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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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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달은 삼국 시대 촉한, 위나라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유비 휘하에서 촉한에 몸담았으나,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과 유봉과의 불화로 위나라로 투항했다. 위나라에서는 신성군 태수를 지냈으나, 조예 즉위 후 촉한, 오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의에게 진압당하여 처형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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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맹달
로마자 표기Meng Da
본명孟達
자경 (子敬) / 자도 (子度)
작위평양정후 (平陽亭侯)
직업장군
출생지사례 부풍군 흥평
사망일228년
사망 장소방현
관직 및 경력
초기 소속유장
이후 소속유비, 조비, 조예
주요 직책의도태수 (宜都太守), 산기상시 (散騎常侍), 건무장군 (建武將軍), 신성태수 (新城太守)
주요 활동
주요 전투상용 전투
관련 인물유봉, 사마의, 섭읍
기타 정보
관련 인물 (배우)오맹달 (동명이인)
맹달, 사마의의 신속에 패배 (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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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맹달은 원래 유장 휘하에서 복무했으나, 유비가 익주를 침공했을 때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는 맹달을 강릉(江陵|강릉중국어)에 주둔시키고, 익주가 안정된 후에는 의도(宜都|의도중국어) 태수(太守|태수중국어)로 승진시켰다. 맹달의 원래 자는 '자경'이었으나, 유비의 숙부와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에 를 피하기 위해 '자도'로 고쳤다.[2]

219년, 맹달은 자귀(秭歸|자귀중국어)에서 방릉(房陵|방릉중국어)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고 방릉을 정복한 후, 상용(上庸|상용중국어)까지 점령하여 유비의 양자 유봉과 합류했다. 그 해 말, 관우가 형주에서 갇히게 되자 유봉과 맹달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결국 관우는 손권의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맹달은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과 유봉과의 불화를 걱정하여,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조비에게 투항했다. 조비는 맹달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여러 직책과 제후의 작위를 내렸다. 조비는 방릉, 상용, 서성의 세 군을 합쳐 신성(新城)을 만들고 맹달을 신성의 태수로 임명하여 위나라의 남서부 국경을 방어하게 했다. 유엽은 맹달을 중용하지 말 것을 조언했지만, 조비는 이를 무시했다.[3]

225년, 촉한에 항복한 이홍이 제갈량을 만나 맹달이 왕충이라는 사람을 통해 제갈량이 유비에게 맹달의 가족을 처형하라고 권했지만 유비가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맹달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4]

제갈량비시의 반대에도 맹달에게 연락하여 다시 촉으로 귀순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당시 위 황제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했는데, 조예는 맹달을 덜 호의적으로 대했다. 맹달의 가까운 친구들인 환계하후상 또한 사망하여 맹달은 고립감을 느꼈다. 제갈량과 맹달 사이에 편지가 오간 후, 맹달은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품게 되었다.

228년, 제갈량은 북벌을 시작했고, 맹달에게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촉한 군대를 돕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맹달의 반란 계획은 맹달과 불화가 있던 위흥(魏興) 태수 신의에 의해 누설되었다. 사마의는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맹달을 혼란스럽게 하고, 몰래 군대를 이끌고 맹달의 기지를 공격했다. 맹달은 조카 등현(鄧賢)과 부하 이보(李輔)에게 배신당했고,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맹달은 사마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2. 1. 유비 휘하에서 (촉한)

건안 초, 맹달은 같은 사람 법정과 함께 기근을 피해 촉으로 들어가 익주목 유장에게 의탁했다.[13] 211년(건안 16년) 장송유비에게 익주를 넘길 뜻을 품고 유장에게 유비로 하여금 장로를 토벌해 한중을 취하자고 권했다.[14] 유장은 장송의 모략인 줄도 모르고 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2천 명을 줘 유비를 맞이하게 했다. 맹달은 강릉(江陵,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 구)에 머물렀으며 익주가 평정된 후 의도태수를 맡았다.

