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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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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3세는 1327년부터 1377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국왕이다. 그는 무능한 아버지 에드워드 2세의 폐위 후 15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어머니 이사벨과 정부 로저 모티머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크레시 전투, 칼레 점령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기에는 프랑스의 반격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의회의 발전을 이끌고 기사도 정신을 강조하며 국가 정체성을 강화했으나, 말년에는 권위가 약화되고 아들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77년 6월 쉰 궁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랭커스터 왕조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 분쟁은 장미 전쟁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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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에드워드 3세
로마자 표기Edward III
즉위1327년 1월 25일
사망1377년 6월 21일
대관식1327년 2월 1일
출생일1312년 11월 13일
출생지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 성
사망지잉글랜드 왕국, 런던, 리치몬드,
매장일1377년 7월 5일
매장지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필리파 드 에노 (1328년 1월 24일 결혼, 1369년 8월 15일 사망)
왕가플랜태저넷가
아버지에드워드 2세
어머니이사벨 드 프랑스 왕녀
통치
칭호잉글랜드의 군주
통치 기간1327년 1월 25일 – 1377년 6월 21일
선임자에드워드 2세
섭정프랑스의 이사벨라 와 로저 모티머 (1327년1330년)
후임자리처드 2세
작위
잉글랜드 국왕1327년 1월 25일 – 1377년 6월 21일
아일랜드 영주1327년 1월 25일 – 1377년 6월 21일
아키텐 공작1372년1377년
퐁티외 백작1325년–1369년
아키텐 공작 (이전)1325년–1360년
자녀
자녀 목록흑태자 에드워드
이사벨라, 베드포드 백작부인
조앤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
랭커스터 공작 존
요크 공작 에드먼드
월섬의 메리, 브르타뉴 공작부인
마가렛, 펨브로크 백작부인
글로스터 공작 토머스
기타
가터 훈장의 수장으로서의 에드워드 3세의 모습
가터 기사단 단장으로서의 에드워드 3세 (《브뤼헤 가터 책》, 1430–1440년경)
주요 참전백년 전쟁 - 에드워드 전쟁

2. 어린 시절

에드워드 2세배넉번 전투(1314년)에서 스코틀랜드에 패배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실정을 거듭한 매우 무능한 군주였다.[17] 그는 동성애 상대였던 피어스 개브스턴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내리는 등 측근만 총애하고 중용했으며,[17] 이들은 왕의 총애만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왕비 이사벨은 정부 로저 모티머와 함께 1326년 9월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켰다.[18][19]

1327년 1월 29일, 15세의 어린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하였다. 명목상 섭정은 5촌 숙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으나, 실권은 어머니 이사벨과 모티머가 쥐고 있었다.[20]

2. 1. 출생과 배경

에드워드 3세의 대관식 (로이세 리데(Loyset Liédet) 그림)


1312년 11월 13일, 잉글랜드 왕에드워드 2세와 그의 왕비 이자벨라(프랑스 왕필리프 4세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윈저 성에서 태어났다. 이후 동생으로 존 오브 엘섬(콘월 백작)이 태어났다. 또한 여동생으로 엘리너 오브 우드스톡(겔더른 공 라이날트 2세의 아내)와 조안(스코틀랜드 왕데이비드 2세의 왕비)가 있다.

에드워드 2세는 국내외적으로 실정을 거듭한 무능한 군주였다. 특히, 총신들을 지나치게 총애하고 중용하여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17] 귀족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왕비 이사벨라는 로저 모티머와 함께 1326년 9월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켰다.[18][19]

에드워드 2세에 대한 쿠데타로 잉글랜드에 귀국한 어머니 이자벨라와 에드워드 왕세자(장 푸케 그림)


1325년, 아버지 에드워드 2세는 아키텐 공으로서 프랑스 왕 샤를 4세에게 봉신의 예를 표하기 위해 이자벨라를 대리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왕세자 에드워드를 파리로 불러들여 당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국왕의 총신 초대 윈체스터 백작휴 르 디스펜서와 그의 아들 휴 르 디스펜서를 추방하지 않는 한 귀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파리에는 디스펜서 부자에게 추방당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많이 있었고, 그중에는 로저 모티머가 있었다. 이자벨라는 모티머와 친밀해졌고, 남편을 폐위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3] 또한 이자벨라는 플랑드르의 에노 백작기욤 1세를 방문하여 기욤 1세의 딸 필리파를 왕세자비로 삼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잉글랜드 원정의 지원을 받았다.

1326년 9월, 이자벨라와 모티머가 모은 기사들이 잉글랜드 동부 서퍽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런던으로 진군했다.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를 지지하는 자는 거의 없었고, 각지에서 왕비군은 환영받았다. 런던 시도 왕비의 편을 들었다. 에드워드 2세와 디스펜서 부자는 도망쳤지만 잡혔고, 디스펜서 부자는 처형되었으며 에드워드 2세는 유폐되었다.[4]

132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 소집된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의 폐위와 왕세자 에드워드를 후계 국왕으로 지명하는 결정이 있었다. 당시 15세였던 왕세자는 즉위 과정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아버지로부터 공식적인 양위가 없다면 왕위 계승을 하지 않겠다고 답변했고, 이에 의회는 1월 20일에 에드워드 2세로부터 양위 문서를 받았다. 의회는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를 국왕 경호대장으로 임명했지만, 실권은 이자벨라와 모티머가 장악했다. 대관식1327년 2월 25일에 거행되었다.

2. 2. 어머니의 반란과 폐위

에드워드 2세배넉번 전투(1314년)에서 스코틀랜드에 패배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실정을 거듭한 무능한 군주였다.[17] 그는 동성애 상대였던 피어스 개브스턴에게 콘월 백작 작위를 내리는 등 측근만 총애하고 중용했으며,[17] 이들은 왕의 총애만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왕비 이사벨은 정부 로저 모티머와 함께 1326년 9월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켰다.[18][19]

1327년 1월 29일, 15세의 어린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하였다. 명목상 섭정은 5촌 숙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으나, 실권은 어머니 이사벨과 모티머가 쥐고 있었다.[20] 1327년 1월 의회는 에드워드 2세의 폐위와 왕세자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을 결정했다. 당시 15세였던 에드워드 3세는 아버지의 공식 양위 없이는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했고, 의회는 1월 20일 에드워드 2세로부터 양위 문서를 받았다.[17] 대관식1327년 2월 25일에 거행되었다.[17]

즉위 초, 어머니 이사벨라와 모티머 중심의 궁정파가 국정을 주도했다. 1328년 1월 요크 대성당에서 거행된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결혼식도 이사벨라가 주관했다.[17]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소년왕 즉위를 기회로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이사벨라와 모티머는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체결, 스코틀랜드의 독립과 로버트 1세의 왕위를 인정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 2세의 결혼이 약속되었다.[17] 그러나 이 강화는 국내 합의 없이 진행되어 "굴욕 외교"로 비판받으며 반발을 샀다.[17]

모티머는 이사벨라의 총애를 바탕으로 1328년 10월 의회에서 웨일스 변경백 칭호를 받았다.[5] 모티머의 급부상은 랭커스터 백작, 노퍽 백작 토마스 오브 브라더턴, 켄트 백작 에드먼드 오브 우드스톡 등 왕족 출신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궁정파와 랭커스터파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6]

결국 랭커스터파는 억눌렸고, 1330년 봄 의회에서 켄트 백작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7] 그러나 18세가 된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와 모티머의 독단적인 켄트 백작 처형에 분개했다.[17]

3. 즉위 초기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정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전쟁 재개는 왕실 주도보다는 개인적인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상속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영국 귀족들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1332년 두플린 무어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그들은 데이비드 2세 대신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발리올은 곧 쫓겨나 에드워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버윅을 포위 공격하고, 할리던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쳤다. 버윅은 함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항복했다. 에드워드는 발리올을 왕위에 복귀시키고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상당한 토지를 얻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2세 지지 세력이 점차 국가 통제권을 되찾으면서 이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18] 1334년 스코틀랜드 봉기로 에드워드는 록스버러 성을 수리하고 스코틀랜드에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1338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휴전했다.[18]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표시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문장을 1/4분기와 4/4분기에 배치했다. 영국 스테인드글라스, 1350년경 – 1377년


스코틀랜드 전략 변화의 이유는 영국과 프랑스 관계에 대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가 동맹을 맺으면 영국은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 해안 도시를 습격하여 영국에서 프랑스 침공 소문이 돌았다.

