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봉
1. 개요
차금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노동자들의 시위를 주도했으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농총동맹,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다. 1928년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192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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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자 -
강해석
강해석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은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유공자로, 광복 후 농민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만성 저혈압으로 사망, 사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자 -
이영 (1889년)
이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정치인으로, 독립운동가와 북한 정권 인사라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이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서울 미동보통학교(渼洞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용산(龍山)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해 3월 김명식·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를 분리하는 정책을 실행시키기 위해 힘썼다.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 단체가 결성되자,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간사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3·1운동 기념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하여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는데,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했으나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당한 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2.1. 초기 활동
1917년 서울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용산 기관차 화부 견습공으로 일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 해 3월 김명식, 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 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2.2.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공산당 활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식민지 현실의 노동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1920년 2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같은해 3월 김명식·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양부 간사를 맡았다. 1922년에는 최상덕 등과 함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쇄신운동을 폈으며, 동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조선금물직공조합·경성신문배달조합 창립을 지도했으며, 1923년 9월에는 조선노농대회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1924년 5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각지의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활동했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노동운동 단체와 농민운동 단체를 분리하는 정책을 실행시키기 위해 힘썼다.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 단체가 결성되자,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간사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3·1운동 기념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하여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는데,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했으나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당한 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