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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지마 미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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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1887년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군인이었으며, 중일 전쟁에 참전하여 제36보병여단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1사단장 등을 역임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사령관으로 미군에 맞서 싸웠다. 오키나와 현민 소개에 힘썼지만, 미군의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1945년 6월 22일, 참모장 조 이사무와 함께 할복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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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지마 미쓰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우시지마 미쓰루
우시지마 미쓰루
출생일1887년 7월 31일
출생지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사망일1945년 6월 22일
사망지오키나와현 이토만시
사인할복 자살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8년 – 1945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주요 지휘제11사단
제32군
참전 전투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화산-류큐 열도 전역
오키나와 전투
훈장서보장
금치훈장 (2등)
가족
묘소아오야마 영원(1イ1-25)

2. 생애

1887년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난 우시지마 미쓰루는 사쓰마 번 출신 육군 중위였던 아버지와 같은 사쓰마 번 무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2] 메이지 유신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고시마로 돌아왔지만, 사쓰마 번 중류 계급 사족이었던 우시지마 가문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시지마는 1894년 야마시타 심상 소학교에 입학하여 월반하였고, 1898년에는 가고시마시 심상 고등 소학교에 조기 입학했다.[2] 1900년 제1 가고시마 중학교를 최연소로 합격하고, 1901년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 학교에 입교했다.[2]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하여 언지사록을 애독했으며, 훗날 사이고에 비유되기도 했다.

1904년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 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2] 1908년 육군사관학교를 20기생으로 졸업하고, 은사의 은시계를 수여받았다.[9] 보병 소위로 진급하여 근위 보병 제4연대에 배속되었다.[2]

1911년 보병 중위로 진급, 1912년 육군대학교에 입교하여 1916년 졸업했다.[10]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부임했고, 보병 대위로 진급, 공5급 금계훈장을 받았다.

1919년 근위 보병 제4연대 중대장을 거쳐, 1920년 육군 보병 학교 교관이 되었고, 같은 해 결혼했다. 1924년 보병 소령으로 진급, 보병 제43연대 대대장을 맡았고, 1925년 모교인 제1 가고시마 중학교에 배속 장교로 부임했다.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며 군사 교육을 하였고, 3년간 근무하며 교육자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928년 보병 제23연대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8월 보병 중좌로 진급했다. 1930년에는 시모노세키 요새 참모, 1932년에는 육군 토야마 학교 교육부장이 되어 보병 대좌로 진급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육군성에서 행정직을 역임하며, 아라키 사다오 등 세 명의 육군 대신을 보좌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중국 출장 중이었으나, 귀국 후 반란에 연루된 보병 제1연대장에 임명되어 부대를 수습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연대 분위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1937년 소장으로 진급, 제6사단 보병 제36여단장에 임명되어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 보병 제36여단은 산해관에서 장제스국민혁명군을 격파하고, 난징 공략전과 우한 작전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우시지마는 '체스트 부대'라 불린 보병 제36여단을 이끌며 용맹을 떨쳤고, 중국군에게는 "귀신 장군"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7년 7월 31일 사쓰마 번 출신 육군 중위였던 아버지와, 같은 사쓰마 번 무가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2] 형제 중에는 이바라키현 지사를 지낸 우시지마 쇼조가 있다. 우시지마 가문은 메이지 유신으로 치록 처분을 당해 도쿄로 상경하여 군에 복무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곧 사망하여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우시지마 가문은 사쓰마 번에서 중류 계급의 사족이었고, 가고시마에 광대한 토지와 저택 등의 자산이 있었으며, 어머니 또한 사쓰마 번사 마쓰모토 가문의 차녀였기에 마쓰모토 가문의 보호도 받아서, 우시지마 가문은 생활에 어려움 없이 아이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시지마 형제는 모두 우수했지만, 그중에서도 미쓰루는 1894년에 야마시타 심상 소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에는 3학년으로 월반하여 10세에 졸업했고, 1898년에는 다른 학생들보다 1년 먼저 가고시마시 심상 고등 소학교에 입학했다.[2] 1900년에는 제1 가고시마 중학교를 응시하여 최연소로 10배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다.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지망하여, 1901년에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 학교에 입교했다.[2] 우시지마는 존경하는 가고시마 출신 위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애독했던 언지사록을 애독했는데, 훗날 우시지마는 사이고에 자주 비유되었다. 유년 학교는 전원 기숙사 제도로 상하 관계가 엄격했지만, 우시지마는 과묵한 우등생이었고, 후배였던 간다 마사타네는 "우시지마 선배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친근한 선배였다"라고 회고했다.

1904년에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 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의 육군 중앙 유년 학교에 진학했으며, 1906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2] 사관학교에서도 학구열은 변함없었고, 특히 지휘도를 들고 부대를 지휘하거나 호령하는 방식 등에 뛰어났고, 전술학과 교련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이었다. 신체 활용도 뛰어나 기계 체조는 최우수, 검도는 시현류를 구사하여, 그 격렬한 기합 소리가 눈에 띄었다.[2] 식욕도 왕성하여, 사관학교 시절 별명은 '소'였다고 한다. 1908년에 사관학교를 제20기생으로 졸업했는데, 우시지마와 시모무라 사다무, 요시모토 사다이치는 성적이 우수하여 20기의 삼우(三羽烏)라고 불렸다. 보병과 졸업 석차 2위, 은사의 은시계를 수여받았다.[9] 전체 병과 중 1위는 쿠사바 다쓰미 (보병과), 2위는 하시모토 군 (포병과), 3위는 우시지마 미쓰루 (보병과) 순이었다.

같은 해 12월, 보병 소위로 진급하여, 근위 보병 제4연대 부속이 되었다.[2] 덩치가 크고 용모가 단정했던 우시지마는 연대 기수로 발탁되었다.

1911년 12월, 보병 중위로 진급했고, 1912년육군대학교에 입교하여 1916년에 졸업(28기, 56명)했다.[10] 육군대학교 28기 동기로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다나카 세이이치 등이 있다.[10] 우시지마의 졸업 석차는 51위였다.[10]

1918년 8월, 시베리아 출병이 시작되어, 시베리아 파견군 야전 교통부 참모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부임했다. 우시지마는 광대한 시베리아에 부대 배치 계획을 세우는 임무를 맡아, 치밀한 수송 계획으로 원활하게 부대 배치와 물자 지급을 했다. 같은 해 12월 보병 대위로 진급했고, 시베리아에서 귀국 후 공적으로 공5급 금계훈장을 수여받았다.

1919년 4월, 근위 보병 제4연대의 중대장을 맡은 후, 1920년 8월부터 육군 보병 학교 교관이 되었지만, 같은 해에 동향의 기미코와 결혼했다. 1924년, 보병 소령으로 진급하자 보병 제43연대 대대장을 맡았고, 1925년 4월에는, 보병 제45연대 부속 배속 장교로서, 모교인 제1 가고시마 중학교에 배속되었다. 배속 장교는 가토 다카오키 내각의 우가키 가즈시게육군 대신이 실시한 것으로, 전국 대학, 중학교, 사범 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군사 교육을 하기 위해 예비역 장교 대신 우시지마와 같은 젊은 현역 장교를 배속하는 제도였다. 중학교에 배속된 장교 중에서 육군대학교 졸업자는 우시지마뿐이었고, 모교로의 개선이라는 점도 있어서,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제1 가고시마 중학교 이시다 교장은 교육계에서 저명한 인물이었고, 우시지마는 이시다로부터 교육자로서 영향을 받았다. 우시지마는 엘리트 군인이면서도 젠체하지 않고 학생들과 접촉했고, 체육 수업에서는 스스로 특기인 철봉에서 대차륜이나 역차륜을 학생들 앞에서 보여주며 모범을 보이거나, 씨름을 할 때는 군복을 벗고 알몸이 되어 학생들과 씨름을 했다. 또한 좌학에서도 난해한 군대 부호를 알기 쉽게, 정성스럽게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 함께 갑돌천으로 나가, 특기인 물고기 낚시를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학생들도 처음에는 교련 중의 군복 차림의 험악한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터놓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날이 갈수록 완전히 친해졌다. 우시지마는 3년간 모교에 근무했지만, 이때의 교육자로서의 경험이 훗날 우시지마의 군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당시, 학교 교련 시찰관을 하고 있던 나가타 데쓰잔 대좌가 1중을 시찰하러 왔을 때, 학생들을 교육하는 우시지마의 모습을 보고 "학교 교련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장래 일본 육군의 주춧돌이 될 것이 틀림없다"라고 칭찬했다.