어머니의 애인 로저 모티머 체포를 묘사한 그림


에드워드 3세는 성년에 가까워지면서 어머니와 모티머의 국정 독점에 불만을 품고 친정 기회를 찾았다. 1330년 10월 노팅엄에서 귀족 회의 중 모티머를 체포, 처형했다. 어머니 이자벨라는 무사했지만 정치에서 은퇴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친정 선언에서 귀족들 조언을 얻어 정치하겠다고 하여 귀족들 지지를 얻었다. 그는 관대하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에드워드 3세 시대에는 여러 백작가가 창설되었고, 왕자와 공주들을 유력 귀족 상속자들과 혼인시켜 귀족들을 "왕실 옹호자"로 만들었다.

에드워드 3세 시대 중요 귀족은 랭커스터 백작, 아룬델 백작, 워릭 백작, 머치 백작(모티머 처형으로 일시 박탈, 후에 복권), 헤리퍼드 백작, 펜브룩 백작 6가문이었고, 그들 협력을 얻는 것은 에드워드 3세에게 필수적이었다.

3. 1. 섭정과 에든버러 조약

에드워드 3세는 즉위 직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했다.[21] 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받았고,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1328년에 체결된 노샘프턴 조약으로 로버트 1세의 아들과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이 결혼하여 양국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21]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1세의 유언을 생각해 이러한 조치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어머니 이사벨라와 모티머의 설득과 압박으로 조약을 체결했다.[21]

1330년 10월, 에드워드 3세는 노팅엄 성(Nottingham Castle)에서 모티머를 체포하고 처형함으로써 친정을 시작했다.

3. 2. 친정 구축과 권력 장악

1328년 1월 24일, 에드워드 3세는 요크 대성당에서 헤이놀트의 필리파와 결혼했고, 1330년 6월 15일에는 훗날 흑태자 에드워드로 불리는 아들을 얻었다.[22] 왕자가 태어난 후, 당시 섭정이었던 로저 모티머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모티머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귀족의 영지와 작위를 획득했다. 또한, 1328년 스코틀랜드와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을 체결하면서 그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22]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고 친정을 시작할 기회를 노렸다. 모티머 역시 왕과의 관계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에드워드 3세를 무시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1330년 10월 19일, 몽타규 남작 윌리엄을 비롯한 측근들과 함께 노팅엄 성을 기습 공격하여 모티머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모티머는 이후 처형되었고, 어머니 이사벨은 수녀원에 유폐되어 정치에서 은퇴하게 되었다.[22] 이로써 에드워드 3세는 만 18세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귀족들의 조언을 얻어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하여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관대하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 시대에는 여러 백작가가 창설되었고, 왕자와 공주들을 유력 귀족 가문의 상속자들과 혼인시킴으로써 귀족들을 왕실의 옹호자로 만들었다.[22]

에드워드 3세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1세 시대에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아버지 에드워드 2세 시대에 실패했던 스코틀랜드 정벌을 다시 추진했다. 1332년 8월, 옛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은 스코틀랜드 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당시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두플린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발리올을 지원하며 스코틀랜드 지배를 노렸다.

하지만 에드워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3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반발을 샀고, 곧 잉글랜드로 도망쳐야 했다. 1333년, 발리올과 잉글랜드 연합군은 할리던 힐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 군을 격파했다. 1334년 2월, 발리올은 에든버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에드워드 3세를 "스코틀랜드 최고의 군주"로 인정하고, 베릭어폰트위드를 잉글랜드에 할양했다. 6월에는 해딩턴에서 던프리스에 이르는 남부 스코틀랜드 지역도 잉글랜드에 할양했다.

데이비드 2세는 1334년 5월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발리올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에서 인기를 얻지 못했고, 에드워드 3세가 1338년부터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대륙 원정을 떠나자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잉글랜드군이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에드워드 발리올은 다시 잉글랜드로 도망쳤고, 데이비드 2세의 섭정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 내 실권을 되찾았다. 1341년 가을,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에서 귀환하여 잉글랜드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3. 3. 스코틀랜드 정책

1332년 8월, 옛 스코틀랜드 왕 존 발리올의 아들인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내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고, 듀플린 무어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 왕 즉위를 선언했다.[8] 스코틀랜드 지배를 노리는 에드워드 3세는 에드워드 발리올의 즉위를 지지하며 지원을 제공했다.[8]

하지만 에드워드 발리올은 에드워드 3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스코틀랜드 국내에서 격렬하게 거부당했다.[8]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8]

이듬해 1333년에 발리올-잉글랜드 연합군은 다시 할리던 힐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 군을 격파했다.[8] 발리올은 1334년 2월 에든버러에 소집된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에드워드 3세를 "스코틀랜드 최고의 군주"로 인정하고, 베릭의 잉글랜드 할양을 결정했다.[8] 더 나아가 6월에는 해딩턴에서 던프리스에 이르는 남부 스코틀랜드도 잉글랜드에 할양했다.[8] 스코틀랜드에게 이 대가는 컸고, 스코틀랜드가 이 지역들을 되찾는 데에는 100년 전쟁이 필요하게 된다.[8]

데이비드 2세는 1334년 5월 프랑스로 망명했다.[8] 스코틀랜드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지만, 잉글랜드 꼭두각시 왕인 에드워드 발리올은 여전히 스코틀랜드 국내에서 인망을 전혀 얻지 못했고, 특히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1338년부터 대륙에 원정을 떠나 그레이트브리튼섬에 부재하게 되자 스코틀랜드 각지에서 잉글랜드 군이 밀려나게 되었고, 에드워드 발리올도 다시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드 2세의 섭정 로버트 스튜어트(후의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 내 실권을 되찾았고, 1341년 가을에는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에서 귀환하여 잉글랜드에 대해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4. 백년 전쟁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칼레를 점령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1355년 전쟁을 재개하여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 왕위 획득에는 실패하고 아키텐을 얻는 데 그쳤다. 1369년 다시 전쟁을 시작했으나, 프랑스의 저항에 밀려 대륙에서 철수해야 했다.[1]

1337년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아키텐 공국과 퐁티외 백작령을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맞섰다. 프랑스는 남계 상속을 근거로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6세의 권리를 옹호했다.[2] 초기 에드워드 3세는 대륙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3]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영국 해협 통제권을 확보했지만,[5]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6]

슬루이스 해전(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 삽화)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돌아온 에드워드 3세는 왕실 행정부를 숙청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와의 대립이 계속되었다.[9] 1341년 4월 의회에서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법령을 파기하고 스트랫퍼드를 고립시켰다.[15]

에드워드 3세가 등장하는 그로트


역사가 니콜라스 로저는 에드워드 3세의 "해상 군주" 칭호에 의문을 제기하며, 헨리 5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왕실 해군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16] 그러나 에드워드 3세 통치 기간 동안 공식적인 해군 행정부가 등장했다.[17]

1338년 7월부터 1340년 초까지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있었다.[20] 1336년 양모 수출 금지로 플랑드르 백작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1337년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가 봉기하여 플랑드르 백작을 축출했다.[21] 1338년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상륙했고,[22] 1339년 12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도시들 사이에 공수 동맹이 성립되었다.

1339년 9월 프랑스 왕령 침공을 시작했지만, 군자금이 바닥나 1340년 초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1340년 6월 슬루이스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생토메르 전투 등에서 연패했다. 1340년 9월 25일 에스플랑 조약을 체결하여 휴전했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장의 계승을 지지했다. 몽포르 백작 부인이 저항을 계속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했다. 1343년 1월 19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자 수를 세는 에드워드 3세를 묘사한 그림


크레시 전투의 진형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캉을 함락시켰다.[13]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14] 1346년 10월 17일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를 사로잡았다. 1347년 칼레를 함락시켰다.[16]

1356년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사로잡았다.[21]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브레티뉴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확장된 프랑스 영토를 확보했다.

