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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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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희는 이천 서씨 출신으로, 고려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나라의 침입 당시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한 고려 시대의 문신이다. 그는 내의령 서필의 아들이자, 문하시중 서눌의 아버지이며, 현종의 왕비인 원목왕후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993년 거란의 침입 때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하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강조하고, 여진을 핑계로 송나라와의 단절을 꾀하는 거란과의 관계를 개선할 여지를 제시하여 강동 6주를 얻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서희는 관직 생활 동안 청렴하고 강직한 면모를 보였으며, 998년에 57세의 나이로 사망 후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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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 [인물]에 관한 문서
정보
서희 기념공원에 있는 서희 동상
기본 정보
이름서희
원어 이름徐熙
학력960년 과거 급제
작위고려의 내사령
군주고려 성종
군주 칭호국왕
희(熙)
염윤(廉允)
시호장위(章威)
출생일942년
사망일998년 음력 7월 14일(56세)
성별남성
국적고려
가문이천 서씨
아버지서필
자녀서눌
서유걸
서유위
서주행
친척손녀 원목왕후
서훈성종 묘정 배향
태사 추증

2. 가계 및 출생

서희의 외가에서 용이 구름에 걸려 추락하다 바다 신의 도움으로 용궁으로 가는 태몽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고 무예에도 능했다고 한다.

서희는 이천 서씨 가문 출신으로, 고려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 대부터 서씨 가문은 경기도 이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력한 호족 세력이었다.[3] 서희에게는 형 서염(徐廉)과 남동생 서영(徐英)이 있었다.

2. 1. 가계

서희는 이천 서씨 출신으로, 고려 광종 때 내의성(內議省)의 최고 관직인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의 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 서씨 가문은 오늘날의 경기도 이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력한 호족 가문이었다.[3] 서희에게는 형 서염(徐廉)과 남동생 서영(徐英)이 있었다.

아버지 서필과 마찬가지로 서희 역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들인 서눌(徐訥)과 서유걸(徐惟傑) 또한 각각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상서성의 차관인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며 가문의 명성을 이었다. 특히 서눌의 딸 중 한 명(원목왕후)이 고려 현종의 왕비가 되면서 서희의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이러한 가문적 배경과 서희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성공적인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3]

  • '''조부'''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
  • '''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 홍찬(洪贊)의 딸
  • '''아버지''' : 서필(徐弼, 901년 ~ 965년, 종1품 내의령)
  • '''어머니''' : 평양 황씨(平壤 黃氏)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자녀손자녀
청주 한씨(淸州 韓氏)장남: 서눌(徐訥, ? ~ 1042년)
(종1품 문하시중)
(며느리: 이천군대부인 최씨(利川郡大夫人 崔氏))
손녀: 원목왕후(元穆王后, ? ~ 1057년) - 현종의 제6비
(며느리: 이천군대군 정씨(利川郡大君 鄭氏))
차남: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
손자: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손자: 서존(徐存, 태원군(太源君), 정3품 병부상서)
사남: 서유위(徐惟偉)
(정3품 장야서령)
손자: 서면(徐冕)
미상삼남: 서주행(徐周行)
(아명: 서유행(徐惟行))
(며느리: 초계 주씨(草溪 周氏))
손자: 서한(徐閈, 종3품 군기소윤(軍器少尹))


2. 2. 가족

서희는 이천 서씨 출신으로, 고려 광종 때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서신일 때부터 이천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호족 가문이었다.[3] 서희는 형 서염과 남동생 서영이 있었다.

아버지 서필과 마찬가지로 서희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의 아들들인 서눌과 서유걸 역시 각각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과 상서성의 차관인 좌복야를 역임했다. 특히 서눌의 딸 중 한 명(원목왕후)이 고려 현종의 왕비가 되면서 서희의 가문은 왕의 외척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서희가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 데 기여했다.[3]

서희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서희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서신일정2품 아간대부
조모합천 홍씨홍찬(洪贊)의 딸
아버지서필901~965, 종1품 내의령
어머니평양 황씨
서염
동생서영
본인서희(徐熙)
부인청주 한씨
장남서눌? ~1042, 종1품 문하시중
며느리이천군대부인 최씨서눌의 부인
손녀원목왕후? ~1057, 고려 현종의 제6비 (서눌의 딸)
며느리이천군대군 정씨서눌의 부인
차남서유걸정2품 상서좌복야
손자서정(徐靖)정2품 중서시랑평장사 (서유걸의 아들)
손자서존(徐存)태원군(太源君), 정3품 병부상서 (서유걸의 아들)
사남서유위정3품 장야서령
손자서면(徐冕)서유위의 아들
부인미상
삼남서주행아명 서유행(徐惟行)
며느리초계 주씨(草溪 周氏)서주행의 부인
손자서한종3품 군기소윤 (서주행의 아들)


3. 생애

서희의 외가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 용이 구름에서 떨어지다 바다 신의 도움으로 용궁으로 가는 태몽을 꾼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고 무예에도 능했다. 960년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 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을 거쳐 983년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993년 요 성종이 장수 소손녕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성종은 박양유, 서희, 최량 등을 보내 맞섰으나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고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겼다. 성종이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으나 소손녕은 항복만을 요구했다.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져 항복론과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으나, 서희는 이를 모두 반대하며 요나라의 진짜 의도는 고려와의 강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민관(民官) 이지백도 서희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결국 서희는 직접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강동 6주의 영유권을 확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서희는 강직한 성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종이 서경 행차 중 몰래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려 하자, 서희는 상소를 올려 그 잘못됨을 지적하여 중지시켰다. 또한 성종이 해주에 행차했을 때 서희가 머물던 군 막사에 들어가려 하자, "임금께서 머무실 곳이 못 됩니다"라며 거절했고, 성종이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하의 술은 감히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임금이 내린 술을 받았다고 한다.

