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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근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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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혈근황대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의 병력 부족으로 인해 오키나와에 미군 상륙이 임박하자 14세 이상 소년들을 소집하여 편성된 부대이다. 1944년 육군성령 개정을 통해 14세 소년도 방위대로 편성할 수 있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강제적인 소집이 이루어졌다. 철혈근황대는 1945년 3월, 약 1,780명의 중학생으로 조직되었으며, 이들 중 절반가량이 사망했다. 유사하게 조직된 호향대와 히메유리 간호대도 있었다. 전후 일본 정부는 소년병 소집의 위법성을 인정했으나, 유족 보상 문제와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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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근황대
철혈근황대
1945년 3월, 가고시마현립 제1 가고시마 중학교(현 가고시마현립 가고시마 중앙 고등학교)의 학생들
1945년 3월, 가고시마현립 제1 가고시마 중학교(현 가고시마현립 가고시마 중앙 고등학교)의 학생들
종류학도대
창설1945년
해체1945년
규모12세에서 19세 사이의 학생
25,000명 이상
활동 지역오키나와 전투
소속일본 제국 육군
역할간호병
탄약 운반
식량 운반
참호 파기
시체 매장
사상자2,500명 이상 사망
관련 인물
지휘관불명
저명한 대원불명
추가 정보
관련 항목학도병
오키나와 전투
히메유리 부대
일본의 전쟁 범죄
집단 자결 (오키나와 전투)

2. 편성 배경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 상황에 처했다. 육군성은 육군성령을 통해 병력 충원을 시도했고, 미군 상륙이 임박한 오키나와에서는 14세 이상 소년들을 철혈근황대로 방위 소집했다.[22][23]

1944년 12월, 육군성령 제58호 및 제59호 개정을 통해 "전연지대"(오키나와현, 아마미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 타이완)에 한해 방위 소집 연령을 14세로 낮추었다.[24] 이는 17세 미만이라도 지원하면 방위대로 편성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으나, 실제로는 "지원"을 강요하여 사실상 모든 학생이 소년병으로 소집되었다.[25]

내무성은 징병 연령을 낮추는 해당 조치가 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반발했지만,[26] 육군성은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 제정으로 법률적 문제를 회피했다.

소집 과정에서 학교 단위 편성은 강제성을 띠었고, 학교장이나 배속 장교가 친권자 동의서를 위조하는 일도 있었다.[27] 내무성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으나, 일부 실무자들은 학생들을 돌려보내기도 했다.[28]

전후 후생성은 철혈근황대 17세 미만 소년병의 방위대 소집에 법적 하자가 있어 군인 신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유족 원호를 거부했다.[29] 이는 국가가 스스로의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보상을 거부한 셈이며, 결국 "사실상 군인"이라는 정치적 판단으로 처리되었다.[30]

당시 일본제국의 법으로도 위법했던 소년병 소집 결과, 1945년 3월 1780명의 중학생(오늘날의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철혈근황대가 조직되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사망했다. 17세 미만 전사자는 567명에 달했다.[30]

2. 1. 병력 부족 심화

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 악화와 장기화로 일본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에 직면했다. 육군성은 육군성령을 통해 병력 충원을 시도했고, 특히 오키나와에서는 14세 이상 소년들을 철혈근황대로 방위 소집했다.[22][23]

1944년 12월, 육군성령 제58호 및 제59호 개정을 통해 "전연지대"(오키나와현, 아마미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 타이완)에 한해 방위 소집 연령을 14세로 낮추었다.[24] 이는 17세 미만이라도 지원하면 방위대로 편성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을 강요하여 사실상 모든 학생이 소년병으로 소집되었다.[25]

내무성은 이러한 조치가 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반발했지만,[26] 육군성은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 제정으로 법률적 문제를 회피했다.

