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1. 개요
황조가는 고구려 유리명왕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가요이다. 유리명왕이 두 부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겪는 외로움을 꾀꼬리에 비유하여 표현한 노래로,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해진다. 노래는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라는 내용으로, 작자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고대 가요의 한 형태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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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음악 -
고마가쿠
고마가쿠는 고구려에서 기원하여 일본 아악의 일부로 편제된 우방 음악으로, 고마부에, 히치리키 등의 악기를 사용하며 고려일월조, 고려평조, 고려쌍조 세 가지 조와 요효오시, 아게효오시, 가라효오시 세 가지 박자를 가진다. -
한국의 한시 -
제왕운기
《제왕운기》는 고려 후기 이승휴가 지은 역사서로, 상권은 중국, 하권은 한국 역사를 시로 읊었으며, 단군을 한민족의 시조로, 발해를 한국사로 인식하여 민족의식과 자주성을 강조했다. -
한국의 한시 -
위항 문학
위항 문학은 조선 시대 위항인들이 주도한 문학으로, 《육가잡영》을 시작으로 시집을 펴내며 문학 활동을 했고 풍월향도, 낙사, 옥계시사 등의 시사 활동을 통해 발전했으며, 《해동유주》, 《소대풍요》, 《풍요속선》, 《풍요삼선》, 《대동시선》 등의 시집이 대표적이다. -
서정시 -
송가
송가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정시의 한 형태로, 특정 대상이나 사건을 찬양하며, 핀다로스식, 호라티우스식, 불규칙 송가 등으로 나뉘어 발전하여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창작되었고 음악과 현대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
서정시 -
5월 (시)
《5월》은 체코 시인 카렐 히네크 마하가 1836년에 발표한 서정적 서사시로, 사랑, 배신, 죽음, 고독을 다루며 체코 국민들에게 자유와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원문과 배경 설화
기원전 17년, 유리명왕은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왕후 송씨(王后 宋氏)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처로 삼았다. 하나는 골천인(鶻川人)의 딸인 화희(禾姬)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漢) 사람의 딸인 치희(稚姬)였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다투었으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어느 날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으로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고, 왕이 쫓아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었다.
:翩翩黄鳥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암수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
:念我之独 (나 홀로임이 가슴 아프다)
:誰其與帰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2.1. 원문
기원전 17년, 유리명왕은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왕후 송씨(王后 宋氏)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처로 삼았다. 하나는 골천인(鶻川人)의 딸인 화희(禾姬)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漢) 사람의 딸인 치희(稚姬)였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 다투었으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어느 날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으로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고, 왕이 쫓아갔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었다.
:翩翩黄鳥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암수가 서로 의지하고 있다)
:念我之独 (나 홀로임이 가슴 아프다)
:誰其與帰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2.2. 현대어 번역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명왕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황조가의 현대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2.3. 배경 설화
고구려 유리명왕 3년(기원전 17년)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후 송씨(王后 宋氏)가 죽자 유리명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처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골천인(鶻川人)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나라(漢)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대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대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으로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하였다.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친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왕은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였다.
3. 작자에 대한 견해들
양주동, 이가원, 문선규, 유종국 등은 유리왕을 《황조가》의 작자로 본다. 정병욱은 작자 불명의 고대 가요가 한역되어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임동권은 민요에서 한역된 것으로 보며, 김승찬은 유리왕 시대의 한 부족장이 지은 것을 후대에 채록한 것으로 본다. 고정옥은 후인이 위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했다.
3.1. 유리왕 작자설
양주동, 이가원, 문선규, 유종국 등은 유리왕을 《황조가》의 작자로 본다. 정병욱은 작자 불명의 고대 가요가 한역되어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임동권은 민요에서 한역된 것으로 보며, 김승찬은 유리왕 시대의 한 부족장이 지은 것을 후대에 채록한 것으로 본다. 고정옥은 후인이 위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했다.
3.2. 민요 또는 부족장 작자설
양주동, 이가원, 문선규, 유종국 등은 유리왕을 《황조가》의 작자로 본다. 정병욱은 작자 불명의 고대가요가 한역되어 유리왕 설화에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임동권은 민요에서 한역된 것으로 보며, 김승찬은 유리왕 시대의 한 부족장이 지은 것을 후대에 채록한 것으로 본다. 고정옥은 후인이 위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