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고려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삼국사기》의 편찬을 주도했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예종 대에는 임금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았고, 인종 대에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등을 겪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수충정난정국공신 칭호를 받았으며, 이후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1145년에 완성했다. 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무신정변 때 부관참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김부식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시대 김부식이 1145년에 완성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 삼국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 중심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국 고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받는다. - 김부식 - 정중부
정중부는 고려 시대 무신으로, 이의방 등과 무신정변을 일으켜 무신정권 시대를 열었으나 부패와 사치로 민심을 잃고 경대승의 쿠데타로 처형된 인물이다. - 중세의 역사가 - 앵글로색슨 연대기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잉글랜드의 역사를 기록한 연대기로, 앵글로색슨의 역사, 바이킹의 침입, 잉글랜드 왕국 통합, 언어 변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 고려의 역사가 - 이제현
이제현은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 성리학자로,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고 개혁 정치를 펼쳤으며, 이색 등 제자를 길러 조선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김부식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 김부식 |
한자 | 金富軾 |
로마자 표기 | Gim Bu-sik |
일본어 | きん ふしょく (기음 부쇼쿠) |
다른 뜻 | 문렬공 |
신분 정보 | |
이름 | 김부식 |
원래 이름 | 金富軾 |
큰 제목 | 낙랑군 개국후 |
작위 | 고려의 평장사 |
임기 | 1128년 2월 1일 ~ 1142년 3월 31일 |
사망지 | 고려 개경 |
국적 | 고려 |
섭정2 | 이공수(前) |
군주2 | 고려 인종 왕해 |
자 | 입지(立之) |
호 | 뇌천(雷川) |
시호 | 문렬(文烈) |
학력 | 고려 숙종대 문과 급제 |
경력 | 문신, 정치가, 역사가, 저술가 |
부모 | 김근(부) |
본관 | 경주(慶州) |
웹사이트 | 한국학중앙연구원 |
생애 | |
출생일 | 1075년 |
사망일 | 1151년 (76세) |
출생지 | 고려 |
2. 생애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김위영은 고려 태조가 경주 주장으로 임명하였다.[2] 아버지 김근은 좌간의대부를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김부식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문이 높지 않았기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섰다.
고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 사록, 참군 녹사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으며,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종 즉위 후 외척인 이자겸이 국정을 농단할 때, 김부식은 이자겸에게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았다.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보았고,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어사대인, 호부상서, 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에 오르고 수사공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 사후, 추밀원사로 승진하여 재추 반열에 올랐다.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이 대두되었는데,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 1135년(인종 13년)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토벌군 원수가 되어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였다. 반란 진압 후,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 칭호를 받고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에 임명되었으며, 윤언이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후 인종 명으로 정습명, 김효충 등 10인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을 지휘하였으며, 1140년(인종 18년) 이후 세력이 약화되자 1142년(인종 20년) 관직에서 물러났고,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 즉위 후 낙랑군 개국후로 봉해졌고, 《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송나라 사신 노윤적이 왔을 때 관반사로서 그를 맞이했고, 같이 왔던 서긍이 《고려도경》에 김부식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9년 후 무신정변으로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대각국사 비문을 지었고,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집 20권은 전해지지 않는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김위영은 고려 태조가 경주의 주장으로 임명하였다.[2] 아버지 김근은 좌간의대부를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김부식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가문이 높지 않았기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섰다.고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한 김부식은 안서 대도호부 사록과 참군 녹사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으며,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2. 2. 관직 진출과 이자겸의 난
김부식은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서 대도호부(安西 大都護府) 사록(司錄)과 참군 녹사(參軍錄事)로 배치되었고, 임기가 끝난 후 직한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좌사간, 중서사인을 역임하였다. 1121년(예종 16년)에는 임금에게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인종 즉위 후 외척인 이자겸이 국정을 농단하였다.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3] 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4]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 소실 등으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4]
2. 3. 묘청의 난 진압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된 후 혼란과 궁궐 소실 등의 이유로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이 대두되었다.[5]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이 성인이라며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연판장을 돌렸으나, 평장사 김부식 등은 이를 거부하였다.[5] 서경의 서기(瑞氣) 조작이 탄로나고, 악천후 등이 잇따르자 김부식 등 반대파 의견이 우세해져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3]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 조광, 유담 등은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 원수가 되어 개경에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金安),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하였다. 김부식은 중군장으로서 좌군장 김부의[6], 우군장 이주연(李周衍)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다. 서경 사람들이 묘청, 유담 등을 죽이고 항복했으나, 조광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포위하고 1136년 잔당을 소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 김부식은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政敵)인 윤언이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4]
2. 4. 삼국사기 편찬과 말년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4] 1145년(인종 23년)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군 개국후(樂浪郡開國候)로 봉해졌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송나라의 사신 노윤적(路允迪)이 왔을 때 관반사(館伴使)로서 그를 맞아들였고, 같이 왔던 서긍이 그의 《고려도경》에 김부식의 집안을 실어 송나라 황제에게 진상함으로써 김부식의 이름은 송나라에도 유명하였다.