219년 유비의 명을 받아 의도군 자귀현(秭歸縣, 지금의 후베이성 쯔구이 현)에서 방릉으로 북진하여 그 태수 괴기(蒯祺)를 죽이고 상용(上庸)까지 나아갔다. 유비는 맹달 혼자로는 힘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유봉도 한중에서부터 면수(沔水)를 타고 내려가게 했다. 상용태수 신탐항복하여 그 자리를 유지했고 동생 신의도 서성태수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번성(樊城)과 양양을 포위하고 유봉과 맹달에게 여러 번 증원군을 청했지만 이제 막 복속한 군들을 동요시킬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런데 관우가 패사하는 바람에 유비가 이 일을 원망하였다. 더구나 유봉과 화합하지 못해 군악대를 뺏기기도 하였다.

맹달은 원래 유장의 휘하에서 복무했는데, 유장은 익주 (현재의 쓰촨성충칭시를 포함)의 지배자였다. 익주 침공때 맹달은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는 맹달을 강릉(江陵|강릉중국어)을 지키도록 보냈고, 익주가 안정된 후에는 그를 의도(宜都|의도중국어)의 태수(太守|태수중국어)로 승진시켰다. 맹달의 원래 자는 '자경'이었으나, '자경'이 유비의 숙부의 자와 같았기 때문에 를 피하기 위해 '자도'로 고쳤다.

219년, 맹달은 자귀(秭歸|자귀중국어)에서 병력을 이끌고 방릉(房陵|방릉중국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방릉을 정복한 후 맹달은 더 북쪽으로 진격하여 상용(上庸|상용중국어)이라는 다른 도시를 점령했고, 그곳에서 유비의 양자 유봉과 합류했다. 그 해 말, 유비의 장수 관우가 형주에서 적군에게 갇히게 되자, 관우는 유봉과 맹달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다. 관우는 결국 손권의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유비 휘하의 무장으로서 한중 전선에서 활약하여, 방릉을 공격하여 태수인 쾌기(아내는 제갈량의 맏언니)를 살해했다. 또한 상용군으로 진격하여, 유봉·이엄과 함께 태수 신탐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유봉과의 관계는, 맹달의 군악대를 유봉이 몰수하는 사건이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였고, 맹달에게는 좋지 않았다.

2. 2. 위나라로 투항

220년(연강 원년) 7월(음력)[15]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이 두려웠고, 유봉과의 불화도 있었기에 유비에게 편지를 남기고 4천여 가를 이끌고 위나라로 귀순했다.[2] 조비는 맹달을 높이 평가하여 매우 기뻐하며 환영했다. 맹달의 등을 어루만지며 유비의 자객이 아닐까 농담을 하고, 자신의 수레에 함께 태우기도 했다. 조비는 맹달을 산기상시(散騎常侍) 겸 건무장군(建武將軍)에 평양정후(平陽亭侯)로 삼고, 방릉·상용·서성 3군을 합쳐 신성군을 설치하여 그 태수까지 겸하게 했다. 이러한 대우는 과분하다거나 국경의 요직은 적당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조비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3]

10월, 조비가 황제에 올랐다.[15] 정남장군(征南―) 하후상이 신성군 탈환을 건의하여 우장군 서황, 맹달과 함께 상용으로 진군하였다. 맹달은 유봉에게 에 남으면 위태로울 것이라며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2] 유봉은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신의의 배반으로 성도로 패주했다. 이로써 3군 9을 수복했다.[16] 맹달은 유봉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 "육친조차 원수로 변하니, 하물며 육친이 아닌 자야 어떻겠습니까. 당신은 한중왕(유비)에게는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한중왕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렸고, 당신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측근들은 한중왕에게 참언을 할 것입니다. 몸을 버리고 동쪽으로 오셔서, 라후를 계승하신다면, 어버이를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쪽을 향해 군주(위의 군주)를 섬기고, 그것으로써 국가의 대강을 바로잡는다면, 옛 지우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폐하(조비)께서는 새롭게 선양을 받으시고, 아무런 사악한 마음 없이 현인의 도래를 기다리고 계시며, 덕으로써 멀리 있는 자를 따르게 하십니다. 당신은 이 기회에 빨리 좋은 계책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에 '대인(지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을 보는 것이 이롭다'고 하였고, '시경'에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용해야 합니다."[8]

그러나 유봉은 맹달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이후 유비에게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죄 등을 추궁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유봉은 "아아, 맹달의 말을 쓰지 않은 탓이로다…"라고 탄식했다.

