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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량은 고려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가 되었고, 성종의 사우(師友)로 발탁되어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을 지냈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문하시랑으로서 하군사로 임명되어 북계를 방어했으며, 《고려사》에는 그의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995년 사망 후 태자태사로 추증되었으며,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목종 때 최승로와 함께 태묘에 배향되었고, 덕종 때 삼중대광으로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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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최량은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994년에는 김후인과 함께 《갈양사혜거국사비》 비문을 작성하였는데, 비문에는 그의 관직이 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태자소사로 기록되어 있다.

995년 4월 1일에 사망하자 성종은 그를 애도하며 태자태사로 추증하고, 쌀 300섬과 보리 200섬, 뇌원차 1천 각을 부의로 보내고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시호는 광빈이다.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 삼중대광이 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경주 사람으로,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기 전에는 그의 스승이자 벗으로서 그를 대우 하였고, 성종이 즉위한 뒤에는 그를 발탁하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左散騎常侍 叅知政事 兼司衛卿)으로 임명하였다. 최량이 병 때문에 100일의 병가를 요청한 것에 대해 어사선관(御事選官)이 규정에 따라 해직을 요청함에 따라 성종이 재가하였으나, 얼마 뒤 성종은 자신이 즉위하기 전부터 충정을 다해 부족한 자신을 바로 잡은 공로가 있다며 곧 복직을 명하였다.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되었다.

993년 8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문하시랑으로써 하군사(下軍使)로 임명되어 상군사(上軍使) 시중(侍中) 박양유, 중군사(中軍使)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와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북계(北界)로 가서 거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2.2. 성종 대의 활동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가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기 전에는 그의 스승이자 벗이었고, 성종 즉위 후에 발탁되어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이 되었다. 병 때문에 100일 동안 병가를 요청했는데, 어사선관이 규정에 따라 해직을 요청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성종은 최량이 즉위하기 전부터 충정을 다해 부족한 자신을 바로잡은 공로가 있다며 복직을 명하였다. 복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시랑으로 임명되었다.

993년 8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문하시랑으로서 하군사로 임명되어 상군사 시중 박양유, 중군사 내사시랑 서희와 함께 병력을 거느리고 북계로 가서 거란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고려사》 열전에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속문에 능하였다"고 평가되어 있으며, 994년에 세워진 《갈양사혜거국사비》의 비문을 김후인과 함께 작성하였다. 비문에는 당시 그의 관직을 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태자소사라고 기재하고 있다.

995년 4월 1일에 사망하자 성종이 그를 애도하며 태자태사로 추증하였고, 부의로 300섬의 쌀과 200섬의 보리, 뇌원차 1천 각을 보냈으며, 예법대로 장례를 치렀다. 시호는 광빈이다.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러 차례 추증하여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 삼중대광이 되었다.

2.3. 말년과 사후

성종 14년(995년) 4월 1일에 최량이 사망하자 성종은 그를 애도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하였고, 부의로 300섬의 쌀과 200섬의 보리, 뇌원차(腦原茶) 1천 각(角)을 보냈으며, 예법대로 장례를 치렀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다.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러 차례 추증을 거쳐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 삼중대광(太尉 太保 太師 內史令 三重大匡)이 되었다.

목종 원년(998년) 성종이 태묘에 모셔질 때 최승로와 함께 배향되었다. 덕종 2년(1033년) 삼중대광(三重大匡)이 증직되었다.

3. 가계

최량의 아들은 최원신(崔元信), 최원좌(崔元佐), 최원억(崔元億), 최원위(崔元偉), 최원간(崔元偘), 최원보(崔元保), 최원준(崔元俊)이다. 이 중 최원신은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호부시랑 예빈경(戶部侍郞 禮賓卿)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이수화(李守和)와 함께 에 신년을 하례하러 갔는데, 귀국 후 사행을 받드는 데 있어서 욕보이게 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