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 시게루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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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바 시게루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마쓰야마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넓은 수비 범위와 우익수 방향으로 밀어치는 독특한 타법으로 '가리타 2세'로 불렸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거쳐 긴테쓰 버펄로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회 수상은 역대 최다 기록이며, 198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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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시게루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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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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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치바 시게루 |
원어 이름 | 千葉 茂 |
로마자 표기 | Shigeru Chiba |
출생일 | 1919년 5월 10일 |
사망일 | 2002년 12월 9일 |
출생지 | 에히메현 사이조시 |
사망 당시 나이 | 83세 |
신장 | 167cm |
체중 | 64kg |
포지션 | 2루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연도 | 1938년 |
첫 출장 | 1938년 5월 1일 |
마지막 출장 | 1956년 7월 17일 |
은퇴 경기 | 1959년 2월 28일 |
선수 경력 | |
소속팀 |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 (1938–1941, 1946–1956) |
아마추어 경력 | 구제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 |
감독/코치 경력 | |
감독/코치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1–1958, 코치) 긴테쓰 버펄로 (1959–1961, 감독) |
통계 | |
리그 | JBL/NPB |
타율 | 0.284 |
홈런 | 96 |
타점 | 691 |
수상 및 명예의 전당 | |
명예의 전당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80년) |
헌액 유형 | 일본 |
헌액 방법 | 특별 표창 |
2. 선수 시절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 시절인 1938년 도쿄 교진군에 입단하여 1년차부터 주전 2루수로 발탁되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아오타 노보루 등과 함께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는 화려한 2루 수비로 유명했으며, 1루수 가와카미의 수비 범위가 좁아 ‘치바 1·2루수’라고도 불렸다. 송구 시 상대를 보지 않고 던지는 등 뛰어난 수비 동작으로 전쟁 전 명 2루수였던 가리타 히사노리의 계보를 잇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우타자였지만 모든 코스의 공을 우측으로 보내는 독특한 타법으로 통산 96개의 홈런 중 81개를 우측으로 넘겼다. 이는 전쟁 이전 클린업 타자를 맡았던 중견수 시절 1번 미하라 오사무와 2번 미즈하라 시게루를 진루시키기 위해 익힌 타격 때문이었다. 또한 ‘배트에 끈끈이가 있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파울볼 커트 능력이 뛰어나 볼넷을 골라 출루하는 교타자였다.
전쟁 이후에는 주로 1번이나 2번 타자로 활약했다. 1948년 10월 16일 다이요 로빈스전에서는 1경기 6득점을 기록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다. 1951년 5월부터 2번 타자로 정착, 시즌 후반부터 요나미네 가나메와 함께 리그 최고의 테이블 세터진을 구축했다. 1953년에는 리그 4위의 타율 3할 2푼, 리그 3위인 80타점을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나, 1954년경부터 부진에 빠져 1956년에 은퇴했다.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회 수상은 다카기 모리미치와 함께 역대 최다 기록이다.[30]
2. 1. 프로 입단 전
에히메현 사이조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쓰야마시의 시노노메 심상 초등학교로 전학하면서 어깨가 강하다는 점을 인정받아 투수가 되었다. 이후 에히메현 대회에서 우승하여 교토에서 개최된 전국 초등학교 대회에 출전했다.마쓰야마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치바는 성실한 성격으로 허드렛일을 묵묵히 해냈지만,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성격 탓에 일부 선배들로부터 버릇없는 녀석이라며 부당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1]
2학년 가을부터 8번·좌익수 자리를 잡았고, 3학년이 된 1935년 봄의 고시엔에 출전하여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아이치상업에 패했다. 여름의 고시엔에서는 준준결승에서 자이농림(대만)과의 연장 10회 접전을 승리하고, 결승에서 이쿠에이 상업(효고)을 6-1로 꺾고 여름 첫 우승을 달성했다.[2] 4학년 때 3번·3루수가 되었고, 5학년 때는 주장을 맡는 한편 투수도 겸임하며[3] 하야시 요시카즈(도쿠시마 상업)·쿠스노키 야스오(다카마쓰 상업)와 함께 "'''시코쿠의 빅 3'''"라고 불렸다.
