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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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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연총은 고려 예종 때의 문신으로, 요나라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여진 정벌에서 윤관의 부원수로 활약했다. 그는 신기군 징발 조건 완화를 건의하고 서경 궁궐 창건을 반대하는 등 정치적 행보를 보였으며, 여진 정벌에서는 9성을 쌓는 데 기여했으나 공험진 전투 패배로 관직을 잃기도 했다. 이후 복직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문하시중평장사로 재임하다가 사망하여 문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여진 정벌에서의 공로로 칭송받았으며, 후손으로는 윤관의 아들과 결혼한 딸과 오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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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총
기본 정보
오연총 영정 (조선 초기에 제작된 원본은 유실되었으며, 현전하는 영정은 1925년 3월 후손이 함경남도에 있는 사당에서 모사한 이모본이다.)
이름오연총
원어명吳延寵
한글오연총
한자呉延寵
일본어 가나ご えんちょう
일본어 가타카나オ・ヨンチョン
로마자 표기법 (2000년식)O Yeonchong
로마자 표기법 (매큔-라이샤워식)O Yǒnch'ong
출생일1055년
출생지송나라 사천성 성도(成都)
사망일1116년 음력 5월 10일 (향년 62세)
국적고려
시호문양(文襄)
가문해주 오씨
아버지오정(吳頲)
친인척생질 김함(金諴), 사돈 윤관(尹瓘)
관직
작위고려의 병부낭중
재임 기간1098년 8월 21일 ~ 1098년 9월 29일
학력 및 경력
학력문과 급제
군주
군주고려 숙종
군주 칭호국왕
기타
정당무소속

2. 생애

오연총은 젊은 시절 가문이 몰락했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문관으로 등용되었다. 1096년 요나라 도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기거랑, 병부랑중, 시랑을 역임하였다.[2] 1100년 송나라 휘종의 즉위를 기념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귀국길에 『태평어람』을 구해 돌아왔다.[2]

1107년 예종의 명을 받아 윤관과 함께 여진족 정벌에 부원수로 참여하여 승리하였다.[3] 이후 여진 정벌에서의 공로와 업적 등으로 1794년 홍양호가 편찬한 『해동명장전』에 선정되어 조선에서 영웅으로 여겨졌다. 오연총은 고려 성종 때 중국에서 건너온 오인유의 후손이다.[4]

2. 1. 출생과 가계

오연총은 오정(吳頲)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설에는 1055년(고려 문종 9년) 중국 사천성 성도 임양에서 오첨(吳瞻)의 18세손인 오백영(吳伯英)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의 초기 생애는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며, 가문에 일부 전한다. 오첨(吳瞻)은 오나라 태백왕의 25세손인 오기(초나라 재상)의 45대손이다. 500년(지증왕 1년)에 중국에서 신라로 건너온 오첨은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두 아들 중 둘째 아들 오응(吳應)이 그대로 신라에 남아서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족질 오우경과 980년에 중국 송나라에 들어가 사천성 성도 임앙에 살았는데, 다시 4대손인 오연총이 1076년(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7][8]

2. 2. 관료 생활 초반

같은 해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했을 때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로서 평장사(平章事) 이오, 참지정사(參知政事) 오수증,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임의 등과 함께 호종했고,[16] 다음 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한림학사(翰林學士),[17]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비서감(秘書監)·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18]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한림학사승지,[19]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事),[20]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를 차례로 거쳤다.[21]

1106년(예종 원년) 신기군(神騎軍)의 징발 조건 완화를 건의하여 허락받았다.[22] 같은 해 왕이 서경(西京)의 용언(龍堰)에 궁궐을 짓고 순행하는 일을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는데, 술사(術士)가 참서(讖書)를 이용해 이를 권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오연총은 남경의 공사가 막 끝나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음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0]

이듬해 평장사(平章事) 최홍사 등의 상주로 서경 궁궐 창건이 다시 거론되자, 역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끝내 최홍사 등의 말을 들었고,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10]

2. 3. 관료 생활

같은 해 왕이 남경(南京)에 행차했을 때,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로서 평장사(平章事) 이오·참지정사(參知政事) 오수증·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 임의 등과 함께 호종했고,[16] 다음 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한림학사(翰林學士)[17], 이듬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비서감(秘書監)·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18],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한림학사승지,[19]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事),[20]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를 차례로 거쳤다.[21]

1106년(예종 원년) 신기군(神騎軍)의 징발 조건 완화를 건의하여 허락받았다.[22] 같은 해 왕이 서경(西京)의 용언(龍堰)에 궁궐을 짓고 순행하는 일을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는데, 술사(術士)가 참서(讖書)를 이용해 이를 권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오연총은 남경의 공사가 막 끝나 백성들이 피로하고 재정이 고갈되었음을 이유로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0] 이듬해 평장사(平章事) 최홍사 등의 상주로 서경 궁궐 창건이 다시 거론되자, 역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으나 왕은 끝내 최홍사 등의 말을 들었고,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10]

1107년(고려 예종 2년) 여진 정벌에 대한 조의(朝議)가 결정되어 왕은 순천관(順天館)에 출어(出御)하여 열병한 후 그와 윤관에게 은포주식(恩布酒食)을 분사(分賜)하고 오연총에게 고려군 부원수(副元帥)를 제수하고 윤관에게는 고려군 원수(元帥)를 제수하여 30만 대군을 주어 여진정벌(女眞征伐)의 장도(壯途)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원수직을 사양하였으나 윤관의 권고로 받아들인다. 윤관이 개연(慨然)하여 말하기를 "오공이 아니면 누가 같이 출정하여 나라를 구하리까?" 하였다. 출전 할 때 왕은 경영전(景靈殿)에서 친히 부철(斧鐵: 철도끼)을 내렸다. 그해 여진족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이어 여진족(女眞族) 조을내(兆乙乃) 등 3280명이 투항(投降)하였다.