2. 2. 초기 군 경력

우시지마 미쓰루는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생으로 수석 졸업하였으며, 지겐류 일본 검술의 달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6년에는 육군 참모 대학 제28기를 졸업했는데, 동기생으로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다나카 시즈이치가 있었다.

1918년 8월, 우시지마는 러시아 내전볼셰비키군에 대항하는 시베리아 출병 기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 원정군의 참모로 배정되어 병력 파견을 조정하고 물자 수송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해 말 대위로 진급했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금계훈장 5급을 수여받았다.

1919년 4월, 우시지마는 제4 근위 연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1920년 8월 육군 보병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1924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제43 보병대대를 지휘했다. 1925년 4월, 우가키 가즈나리 육군대신의 실험의 일환으로 모교인 제1 가고시마 중학교에 배정되어 전국 대학교, 중학교 및 사범학교 학생들에게 기초 군사 교육을 제공했으며, 이 직책을 3년 동안 맡았다.

1928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제23 보병 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1930년에는 시모노세키 요새 참모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육군 정예 부대인 도야마 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 무렵, 젊은 장교들은 기타 잇키의 극우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정치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지만, 우시지마는 교관과 학생들에게 군 복무에 집중하도록 강력히 지시하고 기타 잇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우시지마는 육군성 내에서 행정직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육군 내 정치적 파벌주의가 극에 달했고, 우시지마는 어떤 파벌과도 연관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그는 출장으로 중국에 가 있었고,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반란에 연루되어 징계를 받은 제1 보병 연대[2]를 지휘하도록 선발되었으며, 이 부대는 봉기를 이유로 처벌을 받아 만주국 북부로 파견되었다.

우시지마는 병사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예를 들어, 병사들에게 "손발을 보여 봐라, 불결하게 하면 동상에 걸린다"고 말하고, 안색이 좋지 않은 병사를 보면 "감기에 걸린 거 아니냐? 무리하지 마라"며 군의에게 진찰을 받게 했다. 이러한 그의 배려에 병사들은 감화되었고, 우시지마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도가 높아졌다.

2. 3. 중일 전쟁 참전

1937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6사단 보병 제36여단장에 임명되었다. 제36여단은 도성의 보병 제23연대와 가고시마의 보병 제45연대로 편성되었다.[11]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우시지마가 이끄는 보병 제36여단도 출진하게 되었다. 보병 제36여단은 8월 초에 가고시마를 출발하여, 해로 조선반도로 건너간 후, 철도로 화북에 있는 산해관에 도착했다. 베이핑 근교에 전개하는 장제스 정예의 중국 국민당군 제14군 3개 사단(약 12,000명)이 팔달령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던 제5사단의 측면을 위협하게 되자, 제6사단장 타니 히사오 중장은 우시지마에게 제36여단의 2개 연대로 중국군 3개 사단을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보병 제23연대와 제45연대는 병력에서 훨씬 우세한 중국군이 굳게 진지화하고 있던 샤마링과 첸쥔타이를 공략해야 했다. 8월 30일에 샤마링을 지키는 중국군을 정찰한 결과, 중독 협력으로 중국을 지원하고 있던 독일군 군사 고문단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9월 5일, 우시지마는 육군 비행 전대에 항공 지원을 요청했고, 93식 중폭격기와 93식 쌍발 경폭격기가 중국군 진지를 폭격한 후, 2개 연대는 격렬하게 공격했다. 병력이 우세하고 화포도 충실했던 중국군의 반격은 격렬하여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일본군은 착실하게 중국군 진지를 공략해 나갔다. 9월 8일에는 반격해온 3,000명의 중국군을 괴멸시키고, 9월 13일에는 해발 1,100m의 최중요 거점 첸쥔타이를 공략하여 중국군 패잔병들을 퇴각시켰다. 우시지마는 초전을 화려한 승리로 장식했지만, 보병 제36여단에서만 장교 7명, 준사관 이하 170명이 전사하고, 장교 13명, 준사관 이하 358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우시지마가 이끄는 보병 제36여단은 9월 중순에 바오딩, 10월 8일에 정정, 10월 14일에는 석가장 남쪽 교외의 네이디까지 진격했다. 우시지마 여단의 맹렬한 돌진에 아군과 적군 모두 혀를 내두르며 놀랐고, 중국군에서는 "귀신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두려워했다. 여단 사령부는 전선에서 멀리 후방에 있었지만, 우시지마는 막료들을 데리고 자주 최전선에 나갔다. 적탄이 날아오는 곳에서 여단장 자신이 정찰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부관이 위험하다고 하면 "너만 보면, 탄환이 날아오지 않는다"라고 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최전선의 병사들과 식사를 함께하기도 하고, 병사들과 도시락 반찬을 바꾸는 등 격의 없이 접했다.

11월, 상하이 방면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제6사단이 투입되었다. 보병 제36여단은 상하이 상륙 후, 곤산에서 소주 노선을 따라 진격하여 12월 11일에 시작된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 우시지마 여단은 난징성에서 퇴각하는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20,000명이나 되는 대량의 포로와 엄청난 무기, 탄약을 포획하여 용명을 떨쳤다. 난징 전투 후에는 난징 교외의 우후 지구에 주둔했고, 1938년 7월에 시작된 우한 작전에도 핵심 부대로 참가하여 8월에 요충지 황매를 공략했다. 중국군은 우시지마 등의 급진격에 대항하기 위해 양쯔강 제방을 붕괴시켜 홍수 작전을 감행하여 발을 묶으려 했지만, 우시지마 여단은 홍수를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하여 9월에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광제 요새를 공략했다. 그 기세 그대로 10월에 한커우 시내로 진격하자, 중국군은 우한 삼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제11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가 우시지마에게 감장을 수여했다. 우시지마의 보병 제36여단은, 우시지마가 세키가하라 전투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시마즈 군이 서군 패전 후 적진을 돌파했을 때의 구호로 알려진 "체스트! 가자!"(저쪽으로 가라는 의미)로 장병들을 격려했기 때문에 '체스트 부대'라고 불렸으며, 장병들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난징 공략 직전 11일 아침, 갑자기 한 마리의 사슴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본 우시지마는 곁에 있던 여단 부관 에구치 중좌에게 명하여, 이 사슴을 일격에 쓰러뜨리게 했다. 그 후, 10분 동안 묵상에 잠긴 우시지마는 여단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2. 4. 태평양 전쟁 이전

우시지마 미쓰루는 1887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서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였던 아버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중 한 명은 이바라키현 지사를 역임했다. 가족은 도쿄로 이사했지만, 우시지마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가족을 다시 가고시마로 이주했다. 그는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8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생으로 수석 졸업했으며, ''지겐류'' 일본 검술의 숙련자로 명성을 얻었다. 1916년 육군 참모 대학 제28기를 졸업했으며, 동기생으로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다나카 시즈이치가 있었다.[2]

1918년 8월, 우시지마는 러시아 내전볼셰비키군에 대항하는 시베리아 출병 기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 원정군의 참모로 배정되어 병력 파견을 조정하고 물자 수송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해 말 대위로 진급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금계훈장 5급을 수여받았다.[2]