졸업을 앞두고 고시엔 우승 당시 감독이자 마쓰야마상업 선배였던 모리 시게오가 감독을 맡고 있던 이글스에 입단할 예정으로 가계약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후 도쿄 거인군 감독이자 모리의 선배인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마쓰야마에 와서 학교와 마을 유력자들에게 로비를 벌였고, 결국 치바는 도쿄 거인군에 입단하게 되었다. 치바가 상경할 때 아버지가 동행했는데, 이는 이글스의 고노 야스시와 모리 시게오에게 직접 사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4] 이러한 경위로 인해, 치바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이중 계약 제1호 선수로 여겨진다.[5]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전쟁 전)
1938年일본어 4월 29일에 도쿄 자이언츠에 투수로 입단, 월급은 130엔, 등번호는 "30"이었다[6]。 이중 계약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입소한 치바를 보고 "유치원 입학식도 아니고, 부모에게 이끌려 오다니"라고 비웃는 체격이 큰 선수가 맞이했는데, 그 선수는 며칠 전에 입소한 가와카미 데쓰하루였다고 한다[7]。 이것이 첫 만남이었지만, 치바는 이 가와카미 등과 함께 "'''꽃의 13년조'''"라고 불리는 활약을 보이게 된다.입단 후 타격을 인정받아 야수로 전향, 1938年일본어 춘계 리그부터 6번・2루수 자리를 잡고 바로 타율.295로 베스트 10에 진입하는 등 입단하자마자 주력으로 활약[2]。 같은 해 추계 리그부터는 1번・미하라 오사무, 2번・미즈하라 시게루의 뒤를 잇는 3번・중견수로 자이언츠의 클린업 트리오를 맡았다. 꽃의 소케이 콤비를 살리기 위해, 출루한 두 명을 진루시키는 예술적인 우타의 팀 배팅을 익혔다. 1939年일본어부터 등번호를 "22"로 변경하고, 미하라의 퇴단에 따라 정 2루수 자리를 얻어 상위 타선을 맡아, 타율 .305(리그 4위)로 3할 타자 대열에 합류한다(수위 타자는 타율 .338을 기록한 가와카미). 같은 해 키토 가즈오의 기록을 깨는 전전 최다 95단타를 날렸다[8]。 그 후에도 1940年일본어에는 타율 .281(리그 4위), 1941年일본어에는 타율 .234(리그 9위)로, 항상 개인 타격 성적 상위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1939년・1940년과 2년 연속으로 리그 최고의 출루율을 기록했다. 동기 입단의 가와카미나 나카지마 하루야스와 함께 클린업을 구성하며, 제1기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1941년 시즌 종료 후에 병역을 위해 자이언츠를 떠나, 마쓰야마에 있던 육군 연대에 입대했다.
2. 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전쟁 후)
1946년 프로 야구 공식전이 재개되면서 요미우리에 복귀하여 주장으로 활동했다. 물자 부족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팀을 이끌었다.[30] 1947년부터 1953년까지 7년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2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는데, 이는 다카기 모리미치와 함께 NPB 최다 기록이다.1949년에는 팀의 전후 첫 우승에 기여했으나, MVP 투표에서는 후지무라 후미오에게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 1950년에는 121경기에 출장하여 리그 최다인 105개의 볼넷을 기록했고, 이후 1952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다.
1951년 5월 이후 2번 타자로 정착했는데, 시즌 후반부터 요나미네 가나메가 입단하면서 강력한 1, 2번 타순을 구축했다. 1953년에는 리그 4위의 타율 3할 2푼, 리그 3위인 80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54년경부터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956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킨테츠의 감독을 맡았다. 킨테츠의 구단 애칭인 "버팔로"(후에 버팔로스)는 치바의 현역 시절 애칭 "'''맹우'''"에서 유래되었다.[4] 198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프로 야구 선수, 심판인 치바 에이지는 친동생이다.
