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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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방삭은 중국 전한 시대 무제의 측근으로, 사마천의 《사기》 등에 기록된 인물이다. 그는 고문서와 경학에 능통하고 재치 있는 언변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기이한 행동으로 동료들의 이해를 얻지 못했지만 무제의 인정을 받았다. 동방삭은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전설에서는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저승사자를 속여 오래 살았다는 설화로 유명하며, 그의 삶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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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삭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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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기록
전한 무제 시기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지낸 인물이다. 뛰어난 외모와 익살스러운 언변, 거침없는 행동으로 생전부터 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그의 해학과 재치는 널리 알려져 관련 설화가 한국에서도 유행하였다.
동방삭에 대한 주요 역사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활계열전〉과 반고의 《한서》 〈동방삭전〉에 전해진다.[6] 《사기》 기록은 추소손이 보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산둥성 링현 평원(平原)의 연차(厭次)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 무덤과 사당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해학적이고 재치 있는 인물이었으며[1], 때로는 기이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한 무제에게 천거하며 능력을 과장하거나, 궁중의 난쟁이들을 이용해 황제의 관심을 끄는 등 여러 일화가 남아있다.
후대에는 그의 지혜와 능력이 신격화되어 선인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당나라 시인 이백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익살스러운 면모로 인해 중국 상성(相聲)과 같은 전통 공연 예술 분야에서 시조처럼 존경받기도 한다. 《신이경》, 《십주기》(十洲記) 등의 지괴소설 작가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후대의 가탁(假託)으로 여겨진다.[6]
2. 1. 사기(史記)
사마천의 《사기》 제126권 〈활계열전〉 제66에 동방삭의 경력이 기록되어 있다.[6] 이 기록은 추소손이 후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동방삭은 제나라 출신으로 고문서와 경학을 좋아했으며, 여러 종류의 책과 사전을 널리 읽었다. 처음 장안에 왔을 때, 3,000장의 죽간에 자신을 추천하는 글을 써서 올렸는데, 한 무제는 이를 두 달에 걸쳐 읽고 동방삭을 낭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무제의 측근으로서 자주 대화 상대가 되었다. 성격이 급한 무제도 동방삭과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아져 금품을 하사하거나 식사 자리에 함께하도록 명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무제에게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는 남은 고기를 전부 품에 넣어 가져가려다 옷을 더럽히는 일이 많았고, 하사받은 돈과 비단을 함부로 쓰며 장안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계속해서 첩으로 삼았다가 1년도 안 되어 버리는 생활을 했다. 이는 채음보양(採陰補陽)이라는 도교의 수련법 중 하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는 동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무제는 "동방삭에게 일을 맡기면 그만한 능력을 보일 자가 없다"고 평가하며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박사들이 전국 시대의 현자들과 비교하며 동방삭을 비난한 적이 있다. 뛰어난 학식과 말솜씨를 가졌음에도 관직은 시랑에 불과하고 지위는 황제의 곁을 지키는 집극(執戟)에 지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던 것이다. 이에 동방삭은 "천하에 재앙이 없으면 성인이 있다 해도 그 재능을 펼칠 곳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면 현명한 자가 있다 해도 공을 세울 곳이 없다"는 옛말을 인용하며, 전국 시대와 한나라 시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자신이 학문을 닦고 도를 행하는 것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소신을 밝혔다.
동방삭은 자신의 아들을 낭관으로 만들었고, 그 아들은 '시알자'(侍謁者, 황제의 부름을 전하는 관리)가 되어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노년에 이르러 죽음이 임박했을 때, 동방삭은 무제에게 참소(讒訴, 남을 헐뜯어 고해바침)를 물리치라고 간언한 뒤 곧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은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다"고 하며, 조정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에서 벗어나 살고자 했던 동방삭의 삶에 공감하는 듯한 평가를 남겼다.
2. 2. 한서(漢書)
기원후 111년에 편찬된 반고의 한서(漢書)에는 "동방삭전"(東方朔傳)이라는 별도의 열전이 실려 있다. 이는 기원전 91년의 사기(史記)에서 "활계열전"(滑稽列傳)의 일부로 동방삭을 다룬 것과 대조된다.[6]동방삭은 산둥성 링현에 위치한 평원(平原)의 연차(厭次) 출신으로, 그의 무덤과 사당이 그곳에 있다.