1919년 4월, 우시지마는 제4 근위 연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1920년 8월 육군 보병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1924년 소령으로 진급하면서, 그는 제43 보병대대를 지휘했다. 1925년 4월, 그는 우가키 가즈나리 육군대신의 실험의 일환으로 모교인 제1 가고시마 중학교에 배정되어 전국 대학교, 중학교 및 사범학교 학생들에게 기초 군사 교육을 제공했다. 우시지마는 이 직책을 3년 동안 맡았다.[2]

1928년 보병 제23연대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8월 보병 중좌로 진급했다. 1930년에는 시모노세키 요새 참모, 1932년에는 육군 토야마 학교 교육부장이 되어 보병 대좌로 진급했다. 육군 토야마 학교에서도 제1가고시마 중학교 근무 시와 마찬가지로, 학생들과 함께 검술과 체육으로 땀을 흘렸다. 45세를 넘긴 우시지마였지만, 철봉이나 멀리뛰기에서 우시지마를 따라갈 학생은 없었고, 팔씨름도 학교에서 가장 강했다. 당시에는 기타 잇키의 『일본 개조법안 대강』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장교들이 정치를 말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시지마는 교관과 학생들에게 군무에 집중하도록 강력하게 지도했고, 기타 등의 정치 주장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

1933년, 우시지마는 야마오카 시게히로육군성 군무국장의 추천으로 육군성 고급 부관으로 취임했다. 아라키 사다오, 하야시 센주로, 가와시마 요시유키와 세 대의 육군 대신을 보좌했다. 우시지마가 육군 대신을 보좌하고 있을 때는, 육군 내에서의 파벌 싸움이 가장 격렬한 시기였지만, 우시지마가 보좌한 3명의 육상들은 모두 그 파벌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고, 무인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시지마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육군 대신 부관을 맡을 수 있었다고도 말해졌다. 아라키에 따르면 "일을 처리하는 데 대범하고, 소위 잔무를 처리하지 않지만, 모든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업무 스타일로, 아라키가 재임 중에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도, 우시지마가 아라키의 병중 병후의 처리를 확실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요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역대 고급 부관 중에서도 가장 야스쿠니 신사의 제전에 힘썼다는 신사 측의 증언도 있으며, 막말 동란기부터 제1차 상하이 사변까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전몰자의 일람표 『야스쿠니 신사 충혼사』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시지마의 힘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2]

1936년 2·26 사건 당시, 우시지마는 중국 대륙에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이듬해 3월, 우시지마는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인 구리하라 야스히데 보병 중위 등이 소속된 보병 제1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완전히 혼란해진 부대를 정리할 적임자는 우시지마로 여겨져 발탁되었다. 5월 8일부터 보병 제1연대는 2·26 사건 이전부터 내정되었던 북부 만주에 파견되어 치안 유지 임무를 맡게 되었다.[2]

군 관계자나 병사들은 우시지마의 전임인 고토 메구미 연대장이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고, 징벌의 파견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시지마는 황폐해진 병사들을 격려하고 위문하기 위해 8곳의 분둔지를 대대장들과 트럭으로 순회하며, 병사들에게 "손발을 보여 봐라, 불결하게 하면 동상에 걸린다"고 말을 걸고, 안색이 좋지 않은 병사를 보면 "감기에 걸린 거 아니냐? 무리하지 마라"며 군의에게 진찰을 받게 하는 등 병사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병사들은 징벌이라고 생각했고, 산적과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일도 있어 사기가 저하되었지만, 우시지마 연대장의 배려에 감화되어 병사들의 사기가 올랐고, 우시지마에 대한 경앙과 신뢰도 높아졌다. 그 후, 신병 다수도 배속되었지만, 우시지마의 영향을 받은 고참병들은 신병에게 배려를 하게 되었고, 소총 손질을 돕고, 문맹 신병 대신 가족에게 편지를 써주고, 관급품인 램프를 파손한 신병에게는 고참병이 파손한 것으로 하고 새 제품을 지급했다. 이처럼 우시지마의 연대 운영 방침이 말단 병사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연대의 분위기는 개선되어 갔다. 이는, 마찬가지로 반란 부대의 중추가 된 보병 제3연대가, 신임 연대장의 방침으로 "2·26 사건의 오명을 씻어라"라며 반란에 참가한 고참병 중심으로 철저하게 훈련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2]

3. 오키나와 전투

중일 전쟁 발발 직후, 우시지마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36보병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제6사단 타니 히사오 장군의 명령에 따라 장제스의 정예 중국군을 공격하여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1937년 8월 30일부터 9월 13일까지 중국군 전선을 돌파했고, 10월 14일경 스자좡시 외곽에 도달했다. 그는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3]

이후 제36여단은 상하이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난징으로 도망치는 중국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1938년 7월부터는 우한 전투에 참전했다.[3]

1939년 3월 일본으로 소환된 우시지마는 중장으로 진급, 제11사단 지휘를 맡아 만주국에서 소련 국경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10월 육군 부사관 학교장으로 일본에 돌아왔다.[3]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에 대해 우시지마는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그는 이 전쟁이 중국 전선을 연장시키고 소련에 대한 일본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1942년 4월, 그는 반전 사상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으나, 도이하라 겐지야마다 오토조의 추천으로 육군 사관학교장으로 복귀했다. 우시지마는 태평양 전쟁에 대한 우려를 공유하며, 학생들에게 미국의 국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3]

1944년 8월, 우시지마는 제3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류큐 열도 방어 임무를 맡았다.[3] 그는 오키나와현 민간인들을 일본 본토나 타이완으로 대피시키는 계획을 추진했다. 쓰시마 마루 격침 사건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는 오키나와에서 8만 명, 야에야마 제도에서 3만 명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3]

그러나 식량 부족, 말라리아, 방어 시설 건설을 위한 민간인 징집 등으로 인해 섬 북부로의 민간인 대피는 원활하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1945년 6월 20일 대장으로 진급했다.[3]

우시지마는 참모장 야하라 히로미치 대령의 심층 방어 전략을 따랐으나, 부사령관 초 이사무 장군의 공격적인 정책 추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초가 주도한 공격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미군이 슈리 선을 돌파한 후 우시지마는 병력을 섬 최남단으로 철수시켰다.[3]

고립된 방어 위치가 파편화되면서 32군의 지휘 통제는 악화되었다. 많은 일본군이 항복했고, 대부분 오키나와 출신이었다.[3] 우시지마는 1945년 6월 11일, 미군 장군 시몬 볼리바르 버크너 주니어의 항복 권유를 거부했다.[3]

3. 1. 배경

1944년 8월, 우시지마 미쓰루는 제3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오키나와에 부임했다.[12] 전임 와타나베 마사오 중장이 오키나와 현민들에게 지나친 위기감을 조성한 것과 달리, 우시지마는 온화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현민들에게 안도감과 신뢰감을 주었다.

오키나와 현민을 섬 밖으로 소개시키려는 계획은 와타나베 사령관 시절부터 진행되었으나, 주민들은 증원군을 보고 공포심이 옅어져 소개가 더디게 진행되었다. 군과 오키나와 현의 노력으로 8월에는 소개가 궤도에 오르는 듯했으나, 8월 22일 소개 학도를 태운 쓰시마마루가 격침되면서 큰 차질을 빚었다. 우시지마는 이 소식에 묵념하며 슬퍼했지만, 소개 작전은 계속되어 1945년 3월까지 오키나와 본섬에서 약 80,000명,[12] 야에야마 열도에서 약 30,000명의 주민을 소개시켰다.