3. 1.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요미우리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59년 긴테쓰 버펄로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나이토 히로후미와 오토모 다쿠미가 치바에게 호응해 이적했다. 치바의 감독 취임 이전 긴테쓰의 닉네임은 긴테쓰 연선의 이세지마에서 양식된 진주에서 유래하여 ‘펄스’(パールス일본어)였지만 팬 투표의 결과에 따라 치바의 별명인 ‘맹우’(猛牛)와 관련된 ‘버펄로’로 명명됐다(훗날 팀명을 ‘긴테쓰 버펄로스’로 변경). 구단의 ‘맹우 마크’는 치바의 친구인 오카모토 다로가 디자인한 것이었다.[4]1961년까지 감독을 맡았지만 긴테쓰 시절에 시즌 103패를 기록하는 등 성적은 모두 최하위로 끝났다. ‘지상 최저의 감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계약금이 저렴한 무명 선수만 영입했던 긴테쓰 구단에 ‘많은 돈을 써야 좋은 선수를 얻을 수 있다’고 진언하는 등 긴테쓰의 체질 개선에 노력했다.[4]
3. 2. 기타 활동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전전(戰前)부터 프로 야구의 산증인으로서 많은 글을 남겼다. 1980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2002년 12월 9일에 사망했다(향년 83세).[3]4. 선수로서의 특징
일본 프로 야구에서 전후 양 리그 분립 시기까지 대표적인 2루수였다. 명인으로 불린 화려하고 견실한 수비와, 신기에 가까운 우익 방향으로의 밀어치기와 끈기 있는 팀 플레이에 헌신하는 타격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군)의 제1기, 제2기 황금 시대를 공수 양면에서 계속해서 지탱했다. 1947년부터 7년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으며, 통산 7회 수상은 다카기 모리미치와 함께 2루수로서 NPB 최다 기록이다.[37]
4. 1. 수비
넓은 수비 범위와 화려하면서도 견실한 2루 수비로 '전전(戰前)의 가리타, 전후(戰後)의 치바' 또는 '가리타 2세'라고 불렸다.[38] 강한 손목을 활용한 스냅 스로가 특기였으며, 포구에서 송구로 이어지는 속도도 훌륭하여 "던지고 나서 잡고 있다", "상대를 보지 않고 던진다"고 말해질 정도였다.[36][37] 1루수 가와카미 데쓰하루의 수비 범위까지 커버하여 '치바 1, 2루수'라고 불리기도 했다.[43]1리그 시대에 시라이시 토시오와 짝을 이룬 2유간은 철벽의 명 콤비라는 정평이 있었으며,[37] 유격수 땅볼로 2루에 송구된 공을 받은 치바가 1루를 보지 않고 점핑 스로로 병살을 잡았다. 민첩한 움직임과 견실한 글러브 솜씨로 팬들을 매료시켰으며, 훗날 명수라고 불린 히로오카 다쓰로는 치바에 대해 "몸 전체가 글러브 같았다, 공이 글러브 쪽으로 날아들었다"고 회고했다.[40][41]
4. 2. 타격
우타자이면서도 어떤 코스의 공도 우익 방향을 노리는 독특한 타법을 구사했는데, 이는 신인 시절 미하라·미즈하라 등 육대학 출신 대선배가 루상에 있을 때 더블 플레이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안해낸 것이었다.[37] 통산 96개의 홈런 중 81개를 우익으로 날렸으며, 1950년부터 1954년까지 39개 연속으로 우익 방향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44] 상대팀은 치바가 우익으로만 타구를 보내자 치바 시프트로 1, 2루 간을 좁히는 수비를 펼쳤지만, 치바의 타구는 그 좁은 1, 2루 간을 라인 드라이브로 뚫고 나갔다. 치바의 우타는 작은 체구의 타자가 배트를 짧게 쥐고 맞추는 것과는 달리, 헤드 부분이 무거운 35인치 배트를 그립 엔드까지 길게 쥐고 힘차게 되받아치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45] 치바 자신도 "몸이 작은 사람일수록, 길게 쥐는 것으로 자신의 비력을 커버할 수 있고, 큰 배팅을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46]
또한 "배트에 새 끈끈이가 붙어있다"라고 불릴 정도로 파울로 끈질기게 버틴 끝에, 볼넷을 골라 출루하는 교타자이기도 했다. 파울로 끈질기게 버티고, 마지막에는 라이트 방향으로 잘 치는 기술은 당시 프로 야구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성기에는 "상대가 변화구 투수라면 하루 종일 파울을 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47]