''한서''의 동방삭 열전은 그를 "말이 많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며, 배우이자 익살꾼"으로 묘사하고 있다.[1]
기원전 138년, 한 무제가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동방삭은 다음과 같은 자기 묘사서를 황제에게 제출했다.
>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형님과 형수님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열두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년 겨울이 지나자 평범한 텍스트와 기록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검술을 배웠고, 열여섯 살에는 '시경'과 '서경'을 공부하여 곧 22만 자를 암기했습니다. 열아홉 살에는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 전투 및 야영에 관한 장비, 북과 꽹과리에 관한 규정을 공부했습니다. 다시 22만 자를 암기하여 총 44만 자를 암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항상 자로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제 나이 스물두 살이고, 키는 9척 3촌(약 223cm)이며, 눈은 늘어진 구슬 같고, 이빨은 정렬된 조개 같으며, 맹분만큼 용감하고, 청기만큼 날쌔고, 포숙만큼 신중하고, 미생만큼 충성스럽습니다. 저는 천자의 훌륭한 신하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하고 이 보고서를 올립니다.
이처럼 과장된 자기 소개에 한 무제는 동방삭이 비범하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공거(公車)의 관청에서 황제의 명을 기다리도록 명령했다."
황제의 알현을 기다리던 동방삭은 궁정 난쟁이들을 속여 황제의 관심을 끄는 계략을 사용했다. 그는 난쟁이들에게 황제가 그들을 쓸모없다는 이유로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무제가 지나갈 때 고두(叩頭)하며 자비를 구하라고 조언했다. 난쟁이들이 울며 매달리자 황제가 이유를 물었고, 그들은 동방삭의 말을 전했다. 황제는 동방삭을 불러 이유를 물었다.
> 삭은 "죽든 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난쟁이들은 키가 3척 남짓(약 72cm)이고, 봉급으로 곡식 한 섬과 현금 240전을 받습니다. 저는 키가 9척 남짓(약 216cm)인데, 저 역시 봉급으로 곡식 한 섬과 현금 240전을 받습니다. 난쟁이들은 과식으로 죽어가고 있고, 저는 굶어 죽으려 합니다. 제 말이 쓸모가 있다면, 그들과는 다르게 대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말이 쓸모가 없다면, 저를 해고하십시오. 단순히 저를 곁에 두고 장안의 쌀을 축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황제는 크게 웃었고, 그를 금마문(金馬門)에서 명을 기다리도록 임명했다. 이후 동방삭은 점차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또한 ''한서''에는 무더운 여름날, 한 무제가 하사한 고기를 궁중 집사가 늦게 나눠주자 동방삭이 먼저 칼을 뽑아 자기 몫을 베어 가져간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날 동방삭은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했지만, 황제가 잘못을 스스로 꾸짖으라고 명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삭은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자, 삭! 황제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선물을 받다니, 얼마나 예의에 어긋납니까! 칼을 뽑아 고기를 베다니, 얼마나 대담합니까! 베어낼 때 많이 떼어가지 않다니, 얼마나 절제합니까! 집으로 가져가서 작은 부인에게 주다니, 얼마나 너그럽습니까!" 황제는 웃으며 "과실을 고하라고 했더니, 자네는 칭찬만 하는군!"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술 한 말과 고기 백 근을 더 하사하며 "작은 부인"에게 가져가라고 말했다.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동방삭은 한 무제의 신임을 얻어 상시, 낭, 태중대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3]
《한서》 권65 〈동방삭전(東方朔傳)〉에는 그의 저술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언급되어 있다.