1944년 12월, 군 중앙에서 '황토 경비 요령'이 하달되었고,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이를 구체화한 "남서 제도 경비 요령"을 작성, 우시지마는 이를 승인했다. 이 요령에 따라 17세~45세 남성은 방위 소집되었고, 중학생 및 오키나와 사범학교와 고등여학교 학생들도 통신병이나 간호부로 징집되어, 훗날 '철혈근황대'와 '히메유리 학도대'의 비극을 낳았다.

1945년 1월, 제32군 참모장 나가 유키 소장은 시마다 아키라 신임 오키나와 현 지사에게 반년분 식량 확보를 지시했다. 시마다는 대만에서 쌀 10만 포대를 확보했으나, 해상 수송이 단절되어 일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식량 비축도 부족했고, 얀바루로의 피난도 더뎌, 전투 개시 전까지 85,000명만이 오키나와 북부에 소개되었다.

우시지마는 현민과 함께 슈리 사령부 동굴호 건설에 참여하며, 현민들의 헌신에 감동하여 급여 지급을 지시하기도 했다.

제32군은 오키나와 본섬에 3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배치하고, 미야코섬에도 1개 사단을 배치하여 전력이 충실했다. 야하라가 중심이 되어 고안한 작전 계획은 연합군 상륙 시 방어전을 펼치며 해안에 묶어두고, 다른 병단이 연합군 상륙 지점에 집결하여 포격 후 총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본영은 항공 작전 준비를 우선하라고 요구하며 제32군을 압박했고, 우시지마는 어쩔 수 없이 비행장 건설에 주력했다.

1944년 10월 타이완 해전 이후, 대본영은 레이테 만 해전을 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키나와의 정예 제9사단을 타이완으로 이동시켰다. 주력을 잃은 제32군은 전략 지구 작전으로 방침을 수정했고, 우시지마는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필승의 신념이 강해졌다"며 야하라의 수정안을 지지했다.

제32군은 오키나와 산호초 지반을 이용해 다수의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주진지 제1선에는 LVT 대책으로 우시지마의 발안으로 고사포가 배치되었다. 1945년 3월, 슈리 고지 지하에 제32군 사령부가 완성되었고, 우시지마는 이곳으로 옮겼다.

1945년 3월 24일,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우시지마는 갑호 전비 이행을 명령했다. 4월 1일, 연합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을 시작하자, 제32군은 진지에 틀어박혀 반격하지 않고 은인자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3. 2. 방어 전략

1944년 8월, 제32군 사령관으로 오키나와에 부임한 우시지마 미쓰루는, 전임 와타나베 마사오 중장과는 달리 주민들에게 안도감과 군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12]

오키나와 현민을 섬 밖으로 소개시키려는 계획은 와타나베 군 사령관 때부터 진행되었으나, 초기에는 주민들의 공포심이 옅어져 소개가 더디게 진행되었다. 아라이 타이조 오키나와현 경찰부장은 제32군에 주민들이 소개에 협력하도록 진정하기도 했다.[12] 8월 22일, 소개 학도를 태운 쓰시마마루가 격침되면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12] 우시지마는 묵념과 합장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3월까지 오키나와 본섬에서 약 80,000명,[12] 야에야마 열도에서 약 30,000명의 주민을 소개시켰다.

12월, 군 중앙에서 '황토 경비 요령'이 시달되었고,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남서 제도 경비 요령"을 작성하여 우시지마의 재가를 받았다.[12]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투 및 작업 능력자는 전투 준비 및 전투에 참가한다.

# 60세 이상 노인, 국민학교 이하 아동 및 보호자는 전투가 예상되지 않는 섬 북반부에 소개시킨다.

# 각 부대는 소개를 지원한다.

# 기타 주민 중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생업에 종사하고, 전투 개시 직전 섬 북반부에 소개시킨다.

# 현 지사는 섬 북반부에 소개민을 위한 시설을 준비한다.

야하라는 사이판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비전투민을 주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소개해야 한다고 진언했고, 우시지마도 이에 동의했다.[12] 그러나 이로 인해 17세~45세 남성이 방위 소집되고, 중학생 및 오키나와 사범학교 학생, 고등여학교 학생들도 군에 징집되어, '철혈근황대'나 '히메유리 학도대'의 비극을 낳게 되었다.[12]

1945년 1월 31일, 시마다 아키라 신 오키나와 현 지사에게 오키나와 현민의 식량 확보를 지시했다.[12] 시마다는 대만 쌀 10만 포대를 확보했으나, 해상 수송이 단절되어 일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다.[12]

얀바루로 불리는 오키나와 북부 산악 지대로의 피난은 더디게 진행되었지만,[12] 오키나와 현의 노력과 군의 지원으로 전투 개시 전까지 85,000명이 오키나와 북부에 소개되었다.[12]

우시지마는 현민과 함께 슈리 사령부 동굴호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고, 현민의 헌신에 감동하여 급여 지급을 지시하기도 했다.[12]

제32군은 첩호 작전에 의한 항공 작전 준비를 우선하라는 대본영의 요구에 따라 비행장 설영에 주력했다.[12]

1944년 10월 타이완 해전 이후, 대본영은 레이테 만 해전을 결전으로 만들기 위해 오키나와의 제9사단을 타이완으로 이동시켰다.[12] 주력을 잃은 제32군은 전략 지구 작전으로 방침을 수정했고, 우시지마는 야하라의 수정안에 "필승의 신념이 강해졌다"라고 말했다.[12]

제32군은 오키나와 산호초 지반을 이용하여 다수의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12] LVT 대책으로 우시지마의 발안으로 고사포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사포의 평사가 적 전차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12] 1945년 3월, 제32군 사령부가 완성되어 우시지마 등은 이곳으로 옮겼다.[12]

1945년 3월 24일,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우시지마는 갑호 전비 이행을 명령했다.[12] 4월 1일, 연합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을 시작하자, 제32군은 진지에 틀어박혀 은인자중했다.[12] 연합군은 큰 저항 없이 상륙했지만, 비행장 파괴가 불충분하여 후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12]

연합군은 제32군의 견고한 진지에 막혀 큰 손실을 입었다.[12] 가수 고지에서는 일본군의 대전차 진지에 연합군 전차가 격파당하는 등 격전이 벌어졌다.[12] 그러나 대본영, 제10방면군, 해군은 "소극적"이라며 비판하고 비행장 탈환을 독촉했다.[12] 쇼와 천황도 공세를 질문했고,[12] 연합함대는 국화 작전을 발동하여 야마토를 해상 특공시키겠다고 통지해 왔다.[12]

4월 29일, 참모장 나가 참모는 총공세를 제안했고, 야하라를 제외한 참모들이 동의하여 5월 4일 총공격이 결정되었다.[12] 우시지마는 야하라에게 "32군 사령부 전체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라고 질책했다.[12]

5월 4일, 일본군의 총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제24사단 주력이 괴멸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12] 5월 5일, 우시지마는 야하라에게 작전 지휘를 맡기겠다고 전했다.[12]

3. 3. 주민 소개와 민간인 희생

1944년 8월, 제32군 사령관으로 오키나와에 부임한 우시지마 미쓰루는 현민들에게 안도감과 군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12] 전임 사령관 때부터 진행된 오키나와 현민 소개 계획은 군과 오키나와 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디게 진행되었다. 쓰시마마루 격침 사건으로 많은 학도들이 희생되었지만,[12] 우시지마는 묵념과 합장을 하며 슬픔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3월까지 오키나와 본섬에서 약 80,000명,[12] 야에야마 열도에서 약 30,000명의 주민을 소개시켰다.

12월, 군 중앙에서 '황토 경비 요령'이 하달되었고,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남서 제도 경비 요령"을 작성하여 우시지마의 재가를 받았다. 이 요령은 전투 능력자를 전투에 참가시키고, 노약자와 아동은 전투가 예상되지 않는 섬 북반부로 소개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다. 야하라는 사이판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시지마에게 비전투민 보호를 강조했고, 우시지마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17~45세 남성이 방위 소집되고, 중학생과 여학생들이 군에 징집되어 '철혈근황대'나 '히메유리 학도대'와 같은 비극이 발생했다.

