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의
1. 개요
채의는 전한 시대의 인물로, 《시경》을 배우고 익혀 경서에 밝았다. 소제에게 발탁되어 《시경》을 가르쳤으며, 소부, 어사대부를 거쳐 승상에 올랐다. 곽광의 추천으로 승상이 되었으나, 고령으로 인해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쇠약했다. 양평후에 봉해졌으나, 아들이 없어 사후 봉국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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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4년 출생 -
가이우스 그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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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4년 출생 -
동방삭
전한 무제 시기 태중대부 동방삭은 뛰어난 외모와 익살, 해학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었으며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전설과 함께 한국 설화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
기원전 71년 사망 -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노예 검투사로, 기원전 73년 노예 반란을 이끌었으며, 로마군을 격파하기도 했으나 진압당해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고, 이후 억압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재평가되어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
기원전 71년 사망 -
전순
전순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부민후를 지냈으며 흉노 정벌에 참여하여 호아장군으로 전공을 세웠으나, 허위 보고죄로 자결했다. -
역사에 관한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역사에 관한 -
2013년
2013년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교황 사임, 북한 핵실험, 용산 개발 사업 부도, 윤창중 사건, 스노든 폭로, 김연아 우승, 방탄소년단 데뷔, 넬슨 만델라 사망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들이 발생한 해이다.
2. 생애
같은 군 사람 조자(趙子)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경서에 밝아 대장군의 밑에서 일하였는데, 가난하여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수레를 사다 주었다.
몇 년 후, 복앙성문후(覆盎城門候)로 전임되었다. 이후 소제가 한시(韓詩)에 밝은 자를 찾는 조서를 내렸을 때 부름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알현하지 못하였다. 채의는 직접 알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소제는 채의를 만나본 후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 ·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시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78)에 소부가 되었다가 여든의 나이에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승상 양창이 죽으니,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고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졌다.
승상이 되었을 때 채의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었고, 키가 작고 몸의 털도 다 빠져 노파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부축을 받아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채의가 승상이 된 이유는, 당시 정권을 거머쥔 곽광이 그가 부리기 쉬우리라 여겨 시켜준 것이다. 곽광은 그 말을 듣고 시중 등 황제의 측근과 자신의 속관에게, "황제의 스승이라면 재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제어하기 쉬운 자를 골랐다' 등과 같은 말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본시 3년(기원전 71) 6월 기축일에 죽었고, 시호를 절(節)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봉국은 폐지되었다. 채의는 왕길과 같은 군의 식자공에게 『시경』을 전했다.
2.1. 초기 생애와 학문
채의는 같은 군 사람 조자(趙子)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경서에 밝아 대장군의 밑에서 일하였는데, 가난하여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수레를 사다 주었다.
몇 년 후, 복앙성문후(覆盎城門候)로 전임되었다. 이후 소제가 한시(韓詩)에 밝은 자를 찾는 조서를 내렸을 때 부름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알현하지 못하였다. 채의는 직접 알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소제는 채의를 만나본 후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 ·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시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78) 소부가 되었다. 채의는 왕길과 같은 군의 식자공에게 『시경』을 전했다.
2.2. 관직 생활
같은 군 사람 조자(趙子)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경서에 밝아 대장군의 밑에서 일하였는데, 가난하여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수레를 사다 주었다.
몇 년 후, 복앙성문후(覆盎城門候)로 전임되었다. 이후 소제가 한시(韓詩)에 밝은 자를 찾는 조서를 내렸을 때 부름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알현하지 못하였다. 채의는 직접 알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소제는 채의를 만나본 후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 ·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시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78)에 소부가 되었다. 여든의 나이에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승상 양창이 죽으니,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고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졌다.
승상이 되었을 때 채의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었고, 키가 작고 몸의 털도 다 빠져 노파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부축을 받아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채의가 승상이 된 이유는, 당시 정권을 거머쥔 곽광이 그가 부리기 쉬우리라 여겨 시켜준 것이다. 곽광은 그 말을 듣고 시중 등 황제의 측근과 자신의 속관에게, "황제의 스승이라면 재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제어하기 쉬운 자를 골랐다' 등과 같은 말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본시 3년(기원전 71) 6월 기축일에 죽었고, 시호를 절(節)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봉국은 폐지되었다. 채의는 왕길과 같은 군의 식자공에게 『시경』을 전했다.
2.3. 승상 시절과 죽음
채의는 같은 군 사람 조자(趙子)에게서 《시경》을 배웠다. 경서에 밝아 대장군의 밑에서 일하였는데, 가난하여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수레를 사다 주었다.
몇 년 후, 복앙성문후(覆盎城門候)로 전임되었다. 이후 소제가 한시(韓詩)에 밝은 자를 찾는 조서를 내렸을 때 부름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알현하지 못하였다. 채의는 직접 알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소제는 채의를 만나본 후 그를 광록대부(光祿大夫) ·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여 《시경》을 가르치게 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78년) 소부가 되었다가 여든의 나이에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승상 양창이 죽으니,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고 양평후(陽平侯)에 봉해졌다.
승상이 되었을 때 채의의 나이는 여든이 넘었었고, 키가 작고 몸의 털도 다 빠져 노파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부축을 받아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채의가 승상이 된 이유는, 당시 정권을 거머쥔 곽광이 그가 부리기 쉬우리라 여겨 시켜준 것이다. 곽광은 그 말을 듣고 시중 등 황제의 측근과 자신의 속관에게, "황제의 스승이라면 재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제어하기 쉬운 자를 골랐다' 등과 같은 말은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본시 3년(기원전 71년) 6월 기축일에 죽었고, 시호를 절(節)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봉국은 폐지되었다. 채의는 왕길과 같은 군의 식자공에게 『시경』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