1369년 전쟁이 재개되었으나, 프랑스의 저항에 밀려 잉글랜드는 1372년 푸아투, 오니스(Aunis), 생통주(Saintonge)를 잃는 등 전황이 악화되었다. 1375년 7월 1일 브뤼헤 조약으로 2년간 휴전했으나, 평화 협상은 결렬되고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

4. 1.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과 전쟁 발발

1339년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의 플랑드르 무역에 간섭하여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1] 1337년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아키텐 공국과 퐁티외 백작령을 몰수했고,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맞섰다. 프랑스는 남계 상속의 선례를 들어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6세의 권리를 옹호하여, 백년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었다.[2]

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는 대륙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는 전략을 폈다. 1338년 루트비히 4세는 에드워드 3세를 신성 로마 제국총독으로 임명하고 지원을 약속했다.[3] 1373년에는 1373년 영국-포르투갈 조약으로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이 시기 유일한 주요 군사적 승리는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의 해전 승리였다. 이 승리로 영국 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을 감소시켰다.[5] 에드워드 3세는 이 승리를 신의 뜻으로 여겨 기념 주화를 주조했고, 해군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6][7]

하지만 값비싼 동맹으로 재정적 압박이 커지면서 국내 불만이 쌓였다. 1340년 11월 30일 에드워드 3세는 예고 없이 런던에 돌아와 왕실 행정부를 숙청했지만, 이는 국내 안정을 가져오지 못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와의 대립을 불렀다.[8] 1341년 4월 의회에서 어느 정도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법령을 파기하고 스트랫퍼드 대주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 중세 영국 국왕의 권력은 사실상 무제한이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9][10]

역사가 니콜라스 로저는 에드워드 3세의 "해상 군주" 칭호에 의문을 제기하며, 헨리 5세 이전에는 제대로 된 왕실 해군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11] 그러나 잉글랜드의 국왕 존은 이미 왕실 함대를 개발하려 했고, 에드워드 3세 통치 기간 동안 공식적인 해군 행정부가 등장했다.[12]

에드워드 3세의 군 지휘 체계는 자신을 중심으로 궁정 구성원들이 장군 역할을 맡는 구조였다. 특히 아들들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했는데, 이는 실용적인 면과 더불어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의 세습적 성격을 보여주는 선전 효과도 있었다.[13]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7월부터 1340년 초까지 플랑드르에 있었다.[14] 당시 플랑드르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공 지대였고, 잉글랜드는 양모 수출 금지로 플랑드르 백작을 견제했다. 1337년 겐트의 유력자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가 봉기하여 플랑드르 백작이 축출되었고,[15]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플랑드르에 상륙했다.[16] 플랑드르 여러 도시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고, 1339년 12월 잉글랜드와 공수 동맹을 맺었다.[17]

1339년 9월 프랑스 왕령 침공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전투로 발전하지 못하고 군자금이 바닥나 1340년 초 잉글랜드로 귀국했다.[18] 플랑드르를 떠날 때 에드워드 3세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실상 인질로 남겨두었다.[19] 잉글랜드 귀국 후 의회로부터 요구한 금액을 확보했다.[20]

프랑스는 에드워드의 재상륙을 막기 위해 제해권을 장악하려 했고, 1340년 6월 슬루이스 해전이 벌어졌지만 잉글랜드가 승리했다.[21]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재상륙에 성공했지만, 생토메르 전투와 투르네 공방전(1340년)에서 연패했다.[22] 결국 9월 25일 에스플랑 조약을 체결하여 휴전했다.

에드워드 3세가 부재한 동안 잉글랜드 본국에서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고, 귀족들의 반발도 거세졌다. 1339년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에게 왕의 해외 채무 이행 전권을 맡겼지만, 스트랫퍼드는 의회를 소집하여 과세 동의를 구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1340년 초 에드워드 3세의 일시 귀국으로 겨우 수확물의 9분의 1을 왕에게 주는 데 동의했지만, 징세 지연으로 군자금 확보가 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본국 행정부의 숙청을 시작했고, 스트랫퍼드는 직무를 해임당했다. 스트랫퍼드는 “왕권은 제후와 교회의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마그나 카르타 준수와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귀족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1341년 의회에서 화해했다.

에드워드 3세는 브르타뉴 반도의 브르타뉴 공국을 불안정화시키려 했다. 1341년 4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장의 계승을 지지했다. 몽포르 백작은 낭트를 점령했지만 프랑스군에 의해 낭트를 탈환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몽포르 백작 부인 잔 드 플랑드르가 저항을 계속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 몽포르파를 지원했다.

1343년 1월 19일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말레스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어 1346년 9월 29일까지 휴전했다. 에드워드 3세는 브르타뉴 반도에 잉글랜드군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노르망디 서쪽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된 전략적 중요성을 가졌다.

4. 2. 초기 군사적 성공

1337년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아키텐 공국과 퐁티외 백작령을 몰수하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맞섰다. 프랑스는 남계 상속의 원칙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6세의 권리를 옹호하여, 백년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 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는 다른 대륙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는 전략을 택했다. 1338년 루트비히 4세는 에드워드 3세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약속했다.[2] 1373년에는 1373년 영국-포르투갈 조약을 통해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3]

이 시기 유일한 주요 군사적 승리는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 거둔 해전 승리였다.[4] 이 승리로 영국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을 감소시켰다.[5] 에드워드 3세는 이 승리를 신의 뜻으로 여겨 기념 주화를 주조했고, 해군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6] 그러나 값비싼 동맹으로 인해 왕국에 재정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국내 불만이 쌓였다.[7] 1340년 11월, 에드워드 3세는 직접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 행정부를 숙청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와의 대립이 계속되었다.[8] 1341년 4월 의회에서 어느 정도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같은 해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법령을 파기하고 스트랫퍼드 대주교를 정치적으로 고립시켰다.[9]

1340년대 초, 에드워드 3세의 동맹 정책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후 몇 년 동안 영국군은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했지만, 이 역시 처음에는 성과가 없었다.[10] 에드워드 3세는 피렌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대출자들을 파산시키기도 했다.[11]

1346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여 캉을 함락시켰다.[12] 솜 강 북쪽 크레시에서 유리한 지형을 발견하고 필리프 6세의 군대와 싸우기로 결정,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3] 1346년 10월 17일에는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를 패배시키고 사로잡았다.[14] 북쪽 국경이 안전해지자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포위, 1347년 8월 3일 함락시켰다.[15]

1348년 흑사병이 잉글랜드를 강타하여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했다.[16] 인력 감소로 농업 노동력 부족과 임금 상승이 발생했고, 대지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17] 1349년 노동자 법령과 1351년 노동자 법령이 제정되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18] 그러나 정부와 사회는 빠르게 회복되었는데, 이는 왕실 관리들의 유능한 지도 덕분이었다.[19]

1350년대 중반, 대륙에서의 군사 작전이 재개되었다.[20] 1356년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필립을 사로잡았다.[21] 일련의 승리 후 영국은 프랑스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고, 프랑스 중앙 정부는 거의 붕괴되었다.[22] 1360년 에드워드 3세는 브레티뉴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확장된 프랑스 영토를 확보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7월부터 1340년 초까지 플랑드르에 있었다. 플랑드르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공 지대로, 모직물 산업의 재료인 양모를 대부분 잉글랜드에 의존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36년 양모 수출을 금지하여 플랑드르 백작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고, 1337년에는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가 봉기하여 플랑드르 백작을 축출했다. 1338년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에 상륙했고, 플랑드르 도시들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 1339년 12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도시들 사이에 공수 동맹이 성립되었다.

1339년 9월 프랑스 왕령 침공이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전투로 발전하지 못하고 군자금이 바닥나 1340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1340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 재상륙을 시도하자,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슬루이스 해전을 벌였지만 잉글랜드군이 승리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재상륙에 성공했지만, 생토메르 전투 등에서 연패했다.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했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장의 계승을 지지했다. 몽포르 백작은 낭트를 점령했지만 프랑스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몽포르 백작 부인이 저항을 계속하자,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브르타뉴에 상륙하여 몽포르파를 지원했다. 1343년 1월 19일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어 1346년 9월 29일까지 유지되었다.

