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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창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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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창은 서진의 장수 왕혼의 아버지로, 위나라의 장수이자 정치가였다. 조비가 태자였을 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예 시대에 사마의의 추천을 받아 양렬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하고 경릉후에 봉해졌으며, 관구검과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258년 사공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사망하여 목후의 시호를 받았다. 왕창은 통치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여,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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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창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창
이름왕창
로마자 표기Wang Chang
문서 (文舒)
시호목후 (穆侯)
작위경릉후 (京陵侯)
생애
출생지태원
사망일259년 7월 또는 8월
아버지왕택
자녀왕혼
왕심
왕륜
왕찬
관직
양렬장군 (揚烈將軍) 임명227년–?
연주자사 (兗州刺史) 임명?–226년
서주자사 (徐州刺史) 임명240년대 경
정남장군 (征南將軍) 임명240년대 경–251년 5월 16일
정남대장군 (征南大將軍) 임명251년 5월 16일–255년 6월 14일
표기장군 (驃騎將軍) 임명255년 6월 14일–258년 9월 26일
사공 (司空) 임명258년 9월 26일–259년 7월 또는 8월
소속 세력
국가조위

2. 생애

태원 출신으로, 젊은 시절 같은 군 출신의 왕릉과 함께 명성을 얻었다. 조비가 태자였을 때 발탁되어 태자문학(太子文學) 등을 지내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위나라 건국 후 산기시랑, 낙양 전농교위, 연주(兗州) 자사(刺史) 등을 역임했다. 조예 즉위 후에는 양렬장군(揚烈將軍)에 임명되었고, 사마의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서주(徐州) 자사를 거쳐 정남장군(征南將軍)·가절(加節)·도독(都督) 형예이주 제군사(荊豫二州 諸軍事)가 되어 형주(荊州) 방면에서 오나라와의 국경 방비를 책임졌다.[4] 그는 주둔지를 완에서 신야로 옮겨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250년 오나라의 혼란을 틈타 강릉(江陵)을 공격하여 주적[5]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 공으로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승진하고 경릉후(京陵侯)에 봉해졌다. 252년 동흥 전투에도 참전했으나 호준제갈탄의 패배로 후퇴했다. 이후 관구검·문흠의 난제갈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표기장군을 거쳐 258년 사공에 임명되었다.

259년 6월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목후(穆侯)이다. 진나라의 장수로서 오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왕혼은 그의 아들이다. 왕창은 『치론(治論)』, 『병서(兵書)』, 『가성(家誠)』 등 여러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태원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같은 군 출신인 왕릉과 함께 명성이 있었으며, 연상이었던 왕릉을 형처럼 따랐다. 조비가 황태자였을 때 발탁되어 태자문학(太子文學)과 태자 중서자(太子中書子)를 지내며 그를 보좌했다.

위(魏) 건국 후에는 산기시랑(散騎侍郎)을 거쳐 낙양의 전농교위(典農校尉)가 되어 밭을 개간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후 연주(兗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었다. 조예가 즉위하자 양렬장군(揚烈將軍)으로 승진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 연주 자사로 재직하면서도 국가 통치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당시 진(秦)과 한(漢)에서 이어진 위나라의 법률 제도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결함이 많다고 여겼다. 이에 국가 통치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치론(治論)』과 병법에 관한 『병서(兵書)』를 저술하여 조정에 올렸다. 또한 자녀와 조카들의 교육에도 힘써 『가성(家誠)』 등을 저술하기도 했다.

청룡 4년(236년), 조정에서 현명한 인재를 구하자 사마의에 의해 추천되었다. 정시 연간에는 서주(徐州) 방면으로 나아가 공을 세워 무관정후(武觀亭侯)가 되었다. 이후 정남장군(征南將軍)·가절(加節)·도독(都督) 형예이주 제군사(荊豫二州 諸軍事)로 임명되어 형주(荊州) 방면에서 오나라와의 국경을 방비하는 중책을 맡았다.[4] 당시 정남장군의 주둔지는 완(宛)이었는데, 왕창은 이곳이 오나라와의 최전선인 양양(襄陽)과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하여 유사시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243년 조정에 상소하여 주둔지를 신야(新野)로 옮길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고, 신야에서 수군을 훈련시키고 농경지를 개간하여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조상(曹爽)이 고평릉 사변으로 제거된 후 사마의가 국정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왕창은 교육과 인사를 중심으로 한 5개 조항의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진(晉)의 장수로서 오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왕혼(王渾)은 그의 아들이다.

2. 2. 오나라와의 전투

왕창은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어 형주(荊州)와 예주(豫州)의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4] 당시 정남장군의 주둔지였던 완(宛)은 오나라와의 최전선인 양양에서 멀고 수군 기지와의 거리도 있어, 오의 공격 시 신속한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왕창은 조정에 건의하여 주둔지를 신야로 옮기고, 수군 훈련과 농업 생산을 통해 군사적 대비를 강화했다.