1945년 1월 31일, 시마다 아키라 신임 오키나와 현 지사에게 제32군 참모장 나가 유키 소장은 오키나와 현민의 반년분 식량 확보를 지시했다. 시마다는 대만 쌀 10만 포대를 확보했지만, 해상 수송 단절로 일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식량 비축 부족과 얀바루 지역 기피로 인해 주민 소개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전투 개시 전까지 85,000명만이 오키나와 북부에 소개되었다.

노약 부녀자 외 현민들은 진지 구축 등 군 작업에 동원되었고, 우시지마도 직접 현민들과 함께 슈리 사령부 동굴호 건설에 참여하며 급여 지급을 지시했다.

5월 27일, 제32군 사령부가 슈리에서 남부 마부니로 이동하면서, 오키나와 현민들도 함께 남부로 피난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우시지마의 남부 철수 결정은 현민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제32군은 철수 결정 후 7일이 지나서야 현 지사에게 주민들을 치넨 반도로 피난시키라고 지시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우시지마는 남부 철수 시, 독립 혼성 제44여단의 식량과 물자를 피난민에게 개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6월 7일 경, 우시지마는 시마다 아키라 지사 등에게 "당신들은 문관이기 때문에 여기서 죽을 일은 없다"라고 말했지만, 시마다 등을 포함한 오키나와 현민 희생자의 60%가 남부 철수 후에 집중되었다.[13]

3. 4. 전투 경과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우시지마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미야코노조시(宮崎)에 주둔한 제23보병 연대와 가고시마시(鹿児島)에 주둔한 제45보병 연대로 구성된 제36보병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36여단은 1937년 8월 초 가고시마를 출발하여 중국 북부의 산해관에 배치되었다.[3]

제6사단의 타니 히사오 장군의 명령을 받은 우시지마는 장제스의 정예 중국군 제14군 3개 사단을 공격하여 격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부대는 바다링 인근 일본군 진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부터 9월 13일까지 일련의 전투를 벌여 중국군 전선을 돌파했고, 비록 사상자는 많았지만 10월 14일경에는 스자좡시 외곽에 도달했다. 우시지마는 개인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3]

이후 제36여단은 상하이에서 교착 상태를 타개하는 데 기여했으며, 난징으로 도망치는 다수의 중국군 병사들과 그들의 무기를 노획했다. 12월에 여단은 우후시를 점령하여 겨울을 보냈다. 1938년 7월부터 여단은 우한 전투에 참전했다.[3]

1939년 3월, 우시지마는 일본으로 소환되어 8월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12월에는 제11사단의 지휘를 맡아, 만주국 후린시에서 소련 국경 경비 임무를 맡았다. 1941년 10월, 육군 부사관 학교장으로 일본으로 돌아왔다.[3]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은 우시지마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그는 미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과의 전쟁이 중국에서의 전쟁을 연장시키고 일본을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하는 소련에 대해 약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1942년 4월, 정부 정책에 반대되는 사상을 학생과 부하들에게 주입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도이하라 겐지야마다 오토조의 추천으로 육군 사관학교장으로 복귀했는데, 이들은 태평양 전쟁에 대한 우려를 함께했다. 우시지마는 싱가포르 함락 이후 육군 사관학교 학생들이 오만해지고 "승리에 도취"되었다고 생각했으며, 학생들에게 미국의 풍부한 천연 자원과 산업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3]

우시지마의 경고는 적중했고, 교육자로 남고 싶다는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새로 창설된 12만 명 규모의 제3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미국 침공에 대비하여 류큐 열도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3]

전임자인 와타나베 마사오는 오키나와현 민간인들을 일본 본토 또는 타이완으로 대피시키는 계획을 시작했다. 우시지마 부임 후 다수의 증원군이 투입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잘못된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고, 1,600명 이상의 민간인(대부분 어린이)이 미국 잠수함에 의해 침몰된 대피선에서 사망한 쓰시마 마루 사건으로 인해 공황 상태가 발생하면서 대피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는 미국 침공 전에 오키나와에서 8만 명, 야에야마 제도에서 약 3만 명을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3]

그러나 식량 부족, 말라리아, 그리고 참호, 벙커, 나하시 슈리성 지하 지휘 본부를 포함한 방어 시설 건설을 위해 건강한 민간인들을 징집해야 했기 때문에, 섬의 북쪽으로 민간인들을 대피시키려는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6월 20일, 대장으로 진급했다.[3]

우시지마는 참모장 야하라 히로미치 대령이 계획한 대로 심층 방어에 기반한 섬 방어를 이끌었다. 그러나 부사령관 초 이사무 장군의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초는 도쿄 육군 참모본부가 부추긴, 침공하는 미국군에 대한 반자이 돌격과 같은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초가 주도한 공격 작전으로 인해 열세인 미국군 화력에 의해 공격하는 일본군이 거의 몰살당하고, 미국군이 슈리 선을 돌파한 후, 병력을 섬 최남단으로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3]

이 방어선에는 슈리 선의 신중하게 준비된 지하 방어 시설이 부족했고, 고립된 방어 위치가 파편화된 집단으로 변했다. 우시지마와 초는 남해안의 89고지로 후퇴했다. 32군 잔여 부대에 대한 지휘와 통제는 마지막 방어 위치와의 통신이 끊기면서 빠르게 악화되었다. 기록적인 수의 일본군 포로들이 항복했으며, 많은 이들이 오키나와 자원병 또는 징집병이었다.[3]

우시지마는 6월 11일, 미국 장군 시몬 볼리바르 버크너 주니어가 일본군 진지에 투하한 전단지를 통해 항복하라는 호소를 거부했다. [3]

전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우시지마는 부인에게 "나 혼자만 태연하게 교단에 서 있을 수는 없다. 전사할 각오로 헌신하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1944년 8월, 제32군 사령관으로 친임되어 오키나와에 부임하게 되었다.[3]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를 출발할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부인에게 "당신이 있으니 아이 일도 집안일도 걱정 없다, 그럼 다녀오겠소"라고만 말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3]

전임 와타나베 마사오 중장은 다소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오키나와 현민 대상 강연회 등에서 위기감을 지나치게 부추겨 오히려 공포심을 일으켰다. 반면 제32군 항공 담당 참모 진 나오미치 소좌에 따르면 후임인 우시지마는 "항상 유유자적하여 덤벼들지 않고, 꼼꼼하며, 표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라는 풍격을 갖추고 있어, 오키나와 현민에게 안심감과 군에 대한 신뢰감을 크게 증대시켰다.[3]

오키나와 현민을 섬 밖으로 소개시키려는 계획은 와타나베 군 사령관 시절부터 진행되었다. 오키나와에 병사와 군수 물자를 수송해 온 군용 수송선의 귀로에 노인, 학도, 유아, 부녀자 등을 태워 일본 본토나 대만으로 소개시키려 했지만, 오키나와 현민이 속속 도착하는 증원을 보고 공포심이 옅어진 탓도 있어, 군과 오키나와 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소개가 진행되지 않았다. 주민 소개를 주도하던 아라이 타이조・오키나와현 경찰부장은 제32군에 "군대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선전하니, 주민이 움직이지 않아 곤란하다. 주둔 장병은 좋은 말은 삼가고, 소개에 협력해 주시기 바란다"라고 진정했다.[3] 이후 군과 오키나와 현의 노력으로 우시지마 부임 8월에는 일단 소개가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8월 22일 소개 학도를 태운 "쓰시마마루"가 격침되어 학도 다수를 포함한 약 1,400명이 사망했다. 우시지마는 쓰시마마루 격침 소식을 듣고 묵념, 합장했지만, 손이 떨렸다고 한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상륙 직전인 1945년 3월까지 오키나와 본섬에서 총 187척으로 약 80,000명[12], 야에야마 열도에서 약 30,000명의 주민을 소개시켰다. 특히 다이토 제도는 거의 전 도민을 소개시켰다.[3]

12월, 군 중앙에서 '황토 경비 요령'이 시달되었다. 이는 대만과 남서 제도를 최전선으로 위치시키고, 전장이 될 지역 주민을 전력화하고, 식량을 1년분 확보한 후, 전력화할 수 없는 노약 부녀자를 미리 퇴피시킨다는 것이었다. 제32군 고급 참모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더욱 구체화된 "남서 제도 경비 요령"을 작성하고, 우시지마는 이를 재가했다.[3]

# 대략 전투 능력, 혹은 작업 능력이 있는 자는 모두 전투 준비 및 전투에 참가한다.

# 60세 이상 노인, 국민학교 이하 아동, 그리고 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여자는 1945년(쇼와 20년) 3월까지 전투가 예상되지 않는 섬 북반부에 소개시킨다.