실제 소집 과정에서도 학교 단위 편성이 강제성을 띠었고, 학교장이나 배속 장교가 친권자 동의서를 위조하는 일도 있었다.[27] 내무성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만, 일부 실무자들은 학생들을 돌려보내기도 했다.[28]

전후 후생성은 철혈근황대 17세 미만 소년병의 방위대 소집에 법적 하자가 있어 군인 신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유족 원호를 거부했다.[29] 이는 국가가 스스로의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보상을 거부한 셈이다. 결국 이 문제는 "사실상 군인"이라는 정치적 판단으로 처리되었다.[30]

2. 2. 법적 문제와 논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을 겪었다. 이에 일본 육군성은 육군성령을 통해 병력 충원을 시도했고, 미군 상륙이 임박한 오키나와현에서는 14세 이상 소년들을 철혈근황대로 소집했다.[22][23]

원래 방위대 소집은 17세 이상이 대상이었으나, 1944년 12월 육군성령 개정을 통해 오키나와현 등 일부 지역은 14세 이상도 '지원'하면 방위대로 편성할 수 있게 되었다.[24]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을 강요하여 사실상 모든 학생이 소년병으로 소집되었다.[25]

일본 내무성은 이러한 육군성령이 징병 연령을 낮추는 것으로 병역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며, 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반발했다.[26] 하지만 육군성은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 제정으로 법적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실제로는 학교 단위로 편성되어 강제성이 있었고, 학교장이나 배속 장교가 친권자 동의서를 위조하는 일도 있었다.[27] 이처럼 내무성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다만, 일부 실무자들이 학생을 돌려보낸 사례도 있었다.[28]

전쟁 후, 일본 후생성은 철혈근황대 17세 미만 소년병의 방위대 소집에 법적 하자가 있어 소집 자체가 무효이므로 군인 신분을 인정할 수 없고 유족 원호도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상 군인"이라는 정치적 판단으로 처리되었지만,[29] 후생성은 '지원'의 임의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30]

3. 철혈근황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는 철혈근황대와 관련한 다수의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31]

오키나와 전투 당시 철혈근황대 외에도 "호향대"(護郷隊, 고향을 지키는 부대)라는 소년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철혈근황대가 중학교와 사범학교 남학생 중심이었던 반면, 호향대는 청년학교[42] 남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농림학교 학생 일부도 호향대에 편성되어 오키나와섬 북부 전투에 투입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육군성은 성령을 통해 방위 소집 연령을 낮추었다. 원래 17세 이상 남성이 대상이었으나, 1944년 12월 육군성령 제59호 및 제58호에 따라 오키나와현 등 일부 지역에서는 14세 이상도 지원하여 제2국민병역에 편입되면 방위 소집이 가능했다.[3]

내무성은 징병 연령 인하, 헌법 위반, "지원"의 강제성 등의 문제를 제기했다.[4] 실제 방위 소집 과정에서도 "학교 전체" 편성, 배속 장교의 위조 등 "사실상의 강제" 사례가 다수 발견되었다.[5] 후생성은 법적 절차 문제를 이유로 철혈근황대 소년들의 군적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정치적 배려로 군인으로 처리했다.[7]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은 헌법 위반 의혹이 있는 육군 성령을 근거로 1945년 3월 구제 중학교 학생 등 1780명을 철혈근황대로 편성, 전투에 동원했고 약 절반이 전사했다.[8]

전후 생존 대원 일부는 구술자로 활동했으나, 2024년 9월 19일 마지막 생존자가 사망하면서 철혈근황대 생존자는 모두 사라졌다.[9]

일본군은 학생들도 전투원임을 선포했지만, 미군은 학생들을 민간인으로 취급하며 "포로로 삼지 않겠다"라고 했다. 이 말을 오해한 학생들이 자결하는 비극도 있었다.[33][34][35][36]

3. 1. 조직 및 훈련

오키나와 수비군이었던 일본 육군 제32군과 오키나와현 당국은 《철혈근황대의 편성 및 활용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각급 학교마다 철혈근황대가 편성되어 군의 긴밀한 협조 아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비상 상황 시 군 조직에 편입되어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31] 학교의 교장이 대장이 되었고, 14세 이상의 모든 남자 학생이 대상이었다. 제32군은 훈련 지원 계획을 통해 "강력한 일본군 병사로서 황토 방위 전투에 대비"하기 위한 "실제 전투에 적응한" 훈련을 실시했다.[31]