4. 3. 브레티니 조약과 영토 확장

1337년,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아키텐 공국과 퐁티외 백작령을 몰수했다. 에드워드는 그의 아버지처럼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응답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손자였다.[1] 프랑스는 1316년1322년에 설정된 남계 상속의 선례를 근거로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의 권리를 옹호하여, 백년 전쟁을 일으킨 긴장을 초래했다.[2] 전쟁 초기 단계에서 에드워드의 전략은 다른 대륙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1338년, 루트비히 4세는 에드워드를 신성 로마 제국총독으로 임명하고 지원을 약속했다.[3] 1373년 영국-포르투갈 조약은 영국-포르투갈 동맹을 수립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거의 결과를 내지 못했다.[4]

이 전쟁 단계에서 유일한 주요 군사적 승리는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 거둔 영국의 해전 승리였다. 이 승리는 영국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고,[4] 우세한 프랑스 함대를 궤멸시켜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을 감소시켰다. 하지만 이 상황은 1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지속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이 승리에 만족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5] 잉글랜드는 또한 166척의 프랑스 상선을 나포했다. 이 상선들은 수년 동안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약탈해 왔고 잉글랜드 선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최대 1만 6천 명의 프랑스 선원이 사망했고, 프랑스 선장 니콜라 베위셰는 자신의 마스트에 매달려 처형되었다.[6] 에드워드는 자신의 승리를 신의 뜻으로 여겨 기념 주화를 주조했고, 국왕은 해군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7]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7월부터 1340년 초까지 프랑스 북부 저지대 플랑드르 백작령에 있었다.[8]

플랑드르 백작령은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공 지대였으며, 모직물 가공의 재료인 양모는 대부분 잉글랜드에 의존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개전을 예상하여 1336년 필리프 6세에게 충실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를 견제하기 위해 양모 수출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플랑드르 백작령의 여러 도시에서 반(反)잉글랜드적인 플랑드르 백작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1337년에는 겐트의 유력자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Jacob van Artevelde)가 봉기하여 다른 플랑드르 도시들도 끌어들여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축출되었다.[9] 1338년 에드워드 3세는 어렵지 않게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에 상륙할 수 있었다.[9] 플랑드르 여러 도시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고, 1339년 12월에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여러 도시 사이에 공수 동맹이 성립되었다.[9]

플랑드르를 발판으로 1339년 9월부터 프랑스 왕령으로 침공을 시작했지만, 필리프 6세가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전투로 발전하지 않았다. 곧 잉글랜드 군의 군자금도 바닥나, 1340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임시 과세에 관한 의회 심의를 위해 잉글랜드로 귀국했다.[10]

1340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 재상륙을 시도하자,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잉글랜드군과 슬루이스 해전을 벌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10]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재상륙에 성공하여 잉글랜드군과 플랑드르 여러 도시 군대를 합쳐 3만 군세를 정비했지만, 생토메르 전투와 투르네 공방전|Siege of Tournai (1340)영어에서 프랑스군에게 연패를 당했다.[10] 에드워드 3세는 많은 부채를 지고[12], 9월 25일에는 에스플랑에서 필리프 6세와 1342년 6월 24일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휴전 협정인 에스플랑 조약|Truce of Espléchin영어을 체결했다.[10]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1346년 7월 포츠머스에서 노르망디의 생바스 라 우에 상륙했다.[13]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를 횡단하면서 "기행(Chevauchée)"이라 불리는, 파괴와 방화, 약탈을 거듭하는 장거리 진군으로 적군을 도발하여 전투로 유인했다. 1달 만에 350km를 돌파했다.[11]

이에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퐁티우 백작령 크레시 교외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본대,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에드워드 흑태자와 11대 워릭 백작 토마스 드 비첨이 이끄는 부대, 윌리엄 드 보흔 (초대 노섬프턴 백작)|label=윌리엄 드 보흔|William de Bohun, 1st Earl of Northampton영어이 이끄는 부대 등 3개 부대로 나뉘어 진형을 갖추고, 8월 26일 양군이 격돌하여 크레시 전투가 발생했다.[14]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는 장궁 부대의 승리이기도 하지만[15], 잉글랜드군이 방어적인 진형을 취하고 그것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13]

크레시 전투 직후인 9월부터 칼레 포위를 시작하여 다음 해 1347년까지 함락시켰고[16], 8월 4일 에드워드 3세가 칼레에 입성했다.[17]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유지를 중시하여 정복군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던 파괴와 약탈로부터 칼레를 보호하고, 스테이플 상인|label=수출 양모 지정 시장|Merchants of the Staple영어을 칼레로 이전시켰다. 이는 칼레를 경제적으로 자립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칼레는 그 후 백년 전쟁을 넘어 메리 1세 시대 1558년에 잃을 때까지 잉글랜드 영토였다.[17]

1346년 10월 17일에는 네빌 남작|Baron Neville영어랄프 네빌 (2대 네빌 남작)|label=랄프 네빌|Ralph Neville, 2nd Baron Neville영어와 퍼시 남작|Baron Percy영어헨리 퍼시 (2대 퍼시 남작)|label=헨리 퍼시|Henry Percy, 2nd Baron Percy영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데이비드 2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물리치고 데이비드 2세를 포로로 잡았다.

브르타뉴 지방에서도 1347년6월 20일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토마스 더그워스|Thomas Dagworth영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블루아 백작을 포로로 잡는 승리를 거두었다.[16]

1347년9월 28일에는 로마 교황의 중재로 1355년 6월까지를 기한으로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16]

4. 4. 전쟁 재개와 상황 악화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의 플랑드르 무역 침해에 간섭하여 백년 전쟁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흑태자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크게 이겼고, 같은 해 칼레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355년에 다시 전쟁을 시작하여 이듬해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왕위 획득에는 실패하고, 대신 아키텐을 얻었다. 그러나 1369년에 다시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강력한 프랑스 국민주의에 밀려 대륙에서 철수해야 했다.[1]

1337년,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아키텐 공국과 퐁티외 백작령을 몰수했다. 에드워드 3세는 아버지처럼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맞섰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손자였다. 프랑스는 남계 상속의 선례를 들어 이를 거부하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의 권리를 옹호하여, 백년 전쟁의 긴장을 일으켰다.[2] 전쟁 초기 에드워드 3세는 다른 대륙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는 전략을 썼다. 1338년, 루트비히 4세는 에드워드 3세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약속했다.[3] 1373년에는 1373년 영국-포르투갈 조약으로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거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4]

이 시기 유일한 주요 군사적 승리는 1340년 6월 24일 슬뤼스 해전에서 거둔 해전 승리였다. 이 승리로 영국 해협 통제권을 확보했고,[5] 프랑스 함대를 궤멸시켜 프랑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을 줄여 잉글랜드의 프랑스 공격 의지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이 상황은 1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에드워드 3세는 지속적인 재정 문제로 이 승리에 만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6] 잉글랜드는 또한 프랑스 상선 166척을 나포했는데, 이들은 수년간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약탈해 잉글랜드 선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최대 1만 6천 명의 프랑스 선원이 사망했고, 프랑스 선장 니콜라 베위셰는 마스트에 매달려 처형되었다.[7] 에드워드 3세는 승리를 신의 뜻으로 여겨 기념 주화를 만들었는데, 배에 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마도 베위셰의 배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국왕은 해군 전사로서 명성을 얻었다.[8]