조비는 맹달을 총애했지만, 유엽과 사마의는 맹달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중용하지 말 것을 간언했다.[3]

2. 3. 위나라를 배반 (신성 반란)

226년(황초 7년)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였고, 맹달과 친하게 지냈던 환계하후상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17] 좁아지는 입지에 맹달은 불안감을 느꼈다. 제갈량이엄[18], 오나라가 맹달에게 접근했다. 227년(건흥 5년) 한중에서 북벌을 시작하려던[19] 제갈량은 맹달이 변심할까 우려해 곽모(郭模)를 신의에게 위장 귀순시켜 그간의 모의를 흘렸다. 맹달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누설을 알게 된 맹달은 서둘러 거병하려 하였다.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정무를 보던 독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 사마의는 맹달에게 서신을 써 안심시키고는 은밀히 토벌 준비를 하였다. 얼마 후 사마의가 참군 양기(梁幾)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하였다.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이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신성군은 맹달이 일찍이 백마새(白馬塞)에 올라 ‘유봉과 신탐은 이런 금성천리(金城千里)에 웅거하고도 을 잃다니!’라고 놀랐을 정도로[20] 깊고 험했다. 맹달은 여러 절차와 지세를 감안하여 진압군이 당도하는 데에 한 이상 걸릴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미 만반의 출동 태세를 갖춰놓았던 사마의는 바로 진군하여 8일 만에 상용성에 이르렀다.[21] 228년 1월(태화 2년, 음력)[15] 맹달의 생질 등현과 장수 이보가 성문을 열고 항전을 포기하였다. 공성을 개시한 지 16일 만이었다. 워낙에 신속했으므로 촉과 오의 원군도 소용없었다.[22] 맹달의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번화가에서 태워졌다.[23]

제갈량은 비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맹달에게 연락하여 촉으로 다시 귀순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당시 위 황제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즉위했는데, 조예는 맹달을 덜 호의적으로 대했다. 맹달의 가까운 친구들인 환계하후상 또한 사망하여 맹달은 고립감을 느꼈다. 제갈량과 맹달 사이에 편지가 오간 후, 맹달은 반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품게 되었다.

228년, 제갈량은 위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시작했고, 맹달을 설득하여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촉한 군대를 돕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맹달의 반란 계획은 맹달과 불화가 있던 위흥(魏興)의 태수 신의(申儀)에 의해 누설되었다. 위나라 장군 사마의는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반란을 일으킬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했고, 몰래 완(현재의 남양, 허난성)에서 군대를 이끌고 맹달의 신성 기지를 공격했다. 맹달은 그의 조카 등현(鄧賢)과 부하 이보(李輔)에게 배신당했고, 그의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그는 사마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맹달의 반역 경위는 『촉서』, 『위략』, 『진서』 등 사서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조예가 즉위하면서 맹달이 냉대를 받은 것이 원인으로 여겨진다.

  • 『촉서』비시전에 따르면, 촉한의 제갈량은 맹달의 근황을 위나라에서 항복해 온 이홍에게 들었다. 제갈량은 맹달을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외원으로 삼으려 했다. 장완과 비시에게 이 계략을 말하자, 비시는 맹달이 유장, 유비에게 반역한 불충한 인물이며, 서신을 줄 가치가 없다고 반대했다. 제갈량은 개의치 않고 편지를 보냈고,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맹달은 위나라에 반역할 의사를 표했다.[11] 그러나 제갈량은 맹달에게 성의가 없다고 생각해 구원하지 않았고, 맹달은 사마의의 정벌군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 위략』에 따르면, 맹달은 국경에 주둔한 지 오래되어 잇따라 보호자가 죽었기 때문에 불안해졌다. 제갈량은 이를 듣고 맹달의 배반을 유도하려 몇 차례 편지를 보냈고, 맹달은 이에 답장을 보냈다. 이때 위흥태수 신의는 맹달과 불화하여 몰래 맹달과 촉나라의 밀통을 조정에 상표했다. 맹달은 이에 놀라 마침내 모반을 일으켰다. 신의는 촉나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여 구원을 요청하지 못하게 했다. 토벌군으로 파견된 사마의는 맹달의 대장 이보와 조카 등현을 유인했고,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세를 끌어들였다. 맹달은 포위된 지 16일 만에 패배했다. 그의 머리는 낙양의 대로에서 불태워졌다고 한다.[12]