당시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지역작전명령 갑 제110호"를 통해 군대가 철혈근황대의 훈련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철혈근황대 방위소집 요령》과 첨부 문서에 따르면, 제32군은 오키나와현 당국에 학생들의 방위대 소집에 대비한 서류를 작성하도록 명령했고, 시마다 에이 현 지사가 학교를 통해 수집한 학생 명단을 군에 제출하여 언제든지 소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32]

3. 2. 임무 및 전투 투입

철혈근황대는 물자 부족으로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 여러 임무에 투입되었다. 진지 구축, 전령, 통신 임무를 수행했고, 심지어 전차에 대한 육탄 공격도 강요받았다.[37] 전차 공격은 급조된 뇌관을 단 10kg의 화약을 짊어지고 전차에 뛰어드는 자살 공격이었다.[38] 전차의 두꺼운 장갑 대신 궤도를 파괴하기 위해 몸집이 작은 소년병들이 주로 특공에 동원되었다. 전령 임무 역시 어린 학생 여러 명에게 같은 문서를 전달하게 하여, 다수가 사망하더라도 한 명만 문서를 전달하면 된다는 식으로 운용되었다. 전투 막바지에는 소년병에게도 일반 병사와 같이 전진훈을 따르도록 하여 포로가 되느니 자결을 강요하였다.[39][40]

1945년 6월 18일, 우시지마 미쓰루는 자결 직전 철혈근황대의 정보선전대인 치하야다이(千早隊) 부대장에게 훈령을 내려, 부대가 해체되더라도 게릴라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41]

3. 3. 피해 상황

오키나와 전투에서 철혈근황대는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여러 임무에 투입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진지 구축, 전령, 통신 임무는 물론, 탱크에 대한 육탄 공격까지 강요받았다.[37] 이는 급조된 뇌관을 단 10kg의 화약을 짊어지고 전차에 뛰어드는 자살 공격이었으며,[38] 몸집이 작은 소년병들이 주로 이 임무를 맡았다.

1945년 3월, 제32군의 명령으로 구제 중학교 학생 등 1780명으로 편성된 철혈근황대는 약 절반이 전사했다. 17세 미만 전사자는 567명이었다.[8]

학교명부대명동원 수전사자 수사망률
오키나와 사범학교사범 철혈근황대386명224명58.0%
현립 제1중학교제1중 철혈근황대·통신대371명210명56.0%
현립 제2중학교제2중 철혈근황대·통신대144명127명88.2%
현립 제3중학교제3중 철혈근황대·통신대363명37명10.2%
현립 공업학교공업 철혈근황대·통신대94명85명90.4%
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농림 철혈근황대173명41명23.7%
현립 수산학교수산 철혈근황대·통신대49명23명46.9%
나하시립 상공학교상공 철혈근황대·통신대99명72명72.7%
카이난 중학교카이난 철혈근황대·통신대81명70명86.4%
현립 미야코 중학교미야코 중 철혈근황대불명0명0.0%
현립 야에야마 중학교야에야마 중 철혈근황대20명1명5.0%
현립 야에야마 농업학교(남자)야에노 철혈근황대불명불명불명
합계1780명890명50.0%
출처: 『걷고·보고·생각하는 오키나와』에서


4. 호향대

오키나와 전투 당시 철혈근황대 외에 "호향대"(護郷隊, 고향을 지키는 부대)라는 소년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철혈근황대가 중학교와 사범학교 남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반면, 호향대는 청년학교[42] 남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일부 농림학교 학생들도 철혈근황대가 아닌 호향대에 편성되어 오키나와섬 북부 전투에 투입되었다.

