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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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정훈련은 1980년 2월 육군본부의 지시로 시작되어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를 목적으로 실시된 군사 훈련이다. 3월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주관으로 회의가 개최되었고, 특전사령관은 수도권 지역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차량 배치를 요청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광주 투입 전 시위 진압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훈련 방식의 잔혹성과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부적합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충정작전은 군과 경찰이 수행하는 공세적 진압 작전으로, 시위대 와해, 주모자 체포를 목표로 한다.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는 특별지시를 통해 1군·2작전사령부·3군 사령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 치안본부장에게 1/4분기 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에 완료하라고 지시했다.[1]
충정작전은 군과 경찰이 공동으로 진압 책임을 지는 작전이다. 작전의 성격은 공세적인 진압으로 규정되었으며, 주요 목표는 시위대에 대한 돌격을 통해 이를 와해시키고 재집결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위 세력의 분쇄와 주모자 체포를 목표로 함을 의미한다. 작전 수행 시 장비는 기동성 확보를 위해 경(輕)무장을 원칙으로 했으며, 기본화기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시위대 와해 후 체포를 위해 진압봉을 휴대하도록 했다.[1]
[1]
간행물
육군본부,육군참고자료지-작전명령 및 지시
2. 1980년의 충정훈련
같은 해 3월 4일부터 6일까지 수경사(현 수방사)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비롯해 1·3·5·7·9·11 공수특전여단장, 20·26·30 보병사단장 및 해당 부대 작전참모, 치안본부장, 시경국장 등이 참석했다.[2] 회의의 주된 목적은 수도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요사태에 대한 대비태세를 점검하는 것이었으며, 참석자들은 향후 충정훈련을 더욱 강화하고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2]
4월 12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수도권 지역의 충정작전 출동을 위한 차량 배치를 육군참모총장에게 요청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제1항공여단에 중앙기동부대로 5개의 항공조를 편성하여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특전사에는 공중지원에 필요한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제1항공여단에 지원하도록 하고, 각급 부대는 500MD 헬기 운용 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훈련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2]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에 투입되기 전, 시위 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1980년 초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크게 늘어났으며, 부대에서 퇴근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훈련의 강도 역시 매우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3]
2. 1. 비판
광주에서 공수특전부대가 전개한 시위 진압 방식은 매우 잔혹했다는 비판이 있다.[1] 공수부대는 요인 암살과 적 후방 침투 및 게릴라전 수행에 특화된 최정예 특수부대이다.[1] 따라서 이러한 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은 과도하고 부적절한 대응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1] 당시 전라남도청에 쌓여 있던 수류탄 더미와 12.7mm 중기관총 사진은 이러한 과잉 진압의 증거로 남아 있다.[1]
3. 충정작전의 개요
참조
[2]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3]
보고서
국방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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