- 〈답객난〉(答客難)
- 〈비유선생〉(非有先生)
- 〈봉태산〉(封泰山)
- 〈책화씨벽〉(責和氏璧)
- 〈황태자생매〉(皇太子生禖)
- 〈병풍〉(屛風)
- 〈전상백주〉(殿上柏柱)
- 〈평락관부렵〉(平樂觀賦獵)
- 〈팔언칠언〉(八言七言)
- 〈종공손홍차거〉(從公孫弘借車)
3. 저술
한서 권65 〈동방삭전(東方朔傳)〉에는 동방삭의 저술로 《답객난(答客難)》, 《비유선생(非有先生)》, 《봉태산(封泰山)》, 《책화씨벽(責和氏璧)》, 《황태자생매(皇太子生禖)》, 《병풍(屛風)》, 《전상백주(殿上柏柱)》, 《평락관부렵(平樂觀賦獵)》, 《팔언칠언(八言七言)》, 《종공손홍차거(從公孫弘借車)》 등이 언급되어 있다.[6] 《한서》 동방삭 열전은 이 중 《답객난》과 《비유선생론(非有先生論)》을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는다. 특히 《답객난》은 '설론(設論)', 즉 가상 인물 간의 문답 형식을 통해 주장을 펼치는 문학 형식의 초기 예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한서》의 서지(書誌) 부분인 제30권 「예문지(藝文志)」에는 동방삭이 실제로 쓴 작품 목록과 함께 "요즘 떠도는 다른 작품들은 완전히 가짜다"라는 언급이 있다. 예를 들어, 왕일(2세기)의 주석에서 동방삭의 작품이라고 한 초사 수록 시 《칠간(七諫)》에 대해, 중국학자 데이비드 호크스는 동방삭이 초(楚) 스타일의 시를 썼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이 외에도 《신이경(神異經)》과 《십주기(十洲記)》 같은 지괴소설의 저자가 동방삭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그의 이름을 빌린 것으로 추정된다.[6] 《신이경》은 대략 2세기 후반 작품으로 보이며, 위진남북조시대 문인 장화(232–300)가 주석을 달았다. 내용은 지역별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십주기》는 300년경 작품으로 추정되며, 동방삭이 무제에게 신화 속 '십대주(十洲)' 등 이상향의 지리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이다.
4. 전설과 설화
동방삭은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다양한 전설과 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뛰어난 지혜와 유머 감각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선인(仙人)이나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은 그가 삼천갑자(三千甲子), 즉 18만 년을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서왕모(西王母)의 불사(不死) 복숭아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동방삭은 장수(長壽)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외에도 원래 목성이나 금성의 정령이었다거나, 저승사자를 잘 대접하여 오래 살게 되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저승사자가 동방삭을 잡기 위해 냇가에서 숯을 씻었다는 설화가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경기도 용인시의 탄천(炭川)이 있다. 탄천 지역에서는 이 설화를 바탕으로 매년 탄천문화제를 열고 있다.[7][8] (자세한 내용은 삼천갑자 동방삭 문단 참고)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는 동방삭이 신선과 같은 면모를 보인다. 한 무제 시절, 그는 생전에도 '쫓겨난 신선'이라는 의미의 적선(謫仙)으로 여겨졌으며, 육조 시대 이후에는 목성(歲星)이나 금성(太白星)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또한 노자나 범려 등 여러 인물로 환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수신기》(搜神記)에는 함곡관을 막아선 정체불명의 괴물 '환(䍺)'을 동방삭이 지혜를 발휘하여 술을 뿌려 물리쳤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어, 그의 비범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동방삭은 익살스러운 행동으로도 유명하여 중국에서는 상성(相聲)과 같은 화예(滑稽, 익살) 분야의 시조 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그의 저서로는 『답객난』(答客難), 『신이경』(神異經) 등이 전해진다.
일본에서도 동방삭은 장수 설화의 인물로 등장하며, 노 연극 《동방삭》에서는 선인으로 그려진다. (자세한 내용은 기타 전설 문단 참고)
4. 1. 삼천갑자 동방삭
동방삭은 삼천갑자(三千甲子), 즉 18만 년(1갑자는 60년을 의미하므로, 3000갑자는 3000 × 60 = 180,000년)을 살았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그가 이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왕모(西王母)의 불사(不死) 복숭아를 훔쳐 먹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중국의 『한무고사』나 『박물지』 같은 기록에는 서왕모가 한 무제에게 바친 복숭아를 동방삭이 세 번이나 훔쳐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외에도 저승사자를 잘 대접했기 때문이라거나, 원래 별(목성 또는 금성)의 정령이었다는 설도 있다.
한국에서는 동방삭과 저승사자에 얽힌 설화가 특히 유명하다. 저승사자가 동방삭을 잡으러 왔지만,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해 꾀를 내었다. 저승사자는 냇가에 앉아 검은 숯을 씻기 시작했다. 이를 본 동방삭이 신기하게 여겨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검은 숯을 씻어 희게 만들려는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말하자, 저승사자는 그가 동방삭임을 알아채고 즉시 잡아갔다고 한다.
