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자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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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자(倉慈)는 조위(曹魏) 시대의 인물로, 수집도위, 장안 현령을 거쳐 돈황 태수를 역임했다. 그는 돈황 태수로 부임하여 호족 억제, 빈민 구제, 토지 재분배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서역과의 교역을 원활하게 하고 백성과 이민족의 신망을 얻었다. 창자는 재임 중 사망했으나, 그의 업적은 칭송받았으며, 후임 태수들이 그의 방식을 따르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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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자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창자 |
한자 표기 | 倉慈 |
로마자 표기 | Cang Ci |
자(字) | 효인(孝仁) |
생애 | |
출생지 | 안후이구강군수춘현 |
사망지 | 간쑤둔황 |
활동 시기 | 3세기 초 |
관직 | |
소속 국가 | 조위 |
주요 관직 | 장안 현령 둔황 태수 |
임관 시기 (장안 현령) | 225년 |
임관 시기 (둔황 태수) | 227년 |
최종 관직 | 둔황 태수 |
섬긴 군주 | |
군주 | 조조 조비 조예 |
2. 생애
창자는 후한 말부터 조위 시대에 활동한 관리이다. 초기에는 군의 아전을 지냈고, 건안 연간(196년–220년) 조조가 수춘에서 둔전을 시행할 때 수집도위(綏集都尉)로 임명되었다. 황초 연간(220년–226년) 말기에는 장안령으로 부임하여 청렴하고 유능한 통치로 관리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1][2]
태화 연간(227년–233년)에는 돈황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돈황은 오랫동안 태수가 공석이었고 호족의 세력이 강성하여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나, 창자는 부임 후 호족을 억제하고 빈민을 구제하며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으로 민생을 안정시켰다. 또한 공정한 재판과 서역과의 원활한 교류를 도모하여 돈황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고 발전을 이끌었다.[3][4][5]
몇 년간 돈황을 다스리다 재임 중 사망하였는데,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물론 서역인들까지 크게 슬퍼하며 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후임 태수들이 그의 통치 방식을 따랐으나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가평 연간에 부임한 황보륭이 와서야 창자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그를 정혼과 함께 유능한 지방관으로 높이 평가했다.[7]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창자(蒼慈)는 후한 말 회남(淮南, 현재의 안후이성 일대) 출신이다. 그는 처음에 군의 아전(하급 관리)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후한 헌제 치세인 건안 연간(196년–220년) 중반, 조조가 회남 지역의 수춘에서 둔전제를 시행하자 창자는 이를 감독하는 수집도위(綏集都尉)로 임명되었다.[1]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조위가 건국된 후에도 창자는 관료로 활동했다. 조위의 초대 황제 조비 재위 말기인 황초 연간(220년–226년) 말기에 장안의 령(長安令)을 지냈다. 그는 장안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청렴하고 공정하며 이치에 맞는 통치를 펼쳐,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2]
2. 2. 둔황 태수 시절
태화 연간(227년 ~ 233년)에 돈황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돈황은 서쪽 변경에 위치하고 오랜 전란으로 조정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못했으며, 태수 자리가 20년 가까이 비어 있어 호족들이 세력을 떨치는 것이 당연시되던 상황이었다. 전임 태수 윤봉 등은 이러한 구습을 바꾸지 못하고 문제를 방치했다.[3]부임한 창자는 호족 세력을 억누르는 동시에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호족이 넓은 토지를 독점하고 빈민은 매우 적은 토지만 가진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토지 재분배를 실시했다. 또한, 현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군으로 넘어오는 소송이 많았는데, 창자는 이를 직접 처리하며 형사 사건에서는 사형과 같은 무거운 판결을 자제했다. 그 결과 한 해 사형에 처해지는 이가 열 명 미만으로 줄었다.[4]
당시 서역의 여러 민족들이 조공이나 교역을 원했으나, 돈황의 호족들이 이를 방해하고 외국 상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헐값에 물건을 강매하여 원한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창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외국 상인들을 안심시키고, 수도 낙양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과소 (통행증)를 발급해주었다. 또한 관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이들의 통행 안전을 위한 호위를 제공했으며, 돈황에서 돌아가려는 이들에게도 동등한 편의를 제공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창자는 돈황 백성뿐 아니라 서역 민족들에게도 큰 신망을 얻었다.[5]
창자는 돈황 태수로 재임한 지 몇 년 후 임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관원과 백성들은 마치 친척을 잃은 듯 슬퍼했으며, 그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영정을 그려 기렸다. 서역의 이민족들도 창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무리를 지어 찾아와 함께 슬퍼했으며, 일부는 칼로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 피를 흘리며 충성심을 표하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창자의 후임으로는 왕천(王遷), 조기(趙基)가 차례로 부임했으나 모두 창자의 방식을 따랐음에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다. 가평 연간에 조기의 후임으로 부임한 황보륭이 창자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2. 3. 사망과 평가
창자는 돈황 태수로 여러 해 동안 재직하다가 임기 중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돈황의 관원과 백성들은 마치 가까운 친척을 잃은 것처럼 깊이 슬퍼했으며, 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영정(초상화)을 그려 기렸다. 서역 사람들 또한 창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무리를 지어 찾아와 함께 슬퍼했다. 일부는 칼로 자신의 얼굴을 그어 피를 흘리며 충성심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창자의 뒤를 이어 왕천(王遷)이 부임하여 창자의 통치 방식을 따랐으나 그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왕천의 후임인 조기(趙基)는 왕천보다도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략』에 따르면, 이후 가평 연간에 조기의 뒤를 이어 부임한 황보륭이 와서야 창자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창자의 전기를 쓰며 그를 정혼과 함께 유능한 지방관으로 평가했다. "정혼과 창자는 유능한 태수이다. 그들은 당시 위(魏)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태수들 중 하나이다!"[7]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6
[2]
서적
Sanguozhi vol. 16
[3]
서적
Sanguozhi vol. 16
[4]
서적
Sanguozhi vol. 16
[5]
서적
Sanguozhi vol. 16
[6]
서적
Sanguozhi vol. 16
[7]
서적
Sanguozhi vol.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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