년 | 소련군 중령 | 탱크 사령관 | 1953년 소련 귀국 | ||
| 최종학 | 1945년 | 소련군 대위 | 군사정치학교 교장 제2사단 부사단장 겸 정치부장 총정치국장 | 숙청 | |||
| 유성철 | 보리스 파블로비치 유가이 | 1945년 9월 | 소련군 상등병 | 작전국장 총참모장 대리 | 1959년 12월 소련 귀국 | ||
| 김봉률 | 1945년 9월 | 콜호즈 의장, 소련군 병사 | 포병 사령관 인민무력부 부부장 | 김일성 지지 | |||
| 최홍극 | 최흥국, 아나톨리 최 | 1945년 | 군인 | 인민군 후방 사령관 | |||
| 황호림 |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에비치 후반 | 1946년 | 소련군 대위 | 공병부장, 부총참모장 | 1948년 소련 귀국 | ||
| 박길남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박 | 1945년 9월 | 소련군 대위 | 인민군 공병국장 | 소련 귀국 | ||
| 이청송 | 1945년 9월 | 소련군 특무 상사 | 인민군 통신부 부부장 제2사단장 | 한국 전쟁에서 전사 | |||
| 최원 | 소련군 상급 중위 | 인민군 정찰국장 | 숙청 | ||||
| 한일무 | 1945년 | 집단 농장 당 위원장, 첩보원 | 해군 사령관 | 1962년 소련 귀국 | |||
| 김칠성 | 1947년 | 해군 작전과장 | 숙청 | ||||
| 이세호 | 1947년 | 해군사관학교 부교장 | |||||
| 유성걸 | 니콜라이 안드레이비치 유가이 | 1945년 | 교사 | 비행사단 문화 부사단장 | 1960년 4월 소련 귀국 |
참조
[1]
뉴스
소련파 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https://web.archive.[...]
1991-11-14
[2]
서적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
http://www.loc.gov/r[...]
경인문화사
2006-06-30
[3]
뉴스인용
소련파 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1991-11-14
[4]
웹사이트
정상진(鄭尙進, 1918~2013) 전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의 일대기
http://www.loc.gov/r[...]
[5]
웹사이트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고려인 81명 手記
http://www.loc.gov/r[...]
[6]
서적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2-08-01
[7]
서적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 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07-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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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사
1992-08-01
[9]
서적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연구 - 현황과 전망
아세아문화사
1997-07-10
[10]
웹사이트
소련파 - Daum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100.daum.net/[...]
[11]
웹사이트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공식 홈페이지
http://humanrights-k[...]
[12]
뉴스인용
인권옹호韓國聯盟(한국연맹) 北(북)숙청 蘇聯派(소련파)인사 45명 유엔등에 生死(생사)확인 청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1-11-18
[13]
뉴스인용
북한(北韓)서 숙청 '소련파'인사 생사(生死)확인 추진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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