4. 1. 조직 및 특징

호향대는 1944년 9월 26일 일본군 대본영령을 근거로 14세에서 17세 사이의 소년으로 조직된 소년병 부대이다. 육군나카노학교 출신의 무라카미 하루오(村上治夫) 대위가 지휘하였다. 철혈근황대와 같이 '지원'이 원칙이었지만,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다. 800명에서 1,000명의 소년병이 소집되어 162명이 사망하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철혈근황대 외에도 '호향대'와 같은 소년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호향대는 철혈근황대가 중학교나 사범학교 남학생 위주로 편성된 것과 달리, 청년학교 등의 소년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농림학교 등의 철혈근황대원 일부도 호향대에 편입되어 북부에서 참전했다.

호향대는 임무 은닉을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제1과 제2, 2개 부대가 있었으며, 각각 제3유격대, 제4유격대의 비밀 명칭을 가졌다. 제1유격대는 뉴기니, 제2유격대는 필리핀에 배치되었다.

철혈근황대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등 '전연지대'에서만 적용된 '방위 소집 규칙' 등을 법적 근거로 '지원'을 요건으로 했지만, 철혈근황대보다 더 위법적으로 절차가 생략되었고, '사실상의 강제'였다는 증언이 많다. 온나다케(恩納岳)와 타노다케(多野岳)에 거점을 두고 '얀바루'라고 불리는 오키나와 본섬 북부 지역에서 박격포나 소총으로 유격(게릴라) 작전을 펼쳤다.

4. 2. 전투 및 피해

오키나와 전투에서 철혈근황대는 온나다케(恩納岳)와 타노다케(多野岳)를 거점으로 오키나와 본섬 북부 지역(얀바루)에서 박격포(擲弾筒)나 소총으로 유격(게릴라) 작전을 전개했다. 800~1000명의 소년이 방위 소집되었으며, 그중 162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히메유리 간호대

(주어진 원본 소스가 없으므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1. 조직 및 역할

여학생들은 히메유리 간호대로 동원되어 부상병 치료, 문서 작성 등 각종 지원 활동을 하였다.[43]

6. 전후 문제

6. 1. 법적 책임 회피 논란

일본 후생성은 철혈근황대의 17세 미만 소년병 방위대 소집에 법적 하자가 있어 소집 자체가 무효이므로 군인 신분을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유족에 대한 원호도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사실상 군인"이라는 정치적 판단에 의해 처리되었다.[29] 후생성은 특히 제2국민병역에 편입하는 절차인 "지원"의 임의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30] 국가에 의한 피해 당사자에 대한 처우에서 국가가 스스로의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보상을 거부한 셈이다.

당시 일본제국의 법으로서도 위법했던 소년병 소집의 결과, 1945년 3월 1780명의 중학생(오늘날의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철혈근황대가 조직되었고, 그 가운데 약 절반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17세 미만의 전사자는 567명에 달했다.[30]

7. 국제법 위반

국제연합의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제38조 제3항은 15세 미만 아동의 전쟁 동원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은 15세 미만 아동의 징집 및 적대 행위 가담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7. 1. 아동 권리 침해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심각한 병력 부족을 겪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44년 12월 육군성령 제58호 및 제59호를 통해 "일부 지역"에 대한 방위 소집 연령을 14세로 낮추었다.[24] 이 "일부 지역"은 전선 인접 지대인 오키나와현, 아마미제도, 오가사와라제도, 쿠릴열도, 타이완을 포함했다.[24]

일본 내무성은 이러한 조치가 사실상 징집 연령을 낮추는 것이며, 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반발했다.[26] 그러나 일본 육군성은 1945년 6월 23일 《의용병역법》을 제정하여 법률적 문제를 회피했다.

