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희
1. 개요
치희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유리명왕의 후궁이다. 유리명왕은 첫 번째 왕비인 송씨가 죽은 후 치희와 화희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두 여인의 불화로 인해 유리명왕은 각자에게 별도의 궁전을 지어 거처하게 했다. 치희와 화희의 다툼 끝에 치희가 집으로 돌아가자, 유리왕이 뒤쫓아가 그녀를 달랬으나 거절당했다. 유리왕은 슬픔 속에 황조가를 지었다.
| 이름 | 치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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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雉姬 |
| 로마자 표기 | Chihui |
| 한글 표기 | 치희 |
| 한자 표기 | 雉姬 |
| 직업 | 고구려 유리왕의 후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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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Academy of Korean Studies 치희 雉姬 치희(雉姬) 치희 雉姬 Classical Poetic Songs of Korea, 김대행, 이경희 (번역), Ewha Womans University, 2009, 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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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중국계 한국인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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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한국인 -
오연총
오연총은 고려 예종 때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여진 정벌에서 윤관의 부원수로 활약했으며, 신기군 징발 조건 완화와 서경 궁궐 창건 반대 등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문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 유리명왕의 생애와 관련된 설화
삼국사기에는 유리명왕이 첫 번째 왕비 송씨가 죽은 후 화희와 치희 두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했으나, 서로 총애를 다투어 불화가 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은 별도의 궁궐을 지어 각자를 머물게 했다.
왕이 7일 동안 사냥을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화희는 치희에게 "너는 한 가문의 첩인데 어찌 예의가 없느냐?"라고 꾸짖었다. 격분한 치희는 집으로 돌아갔고, 유리왕이 뒤쫓았지만 돌아가지 않았다. 유리왕은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꾀꼬리가 나는 것을 보고 황조가를 지었다.
2.1. 두 후궁, 화희와 치희
유리명왕이 첫 번째 왕비 송씨가 사망한 후, 화희와 치희라는 두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삼국사기에는 이 두 여인이 왕의 총애를 두고 다투었으며, 불화가 심해 왕이 별도의 궁전을 지어 각자를 머물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둘은 다투었고, 화희는 치희에게 "너는 한 가문의 첩인데 어찌 예의가 없느냐?"라며 꾸짖었다. 격분한 치희는 집으로 돌아갔고, 유리왕이 뒤쫓아갔지만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후 유리왕은 꾀꼬리를 보고 황조가를 지었다.
2.1.1. 화희와 치희의 갈등
유리왕이 첫 번째 왕비인 송씨(王后 松氏)가 죽은 후 맞이한 후궁 화희와 치희는 왕의 총애를 다투었다. 그 불화가 심하여 왕은 두 개의 별도 궁전을 짓고 각 여인을 머물게 했다.
한 번은 왕이 7일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화희와 치희가 다투었다. 화희는 치희를 꾸짖으며 "너는 한 가문의 첩인데 어찌 예의가 없느냐?"라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치희는 집으로 돌아갔고, 이를 들은 유리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았지만 치희는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2.1.2. 유리명왕의 슬픔과 황조가
유리왕은 첫 번째 왕비인 송씨(王后 松氏)가 죽은 후 치희와 화희라는 두 여성을 후궁으로 맞이했는데, 이들은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었다. 왕은 두 개의 별도 궁전을 짓고 각 여인을 머물게 했다.
한 번은 왕이 7일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에 치희와 화희가 다투었다. 화희는 치희에게 "너는 한 가문의 첩인데 어찌 예의가 없느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격분한 치희는 집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은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았지만, 치희는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유리왕은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많은 노란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황조가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