# 각 부대는 소속 자동차, 기타 차량, 그리고 소속 선박을 이용하여 최대한 이 소개를 지원한다.

# 기타 주민 중,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전투 준비 작업, 농경 등 생업에 종사하고, 전투 개시 직전 급속히 섬 북반부에 소개시킨다.

# 현 지사는 섬 북반부에 소개민을 위한 식량과 주거 시설을 준비한다.

야하라는 이 요령을 작성하면서 "사이판의 재앙을 엄하게 삼가야 한다, 미국은 문명국이라 설마 비전투민을 학살하지 않을 것이다. 주 전장이 될 섬 남부에 비전투민을 남겨두면, 검전탄우 속을 방황하는 참상이 될 것이다"라고 우시지마에게 진언했지만, 우시지마도 '일억 총 옥쇄'가 호령되는 시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라 의견에 크게 찬동했다.[3]

그러나 이 결과, 17~45세 청장년 남자가 모조리 방위 소집되어 전력화됨과 동시에, 대략 전투 능력, 혹은 작업 능력이 있는 자로서 중학생이나 오키나와 사범학교 학생, 고등여학교 학생들도 통신병이나 간호부로 군에 징집되었는데, 이것이 후일 '철혈근황대'나 '히메유리 학도대'의 비극을 낳게 되었다.[3]

제32군 참모장 나가 유키 소장은 1945년 1월 31일에 부임한 시마다 아키라 신 오키나와 현 지사에게 "남서 제도 경비 요령"에 따라 반년분 오키나와 현민 식량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부임하자마자 시마다는 엄청난 열정으로 식량 확보에 분주히 움직였고,[3] 2월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대만에 날아가 대만 쌀 10만 포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대만과 오키나와 사이 해상 수송이 미국군 잠수함에 의해 단절되어 어렵게 확보한 대만 쌀도 일부밖에 오키나와에 도착하지 못했다.[3]

식량 비축도 적었고, "얀바루"라고 불리는 말라리아 발병 지역인 오키나와 북부 산악 지대로 기꺼이 피난하려는 주민도 적었으며, 오키나와 현의 필사적인 호소와 군용 차량 제공 등 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개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오키나와 현은 가축의 먹이로 풍부했던 고구마를 사람용 식량으로 전용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여 전투 개시 전까지 85,000명을 오키나와 북부에 소개시켰지만, 이는 예정의 1/3에 불과했다.[3]

노약 부녀자 외 현민은 진지 구축 등 군 작업에 종사했지만, 우시지마 스스로도 현민과 함께 슈리 사령부 동굴호 만들기 일을 도왔다. 우시지마는 틈이 있을 때마다 작업 현장을 시찰하고, 중학생과 주민과 함께 참호 파는 것을 도왔다. 현민 헌신에 감동한 우시지마는 군 경리부에 가능한 한 급여를 지급하도록 지시했다.[3]

제32군은 대본영의 남서 제도 중시 방침도 있어, 오키나와 본섬에 정예 제9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과 1개 여단에 다수의 화포, 미야코섬에도 1개 사단이 배치되어 전력이 충실했다. 야하라가 중심이 되어 고안한 작전 계획은 연합군 상륙 예상 지역에 각 병단을 배치하고, 연합군 상륙 시 상륙 정면 병단이 구축한 진지에서 방어전을 펼쳐 연합군을 해안선에 묶어두는 동안, 다른 지역에 배치된 병단이 공습을 피해 야간에 연합군 상륙 지점에 집결하여 충실한 화포로 연합군 교두보에 격렬한 포격을 가해 큰 손해를 입힌 후, 제32군이 총력을 기울여 상륙군을 공격하여 바다로 몰아내겠다는 작전이었다.[3] 참모장 나가(長)를 중심으로 지상전을 중시하기 위해 진지 구축에 힘썼지만, 대본영은 첩호 작전에 의한 항공 작전 준비(비행장 설영)를 우선하라고 제32군에 여러 차례 요구했으며, 제32군에 "항공 작전 준비에 협력하지 않을 경우 증원한 병력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거나 "중앙 방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제32군 참모를 경질하겠다"는 등 협박을 해올 정도였다. 우시지마는 어쩔 수 없이 대본영 방침을 받아들여 우선 비행장 설영에 주력하도록 명령했다.[3]

1944년 10월 타이완 해전으로 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고 오인한 대본영은 연합군이 필리핀에 침공하자 전기가 도래했다고 판단, 레이테 만 해전을 결전으로 만들기 위해 증원을 보내기로 했다. 타이완에서 3개 사단이 레이테로 보내졌지만, 대본영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개 사단을 오키나와에서 차출하여 타이완으로 보내기로 하고, 그 협의를 타이완에서 하겠다고 제32군에 통지했다. 우시지마는 야하라에게 "군에서 1개 병단을 빼낸다면 오키나와 본섬이나 미야코섬 중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필리핀이 결전이라고 한다면, 제32군 주력 전부를 필리핀에 전용해야 한다."라는 등 제32군 의견서를 가지고 타이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대본영 핫토리 타쿠시로 작전과장 앞에서 의견을 말했지만, 결국 11월 11일 대본영으로부터 정예 1개 사단을 타이완으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이 도착했다. 야하라가 반발했지만 우시지마는 명령을 받아들여 17일에 제9사단을 타이완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3]

주력을 잃은 제32군은 야하라의 "기노완 동서 선 이남 시마지리군에 군 주력을 배치하고, 북방·중두부에 상륙하여 남하하는 적에 대해서는 슈리 북방 진지선에서 지구전을 펼치며 적에게 출혈을 강요한다"는, 기존 수제멸 결전 방침 작전에서 전략 지구 작전으로의 작전 수정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우시지마는 야하라의 작전 수정안 설명을 듣고 "제9사단은 차출되어 버렸지만, 이번 작전 계획은 매우 견고하며,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필승의 신념이 강해졌다."라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3]

전략 지구 작전으로 군 방침이 결정되자, 제32군 총력과 오키나와 현민 동원으로 오키나와의 산호초의 단단한 지반을 이용하여 다수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주진지 제1선에는 LVT 대책으로 우시지마 발안으로 고사포가 배치되었다. 지금까지 전훈을 분석하여 고사포 평사(水平射)가 적 전차에 효과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3] 슈리 고지 지하에 구축된 제32군 사령부도 완성되어 1945년 3월 우시지마 등은 이 사령부로 옮겼다. 이 사령부는 최심부 35m, 총 연장 1km이며, 1톤 폭탄 직격에도 견딜 수 있는 구조였다.[3] 우시지마는 지하 진지 전등을 보고 "긴자 밤 가게가 생각난다"라고 농담하며 막료들을 즐겁게 했다.[3]