1151년(의종 5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6] 대각국사의 비문을 지었고, 죽은 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집 20권을 지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4]
3. 평가
김부식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긍은 김부식을 학문과 글쓰기 능력이 뛰어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이기백은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쓰여진 발전된 역사서라고 평가하였다. 반면 신채호는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만약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 1. 긍정적 평가
1123년 중국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로 고려를 다녀갔던 서긍(徐兢)은 김부식을 "박학강식(博學強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1]반면 한국 사학 1세대로 평가되는 역사학자 이기백 전 이화여대·서강대 교수는 《삼국사기》에 대해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씌어진 사서로 이전의 신이적(神異的)인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라고 호평하였다.[2]
3. 2. 부정적 평가
신채호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묘청의 서경 반란군 토벌을 지휘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하며,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 태도에 대한 비판은 주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2]
# 중국 중심적 경향: 중국 사서를 많이 이용하고,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채택했다.
# 유교적 입장 강조: 『삼국유사』와 비교하여, 옛 기록을 유교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많이 삭제했다.
# 신라 중심적 역사관: 고려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신라계 문벌인 김부식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의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조선 시대의 원사료 보존 상황, 당시 동아시아 학문의 중심이 중국에 있었던 점, 고려와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2]
3. 3. 현대적 재평가
1123년 중국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로 고려를 다녀갔던 서긍(徐兢)은 김부식을 "박학강식(博學強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1]신채호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서경 반란군 토벌을 지휘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 년간 ‘묘청의 난’보다 지나친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전쟁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니….(중략)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이며 진취적으로 진전했을 것이다."[2]
반면 한국 사학 1세대로 평가되는 역사학자 이기백 전 이화여대·서강대 교수는 "《삼국사기》는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씌어진 사서로 이전의 신이적(神異的)인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라고 김부식의 저술에 대해 호평하였다.[3]
4. 저서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증조부 | 김위영(金魏英) |
조부 | 김원충(金元冲) |
아버지 | 김근(金覲) |
어머니 | 미상 |
형 | 김부필(金富弼) |
형 | 김부일(金副佾, 1071년 ~ 1132년) |
동생 | 김부의(金副儀)[초명: 부철(富轍)] |
아들 | 김돈중(金敦中, 1119 ~ 1170년) |
아들 | 김돈시(金敦時) |
손자 | 김군수(金君綏) |
6. 김부식이 등장한 작품
김부식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배우 주효만이 연기하였다.[1]
6. 1. 텔레비전 드라마
金富軾중국어을 연기한 배우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2]
서적
고려사 권97, 열전10, 김부일전
[3]
서적
고려사 권98, 열전11, 김부식전
[4]
서적
한국중세사학사(Ⅰ)
집문당
1999
[5]
서적
고려사 권127, 열전40, 묘청전
[6]
문서
김부식의 동생
[7]
문서
고려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