실제 소집 과정은 학교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법률이 정한 '지원' 규정과 달리 강제성을 띠었다. 학교장이나 배속 장교가 친권자의 동의서를 위조하는 경우도 있었다.[27]

일본 후생성은 철혈근황대의 17세 미만 소년병 방위대 소집이 법적 하자가 있어 무효이며, 군인 신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유족에 대한 원호 문제로 이어졌으나, 결국 "사실상 군인"이라는 정치적 판단에 따라 처리되었다.[29]

이러한 소년병 징집은 국제법 위반이기도 하다. 국제연합의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제38조 제3항은 15세 미만 아동의 전쟁 동원을 금지하고 있다. 또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은 15세 미만 아동의 징집 및 적대 행위 이용을 전쟁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아베 신조 정부는 2007년 교과서에서 소년병 동원에 대한 군의 강요 내용을 삭제하며 이를 부정하려 했다.[43]

8. 위령비


  • 오키나와 사범학교 남자부 건아의 탑
  • 현립 제1중학교 제1중 건아의 탑
  • 현립 제2중학교 제2중 건아의 탑
  • 현립 제3중학교 제3중 건아의 탑, 제3중 학도의 비
  • 시립 나하 상공학교 화혼의 탑
  • 현립 공업학교 오키나와 공업 건아의 탑
  • 현립 수산학교 상양비
  • 오키나와현립 농림학교 농림 건아의 탑
  • 사립 개남 중학교 개남 건아의 탑
  • 소년 호향대의 탑, 제2호향대의 비 - 학도 이외의 소년병을 중심으로 한 부대

참조

[1] 웹사이트 戦時記録 上巻 第一章 太平洋戦争 全島要塞化と根こそぎ動員 http://www.yomitan.j[...]
[2] 웹사이트 "3人の捕虜"読谷バーチャル平和資料館 http://heiwa.yomitan[...]
[3] 서적 沖縄戦における軍官民関係
[4] 문서 兵役に関する研究 1944-11-10
[5] 서적 沖縄戦―国土が戦場になったとき 青木書店 1987
[6] 웹사이트 「非国民」が人々の生命を救った -『ジャイロスGYROS』第5号2004年8月沖縄戦の真実 - 林博史 http://www32.ocn.ne.[...]
[7] 문서 沖縄作戦における沖縄島民の行動に関する史実資料
[8] 회의록 海外同胞引揚及び遺家族援護に関する調査特別委員会 衆議院 1955-07-15
[9] 뉴스 沖縄戦で動員「鉄血勤皇隊」最後の生存者 石川榮喜さん死去 https://www3.nhk.or.[...] NHK NEWS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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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米軍1次資料に見る沖縄戦 http://www.geocities[...] 琉球新報 2007-06
[12] 서적 鉄血勤皇師範隊/少年たちの沖縄戦
[13] 서적 沖縄のこころ-沖縄戦と私 岩波新書
[14] 서적 具志川市誌
[15] 웹사이트 沖縄戦と天皇制 http://www32.ocn.ne.[...] 立風書房
[16] 서적 戦時記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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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戦陣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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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牛島司令官、千早隊に「遊撃戦」命令 米国で「訓令」発見 http://ryukyushimpo.[...] 琉球新報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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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문서 沖縄作戦における沖縄島民の行動に関する史実資料
[30] 회의록 海外同胞引揚及び遺家族援護に関する調査特別委員会 衆議院 195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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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米軍1次資料に見る沖縄戦 http://www.geocities[...] 琉球新報 2007-06
[33] 서적 鉄血勤皇師範隊/少年たちの沖縄戦
[34] 서적 沖縄のこころ-沖縄戦と私 岩波新書
[35] 서적 具志川市誌
[36] 웹인용 参考文献 藤原彰編著『沖縄戦と天皇制』-立風書房 http://www32.ocn.ne.[...] 2020-11-08
[37] 서적 読谷村史 「戦時記録」上巻 第二章 読谷山村民の戦争体験
[38] 서적 八原博通著『沖縄決戦』
[39] 웹사이트 大江健三郎・岩波書店沖縄戦裁判大阪地裁判決 http://www16.atwiki.[...]
[40] 서적 『沖縄県の歴史』 山川出版 2004
[41] 뉴스 牛島司令官、千早隊に「遊撃戦」命令 米国で「訓令」発見 http://ryukyushimpo.[...] 2008-06-15
[42] 웹사이트 青年学校令 https://web.archive.[...]
[43] 뉴스 오키나와 전투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0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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