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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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천호 공소의 천호산 기슭에 위치한 성지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 등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묻혀 있으며, 박해 시대 신앙 공동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09년 토지 매입을 시작으로 1980년대 성지 개발을 거쳐 현재는 순교자들의 묘소 보존과 신앙 수련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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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성지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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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류 | 로마 가톨릭교회 성지 |
| 주소 | 대한민국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
| 위치 | 대한민국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
| 상세 정보 | |
| 건축 양식 |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
| 봉헌일 | 1987년 |
| 역사 | |
| 기원 | 병인박해 순교자 |
| 설립 | 1906년 공소 설립 |
| 성지 지정 | 1987년 성지 지정 |
2. 유래
천호성지는 약 150년의 역사를 지닌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가 자리한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위치한다. 천호 공소는 이름 그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를 의미하며, 천호산 역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병인박해 시기인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베드로), 손선지(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한재권(요셉) 네 분의 성인이 잠들어 있다. 또한 같은 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와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순교자들의 유해도 모셔져 있다. 이들 외에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산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모든 것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친 이들로, 천호산의 자연은 이들 순교자들의 희생 위에 자라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1. 천호 공소
천호 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해 시대에는 주로 다리실 또는 용추네로 불렸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표기했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승천한 내가 있다는 의미의 용천내(龍川內)가 변한 이름이다. 현재의 행정명인 천호(天呼)는 후대에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천호 마을(공소)의 형성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한 시기로, 주로 충청도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 산골짜기로 피신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신자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성인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으나,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점차 아래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미쳤다. 6월 9일 문 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공소의 신자들이 여산 관아로 끌려갔으며, 이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시기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14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병중에 있던 마태오는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머물다 포졸들에게 발각되었다. 이후 형 요한과 함께 산속으로 피신했으나, 장마철 찬비 속에 병세가 악화되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머물던 중, 1868년 6월 12일 풍증(風症)으로 사망했다. (다른 구전에 따르면, 포졸들이 다시 마을을 수색할 때 마태오가 숨어있던 집까지 오자, 형 요한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신음 소리를 막기 위해 동생에게 이불을 씌웠다가 질식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해 시대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 천호) 외에도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존재했다. 현재는 다리실(천호 공소), 성채골, 그리고 이후 터를 옮겨 새로 시작된 산수골 공소만이 남아 있으며, 이 중 다리실(천호) 공소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1877년에는 블랑 신부가 으럼골을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리우빌 신부, 라푸르카드 신부 등 선교사들이 10여 년간 부임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천호 공소에 머물며 사목 활동을 펼쳤다. 오늘날 천호 공소는 1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교우촌으로서, 주민 전체가 신자인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2. 2. 다리실과 성 손선지·성 한재권
천호성지에 묻힌 순교자 성인 중, 손선지(베드로)와 한재권(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에 잠시 거주했던 적이 있다. 이후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1866년(병인박해)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손선지 성인이 순교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는 70여 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 그리고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같은 시기,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으로 피신해 왔다.
2. 3. 다리실 신앙공동체가 겪은 박해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미쳤다. 그해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여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이 시기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병과 박해의 여파로 세상을 떠났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누운 지 스무 날이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있다가 포교들에게 발각되었다. 포교들은 마태오를 추궁한 뒤 다른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아 여산 관아로 돌아갔다. 그날 밤 형 요한이 집에 와서 상황을 듣고 병든 마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장마철 찬 비를 맞으며 3~4일을 지내자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포졸들이 두려워 남의 집에 머물렀다. 마태오는 불안 속에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결국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다른 구전에 따르면, 형 요한이 포졸들에게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여 신음하는 동생의 입을 이불로 막았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 보니 질식해 숨져 있었다고도 한다.)
박해 시대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 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있었다. 현재는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터를 옮겨 새로 시작한 산수골 공소만이 남아 있으며, 이 중 다리실 공소가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크다. 1877년에는 블랑 신부가 으럼골을 거점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리우빌 신부, 라푸르카드 신부 등이 천호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박해 이후 신앙 공동체의 재건에 기여했다.
3. 성지의 조성 과정
천호성지와 그 주변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였으나, 1909년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와 신도들이 힘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면서 교우촌의 터전과 순교자 묘역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1] 이후 1941년에는 순교자 묘역이 포함된 부지가 교회에 봉헌되어 성지 보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1]
1983년에는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 주도로 순교자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 등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었다.[1] 그러나 천호산에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순교자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1]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본격적인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1987년에는 신앙 수련을 위한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1] 천호성지는 박해 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주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1]
3. 1. 토지 매입 및 봉헌
천호성지와 그 주변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 때문에 이곳에 살던 신도들은 언제든 터전을 잃고 쫓겨날 수 있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그러던 중 1909년, 되재본당의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힘을 모아 자금을 마련하여 150 정보에 달하는 임야를 매입할 기회를 얻었다. 이 토지 매입을 통해 공소 신도들은 안정적인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이미 모셔져 있던 순교자들의 묘소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41년경, 매입한 150 정보의 임야 중 순교자들의 묘가 있거나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 75 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봉헌에는 목세영(베르몽) 신부를 비롯하여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 참여했으며, 이들의 헌신 덕분에 오늘날의 천호성지가 보존될 수 있었다.
3. 2. 유해 발굴 및 성지 개발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 발굴을 통해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후 함께 묻혔던 여덟 분의 유해와 천호산 기슭에서 두 분의 유해를 찾아냈다. 그러나 천호산에는 아직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발굴하지 못한 순교자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했다. 이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배우고 신앙을 수련할 수 있도록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4. 천호성지의 현재와 의의
천호성지는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 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당시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주는 교육장으로서 가치가 있다.
원래 천호성지와 주변 산은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였으나, 1909년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가 자금을 모아 150 정보의 임야를 매입하였다. 이를 통해 신도들은 생활 터전을 마련하고 순교자들의 묘소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41년경, 매입한 토지 중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75 정보가 교회에 봉헌되었다. 이 봉헌에는 목세영 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 참여했으며, 이 봉헌으로 오늘날 성지를 보존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후 함께 묻혔던 8명의 유해, 천호산 기슭의 다른 두 분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아직 발굴되지 못한 순교자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다. 또한,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한 신앙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4. 1.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이리 인터체인지에서 전주 쪽으로 나와 고속도로 밑을 통과한 후, 좌측의 좁은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으면 739번 지방도와 만나는 소농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천호천을 따라 약 5km 정도 올라가면 천호산 성지 입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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