1945년 3월 24일 연합군 대형 함선이 나타나 함재기에 의한 맹폭격에 더하여 함포 사격도 했다. 우시지마는 연합군에 의한 오키나와 침공이라고 판단, 갑호(甲号) 전비 이행을 명령했다.[3] 많은 노력을 들여 구축된 오키나와 본섬 비행장에는 겨우 15기 작전기밖에 없었지만, 항공 참모 카미(神)는 우시지마에게 전기 특별 공격 출격 명령을 요청했고, 우시지마는 허가했다. 특공기는 중비행장 앞바다 적 함대에 돌입했다.[3] 1945년 4월 1일, 연합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을 시작하자, 일부 진격 지연 목적 부대를 제외하고는 진지에 틀어박혀 일절 반격을 하지 않고 은인자중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그날 안에 4개 사단 50,000명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했고 사상자는 불과 159명이었다.[3] 이는 우시지마가 재가한 기존 방침대로였지만, 적 상륙 시 적에게 사용되지 않도록 비행장을 파괴할 예정이었던 특설 제1연대가 상륙 전 격렬한 함포 사격으로 소식 불명이 되어 비행장 파괴가 불충분한 채 연합군에게 점령되었고, 이는 이후 문제를 야기했다.[3]

연합군은 순조롭게 진격했으나, 작전 수정 이후 제32군이 정성을 다해 구축한 견고한 진지로부터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특히 가수 고지를 둘러싼 격전에서는 교묘하게 구축된 일본군 대전차 진지에 연합군이 하루에 전차 22대를 격파당하는 등 전력을 다해 공격해온 연합군을 여러 번 격퇴했다. 여기까지는 제32군 작전 구상대로 전개되었지만, 항공 작전 우선주의인 대본영이나 32군을 관할하는 제10방면군 및 해군으로부터 "소극적"이라는 작전 방침을 비판받았고, 비행장 탈환을 독촉받았다. 쇼와 천황도 전황을 상주한 우메즈 미지 로 참모총장에게 "오키나와 작전이 불리하게 되면 향후 전황은 매우 우려될 뿐 아니라 육해군에 대한 국민 신뢰도 사라질 것이다. 현지 군은 어째서 공세에 나서지 않는가, 병력이 부족한가, 그렇다면 증원 부대를 역상륙시켜서는 어떤가"라고 질문했다. 특히 해군 연합함대는 미군 기동부대를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 전까지는 탈환해주기를 간절히 요청해왔다. 그 원호를 위해 국화 작전을 발동하여 다량 특공기를 출격시키는 동시에 전함(전함)|야마토]]를 주력으로 하는 제2함대를 오키나와에 해상 특공시키겠다고 통지해 왔기 때문에, 우시지마는 중지해주기를 타전했지만, 결행되어 미군 항공기 공격으로 야마토는 격침되었다.[3] 이러한 공세 독촉은 우시지마 등 제32군에게 큰 압력으로 다가왔다.[3]

4월 29일, 중앙으로부터 독촉에 가장 마음이 흔들린 참모장 나가 참모를 소집하여 전력이 아직 충분히 남아있는 지금 공세를 걸어 운명을 타개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다른 참모들 동의를 구했다. 참모 중 야하라만이 열세인 아군이 공세로 전환하면 5배 이상 손실을 입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무모한 공격이다. 지금까지와 같이 전략적인 지구전을 지속하여 본토 결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반대했지만, 다른 참모들은 나가 의견에 찬성했기 때문에 5월 4일에 제32군 총력을 기울여 총공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3] 야하라는 마지못해 총공격 계획서를 약마루, 나가노 두 참모와 작성했지만, 나가에 대한 반항 의미도 담아, 원래 책임자인 야하라가 해야 할 우시지마에 대한 작전 계획서 제출을 나가노에게 대리로 시켰다.[3] 평소 참모들에게 관여하지 않는 우시지마였지만, 이때만큼은 야하라를 불러 "귀관은 공세에 대한 논의가 나올 때마다 반대하고, 군 사령관이 공세를 결의한 후에도 왠지 침울한 표정으로 32군 사령부 전체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미 32군은 운명을 걸고 공세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고급 참모인 자가 그 기세를 꺾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질책했다.[3]

5월 4일부터 일본군 총공격은 야하라 예상대로 미군 압도적인 화력 앞에 대실패로 끝나, 온존해두었던 제24사단 주력이 괴멸 상태에 빠지는 등 전사자 5,000명 이상 대손실을 입었다. 또한 군 포병도 1/3까지 전력이 격감하여 향후 작전 계획을 크게 뒤틀었다. 연합군 사상자는 1,066명이며, 손실 비율도 야하라 예상대로였다.[3] 공세 이틀째인 5월 5일에 우시지마는 야하라를 불러 "야하라 대좌, 귀관 예언대로 공격은 실패했다. 귀관 판단은 옳다." "함부로 옥쇄하는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 내가 명령을 받아 도쿄를 출발할 때 육군 대신, 참모총장은 가볍게 옥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귀관에게 맡기겠다. 나의 방침에 따라 마음껏 자유롭게 해달라"라고 앞으로는 야하라에게 작전 지휘를 맡기겠다고 전했다. 야하라는 이제 와서 무엇을 이라는 분노의 마음도 솟아났지만, 우시지마의 순수한 인격에 감동하여 마음을 새롭게 했다.[3]

3. 5. 최후

6월 중순까지 제32군은 사실상 구니시 능선 아래와 언덕 89 내 지휘 본부, 두 개의 요새만 남게 되었다.[14] 전투의 종말이 다가옴을 깨달은 우시지마는 황궁에 보낸 작별 메시지에서 "내 죽음으로 천황 폐하께 사죄할" 마지막 결전을 지휘하겠다고 다짐했다.

6월 18일, 우시지마는 병사들에게 적진을 소규모 그룹으로 통과하여 오키나와 북부의 게릴라 그룹에 합류하라는 지시와 함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14]

> "나의 사랑하는 병사들이여;

>

> 거의 3개월 동안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당신의 용기와 충성은 미래를 밝게 비춥니다.

>

> 이제 전장은 혼란에 빠져 모든 통신이 중단되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요새의 모든 병사는 상급 장교의 명령에 따라 조국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명령입니다.

>

> 작별"[14]

초 장군은 붉은 잉크로 이 명령에 "포로로 잡히는 수치를 겪지 마십시오. 당신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라는 글을 덧붙였다.[14]

우시지마와 초는 세푸쿠(할복)를 하기로 결정했고, 출발 전날 밤 우시지마의 요리사가 준비한 푸짐한 식사를 갖춘 연회가 지휘소 동굴에서 열렸다.[14]

6월 22일 이른 아침, 지휘소 참모들은 정복 차림을 한 우시지마와 흰 기모노를 입은 초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줄을 섰다. 초는 먼저 가겠다고 자원했지만, 우시지마는 자신이 먼저 가겠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바깥쪽 턱으로 이동했고, 조수로부터 칼을 받은 우시지마는 소리를 지르며 복부에 칼을 꽂았고, 사카구치 대위가 그의 머리를 베었다. 초는 우시지마를 따라갔고, 두 사람의 시신은 3명의 시종에 의해 얕은 무덤에 묻혔다.[14]

야하라는 우시지마에게 자살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우시지마는 "만약 당신이 죽는다면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잠시 수치를 견디고 인내하십시오. 이것은 군 사령관의 명령입니다."라고 거절했다.[14] 야하라는 나중에 우시지마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한 "오키나와 전투"라는 책을 저술했다.

