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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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잠은 후한 말에서 위나라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형주에서 조조 휘하로 들어가 참승상군사, 대군 태수, 연주 자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유비의 재능을 평가하고, 대군 태수로 재임하며 오환족을 안정시키는 등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조조 사후에는 위나라에서 산기상시, 형주 자사, 상서령 등을 지냈으며, 사후에는 태상으로 추증되고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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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는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관료이자 지리학자로, 사마소의 신임을 얻어 서진 건국에 기여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원칙인 제도육체를 정립하고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여 중국 지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 배잠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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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배잠 |
| 자 | 문앙(文鴦) |
| 생몰 | 170년대 ~ 266년 |
| 출생지 | 산양군 창읍현 |
| 사망지 | 낙양 |
| 사인 | 처형 |
| 시대 | 삼국 시대 |
| 소속 | 조위 → 서진 |
| 관직 | 기도위(騎都尉) → 동래군 태수 → 청주 자사 → 호군 → 중호군 |
| 봉작 | 관내후(關內侯) → 도향후(都鄉侯) |
| 가족 | 아버지: 배계(裴楷) 손자: 배수(裴粹) |
| 상세 정보 | |
| 생애 | 배잠은 조위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자는 문앙(文鴦)이며 산양군 창읍현 사람이다. |
| 주요 활동 | 옹개의 난 진압 사마염 암살 모의 |
2. 생애
배잠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고, 젊은 시절 예를 경시하는 행동으로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위략』).
후한 말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으며, 유표에게 초청받았으나 그의 그릇에 맞지 않는 야심을 간파하고 장사로 갔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자 승상 군사에 임명되었고, 현령을 역임한 후 창조속이 되었다. 조조가 유비의 재능을 묻자 "중앙에 있다면 사람을 어지럽힐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틈을 타서 요새를 지킨다면 한 지방의 주가 될 만한 것은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군 태수 시절, 오환의 장로들을 제압하기 위해 한 대의 수레만으로 임지에 부임하여 그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군내 부패 관리들을 일소하고 민심을 사로잡았다. 3년 후 중앙으로 돌아와 조조에게 공적을 치하받았을 때, 후임자의 통치 실패와 이민족의 반란을 예언했고, 실제로 조창이 이를 진압했다.
패국 상, 연주 자사를 거쳐 219년 손권의 합비 침공과 관우의 공격에 대응했다. 조조는 마파에서 배잠의 군대가 정연한 것을 보고 칭찬했다.
조비가 선양으로 위 왕조를 성립시키자 산기상시, 위군·영천군 전농 중랑장을 역임했다. 농정 관료의 출세 길을 넓혔고, 형주 자사,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조예 시대에 상서, 하남윤, 태위 군사, 대사농 등 고관을 역임하고 청양정후에 봉해졌다. 상서령 시절 인사 제도 개혁에 힘썼으나 부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났고, 광록대부를 받았다.
244년에 사망했으며, 태상으로 추증되고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아들 배수가 뒤를 이었다.
2. 1. 후한 말의 혼란과 형주 피난
후한 말기의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다. 유표는 빈객의 예로써 대우했다. 배잠은 친교를 맺은 왕찬, 사마지에게 "유표는 패왕(霸王)의 재목이 아닌데, 서백(西伯: 주문왕)으로 자처하려고 하니, 그의 멸망은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쪽 장사로 갔다.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세 현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중앙으로 들어와 창조속(倉曹屬)으로 임명되었다. 조조가 배잠에게 "경은 이전에 유비와 함께 형주에 있었소. 그대는 유비의 재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라고 묻자, 배잠은 "그가 중원(中原)에 있으면, 민심이 흩어져 혼란만 가중시킬 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변방을 차지한다면, 한 지역의 군주 노릇은 톡톡히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2]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후한 말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다. 유표는 빈객의 예로써 대우했으나, 배잠은 왕찬, 사마지에게 "유표는 패왕(霸王)의 재목이 아닌데, 서백(西伯: 주문왕)으로 자처하려고 하니, 그의 멸망은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2] 그리고 남쪽 장사로 갔다.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자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 이후 세 현의 현령을 역임하고, 중앙으로 돌아와 창조속(倉曹屬)이 되었다.조조는 배잠에게 유비의 재략에 대해 물었고, 배잠은 "그가 중원(中原)에 있으면 민심이 흩어져 혼란만 가중시킬 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변방을 차지한다면 한 지역의 군주 노릇은 톡톡히 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2]
건안 20년(215년),[2] 대군에 소란이 일자 배잠이 대군태수로 임명되었다. 오환왕 등은 선우를 자칭하며 정사에 간섭했고, 전임 태수는 이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조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려 했으나, 배잠은 이를 사양하며 "대군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불안해할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계획을 짜서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배잠은 수레 한 채만 타고 대군으로 부임했고, 선우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으며, 선우 등은 모자를 벗고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그릇,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또한 군내에서 선우와 결탁한 대관인 학온(郝溫)·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하여 북쪽 변방이 크게 떨고 백성들이 귀의했다.