한 리그 시대에는 희생 번트를 댈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양 리그 분립 후 감독인 미즈하라로부터 번트를 지시받는 기회가 많아졌다. 치바의 번트는 배트를 당기는 등의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배트 중심보다 공 2개 정도 앞부분에 투구를 맞춤으로써 중심을 벗어나 타구를 죽였다. 또한, 반대로 배트 뿌리에 공을 맞혀 타구를 죽이기도 했다. 타구가 죽으면 타구가 투수 앞에 굴러가도 번트는 성공한다. 또한, 투수 앞에 굴러가도 번트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안심감이 있으면, 마음의 여유로 파울 라인 근처의 어려운 번트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치바는 그라운드에 지름 1m 정도의 원을 그리고 거기에 번트로 공을 넣는 연습이나, 한 번 파울 그라운드로 타구를 떨어뜨리지만 굴러오는 중에 페어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번트 연습도 했다.
5. 리더십
멸사봉공에 철저했던 치바의 자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팀 동료들은 매료되었고, 치바가 "천천히 가자"라고 한마디 하면 팀은 일시에 기운을 되찾았다고 한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평가받는다.[37]
6. 에피소드
평소 옷차림은 엉성했지만, 모두 일류 브랜드 제품이었다고 한다. (아오타 노보루 증언)[50] 1948년 긴자의 양식점 '그릴 스위스'에서 돈가스를 카레에 얹어 먹은 것이 '돈가스 카레'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52] 다테가와 단시 등 많은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7. 상세 정보
일본 프로 야구에서 전후 양 리그 분립 시기까지 대표적인 2루수였다.
화려하고 견실한 수비, 우익 방향으로의 밀어치기와 끈기 있는 팀 플레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거인군)의 제1, 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947년부터 7년 연속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으며, 통산 7회 수상은 다카기 모리미치와 함께 2루수 최다 기록이다.[19]
은퇴 후 킨테츠 감독을 맡았다. 킨테츠 구단 애칭인 "버팔로"(후에 버팔로스)는 치바의 현역 시절 애칭 "'''맹우'''"에서 유래했다. 198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프로 야구 선수이자 심판인 치바 에이지는 친동생이다.
7. 1. 출신 학교
구제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1]7. 2. 선수 경력
1938년 도쿄 교진군에 입단하여 1년차부터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아오타 노보루 등과 함께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는 2루수였으며, 1루수 가와카미의 수비 범위가 좁아 ‘치바 1·2루수’라고도 불렸다. 송구 시 상대를 보지 않고 던지는 등 뛰어난 수비 동작으로 전쟁 전 명 2루수 가리타 히사노리의 계보를 잇는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2]우타자였지만 모든 코스의 공을 우측으로 보내는 독특한 타법으로 통산 96홈런 중 81개를 우측으로 넘겼다. 이는 전쟁 이전 클린업 트리오 시절 1번 미하라 오사무와 2번 미즈하라 시게루를 진루시키기 위해 익힌 타격에서 비롯되었다. ‘배트에 끈끈이가 있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파울볼을 잘 쳐내고 볼넷을 골라 출루하는 교타자였다.
전쟁 이후에는 주로 1번이나 2번 타자로 활약했다. 1948년 10월 16일 다이요 로빈스전에서는 1경기 6득점을 기록했다. 1950년에는 121경기에 출장, 리그 최다인 105볼넷을 기록했고, 1952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다. 1951년 5월 이후 2번 타자로 정착, 시즌 후반부터 요나미네 가나메와 테이블 세터진을 이뤘다. 1953년에는 리그 4위 타율 .320, 리그 3위 80타점을 기록하며 요미우리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으나, 1954년경부터 부진에 빠져 1956년에 은퇴했다.