한편, 에드워드 3세의 값비싼 동맹으로 왕국에 재정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국내 불만이 쌓였다. 국내 섭정평의회는 증가하는 국가 부채에 좌절했고, 대륙에 있던 국왕과 지휘관들은 영국 정부의 자금 지원 부족에 분노했다.[9]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에드워드 3세는 직접 영국으로 돌아와 1340년 11월 30일 예고 없이 런던에 도착했다.[10] 그는 왕국의 국정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많은 장관과 판사들을 왕실 행정부에서 숙청했다.[11]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국내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국왕과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스트랫퍼드의 친척인 치체스터 주교 로버트 스트랫퍼드와 헨리 드 스트랫퍼드는 잠시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12] 스트랫퍼드는 에드워드 3세가 왕실 관리들을 체포함으로써 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13] 1341년 4월 의회에서 어느 정도 화해가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3세는 세금 징수 허가를 받는 대신 재정 및 행정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제한을 받아들여야 했다.[14] 그러나 같은 해 10월, 에드워드 3세는 이 법령을 파기했고 스트랫퍼드 대주교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4월 의회의 특별한 상황은 국왕을 굴복시켰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중세 영국 국왕의 권력은 사실상 무제한이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15]

역사가 니콜라스 로저는 에드워드 3세가 주장한 "해상의 군주"라는 칭호에 의문을 제기하며, 헨리 5세(1413~1422)의 통치 이전에는 제대로 된 왕실 해군이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 로저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국왕 존은 이미 왕실 함대인 갤리선을 개발했고, 이러한 함선들과 체포된 다른 함선들을 관리하기 위한 행정부를 설립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후계자인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3세는 이러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와 그의 전임자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해군 행정부를 개발하기를 희망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비공식적이고 대부분 임시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에드워드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평신관 관리들로 구성되고, 윌리엄 드 클레워, 매슈 드 토크시, 존 드 헤이트필드가 차례로 "국왕 함선 서기"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공식적인 해군 행정부가 등장했다. 로버트 드 크룰은 에드워드 3세 통치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마지막으로 맡았고,[16] 이 직책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다.[17]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에드워드 3세의 해군 행정부는 헨리 8세의 "해양 평의회"와 "해군청", 그리고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1세의 "해군성"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로저는 또한 14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슬루이스 해전(1340년)과 아마도 윈첼시 해전(1350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가 우위를 점했다고 주장한다.[18]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을 침공하지 못했고, 프랑스의 국왕 잔 2세는 영국에서 사로잡혀 죽었다. 영국 해군은 이러한 일에 역할을 하고 앵글로-아일랜드 귀족들의 반란과 해적 행위와 같은 다른 문제들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19]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7월부터 1340년 초까지 프랑스 북부 저지대 플랑드르 백작령에 있었다.[20] 당시 플랑드르 백작령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상공 지대였으며, 기간 산업인 모직물 가공의 재료인 양모는 대부분 잉글랜드에 의존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개전을 예상하여 1336년 필리프 6세에게 충실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를 견제하기 위해 양모 수출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플랑드르 백작령의 여러 도시에서 반(反)잉글랜드적인 플랑드르 백작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1337년에는 겐트의 유력자 야코브 반 아르테벨데(Jacob van Artevelde)가 봉기하여 다른 플랑드르 도시들도 끌어들여 결국 플랑드르 백작이 축출되었다.[21] 따라서 에드워드 3세는 1338년에 어렵지 않게 잉글랜드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에 상륙할 수 있었다.[22] 플랑드르 여러 도시는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했고, 1339년 12월에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 여러 도시 사이에 공수 동맹이 성립되었다.

플랑드르를 발판으로 1339년 9월부터 프랑스 왕령으로 침공을 시작했지만, 필리프 6세가 응하지 않아 본격적인 전투로 발전하지 않았고, 곧 잉글랜드 군의 군자금도 바닥났다. 1340년 초 에드워드 3세는 임시 과세에 관한 의회 심의를 위해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플랑드르를 떠날 때, 에드워드 3세는 귀국에 불안을 느끼는 플랑드르 여러 도시를 설득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공격이 있을 경우 배와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동시에, 아내와 아이들을 사실상 인질로 루뱅(Leuven)에 남겨두었다.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 에드워드 3세는 의회로부터 요구한 금액을 확보했다.

그 사이 프랑스는 에드워드 3세의 재상륙을 막기 위해 제해권을 장악하려고 루앙(Rouen)에서 잉글랜드 남안을 공격했다. 1340년 6월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 재상륙을 시도하자,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잉글랜드군과 슬루이스 해전을 벌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재상륙에 성공하여 잉글랜드군과 플랑드르 여러 도시 군대를 합쳐 3만 군세를 정비했지만, 생토메르 전투(Battle of Saint-Omer)와 투르네 공방전에서 프랑스군에게 연패를 당했다. 에드워드 3세는 많은 부채를 지고, 9월 25일에는 에스플랑(Espléchin)에서 필리프 6세와 1342년 6월 24일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휴전 협정인 에스플랑 조약을 체결했다.

플랑드르에서는 아르테벨데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스코틀랜드 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스코틀랜드로 귀환함으로써 북부 국경이 스코틀랜드에 침범당하게 되자, 에드워드 3세는 위기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재전 이후 잉글랜드의 전황은 좋지 않았다. 카스티야에서는 1369년 3월, 뒤 게클랑 등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는 엔리케 2세가 페드로 1세를 격파했다. 1370년 10월 뒤 게클랑은 프랑스 대원수에 임명되어 프랑스 전군의 지휘관이 되어, "기행"을 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을 12월 4일 퐁바랑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1372년에는 푸아투, 오니스(Aunis), 생통주(Saintonge)의 북 아키텐 3개 지역이 프랑스군에 점령되었다. 7월 7일에는 푸아티에, 9월 8일에는 라 로셸이 함락되었다. 잉글랜드 왕의 지배 영역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1375년 7월 1일, 에드워드 3세와 샤를 5세는 브뤼헤에서 2년간의 휴전 협정인 브뤼헤 조약을 체결했다. 그 사이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에 착수했으나, 평행선을 달리다 휴전이 끝나기 전에 에드워드 3세가 서거하게 된다.

5. 국내 정치와 사회

에드워드 3세의 치세는 흑사병의 만연, 1376년 선량 의회와 같은 정치적 사건, 존 위클리프의 개혁 운동이 시작된 시기였다. 또한,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에드워드 3세 재위 중년에는 여러 중요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특히 1351년 노동자 법령(Statute of Labourers of 1351)은 흑사병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고정하고 농민의 이동을 제한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법령은 농민들의 분노를 야기하여 1381년 농민 반란(Peasants' Revolt)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 시기와 겹치는 에드워드 3세의 재위 기간 동안, 영국에서는 프랑스 왕권의 영향을 받는 교황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350년과 1353년의 프로비전 법령(Statute of Provisors)과 프라에무니레(Praemunire)는 교황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고 영국 신민에 대한 교황 법원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다.

1351년 반역죄 법(Treason Act 1351)은 반역죄의 정의를 명확히 했으며, 치안 판사(Justices of the Peace) 제도가 강화되어 지방 사법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에 큰 영향을 받아 1348년 가터 기사단을 창설했다. 성 조지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이 기사단은 최초의 세속 기사단이었다. 윈저 성에는 가터 기사단의 본거지가 건설되었다. 가터 기사단의 휘장인 가터 훈장은 가터, 목걸이, 별, 레서 조지로 구성되며, 왼쪽 다리에 가터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터 훈장의 모토는 "Honi soit qui mal y pense (악의를 품은 자에게 재앙이 있으리라)"이다.

에드워드 3세의 금화 쿼터 노블, 요크 박물관 트러스트


에드워드 3세 초상이 새겨진 반 그로트(반 크라운) 동전, 요크 주조국


에드워드 3세의 대인장


가터 훈장 기사단원의 정장을 한 에드워드 3세를 그린 그림(의 에서)

5. 1. 의회와의 관계

에드워드 3세의 재위 기간은 의회, 특히 하원의 권한과 역할이 크게 성장한 시기로 기록된다. 이는 백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세금은 크게 부과금(levy)과 관세(customs)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과금은 동산의 일정 비율을 징수하는 것으로,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관세는 양모 수출에 부과되었는데, 1353년 스테이플 조례를 통해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제도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회는 세금 부과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의회는 세금 부과 승인 외에도 왕실 관리의 잘못된 통치에 대한 불만을 담은 탄원서를 국왕에게 제출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이는 국왕과 의회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시스템으로, 하원과 그들이 대표하는 공동체의 정치적 의식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기관으로 발전했다. 특히 하원은 1376년 선량 의회에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며 그 영향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탄핵 절차와 하원 의장 직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때때로 의회의 통제를 벗어나 세금을 징수하려 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1338년 양모에 대한 강제 대출 시도는 실패했고, 범죄자의 재산 몰수나 수쿠타주와 같은 고대 권리 강화 시도 역시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심지어 1339년에는 대관식 왕관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처럼 에드워드 3세 시대는 왕권과 의회 권력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협상 속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고, 입헌 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된 중요한 시기였다.