3년 후, 건안 23년(218년)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이 되었다. 조조는 배잠의 공을 칭찬하며, 후임자의 통치 실패와 이민족 반란을 예언했다. 예언대로 오환의 장로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조창이 이를 진압했다.
이후 배잠은 패상을 거쳐 연주자사로 승진했다. 건안 24년(219년), 번성이 위급해지자 예주자사 여공(呂貢)과 함께 부름을 받았으나, 느긋하게 가다가 온회의 충고를 받고 빨리 출발하여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조는 마피(摩陂)에서 배잠의 군대가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여 상을 내렸다.
2. 3. 위나라 건국 이후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2] 지방으로 나가 세 현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중앙으로 들어와 창조속(倉曹屬)으로 임명되었다.건안 20년(215년),[2] 대군이 크게 소란했으므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했다. 오환왕과 그 대인(大人) 세 명은 각자 선우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하였다.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조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진무하고 토벌하게 하려고 했다. 배잠은 "대군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전쟁용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당 계획을 짜서 그들에게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라며 사양하였다.
배잠은 수레 한 채를 타고 대군으로 부임하니, 선우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다.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전후로 하여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그릇,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배잠은 군내의 대관중 선우와 결탁한 군 내의 대관인 학온(郝溫)·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하였다. 북쪽 변방은 크게 떨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대군에서 3년 재직하고, 건안 23년(218년),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이 되었다. 조조는 대군을 다스린 공을 칭찬하고 포상했다. 배잠은 "신(臣) 배잠은 백성들에게는 비록 관대하지만, 오랑캐들에게는 매우 엄합니다. 지금 후임자는 반드시 제 법령이 너무 엄하고, 정사는 너무 온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랑캐는 평상시 오만하고 방자하여 지나치게 간대(懇待)하면 반드시 흩어지게 되고, 또 이미 흐트러지고 나서 그들을 법률로써 규제하려고 하면, 이것은 투쟁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형세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대군은 반드시 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조조는 배잠을 너무 일찍 중앙으로 소환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 후 수십 일이 지나자 선우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언릉후(鄢陵侯) 조창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여 보내 그들을 정벌하도록 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패상이 되었다가 연주자사로 승진했다.
건안 24년(219년), 당시 번성이 위급해져 조서로써 예주자사 여공(呂貢)과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느긋하게 가다가 양주자사 온회의 충고를 받고, 군용물자를 남겨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바꾸고 빨리 출발하였는데,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조는 마피(摩陂)에 주둔하였을 때, 배잠이 다스리는 군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여 특별히 상을 내렸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중앙으로 들어가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가 위군ㆍ영천의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이 되었고, 군국과 같이 태수·국상과 같은 인재 천거의 길을 열어달라고 주청하였으며, 이로부터 농업관리가 벼슬에 나갈 길이 넓어졌다. 형주자사로 승진하였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명제가 즉위하자, 중앙에 들어가 상서(尙書)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와서는 하남윤이 되었고, 태위군사(太尉軍師)ㆍ대사농으로 전임되었으며, 청양정후(淸陽亭侯)로 봉해졌고, 식읍 2백 호가 증가했다. 중앙으로 들어와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직무의 구분을 바르게 하고, 명실(名實)ㆍ품평ㆍ정책을 내었을 때 관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150여 가지를 상주하였다. 부친이 죽은 후, 관직을 떠났고, 후에 광록대부로 임명되었다.
정시 5년(244년), 세상을 떠났는데 태상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했다. 아들 배수(裴秀)가 후사를 이었다.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였으므로, 묘 안에는 오직 태좌(台坐) 하나와 옹기 몇 개만을 두었을 뿐이었다.
3. 주요 업적
배잠은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로, 뛰어난 행정 능력과 인재 등용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오환족을 통치하고 북방을 안정시킨 업적과 내정 개혁, 그리고 인재를 보는 안목은 높이 평가받는다.
