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태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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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태는 조위의 장군으로, 등애와 동향 출신이며 병법에 능통했다. 형주 자사 배잠에게 발탁되어 사마의를 보좌하며 그의 눈에 띄었다. 맹달의 신성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 신성 태수를 역임했다. 뛰어난 용병술로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나라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말년에는 도독강남제군사를 역임하다가 261년에 사망했으며, 위장군에 추증되고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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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태 |
본명 | 주태 (州泰) |
작위 | 장후 (壯侯) |
직책 | 정로장군 (征虜將軍) |
사망 | 261년 |
관직 | |
정로장군 | 정로장군 (征虜將軍) |
자사 | 예주자사 (豫州刺史) 연주자사 (兖州刺史) |
태수 | 신성태수 (新城太守) |
생애 | |
활동 시기 | 조방 및 조모 통치 기간 |
주요 활동 | 228년경 신성 태수 임명 |
사망 시기 | 조환의 경원 2년 사망 |
2. 생애
주태는 용병술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남양군(南陽郡) 출신으로, 현재의 허난성 난양시 일대이며, 등애와 같은 군 출신으로 비슷한 나이였다. "영예를 얻는 데 열정적이고, 병법에 정통했다"고 묘사되었다.[2]
주태는 형주 자사 배잠에게 발탁되어 사마의와 인연을 맺었고, 맹달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5] 이후 동오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8] 사마사가 정권을 잡았을 때, 주태는 왕기, 등애, 석포와 함께 주요 장수 중 한 명으로 언급될 정도로 군 통솔 능력과 치적에 뛰어났다.[9] 예주 자사와 연주 자사를 역임했다.[9]
257년 제갈탄의 난 때는 주이가 이끄는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큰 공을 세웠고,[10] 259년에는 도독강남제군사에 임명되어 양양에 주둔했다.[13] 261년에 사망하여 위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장후(莊侯)라는 시호를 받았다.[1]
2. 1. 초기 생애 및 사마의와의 만남
주태는 형주자사였던 배잠에게 발탁되었다. 당시 완에 형예제군사의 사마의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배잠은 사자로서 여러 번 주태를 사마의에게 보냈기 때문에, 사마의는 주태를 알게 되었다. 상용군의 맹달 정벌에서 주태는 선두 역할을 맡았다.[1]이후 주태는 9년간 상을 치른 후 신성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사마의는 주태를 중직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속관에 결원을 마련한 뒤, 주태의 상이 끝나자마자 속관으로 임명하고 36일 후에 태수로 발탁했다.[1] 사마의에게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 주태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서 종요(종회를 말하는가)에게 중상모략을 받았지만, 명문 출신의 종요(종회)에게 당당하게 대답하여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1]
2. 2. 대오(吳) 전선에서의 활약
250년, 신성태수(新城太守)로 형주 정벌에 참전해 자귀(秭歸)로 쳐들어갔으며, 위군은 오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1]251년 1월, 왕기와 함께 오군과 싸워 수천 명을 항복시켰다.[2]
252년 1월, 사마사(司馬師)의 명령으로 주와 군을 관장하게 되었다.[3]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사마소(司馬昭)에 대항해 회남(淮南)에서 거병하자, 사마소는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수춘(壽春)으로 와서 제갈탄군을 공격했다.[4] 제갈탄은 단독으로 사마소에게 맞서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구원을 청했으며, 오의 실권자 손침(孫綝)은 군사를 보내 제갈탄을 도왔다.[5]
오나라 장수 주이(朱異)가 안풍(安豊)에 진을 치자, 사마소는 주태에게 주이를 공격하게 했다.[6] 주태는 주이와 양연(陽淵)에서 싸워 2천 명을 베었으며,[7] 주이가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침은 군사를 다시 보내려 했으나, 주이가 '군사들이 피로하고 군량이 부족하고, 이길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명령을 거부하자, 화가 난 손침은 주이를 죽였다.[8] 이후 주태는 정로장군(征虜將軍)까지 벼슬이 올랐다.[9]
258년, 제갈탄의 반란에서 원군으로 침공해 온 주이가 이끄는 오군을 양연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10]
259년, 도독형주제군사의 직무가 둘로 나뉘자, 주태는 형주 방면으로 복귀하여 양양에 진수하는 도독강남제군사에 임명되었다 (도독형주제군사는 왕기).[11] 가절을 받았으며, 정로장군까지 승진했다 (『진서』 문제기).[12]