5. 2. 흑사병과 사회 변화

흑사병은 1347년 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1348년 말에는 런던까지 퍼졌다. 1349년은 흑사병이 가장 기승을 부린 해였다. 1348년부터 1349년까지 흑사병으로 잉글랜드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토지 양도 수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인구의 30%에서 45%가 흑사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한 잉글랜드는 14세기 내내 흑사병이 재유행하면서 인구 감소를 거듭하여, 세기말에는 흑사병 발생 이전 인구의 절반인 2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에드워드 3세는 흑사병을 피해 킹스 랭글리와 우드스톡 영지의 저택에서 지냈다. 흑사병의 위기 속에서도 에드워드 3세의 권위는 굳건했고, 정부나 의회의 정치적 합의도 훼손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의 대승으로 군사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확립했고, 의회는 왕을 칭찬하며 조달된 자금이 모두 유익하게 사용되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1340년대와 1350년대에는 재무부 장관(후에 대법관)인 윌리엄 에딩턴의 노력 덕분에 왕실 금고의 재정난이 회복되었고, 흑사병이 덮친 시기에도 징세가 계속되어 재정적으로 매우 안정적이었다.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많은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성공한 노동자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연대기 작가 헨리 나이튼은 당시 상황을 "노동자들은 몹시 오만해져서 순종적이지 않고, 왕의 명령에 전혀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그들의 요구에 굴복해야만 한다"고 표현했다. 농업 노동자들도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며 이동이 활발해졌다. 토지 소유자들은 에드워드 왕에게 노동자들의 부당한 임금 인상 요구를 허용하지 않는 법 제정을 요구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51년에 노동자 규제법을 제정하여 임금률을 고정하고 농업 노동자들의 이동을 억제하려 했다. 1363년에는 사치 금지법을 제정하여 노동 계급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와 생활을 하는 것을 규제하려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흑사병의 유행으로 전쟁 지속이 어려워짐에 따라 1354년 4월 아비뇽에서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앙주 제국" 재건을 꿈꾸는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는 것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다음을 요구했다.

  • 아키텐 영유를 인정할 것.
  • 푸아투, 투렌, 앙주, 메인의 할양과, 이들 영토에 프랑스 왕이 봉신이 되지 않을 것.


그러나 프랑스 왕 장 2세가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1366년 1월, 프랑스 왕 샤를 5세카스티야 왕 페드로 1세와 대립하는 이복형제 엔리케를 지원하여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용병대를 카스티야에 파병했다. 이들은 수도 부르고스를 함락하고 엔리케를 엔리케 2세로 즉위시켰다. 폐위된 페드로 1세는 잉글랜드의 보호를 받고자 아키텐으로 망명했다. 당시 아키텐은 프랑스 왕의 종주권이 사라진 상태였고, 에드워드 3세가 종주였으며 흑태자가 아키텐 영주가 되어 보르도에 흑태자의 궁정이 있었다. 흑태자는 9월 23일에 페드로 1세와 리부르네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었고, 이후 카스티야 내전은 영불 대리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367년 4월 3일, 흑태자의 지원을 받는 페드로 1세 군은 나헤라 전투에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엔리케 2세 군을 격파했고, 흑태자는 페드로 1세를 카스티야 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흑태자는 카스티야에 체류하는 동안 병을 얻었고, 원정 경비 충당을 위해 아키텐에서 증세를 단행하여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와 알브레 영주 등 남부 가스코뉴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여 프랑스 왕 샤를 5세에게 호소했다. 칼레 조약에서 아키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던 샤를 5세는 이를 구실로 1369년 11월 30일 아키텐 몰수를 선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를 프랑스의 칼레 조약 파기 선언으로 간주하고 다시 프랑스 왕을 자칭하며 아키텐을 무대로 백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5. 3. 기사도 정신과 국가 정체성 강화

에드워드 3세의 정책은 전쟁과 행정을 위해 고위 귀족에게 의존하는 것을 중심으로 했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과 끊임없이 갈등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자신과 가장 위대한 신하들 사이에 동지애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1]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는 귀족에 대한 정책에 제한을 받아 에드워드 3세 통치 이전 60년 동안 새로운 귀족 작위를 거의 만들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1337년 임박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같은 날 여섯 명의 새로운 백작을 임명하여 이러한 경향을 바꾸었다.

동시에 에드워드는 왕의 가까운 친척들에게 새로운 공작 작위를 도입하여 귀족의 계급을 상향 확장했다. 잉글랜드의 최초 세 공작 작위(콘월, 랭커스터, 클래런스)를 창설했다. 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는 1337년 최초의 잉글랜드 공작인 콘월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351년 랭커스터 백작은 랭커스터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은 최초의 클래런스 공작이 되었다.[1]

에드워드 3세는 아더왕의 원탁의 기사에 강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크레시 전투에서 개선하여 잉글랜드로 귀국한 후, 잉글랜드의 수호 성인 세인트 조지에 대한 헌신을 정신적 지주로 하는 기사단 창설을 생각하여, 1348년 8월 6일에 가터 기사단을 창설했다. 가터 기사단은 십자군을 계기로 창설된 템플 기사 수도회와 같은 종교적 조직과는 달리, 최초의 세속 기사단이었다. 윈저 성 주변에서 목수와 석공을 모아 성 내에 가터 기사단의 본거지가 될 컬리지를 건설했다. 최초의 기사단원 26명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에드워드 3세 이하 13명, 다른 한 그룹은 흑태자 이하 13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단원 휘장인 가터 훈장은 가터, 목걸이, 별, 레서 조지(어깨에서 걸치는 훈장을 고정하는 것)로 구성되며, 왼쪽 다리에 가터를 착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왼쪽 다리에 가터를 착용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 에드워드 3세가 무도회에서 솔즈베리 백작 부인 조앤(후에 에드워드 흑태자의 왕비)와 춤을 추고 있을 때, 백작 부인의 스타킹 고정대(가터)가 풀려 떨어져 버려, 백작 부인은 수치심에 굳어 버렸다. 그것을 걱정한 에드워드 3세는 가터를 줍더니 자신의 왼쪽 다리에 착용하고 "Honi soit qui mal y pense(악의를 품은 자에게 재앙이 있으리라)"라고 외치며, 백작 부인의 곤경을 구해주었다.

이 전설의 진위는 불명이지만, "Honi soit qui mal y pense"는 기사단의 모토가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창설한 가터 훈장(가터 기사단)은 오늘날까지 잉글랜드 최고 훈장으로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6. 말년과 죽음

에드워드 3세의 초기 통치는 활기차고 성공적이었지만, 말년에는 무기력, 군사적 실패, 정치적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360년대부터 에드워드는 국정 운영에 윌리엄 위컴과 같은 부하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361년~1362년 흑사병이 재발하여 랭커스터 공작 헨리 드 그로스몽 등 에드워드가 가장 신뢰하던 측근들이 사망하면서 왕은 더욱 아들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14]

에드워드 3세가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아키텐을 하사하는 모습. 1390년 미니어처의 머리글자 "E"; 영국 도서관, 서가표기: Cotton MS Nero D VI, f.31.


왕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일랜드에서 앵글로-아일랜드 영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366년 억압적인 킬케니 법령만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브레티니 조약 이후 10년간 상대적인 평화가 지속되었으나, 1364년 샤를 5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에드워드의 아들 건트의 존이 군사 원정을 이끌었으나 실패했다. 1375년 브뤼헤 조약으로 칼레, 보르도, 바욘을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 내 영토를 상실했다.