조조에게 유비의 재능에 대해 평가할 때, "중원에 있으면 백성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지만, 변방을 지킨다면 한 지역의 군주 노릇은 할 수 있다"고 하였다.[2] 진수는 배잠을 "항상 평상심을 유지했으며,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라고 평가했고, 『위략』에서는 "평생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아내와 자식에게도 이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다"고 전한다.
3. 1. 오환족 통치와 북방 안정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세 현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중앙으로 들어와 창조속(倉曹屬)으로 임명되었다.[2] 대군이 크게 소란했으므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했다. 오환족의 왕과 그 대인(大人) 세 명은 각자 선우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하였다.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조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진무하고 토벌하게 하려고 했다. 배잠은 이를 사양하고 수레 한 채만 가지고 대군으로 부임했는데, 선우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으며,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에 대고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그릇,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배잠은 군내에서 선우와 결탁한 대관인 학온(郝溫)·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하였다. 북쪽 변방은 크게 떨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대군에서 3년 재직하고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이 되었다. 조조는 대군을 다스린 공을 칭찬하고 포상했다. 조조는 배잠을 너무 일찍 중앙으로 소환한 것을 후회했고, 이후 수십 일이 지나자 선우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언릉후(鄢陵侯) 조창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정벌하도록 했다.3. 2. 내정 개혁과 인재 등용
후한 말기의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갔다. 유표는 빈객의 예로써 대우했다. 배잠은 친교를 맺은 왕찬, 사마지에게 "유표는 패왕(霸王)의 재목이 아닌데, 서백(西伯: 주문왕)으로 자처하려고 하니, 그의 멸망은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2] 그리고 남쪽 장사로 갔다. 건안 13년(208년), 조조는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을 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임명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세 현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중앙으로 들어와 창조속(倉曹屬)으로 임명되었다.조조가 배잠에게 "경은 이전에 유비와 함께 형주에 있었소. 그대는 유비의 재략이 어떻다고 생각하시오?"라고 묻자, 배잠은 "그가 중원(中原)에 있으면, 민심이 흩어져 혼란만 가중시킬 뿐 통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변방을 차지한다면, 한 지역의 군주 노릇은 톡톡히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
건안 20년(215년),[2] 대군이 크게 소란했으므로 배잠을 대군태수로 임명했다. 오환왕과 그 대인(大人) 세 명은 각자 선우라고 칭하고, 대군의 정사에 간섭하였다. 전임 태수가 그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없었으므로, 조조는 배잠에게 정예병을 주어서 그들을 진무하고 토벌하게 하려고 했다. 배잠은 "대군의 호구 수는 많고, 병사와 전쟁용 말은 항상 만여 필을 헤아립니다. 선우는 스스로 방종하게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알고 내심 매우 불안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벌한다면, 반드시 두려워하며 경내에서 항거할 것이고, 소수의 장수는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응당 계획을 짜서 그들에게 대응해야지, 군대로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사양했다.[2]
그리고는 수레 한 채를 타고 대군으로 부임하니, 선우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배잠은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켰다. 선우 이하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전후로 하여 약탈했던 부녀자, 기계, 그릇, 재물을 모두 돌려주었다. 배잠은 군내의 대관 중 선우와 결탁한 군 내의 대관인 학온(郝溫)·곽단(郭端) 등 10여 명을 주살하였다. 북쪽 변방은 크게 떨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대군에서 3년 재직하고, 건안 23년(218년),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이조연(丞相理曹掾)이 되었다. 조조는 대군을 다스린 공을 칭찬하고 포상했다. 배잠은 "신(臣) 배잠은 백성들에게는 비록 관대하지만, 오랑캐들에게는 매우 엄합니다. 지금 후임자는 반드시 제 법령이 너무 엄하고, 정사는 너무 온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오랑캐는 평상시 오만하고 방자하여 지나치게 간대(懇待)하면 반드시 흩어지게 되고, 또 이미 흐트러지고 나서 그들을 법률로써 규제하려고 하면, 이것은 투쟁을 낳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형세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대군은 반드시 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
조조는 배잠을 너무 일찍 중앙으로 소환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 후 수십 일이 지나자 선우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언릉후(鄢陵侯) 조창을 효기장군으로 임명하여 보내 그들을 정벌하도록 했다. 배잠은 지방으로 나가 패상이 되었다가 연주자사로 승진했다.