이 저승사자 설화와 관련된 지명이 한국에 남아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 발원하는 탄천(炭川)은 이름 자체가 '숯내'라는 뜻인데, 바로 저승사자가 동방삭을 잡기 위해 숯을 씻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지역에서는 동방삭과 탄천 설화를 바탕으로 매년 탄천문화제를 열고 있으며, 저승사자가 숯을 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 등을 진행한다.[7][8]
일본에도 동방삭과 관련된 장수 설화가 있다. 시마네현에서는 팔백비구니에게 도끼를 갈아 바늘로 만들겠다고 말하며 자신은 구천 년을 살았다고 밝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4], 야마구치현에서는 106세의 미우라 요시아키, 8천 살의 우라시마 타로와 함께 장수를 자랑하다가 칠억 살의 산파 할머니를 만나 망신을 당했다는 전설도 있다.[5]
4. 2. 기타 전설
일본의 노 연극 《동방삭》에서는 동방삭이 선인으로 등장한다. 시마네현에는 팔백비구니에게 도끼를 갈아 바늘로 만들겠다고 말하여 놀라게 하고, 팔백 년을 살았다고 비구니가 말하자 자신은 구천 년을 살았다고 밝혔다는 전설이 있다.[4] 야마구치현에는 106세의 미우라 다이스케와 8천 살의 우라시마 타로를 만나 자신이 구천 살이라고 자랑했지만, 이후 셋이 함께 여행하다가 그들의 출산을 도왔던 칠억 살의 산파 할머니를 만나 망신을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5]5. 대중문화
롱인의 소설 『지성 동방삭』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동방삭』이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제작되어 2008년 8월 17일부터 8월 31일까지 총 45화로 방영되었다. 주연은 청첸이 맡았다.
6. 평가 및 의의
전한 무제 시대에 활동했던 동방삭은 생전부터 사후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언변과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유명했지만, 단순한 어릿광대를 넘어선 지혜와 통찰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생전의 동방삭은 장안의 궁정에서 때로는 괴짜처럼 보이는 행동으로 인해 어릿광대(滑稽)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조은(朝隱)', 즉 궁정에 머물면서도 세속적인 명예나 권력 다툼에서 벗어나 있는 은둔자라고 칭했다.[6] 동료 관리들 중 일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수군거렸지만, 무제는 그의 비범한 능력을 알아보았고 "동방삭에게 일을 맡기면 그만한 능력을 보이는 자가 없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한 유향은 젊은 시절 동방삭에게 가르침을 구하며 그의 예리함과 통찰력에 감탄했으며,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논객이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했다.[2]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삭에 대한 평가는 점차 신격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육조 시대 이후 그는 목성이나 금성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서왕모의 불멸의 복숭아를 훔쳐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적선(謫仙)이라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더해졌다. 또한 함곡관에 나타난 거대한 괴물을 술을 뿌려 지혜롭게 물리쳤다는 수신기의 기록처럼, 그의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설화들이 다수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동방삭이 단순한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방삭의 삶과 이야기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해학과 기지는 문학과 예술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관련 설화가 널리 유행하였다.[6]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그를 "세상 사람들은 동방삭을 알지 못하나, 크게 숨어 금문에 있는 자는 적선이다"라고 칭송하며 그의 비범함을 높이 평가했다. 중국에서는 민간 예능인 상성(相聲) 등 화예(話藝, 말로 하는 예술)의 시조 신으로 존경받기도 한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동방삭은 세속적인 기준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는 박사들의 비판에 대해, 시대 상황이 다르며 학문과 도를 행하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님을 〈답객난〉(答客難)이라는 글을 통해 당당히 밝혔다. 이는 세속적 성공만을 중시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임종 직전 무제에게 간언을 올린 사실은 그가 단순한 익살꾼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지혜와 충성심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마천은 사기 활계열전에서 동방삭을 "조정 안에 있으면서 세상을 피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처세에 주목했다. 동방삭의 삶은 권력 앞에서의 유연함과 세속적 가치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점을 시사한다.
참조
[1]
서적
"Jester Extraordinary"
[2]
서적
[3]
서적
縮刷 東洋歴史大辞典 中巻
臨川書店
[4]
서적
妖鬼化 第4巻 中国・四国編
Softgarage
[5]
서적
周防・長門の民話 第1集
미래사
[6]
간행물
한국지명유래집
국토지리정보원
[7]
뉴스
용인 죽전서 탄천문화제
https://n.news.naver[...]
연합뉴스
2008-10-10
[8]
뉴스
삼천갑자 동방삭이 객사한 사연
https://sgsg.hankyun[...]
한국경제
200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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