공빈령 정우현이 시정(時政)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봉사를 올렸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 내쳐질 위기에 처했을 때,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주장이 옳다고 변호하며 그 허물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 일로 정우현은 감찰어사로 임명되었고, 서희는 성종으로부터 위로의 의미로 말과 술, 과일 등을 받았다.

996년 병으로 개국사에서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찾아와 그의 쾌유를 빌었으며, 998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들은 성종은 크게 슬퍼하며 많은 부의를 내렸고,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3. 1. 관직 진출

960년 (광종 11년) 3월에 실시된 과거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과 내의시랑(內議侍郎)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972년 (광종 23년)에는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10여 년간 단절되었던 양국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83년 (성종 2년)에는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에 임명되었다. 그 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와 같은 중요한 직책을 거쳐 최고위직인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에 이르렀다.[3]

3. 2. 거란과의 담판 (993년)

993년 (성종 12년), 거란성종은 장수 소손녕에게 대군을 주어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압록강을 건넌 소손녕의 군대는 봉산군(오늘날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고려군을 격파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3] 고려 성종은 박양유, 서희, 최량 등을 보내 맞서 싸우게 했으나 초반 전세는 고려에 불리했다.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지만, 소손녕은 고려의 항복만을 요구하며 침략 명분을 내세웠다.[3]

거란군의 압박과 초기 패배 소식에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일부 신하들은 거란에 항복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을 내세웠다. 당시 성종마저 서경의 군량미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상황은 비관적이었다.[5]

이때 병관어사(兵官御事)였던 서희는 항복론과 할지론 모두를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거란의 침공 의도가 단순히 영토를 빼앗거나 고려를 굴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고 거란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데 있음을 간파했다. 서희는 군량미 포기 명령과 할지론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거란군의 병력 규모가 과장되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3][5] 그는 거란과의 강화 가능성을 보고 직접 소손녕과 담판을 짓겠다고 자청했으며, 민관(民官) 이지백 등 일부 신료들도 서희의 주장에 동조했다. 서희의 이러한 분석과 주장은 이후 거란과의 담판에서 고려가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3. 2. 1. 협상 과정

993년 요나라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자, 고려 조정은 큰 혼란에 빠졌다. 박양유, 서희, 최량 등이 맞서 싸웠으나 초기 전투에서 패배하여 봉산군 일대를 빼앗겼다. 고려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시도했으나, 소손녕은 고려의 항복만을 요구하며 침략 이유를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아 하늘의 벌을 내리러 왔다"고 주장했다.[3]

조정에서는 요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힘을 얻었다. 심지어 성종도 서경(평양)의 군량미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서희는 할지론과 투항론 모두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요나라의 진짜 목적이 고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끊고 요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시키려는 데 있다고 간파했다. 서희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강약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잘 포착하여 움직이는 데 있습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키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어찌 갑자기 서경의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라고 주장하며 군량미 포기 명령에 반대했다. 또한 할지론에 대해서도 "지금 서경 이북의 땅을 내준다 해도, 삼각산 이북은 모두 옛 고구려의 땅인데 저들의 끝없는 욕심을 어찌 다 감당하시겠습니까?"라고 비판하며, 요나라의 80만 대군 주장은 과장된 것이니 직접 소손녕과 담판을 짓겠다고 나섰다.

서희는 소손녕이 머무는 봉산군의 진영으로 향했다. 소손녕 측은 서희에게 먼저 뜰에서 큰절을 올리라며 예를 갖추라고 압박하며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는 뜰에서 절하는 것이 예법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등하게 만나는 자리에서 어느 한쪽이 먼저 절하는 예는 없다"고 당당하게 맞서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숙소로 돌아가 버렸다. 서희의 강직하고 비범한 태도에 소손녕은 내심 놀라며 결국 예를 갖춰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절을 하고 마주 앉아 회담을 시작했다.[5]

서희의 외교 담판


본격적인 협상에서 소손녕은 먼저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소유인데 너희가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침략의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서희는 "우리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은 것이다. 영토 경계로 따지자면 오히려 당신들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우리 영토 안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범했다고 하는가?"라고 논리적으로 반박했다.[5]