2루수로서 베스트 나인 7회 수상은 다카기 모리미치와 함께 역대 최다 기록이다.[19]
7.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요미우리에서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59년 긴테쓰 버펄로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나이토 히로후미와 오토모 다쿠미가 치바에게 호응해 이적했다. 치바의 감독 취임 이전 긴테쓰의 닉네임은 긴테쓰 연선의 이세지마에서 양식된 진주에서 유래하여 ‘펄스’(パールス|파루스일본어)였지만, 팬 투표의 결과에 따라 치바의 별명인 ‘맹우’(猛牛)와 관련된 ‘버펄로’로 명명됐다(훗날 팀명을 ‘긴테쓰 버펄로스’로 변경). 구단의 ‘맹우 마크’는 치바의 친구인 오카모토 다로가 디자인한 것이었다.1961년까지 감독을 맡았지만, 긴테쓰 시절 시즌 103패를 기록하는 등 성적은 모두 최하위로 끝났다. ‘지상 최저의 감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때까지 계약금이 저렴한 무명 선수만 영입했던 긴테쓰 구단에 ‘많은 돈을 써야 좋은 선수를 얻을 수 있다’고 진언하는 등 긴테쓰의 체질 개선에 노력했다.
-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2군 감독(1951년 ~ 1958년)
- 긴테쓰 버펄로 감독(1959년 ~ 1961년)
7.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베스트 나인: 7회 (2루수 부문: 1947년 ~ 1953년) ※2루수 부문 최다 기록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80년) ※특별 헌액
7. 5. 개인 기록
- 통산 1000경기 출장: 1951년 7월 28일(역대 6번째)[30]
- 1경기 6득점: 1948년 10월 16일(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올스타전 출장: 5회(1951년 ~ 1955년)
7. 6. 등번호
- '''30''' (1938년)
- '''22''' (1939년 ~ 1941년)
- '''3''' (1946년 ~ 1957년)
- '''31''' (1958년 ~ 1961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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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変化球こそPLAY BASEBALLの原点! 遊び心で打者をもてあそんだ3つの変化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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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웹사이트
クラシックSTATS鑑賞 1959年G.ミケンズ、全登板成績【グレン、リメンバーパールハーバーや】
http://classicstats.[...]
[36]
서적
『巨人軍の男たち』著者紹介
[37]
서적
『ジャイアンツ栄光の70年』42頁
[38]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109頁
[39]
서적
『報知グラフ 別冊 巨人軍栄光の40年』212頁
[40]
서적
『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185頁
[41]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一塁手を見ずに送球、徹底した右打ち 千葉茂の名人芸
http://column.sp.bas[...]
[42]
서적
『巨人軍の男たち』149頁
[43]
서적
『巨人軍の男たち』66頁
[44]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477頁
[45]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106頁
[46]
서적
『猛牛一代の譜』
[47]
서적
『後楽園球場のサムライたち』117頁
[48]
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128頁
[49]
서적
『プロ野球三国志』88頁
[50]
서적
『サムライ達のプロ野球』123頁
[51]
간행물
スカウト巡礼(8) 近鉄篇 元近鉄、現東映 荒井健スカウトに聞く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52]
웹사이트
銀座スイス-千葉茂さんとカツカレー
http://www4.ocn.ne.j[...]
[53]
뉴스
森、国松…巨人昭和30年組のささやかなご褒美メシ
https://www.tokyo-sp[...]
[54]
서적
『プロ野球名語録 勝つ、打つ、守る、そして徹する』
講談社
1996-10-20
[55]
웹사이트
1000安打
https://npb.jp/histo[...]
2022-09-30
[56]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532頁
[57]
웹사이트
記録ラッシュの横浜対ヤクルト(1999年7月22日)
https://column.sp.ba[...]
2019-07-22
[58]
서적
『プロ野球記録大鑑』514頁
[59]
웹인용
銀座スイス-千葉茂さんとカツカレー
http://www4.ocn.ne.j[...]
2013-12-07
[60]
서적
《한신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
[61]
서적
오이 히로스케 저 《타이거스 사》
베이스볼 매거진사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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