2. 3. 제갈탄의 난 진압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에 대항해 회남(淮南)에서 거병하자, 사마소는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수춘(壽春)으로 와서 제갈탄 군을 공격했다.[1] 제갈탄은 단독으로 사마소에게 맞서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아들 제갈정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구원을 청했으며, 오의 실권자 손침은 군사를 보내 제갈탄을 도왔다.[1]오나라 장수 주이가 안풍(安豊)에 진을 치자, 사마소는 주태에게 주이를 공격하게 했다.[1] 주태는 주이와 양연(陽淵)에서 싸워 2천 명을 베었으며, 패전한 주이의 소식을 듣고 손침은 군사를 다시 주어 가게 했으나, 주이가 '군사들이 피로하고 군량이 부족하며, 이길 가능성이 낮다'라는 이유로 명령을 거부하자, 노한 손침은 주이를 죽였다.[1] 이후 주태의 벼슬은 정로장군(征虜將軍)까지 이르렀다.[1]
258년, 제갈탄의 반란에서는 원군으로 침공해 온 주이가 이끄는 오군을 양연에서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는 무공을 세웠다.[2]
2. 4. 말년
257년, 제갈탄이 사마소에 대항해 회남(淮南)에서 거병하자, 사마소는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수춘(壽春)으로 와서 제갈탄 군을 공격했다. 제갈탄은 단독으로 사마소에게 맞서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아들 제갈정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구원을 청했으며, 오의 실권자 손침은 군사를 보내 제갈탄을 도왔다.[1]오나라 장수 주이가 안풍(安豊)에 진을 치자, 사마소는 주태에게 주이를 공격하게 했다. 주태는 주이와 양연(陽淵)에서 싸워 2천 명을 베었으며, 패전한 주이의 소식을 듣고 손침은 군사를 다시 주어 가게 했으나, 주이가 '군사들이 피로하고 군량이 부족하며, 이길 가능성이 낮다'라는 이유로 명령을 거부하자, 노한 손침은 주이를 죽였다. 이후 주태는 정로장군(征虜將軍)까지 벼슬이 올랐다.[1]
259년, 도독형주제군사의 직무가 둘로 나뉘자, 주태는 형주 방면으로 복귀하여 양양에 진수하는 도독강남제군사에 임명되었다 (도독형주제군사는 왕기). 가절을 받았으며, 정로장군까지 승진했다 (『진서』 문제기).[1]
261년, 병으로 죽었다. 위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장후(莊侯)라 하였다.[1]
2. 5. 평가
주태는 배잠에게 발탁되었다. 당시 완에 형예제군사의 사마의가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배잠은 사자로서 여러 번 주태를 사마의에게 보냈기 때문에, 사마의에게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상용군의 맹달 정벌에서 선두 역할을 맡았다.이후 9년간 상을 치른 후 신성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사마의는 주태를 중직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속관에 결원을 마련한 뒤, 주태의 상이 끝나자마자 속관으로 임명하고 36일 후에 태수로 발탁했다. 사마의에게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서 종요(종회를 말하는가)에게 중상모략을 받았지만, 주태는 명문 출신의 종요(종회)에게 당당하게 대답하여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후 대오 전선에서 무공을 세웠고, 250년의 전투에도 왕창, 왕기와 함께 참가하여 무공을 세웠다.
사마사가 정권을 잡았던 시대에는 주군을 다스리는 여러 장수 중 한 명으로 왕기나 등애, 석포와 함께 이름이 올랐다(『진서』 경제기).
군의 통솔에 뛰어난 한편 치적에도 뛰어났기 때문에, 그 재능을 사마소에게도 인정받아 예주 자사, 연주 자사를 역임했다.
258년 제갈탄의 반란에서는 원군으로 침공해 온 주이가 이끄는 오군을 양연에서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259년 도독형주제군사의 직무가 둘로 분할되자, 주태는 형주 방면으로 복귀하여 양양에 진수하는 도독강남제군사에 임명되었다(도독형주제군사는 왕기). 가절을 받았으며, 정로장군까지 승진했다(『진서』 문제기).
261년 사망하여 위장군으로 추증되었으며,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마씨에게 발탁된 인물이지만, 진 건국을 보지는 못했다. 또한, 자식이나 일족이 진 건국 후에 열후가 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 마찬가지로 제갈탄의 반란에서 위군의 우비로 참가하여, 종회의 책략에 따라 오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28
[2]
서적
Sanguozhi vol. 28
[3]
서적
Jin Shu vol. 1
[4]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5]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6]
서적
Sanguozhi vol. 13
[7]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8]
서적
Sanguozhi vol. 4
[9]
서적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8
[10]
서적
Zizhi Tongjian vol. 77
[11]
서적
Zizhi Tongjian vol. 77
[12]
서적
Sanguozhi vol. 28
[13]
서적
Sanguozhi vol.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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