  •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제갈량은 맹달이 유비를 배신한 것을 미워했고, 촉나라에 재앙이 될까 두려워했다. 제갈량은 맹달과 신의가 불화한 틈을 타서 모반을 부추기기 위해 곽모라는 사람을 위장 항복시키고 맹달의 밀모를 신의에게 누설했다. 이를 알게 된 맹달은 과연 거병했다. 사마의는 맹달에게 정중한 서신을 보내 미혹시키고, 맹달이 즉시 거병하지 않도록 모의했다. 그러나 맹달의 예상과 달리 사마의는 맹달의 4배의 병력을 이끌고, 주태의 선도 하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군하여, 불과 8일 만에 상용까지 도착하여 맹달을 공격했다. 상용성은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그러나 사마의의 예상 밖의 진군 속도에 맹달 진영에서는 조카 등현 등 반역자가 속출했고, 맹달은 반 달 정도 만에 패배하여 참살되었다.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

3. 평가

남들보다 품위가 있고 과 글 솜씨가 뛰어나 타국에도 명성이 알려졌다. 위나라의 안목 있는 여러 고관들은 악의에 비견하며 장수의 재목이라거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하였다. 반면에 유엽은 그 능력을 믿고 술수를 부린다며 의리 있는 이가 아니라 하였고,[24] 사마의도 그 언행이 간교하다며[15] 서남방의 일을 일임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비시는 유장 때도 그렇고, 유비 때도 그렇고 자꾸 배반하는 소인이라며 제갈량의 접선을 반대하였다.[25]

4. 삼국지연의

소설삼국지연의》에서 맹달은 장송, 법정, 이엄과 절친한 친구로 는 자경(子慶)이라고 나온다. 유비에게 협력하여 곽준과 더불어 가맹관을 지켰으며, 한중 평정 후 유봉과 함께 상용을 점령했다. 맥성(麥城)으로 내몰린 관우요화를 보내 원군을 청했지만 거절했다. 유비가 맹달을 죽이려 하자 위나라로 귀순하여 5만 명을 이끌고 양양으로 쫓아온 유봉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하후상, 서황과 힘을 합쳐 유봉을 물리치고 상용 일대를 정복했다. 이후 신성태수로서 제갈량북벌에 호응하여 낙양을 공격하려 했다. 신의, 신탐, 이보, 등현사마의와 내통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빠르게 진군해온 사마의와 맞닥뜨렸다. 선봉인 서황의 이마화살을 쏘아 죽였고, 신성에 도착한 금성태수(金城―) 신의, 상용태수 신탐을 맞으러 나갔다가 공격을 받고 으로 후퇴했으나, 이보와 등현이 성문을 닫고 화살을 날렸다. 결국 맹달은 도망가다가 신탐에게 죽임을 당했다.[1]

관우가 사망하기 전후의 행적은 정사와 거의 같지만, 유봉에게 적극적으로 관우를 죽게 내버려두라고 진언했다는 점이 다르다.[1]

조비 즉위 후, 사마의가 제안한 촉 공격 계략에 따라 촉에 침공했지만, 제갈량의 계략으로 친구인 이엄과 대치하게 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싸우지 않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또한 사마의의 군대에 성이 포위당했을 때, 서황을 활로 쏘아 죽였다.[1]

5. 가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228-02-23
[2] 서적 Sanguozhi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Sanguozhi
[5] 문서 劉備の叔父の名が敬であった為、[[避諱]]して改名した
[6] 서적 蜀書
[7] 서적 襄陽耆旧記
[8] 서적 魏略
[9] 서적 三国志
[10] 서적 三国志
[11] 서적 三国志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삼국지
[14] 서적 삼국지
[15] 서적 삼국지
[16] 서적 삼국지
[17] 서적 삼국지
[18] 서적 삼국지
[19] 서적 삼국지
[20] 서적 진기
[21] 서적 진서
[22] 서적 자치통감
[23] 서적 수서
[24] 서적 삼국지
[25] 서적 삼국지
[26] 문서 상 고종의 아들
[27] 문서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28] 문서 진 선공(陳宣公)의 아들
[29] 문서 초 평왕의 아들
[30] 서적 삼보결록주
[31]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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