우시지마와 초의 시신은 1945년 6월 27일, 그들이 사망한 동굴 근처에서 미군 주도하에 매장되었다.[14]

우시지마는 부하를 때리는 것을 자제하고 분노를 저급한 감정으로 여겨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인간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었다.[14] 미국의 역사가 핸슨 W. 볼드윈은 우시지마를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위대한 일본 장군으로 평가했다.[14]

4. 평가

미국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후 우시지마를 "과묵하고 매우 유능한 사람"이며 "모든 장병들이 마음으로 복종했다"고 높이 평가했다.[18]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명장을 꼽을 때 육군에서는 우시지마를, 해군에서는 다나카 라이조를 꼽으며 우시지마의 지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 우시지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자결 전후의 행동이 비판받는데, 전투의 승패가 명확했던 시점에 미국군의 항복 권고를 묵살한 점과 자결 전 명령에서 항복을 부정하며 "영구한 대의에 살라"고 한 점이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철저 항전에 휘말리게 했다는 비판이 있다.[18] 오카모토 타로는 우시지마를 "구 일본군의 구제할 수 없는 우매함, 비인간성, 그 부끄러움과 굴욕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전 육군 소좌 오쿠다 코이치로는 "살아남은 제32군 장병은 물론, 오키나와 현민의 우시지마 사령관 개인에 대한 감정은 경애하는 마음이야말로 있을지언정, 반감이나 원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시지마는 자신을 교육자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온화한 성품으로 부하들을 대했다는 증언도 많다. 오키나와 현민 여성들을 군속으로 근무하게 하다가 안전을 위해 피난시키려 할 때, 여성들이 항의하자 귀중품을 나눠주며 피난시킨 일화도 있다.[19]

5. 기타

우시지마는 가고시마현 출신이지만 술에는 약해서 술잔을 몇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술자리는 좋아해서 단가를 부르고 흥이 오르면 알몸 춤까지 선보였다고 한다.[17] 술을 못하는 대신 음식에는 꽤 신경을 써서 나쓰메 소세키 등도 다니던 고지마치의 서양 요리점 '호테이'에서 아내와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외식을 했다. 또 요리에도 능해서 이 시대 남성에게는 드물게 가족에게 도미 조림과 돼지 뼈 요리, 오세치 요리 등을 자주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 집에 술 취한 사람이 표지판의 '우시지마'를 '우조'라고 잘못 읽고 요정으로 착각하고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우시지마는 싫은 기색 없이 술 취한 사람과 심야까지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임 중 교내 화재가 발생했으나, 필사적인 소화 활동으로 간부실에서만 막았고 학생 숙소에는 피해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내가 간다고 해서 불이 꺼지는 것은 아닐 텐데"라며 당황하지 않고 다음 날 평소처럼 출근하여 "한 명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한쪽 구석만 깨끗하게 탔네"라고 웃으며 교장실로 들어갔다.

참모들로부터 올라오는 결재 서류에는 한 마디도 수정하지 않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날인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의 니시오카 교장이 그 이유를 묻자 "군 사령부에는 유능한 참모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제 생각을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참견하면 복잡해질 뿐입니다. 저는 부하를 믿고 책임만 지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우시지마는 장군이 된 후에도 제일선에서 연락과 보고를 하러 온 병사와 직접 면접하고 자세히 전황을 들었다. 병사들의 꽤 과장된 자랑 이야기라도 열심히 듣고 마지막에는 상대의 계급을 불문하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가고시마시 가지요정의 고토쓰강 강변에 우시지마 미쓰루의 위령비 '우시지마 미쓰루 탄생의 비'가 건립되어 있다. 주변에는 벚꽃이 심어져 있어 가고시마 시민들에게는 벚꽃놀이 명소로 인기가 있다.[20]

손자 우시지마 사다미쓰는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지만, 현직 교사 시절부터 오키나와 등 각지 초등학교에서 평화 수업을 하고 있다. 그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할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분전"하도록 전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피해를 늘린 것을 비판하며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전쟁입니다."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배운 것입니다."라고 아이들에게 전하고 있다.[21][22]

우시지마는 50세가 넘어서도 체조의 앞구르기(핸드스프링), 철봉의 대차륜이나 역차륜을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능력이 뛰어났다.

제36여단장이었을 때, 부대에서 설사가 만연하여 밭 등에서 숨어서 용변을 보려던 병사가 적군에게 살상되는 일이 많아졌다. 지휘관들은 보이는 곳에서 용변을 보도록 명령했지만 좀처럼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우시지마가 직접 부하들 눈앞의 길가에서 용변을 보이며 생명이 중요함을 강조했다.[29]


5. 1. 수상 경력


  • 勲一等瑞宝章|훈1등 서보장일본어 (1940년)[8]
  • 金鵄勲章|금계 훈장일본어 2등 (1940년)[8]
  • 旭日大綬章|욱일대수장일본어 (1944년)[8]

참조

[1] 웹사이트 The War: Okinawa https://web.archive.[...] PBS 2009-09-09
[2] 문서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3] 서적 Bloody Okinawa Hachette 2020
[4] 뉴스 The Gory Way Japanese Generals Ended Their Battle on Okinawa https://time.com/391[...] Time 2015-06-22
[5]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Random House
[6] 서적 The Battle for Okinawa https://archive.org/[...] John Wiley & Sons, Inc.
[7] 뉴스 Jap Officers Buried By U. S. Forces Florence Morning News 1945-06-28
[8] 간행물 官報』第5306号「叙任及辞令」 1944-09-19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薩摩国・大隅国・日向国
[12] 웹사이트 年表「対馬丸と学童疎開」 http://tsushimamaru.[...] 対馬丸記念館 2017-09-20
[13] 방송 NHKスペシャル「沖縄戦 全記録」 2015-06-14
[14] 서적 私の沖縄戦記 第三十二軍司令部秘話
[15] 웹사이트 大田昌秀・元沖縄県知事が自ら調べた沖縄戦の証言を聞く http://www.news.janj[...] JANJAN 2017-09-20
[16] 웹사이트 The Death of Generals Ushijima and Cho http://www.ibiblio.o[...] Department of Defense 2017-09-23
[17] 뉴스 戦禍を掘る 出会いの十字路 [125 32軍司令部壕(10)]牛島中将の遺体確認 http://ryukyushimpo.[...] 2017-09-20
[18] 웹사이트 沖縄戦の実相 https://www.city.oki[...] 沖縄市役所 平和・男女共同課 2017-10-20
[19] 뉴스 首里城地下の沖縄戦 32軍司令部壕 [29 32軍首脳(上)]人間味あふれる司令官 http://ryukyushimpo.[...] 2014-10-24
[20] 뉴스 鹿児島市観光サイト よかとこかごんまナビ 牛島満生い立ちの碑 http://www.kagoshima[...] 公益財団法人 鹿児島観光コンベンション協会 2017-09-23
[21] 뉴스 軍抗戦「住民に犠牲」 牛島司令官の孫・貞満さんが沖縄戦語る http://ryukyushimpo.[...] 2017-09-20
[22] 뉴스 (ひと)牛島貞満さん 平和授業を続ける沖縄戦司令官の孫 2010-06-22
[23] 간행물 官報』第7701号「叙任及辞令」 1909-03-02
[24] 간행물 官報』第8608号「叙任及辞令」 1912-03-02
[25] 간행물 官報』第1389号「叙任及辞令」 1917-03-22
[26] 간행물 官報』第2913号「叙任及辞令」 1922-04-21
[27] 간행물 官報』第151号「叙任及辞令」 1927-07-01
[28] 간행물 官報』第3101号「叙任及辞令」 1937-05-08
[29] 간행물 官報』第7477号「彙報—陸海軍—生徒卒業」 1908-06-01
[30] 간행물 官報』第3554号「叙任及辞令」 1938-11-08
[31] 간행물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 1941-10-23
[32] 간행물 官報』第5306号「叙任及辞令」 1944-09-19
[33] 간행물 官報』第4493号・付録「辞令二」 1935-04-27
[34] 간행물 官報』第4707号「叙任及辞令」 194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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