핵심 쟁점으로 넘어가 소손녕은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어째서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는가?"라며 요나라의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이는 송나라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배후의 고려가 송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서희는 이를 간파하고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중간에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여진을 몰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아 그곳에 성과 보루를 쌓아 길을 통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귀국과 국교를 통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이는 단순히 거란의 침공을 막는 수동적인 대응을 넘어, 외교적 담판을 통해 오히려 고구려의 옛 영토 일부인 압록강 동쪽 지역의 영유권을 확보하려는 서희의 뛰어난 외교 전략이었다.[5]

결국 서희의 논리와 제안에 소손녕은 설득되었고, 요나라는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압록강 동쪽 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담판의 성공으로 고려는 전쟁 없이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이는 이후 요나라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외교적, 군사적 자산이 되었다. 소손녕은 철수하면서 서희의 외교적 역량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낙타 10마리, 100필,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3. 2. 2. 협상 결과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그래서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서경(현재의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이오."라고 주장하며, 영토 문제에 있어서도 오히려 거란의 동경(東京) 일부가 고려 영토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5]

또한, 거란이 침략의 명분으로 삼은 '송나라와의 교류'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와 거란 사이를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국교가 원활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희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만약 고려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 영토를 되찾아 그곳에 성과 요새를 쌓아 길을 확보한다면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제안했다. 이는 단순히 거란의 침략을 막는 것을 넘어, 외교 담판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서희의 담판은 성공적이었다. 고려는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항복하는 대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5] 소손녕은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서희에게 낙타 10마리, 100필,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며 예를 표했다.

이후 서희는 새로 확보한 강동 6주 지역에 성을 쌓고 요새화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는 그의 사후 벌어진 거란의 제2차, 제3차 침입 때 고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5] 서희의 외교적 성공은 고려가 고구려의 정식 후계자임을 거란이라는 강대국에게 인정받고,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의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3. 3. 말년

996년에 병으로 개국사에서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찾아와 어의(御衣) 한 벌과 말 세 필을 여러 사원에 나누어 시주하고, 개국사에는 곡식 1,000석을 추가로 시주하는 등 서희의 쾌유를 빌었다.

998년 음력 7월 14일(양력 8월 8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3][4][6] 부고를 들은 성종은 크게 슬퍼하며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다(腦原茶) 2백 각(角), 대다(大茶) 10근, 전향(箋香) 3백 량 등을 부의로 내렸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사후 1027년(현종 18년)에 성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4. 평가



서희의 외교적 역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당시 소손녕과의 담판이다. 당시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내세우며 고려의 항복을 압박했고, 압록강을 건너 봉산군에서 고려 선봉군을 격파하며 고려 조정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조정에서는 땅을 떼어주고 전쟁을 피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했고, 성종 역시 서경의 군량미를 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서희는 할지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나섰다. 그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시기를 잘 파악하여 움직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식량이 충분하면 성을 지키고 싸워 이길 수 있는데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라고 반문하며 군량미 포기 명령을 반대했다. 또한 "서경 이북 땅을 내준다 해도, 삼각산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의 끝없는 욕심에 계속 땅을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라며 할지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거란의 80만 대군은 과장된 것이라 주장하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

서희는 직접 소손녕과의 담판에 나섰다. 거란 측이 예를 갖추라며 절을 강요하자,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절을 하는 예는 없다"며 단호히 거부하고 숙소로 돌아가 버리는 등 초기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소손녕은 서희의 강직함에 결국 동등한 입장에서 예를 갖추고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과정에서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소유"라며 침략의 명분을 내세우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국호와 수도(서경)가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국경을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요양) 일부가 우리 영토 안에 있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이어 소손녕이 "왜 국경을 맞댄 거란을 두고 바다 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는가?"라며 본심을 드러내자, 서희는 거란의 진짜 목적이 송과의 전쟁을 앞두고 고려의 배후 공격을 막으려는 데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양국 관계가 막힌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만약 여진을 몰아내고 고구려 옛 땅을 되찾아 길을 열 수 있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라고 역제안했다. 이는 단순히 거란군을 돌려보내는 것을 넘어, 외교적 기회를 활용해 고토 회복의 실리까지 얻으려는 뛰어난 협상 전략이었다.

결국 서희의 담판은 성공적이었다. 고려는 영토를 할양하고 항복하는 대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소손녕은 철수하며 서희에게 낙타 10마리, 100필,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 이 담판은 서희의 뛰어난 외교적 통찰력과 협상 능력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국익을 극대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5. 대중문화 속의 서희

참조

[1] 웹사이트 서희(徐熙) https://encykorea.ak[...] 2023-12-11
[2] 웹사이트 서희장군묘(徐熙將軍墓) https://web.archive.[...] 2009-08-07
[3] 웹사이트 서희 (徐熙) https://web.archive.[...] Nate /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09-08-06
[4] 웹사이트 서희 (徐熙) http://100.naver.com[...] Naver / Doosan Encyclopedia 2009-08-06
[5] 서적 Sourcebook of Korean Civiliz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6] 뉴스 General Seo's skills are needed today http://joongangdaily[...] JoongAng Daily 2004-06-09
[7] 문서 고려사 권 3, 세가 3, 목종 원년(998년) 7월 14일(경오)
[8] 웹사이트 고려사 권94, 열전7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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