해외에서의 군사적 실패와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은 잉글랜드 내 정치적 불만을 야기했다. 1376년 소집된 선의회에서 하원은 왕의 측근들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왕실 관리 윌리엄 레이티머 경과 대왕실 관리 존 네빌 경이 해임되었고, 에드워드 3세의 정부인 앨리스 페러스는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당시 병으로 무능력해진 왕과 에드워드 우드스톡을 대신해 건트의 존이 사실상 정부를 장악했다. 건트는 의회의 요구에 굴복해야 했지만, 1377년 악의회를 통해 선의회의 대부분의 성과를 무효화시켰다.

1376년 맏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사망한 후, 1377년 에드워드 3세는 쉰 궁에서 사망했다. 왕위는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가 계승했다.[4]

6. 1. 권위 약화와 정치적 갈등

말년에 에드워드 3세는 의회의 반대와 앨리스 페러스와의 열애 속에서 아들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했다. 그의 치세는 기사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대인 동시에 장기간의 대륙 전쟁으로 봉건 군제가 쇠퇴하고, 봉건 말기의 양상이 나타났다. 흑사병의 만연과 1376년의 선량 의회와 같은 정치의식의 앙양,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일어났다.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졌다.[14]

에드워드 3세의 초기 통치는 활기차고 성공적이었지만, 후기에는 무기력, 군사적 실패, 정치적 갈등으로 특징지어졌다. 군사 원정보다 국정의 일상 업무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에드워드는 1360년대에 윌리엄 위컴과 같은 부하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신흥 인물이었던 위컴은 1363년에 비밀 인장 관리관, 1367년에는 대법관이 되었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정치적 어려움으로 1371년 대법관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1361~1362년 흑사병 재발로 인한 측근들의 사망은 에드워드의 어려움을 더욱 악화시켰다.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몽타규 1세, 헌팅던 백작 윌리엄 드 클린턴 1세,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 1세, 랭커스터 공작 헨리 드 그로스몽 등이 사망하면서 귀족들은 왕보다 왕자들에게 더 기울어졌다.

에드워드는 군사 작전 지휘를 아들들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아일랜드에서 앵글로-아일랜드 영주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366년 킬케니 법령만 남겼다. 프랑스에서는 브레티니 조약 이후 평화가 지속되었지만, 1364년 샤를 5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건트의 존이 군사 원정을 맡았으나 실패했다. 1375년 브뤼헤 조약으로 칼레, 보르도, 바욘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앨리스 페러스는 필리파 왕비의 궁정 숙녀였으며, 1359년에 임명되었다. 남편이 사망한 후, 그녀는 노년의 국왕의 연인이 되었고, 왕실에서의 직책 외에도 사채업자로 활동하면서 왕실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토지, 영지, 보석을 선물했고, 1371년에는 사망한 필리파의 보석까지 주었다. 앨리스는 신수권 이전을 통해 재산을 묶어 왕실에 반환되지 않도록 했다. 그녀는 25개 주의 50개 영지와 20000GBP 상당의 보석을 소유했다. 토마스 월싱엄과 같은 당대 편년사들은 그녀를 비판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녀의 사업 감각과 법률 지식을 주목한다. 1376년 선량 의회는 그녀를 추방했지만, 곧 복귀하여 에드워드 3세의 임종까지 함께했다. 1378년 리처드 2세 통치 초기에 의회 재판을 받고 추방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해외 군사 작전 실패와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압박은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불만을 야기했다. 재정 문제는 1371년 이후 왕실 재정 지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1376년 선량 의회는 조세 부과를 위해 소집되었지만, 하원은 왕의 측근들을 비판하며 불만을 제기했다. 왕실 관리 윌리엄 레이티머 경과 대왕실 관리 존 네빌 경이 해임되었고, 앨리스 페러스는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하원의 진정한 적대자는 건트의 존이었는데, 왕과 에드워드 우드스톡이 병으로 무능력해지면서 사실상 정부를 장악했다. 건트는 의회의 요구에 굴복해야 했지만, 1377년 악의회에서 선량 의회의 성과는 대부분 무효화되었다.

1360년대에는 에드워드 3세에 대한 국내적 압력이 거의 없었지만, 통치 말년(1367~1377년)에는 양모 무역 쇠퇴로 권위가 약화되었다. 1369년부터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잉글랜드군은 고전했고, 1370년대에는 중과세가 부과되어 국민들의 반전 여론이 높아졌다.

에드워드 3세는 1369년 필리파 왕비 사후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졌고, 앨리스 페러스를 총애하여 정치에 개입하게 했다. 넷째 아들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가 권세를 휘둘렀다. 1375년 프랑스와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상황 악화가 예상되어 정부는 의회에 승리 전망을 제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통치 말기 의회는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1371년 의회에서 귀족들은 윌리엄 위컴의 해임을 요구했고, 에드워드 3세는 그를 해임해야 했다.

1376년 선량한 의회는 평민 의원들이 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평민 의원들의 반항에는 전황 악화, 궁정 부패, 상업적 불만 등이 작용했다. 선량한 의회는 3년간의 관세 징수 승인, 앨리스 페러스 추방, 국왕 보좌 평의회 구성, 측근 탄핵 등을 결정했다. 의회에서 정부 고관 탄핵 절차가 처음 도입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량한 의회에서 평민 의원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단결과 에드먼드 모티머의 집사인 Peter de la Mare|피터 드 라 메어영어의 활약 덕분이었다. 메어는 최초의 하원 의장으로 여겨진다.

선량한 의회 이후 국왕 감시 평의회가 발족했지만 곧 해산되었고, 에드워드 3세는 반격했다. 1377년 의회는 탄핵된 자들에게 사면을 내리고, 메어를 수감했으며, 최초의 인두세 도입에 동의했다. 이 의회는 Bad Parliament|불량 의회영어로 불린다.

6. 2. 죽음과 왕위 계승

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가 죽은 다음 해인 1377년 쉰 궁에서 사망하였다. 에드워드 3세의 초기 통치는 활기차고 성공적이었지만, 후기에는 무기력, 군사적 실패, 정치적 갈등으로 특징지어졌다. 1360년대 동안 에드워드는 점점 그의 부하들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특히 윌리엄 위컴이 그러했다. 1376년 의회(소위 선의회)는 왕의 고문들을 비판했고, 윌리엄 레이티머 경과 존 네빌 경은 해임되었으며, 왕의 정부 앨리스 페러스는 궁정에서 추방되었다.[1]

에드워드 3세는 선량의회에 의해 궁정에서 추방되었던 애첩 앨리스 페러스를 다시 불러들여 여생을 함께 보냈다. 1377년 6월, 런던 리치먼드의 씬 궁전에서 죽음을 맞이하려던 에드워드 3세에게, 앨리스는 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앗고 보석함의 보석들을 훔쳐 궁정을 떠났다. 시종들도 하나둘씩 궁전을 떠나갔고, 마지막까지 에드워드 3세 곁에 남은 것은 고해신부 한 명뿐이었다. 6월 21일, 에드워드 3세는 고해신부가 들고 있던 십자가를 가슴에 얹은 채로 붕어했다.[2] 향년 64세였다.

4년 전에 붕어한 왕비 필리파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3]

장남인 흑태자는 선량의회 회기 중이던 1376년에 이미 사망했고, 왕위는 흑태자의 차남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10세의 리처드 2세가 계승했다.[4]

7. 유산과 역사적 평가

에드워드 3세는 생전에 전례 없는 인기를 누렸으며, 후대의 어려움조차도 왕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1] 그의 동시대인 장 프로이사르는 그의 저서 ''연대기''에서 "아더 왕 시대 이후로 그와 같은 인물은 없었다"고 썼다.[2] D. A. L. 모건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진 에드워드의 지속적인 인기에 주목하며, "1500년까지 에드워드 3세는 영국을 통치했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언급하며, 헨리 7세에 대한 ''런던 대연대기''를 인용하여, 그가 만약 탐욕이 없었다면, "에드워드 3세 시대 이후 영국을 통치했던 모든 군주 중 가장 훌륭했을 것"이라고 썼다.[3]

이러한 견해는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에드워드의 이미지는 변했다. 후대의 휘그 역사가들은 외국 정복보다 헌법 개혁을 선호했고, 에드워드를 자신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무시한 인물로 비난했다. 비스숍 스터브스는 그의 저서 ''영국의 헌법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도전을 받았으며, Ormrod는 "어떤 현대 독자도 이러한 칭찬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언급했지만,[5] 또한 20세기 초 역사가들은 만연한 성인 전기에 맞서기 위한 노력에서 더 비판적이었다는 점도 언급했다.