가평 2년(250년) 12월, 왕창은 손권 재위 말기 이궁의 변 등으로 오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공격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승인받았다. 그는 신성태수(太守) 주태(州泰)에게 무(巫)·방릉(房陵) 방면을, 형주 자사 왕기(王基)에게 이릉(夷陵) 방면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강릉(남군)으로 향했다. 왕창군은 대나무 조각으로 다리를 만들어 양쯔강을 건너 오나라 장수 주적[5]을 공격했다. 왕창은 철수하는 척하며 일부러 전사자의 목을 말에 매달아 보이는 등 도발하여 주적을 유인한 뒤, 복병으로 격파하고 오나라 장수 종리모(鍾離茂)와 허민(許旻) 등을 베었다. 이후 강릉성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군사를 물렸다. 철수 과정에서 주적의 추격을 받았으나 위기를 넘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2], 오나라 측 기록에는 육개(陸凱) 등의 원군이 도착하여 위군을 물리쳤다고 한다.[3] 이 전투의 공으로 왕창은 정남대장군·의동삼사(儀同三司)로 승진하고, 경릉후(京陵侯)에 봉해졌다.

가평 4년(252년) 손권이 사망하자, 왕창은 제갈탄, 호준, 관구검 등과 함께 다시 오나라 정벌을 계획했다. 위의 실권자 사마사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세 방향으로 공격을 명령했고, 왕창은 남군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흥(東興)에서 호준제갈탄의 군대가 오나라의 제갈각에게 크게 패하면서( 동흥 전투 ), 왕창도 별다른 성과 없이 진영을 불태우고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감로 2년(257년) 제갈탄이 수춘(壽春)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창은 군대를 이끌고 강릉 방면으로 진격하는 움직임을 보여 오나라 장수 주적을 견제함으로써 반란 진압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2. 3. 반란 진압

255년,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창은 군사를 이끌고 이에 저항하여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왕창은 표기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의 두 아들은 열후에 봉해졌다.

257년, 또 다른 위나라 장수 제갈탄오나라의 지원을 받아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왕창은 군대를 이끌고 강릉 방면으로 나아가, 사기(施績)와 전희(全熙)가 이끄는 오나라 군대를 압박하여 그들이 제갈탄을 돕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258년, 제갈탄의 난이 성공적으로 진압된 후, 왕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칙에 따라 식읍 천 호를 추가로 받아 이전의 봉읍과 합쳐 총 4천 7백 호가 되었다. 또한 지절(持節)과 도독(都督)의 지위는 유지한 채 사공으로 승진했다. 그는 이듬해인 259년 6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로 목후(穆侯)를 받았다.

2. 4. 죽음

감로 4년(259년) 6월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목후(穆侯)로 추증되었다.

3. 저술 활동

왕창은 조예(曹叡)가 즉위한 후 양렬장군·관내후(關內侯)가 된 시기에 법률, 병학, 가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에 힘썼다.

그는 당시 위나라의 법률 제도가 가혹하고 조잡하다고 여겨, 이를 대대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고대의 제도를 참고하고 당시의 정치 상황에 맞는 내용을 담아 《치론》(治論) 20여 편을 저술하여 선왕의 유풍을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병법에 관한 책인 《병서》(兵書)를 저술하여, 전쟁에서의 기책(奇策)과 정공법(正攻法)의 운용에 대해 논하고 이를 황제에게 상주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불어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훈계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가성》(家誠)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 가족 관계

wikitext

'''왕창의 가계'''
관계이름설명
아버지왕택(王澤)후한 시대의 대군 태수
아들왕혼(王渾)위나라 장군, 나라 사도, 오나라 정복 참여
왕심(王深)기주 자사
왕륜(王淪)대장군 고문
왕담(王湛)유남군 태수
손자왕상(王尚)왕혼의 장남, 제후 작위, 요절
왕제(王濟)왕혼의 차남, 진나라 시중
왕징(王澄)왕혼의 삼남, 제후 작위, 진나라 관리
왕문(王汶)왕혼의 사남, 진나라 관리
왕승(王承)왕담의 아들, 동해군 내시
증손자왕탁(王卓)왕제의 장남, 관리
왕율(王聿)왕제의 차남, 진나라 공주와 결혼, 민양후 작위
왕술(王述)왕징의 아들, 진나라 중서령, 위장군
고손자왕탄지(王坦之)왕술의 아들, 진나라 상서, 서주 및 연주 자사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2] 서적 呉書「朱績伝」
[3] 서적 呉書「呉主伝」
[4] 서적 자치통감
[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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