건안 24년(219년), 당시 번성이 위급해져 조서로써 예주자사 여공(呂貢)과 함께 부름을 받았는데, 느긋하게 가다가 양주자사 온회의 충고를 받고, 군용물자를 남겨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바꾸고 빨리 출발하였는데,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조는 마피(摩陂)에 주둔하였을 때, 배잠이 다스리는 군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감탄하여 특별히 상을 내렸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중앙으로 들어가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가 위군ㆍ영천의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이 되었고, 군국과 같이 태수·국상과 같은 인재 천거의 길을 열어달라고 주청하였으며, 이로부터 농업관리가 벼슬에 나갈 길이 넓어졌다. 형주자사로 승진하였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명제가 즉위하자, 중앙에 들어가 상서(尙書)가 되었다. 지방으로 나와서는 하남윤이 되었고, 태위군사(太尉軍師)ㆍ대사농으로 전임되었으며, 청양정후(淸陽亭侯)로 봉해졌고, 식읍 2백 호가 증가했다. 중앙으로 들어와 상서령(尙書令)이 되어 직무의 구분을 바르게 하고, 명실(名實)ㆍ품평ㆍ정책을 내었을 때 관소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150여 가지를 상주하였다.
3. 3. 인재 평가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후, 배잠은 승상 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현령을 역임하고 중앙으로 돌아와 창조속이 되었다. 조조가 이전에 교류했던 유비의 재능에 대해 묻자, 배잠은 "유비가 중원에 있다면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 다스릴 수는 없겠지만, 변방의 요새를 지킨다면 한 지역의 군주 노릇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2]진수는 배잠에 대해 "항상 평상심을 유지했으며,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였다"라고 평가했다.
『위략』에서는 배잠의 전기가 서복, 엄간, 이의, 장기, 유초, 양습, 조엄, 한선, 황랑과 같은 권에 수록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배잠은 평생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아내와 자식에게도 이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다"라고 평가했다.
4. 평가
진수는 배잠을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며,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라고 평가했고, 서복 등과 함께 배잠의 전기가 『위략』에 실렸으며, "생애를 통해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것을 철저하게 했다"라고 평가했다. 그 외 배잠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젊은 시절에는 예를 경시하는 행동으로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
- 전란을 피해 형주로 피난 간 후 왕찬, 사마지와 친분을 쌓고 유비와도 교류했다.
- 유표의 초청을 거절하고 그의 야심과 실패를 간파했다.
- 조조에게 발탁되어 승상 군사, 창조속 등을 역임했고, 유비에 대해 "사람을 어지럽힐 수는 있어도 다스릴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 대군 태수 시절 오환족 장로들을 제압하고, 군내 부패 관리들을 일소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조조에게 후임자의 통치 실패와 이민족의 반란을 예언했고, 실제로 오환족 장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손권의 합비 침공 시 온회의 충고에 따라 조조의 의도를 파악하고, 관우의 공격에 대비했다.
- 조조는 마파에 주둔하는 배잠의 군대가 정연한 것을 보고 칭찬했다.
- 조비가 위 왕조를 성립시키자 산기상시, 전농 중랑장 등을 역임하며 농정 관료의 출세 길을 넓혔다.
- 형주 자사 시절 주태를 종사로 채용했다.
- 조예 시대에 상서, 하남윤, 태위 군사, 대사농 등 고관을 역임하고 청양정후에 봉해졌다.
- 상서령 시절 인사 제도 개혁을 제안했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관직을 물러났다가 광록대부를 받았다.
- 244년에 사망했으며,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도록 유언했고, 태상으로 추증되었고,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4. 1. 긍정적 평가
진수는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며,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였다"라고 평가했다. 서복, 엄간, 이의, 장기, 유초, 양습, 조엄, 한선, 황랑과 함께 배잠의 전기가 『위략』에 수록되었으며, "생애를 통해 생활은 검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것을 철저하게 했다"라고 평가받았다.5. 가족 관계
배잠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불명 | |
| 어머니 | 불명 | 신분이 낮음 |
| 아들 | 불명 | 배잠의 뒤를 이음 |
| 처 | 불명 |
6. 기타
배잠은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어머니의 신분이 낮고 젊은 시절 예의를 경시하는 행동을 하여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다.
진수는 배잠에 대해 "항상 평상심을 유지하며,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였다"라고 평가했다.
『위략』에는 배잠의 전기가 서복, 엄간, 이의, 장기, 유초, 양습, 조엄, 한선, 황랑 등과 같은 권에 수록되었으며, "생애를 통해 생활은 검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것을 철저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배휘의 6세 손으로, 주석에서 배씨 일족의 그 후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幽州は当時廃止されていた
[2]
문서
3년 후에, 다시 모반한 [[오환]]을 조창이 토벌한 해가 218년인 데서 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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