Ormrod는 후대의 학문은 "다소 더 친절해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제안한다.[7] 1960년 논문에서 메이 맥키삭은 스터브스의 판단의 목적론적 성격을 지적한다. 중세 왕은 마치 그것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인 양 미래의 이상적인 의회 군주제를 향해 노력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역할은 실용적인 것이었다. 즉, 질서를 유지하고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에드워드는 뛰어났다.[8] 에드워드는 또한 그의 젊은 아들들에게 너무 관대하게 재산을 상속해 왕조 간의 분쟁을 조장하여 결국 장미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주장은 K. B. 맥퍼레인에 의해 기각되었는데, 그는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정책일 뿐만 아니라 최선의 정책이었다고 주장했다.[9] 마크 옴로드와 이안 모티머와 같은 에드워드의 후대 전기 작가들은 이러한 역사적 경향을 따랐다. 이전의 부정적인 견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캔터는 에드워드가 "파괴적이고 무자비한 세력"이었다고 주장했다.[10] 옴로드는 스터브스 패러다임을 뒤엎는 과정에서 역사가들이 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갔을 수 있으며, 그가 해결해야 했던 문제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수용해야 했던 여러 당파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1] 크리스 기븐-윌슨과 마이클 프레스위치는 1999년 중세 연구 센터 요크 대학교 회의의 서문에서 현대의 합의를, 효과적으로 그가 전반적으로 강력한 왕이자, 정의로운 왕이며, 훌륭한 전사이자 전략가였고, 기본적으로 당시에 좋은 왕이었다는 것으로 요약한다. 그들은 이것이 에드워드 3세에 대한 현대 학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전의 합의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왕의 모든 측면을 살펴보고 그가 어떻게 이러한 성공을 거두었는지 조사하는 것이다.[12] 현대 역사가들은 또한 왕의 다산을 성공의 징후로 보는 동시대인들보다 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 자주 그것은 각 입에 먹이를 주어야 했고 제한된 자원을 고갈시켰기 때문에 부채로 여겨진다. 게다가, 그것은 나중에 왕관과 그 부계 가문 사이의 당파성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13]

마크 오름로드(Mark Ormrod)는 이 시대의 정치는 종종 국왕의 성격과 인품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국왕은 단지 잘 다스리고 현명하게 통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해되었다. 오름로드는 에드워드 3세가 많은 플랜태지넷 왕들과 달리 재위 초에는 이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지만, 이후에 습득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연대기 수집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데, 때로는 연대기 저자들과 상담하기도 했다. (랜덜프 히그던이 저술한 ''폴리크로니콘''에 대해 1352년에 문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특히 헨리 2세와 에드워드 1세를 본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의 무예와 성공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름로드는 그의 취향이 전통적이었다고 말하며, J. R. 랜더(J. R. Lander) 또한 그의 취미에 이것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한다. 목수, 지붕 잇기, 노 젓기 등의 육체노동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과는 달리, 에드워드 3세는 "귀족의 전통적인 취향과 즐거움을 충분히 공유했으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건축이었다. (오름로드는 에드워드 3세가 윈저 성과 다른 성들, 예배당, 사냥 별장과 궁전을 확장하는 데 약 130000GBP를 지출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그의 종교적 견해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수도원 후원과 성지 순례를 통해 표현된 그의 종교는 전통적인 것이었다. 이는 그의 구호 활동에도 반영된다. 헨리 3세와 같은 그의 조상들은 종종 기부 금액과 시기에 있어서 즉흥적이고 과도했지만, 에드워드 3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매주 366끼의 식사를 제공하고, 4대 축제 (크리스마스, 부활절, 오순절, 미카엘 축일) 기간 동안 25GBP를 추가로 배포하는 규칙적인 시스템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전통성과 함께 대중적인 성향도 있었고, 오름로드는 그를 "타고난 쇼맨"이라고 묘사했는데, 특히 왕의 축복을 통해 악성종기를 앓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그의 민첩함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안수 기도의 일종이었다. 실제로 이 질병은 회복률이 높았고 자연스럽게 호전되는 경우가 많아 국왕이 치료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1338년부터 1340년까지 2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그는 영국과 프랑스 원정 중에 악성종기를 치료했으며, 그 후 1340년 11월부터 다음 해 같은 달까지 355건의 치료가 더 있었다. 그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관대했다. 반대로 노먼 캔터(Norman Cantor)는 에드워드 3세를 "탐욕스럽고 사악한 폭력배"라고 묘사했다.

에드워드 3세의 성격에 대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웠는데, 1340/41년 스트랫퍼드와 장관들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돌발 행동들은 충동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했는데, 1349년 소규모 경호원만 대동하고 칼레로 항해한 것이 그 예이다. 동시에 그는 관용으로 유명했는데, 모티머의 손자는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결국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전쟁이었고, 이것에서 그는 중세의 훌륭한 군주에 대한 개념에 부합했다. 전사로서 그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 현대 군사 사학자는 그를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필리파 왕비에게 특별히 헌신적인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3세의 성적 방탕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앨리스 페러스(Alice Perrers)가 그의 연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가 불륜을 저지른 증거가 없으며, 그때쯤 왕비는 이미 말기 질환에 걸려 있었다. 이러한 헌신은 가족 구성원에게도 확대되었는데, 그의 많은 선왕들과는 달리 에드워드 3세는 다섯 명의 성년기 아들 중 누구에게서도 반대를 받지 않았다.

마이클 A.R. 그레이브스(Michael A.R. Graves) 학자는 에드워드 3세가 "이중 유산"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그의 많은 자녀와 손자들, 다른 하나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다. 첫째로, 그가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 공작, 요크 공작으로 아들들을 책봉함으로써 왕족이자 귀족인 그들만의 왕조를 세울 수 있게 했다. 이는 에드워드의 손자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킨 헨리 볼링브룩 이후 "골칫거리"가 된 랭커스터 왕조의 기반이 되었다.[14] 둘째로, 에드워드의 계승권 주장과 프랑스와의 전쟁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지만(당대 사람들은 헨리 5세의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에드워드의 크레시 전투와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와 비교했다), 프랑스에서 영국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서면서 왕조 또한 약화되었다.[15] 실제로 프랑스와의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뿐만 아니라 요크 가문에도 문제가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1475년 프랑스를 침공할 때 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에드워드 3세의 발자취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그 후의 피키니 조약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지만.[16] 모건(Morgan)은 에드워드 4세의 통치는 군사적 및 행정적 발전을 이룬 에드워드 3세의 통치를 본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4세 자신의 ''가계부''는 그 접근 방식을 "더욱 완벽한 새 집을 짓기 위해"로 요약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들의 많은 보조금과 영장에는 논의 중인 모든 것이 에드워드 3세의 마지막 해와 같아야 한다는 최종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플랜태지넷 가문이 최종적으로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3세의 사후 이미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헨리 7세가 자신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국왕이기도 했다.[17]

참조

[1] 백과사전 Clarence, Dukes of EB1911
[2] 웹사이트 Edward III|king of England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4-11-13
[3] 논문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논문
[14] 논문
[15] 웹사이트 Family relationship of Edward III, King of England and George Washington via Edward III, King of England. https://famouskin.co[...] 2022-07-18
[16] 웹사이트 Edward III, King of England http://www.thepeerag[...] 2020-05-10
[17]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8]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19] 서적 영국사 기린원 1996-04-15
[20]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21]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22] 서적 이야기 영국사 청아출판사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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