여진 원정을 승리로 이끈 뒤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지계(地界)를 정하고 웅주(雄州)·영주(英州)·복주(福州)·길주(吉州) 등 4성을 축성(築城)하였다. 그리고 두만강 건너 선춘령(先春嶺)에 고려국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는 것을 감독하였다.

2. 4. 여진 정벌

1107년(예종 2년) 여진족 정벌에 대한 논의가 결정되자, 고려 조정은 순천관(順天館)에서 열병식을 열었다. 예종은 윤관과 오연총에게 은으로 만든 그릇과 음식, 술을 하사하고, 오연총을 고려군 부원수(副元帥), 윤관을 고려군 원수(元帥)로 임명하여 30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오연총은 부원수직을 사양했으나, 윤관이 "오공이 아니면 누가 함께 출정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는가?"라며 설득하여 결국 출정을 결심했다. 출전할 때 예종은 경령전(景靈殿)에서 직접 철도끼를 하사했다. 그해 오연총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고, 여진족 조을내(兆乙乃) 등 3280명이 고려에 투항했다.[23]

대원수 윤관


척경입비도, 윤관 등이 여진족 정벌 직후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 (17세기 민화)


여진 원정에서 승리한 후, 오연총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지계(地界)를 정하고 웅주(雄州)·영주(英州)·복주(福州)·길주(吉州) 등 4성을 쌓았다. 그리고 두만강 건너 선춘령(先春嶺)에 고려국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는 것을 감독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고려 동북부에서 만주에 걸쳐 살면서 북부 국경지대인 함흥 지방을 위협했다. 고려의 북진 정책에 방해가 되었던 여진족을 소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출정했으나 실패했고, 그 원인이 여진족의 기병에 있음을 파악한 고려는 왕명을 받들어 별무반을 편성했다. 오연총은 도원수 윤관과 함께 17만 명의 별무반을 이끌고 동북면의 여진족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이 전투에서 여진족 5천 명을 사살하고 130여 명을 생포하는 큰 공을 세웠으며, 9개의 성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돌아왔다. 예종은 윤관, 오연총 등의 공을 치하하고 공신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무력 항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사신을 보내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보장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9성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일부 주화파들은 9성을 되돌려주자고 주장했고, 윤관과 오연총은 9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는 여진족의 공세에 9성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방어가 어려웠고,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커져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우세해졌다.

2. 4. 1. 3차 여진족 토벌 출정

1108년(예종 3) 웅주(雄州)에 다시 침입한 여진을 물리치고 개선하여, 양구진국(攘寇鎭國)의 공신호와 수사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 관직을 받았다.[10]

그러나 이듬해 여진이 다시 침입하여 길주(吉州)를 포위,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윤관(尹瓘)과 함께 출정했으나, 길목인 공험진(公嶮鎭)에서 여진에게 기습을 당해 크게 패했다.[24]

고려군은 다시 길주로 진군하려던 차에 여진 쪽에서 청한 화친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를 이유로 윤관과 함께 재신(宰臣)들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은 끝에, 1110년(예종 5)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10]

같은 해 표문을 올려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로 복직되었다.[10]

1109년 9월 동덕치원공신(同德致遠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가 되었으며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구마(廐馬) 한 필을 하사받았다.

1109년 10월 여진족이 길주성을 함락시키자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로서 윤관과 함께 출정,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기습공격을 당하였다. 병력을 잃고 토벌에 실패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11월 화친을 이유로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이 박탈되고 파면되었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다시 복직되었다.

2. 4. 2. 4차 여진족 토벌 전쟁

1108년(예종 3) 여진 정벌이 결정되자, 오연총은 윤관(尹瓘)의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었고,[23] 9성을 쌓은 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에 책록되고,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로 옮겼다. 같은 해 웅주(雄州)에 재침입한 여진을 물리치고 개선하여, 양구진국(攘寇鎭國)의 공신호와 수사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 관직이 더해졌다.[10]

그러나 이듬해에도 여진이 재침입해 길주(吉州)를 포위해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출정했으나, 길목인 공험진(公嶮鎭)에서 여진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24] 고려군은 다시 길주로 진군하려던 차에 여진 쪽에서 청한 화친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를 이유로 윤관과 함께 재신(宰臣)들의 계속되는 탄핵을 받은 끝에, 1110년(예종 5)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10] 같은 해 표문을 올려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로 복직되었다.[10]

1108년(예종 3) 1월 윤관,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가한촌(加漢村) 전투 중 험곡에서 윤관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하고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척후경(拓後京)이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구하여 극적으로 살아났다.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윤관 등과 함께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1109년 9월 동덕치원공신(同德致遠功臣)의 훈호(勳號)를 내리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가 되었으며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구마(廐馬)한 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여진이 재침입하여 웅주를 포위하자 부원수로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격파하고 되돌아왔다. 9월 다시 양구진국공신(攘寇鎭國功臣)에 수사도 연영전대학사(守司徒延英殿大學士)가 되었다.

2. 4. 3. 패전과 삭탈, 복직

1108년(예종 3) 여진 정벌 후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에 책록되고 좌복야(左僕射)·참지정사로 옮겼으며, 웅주(雄州)에 재침입한 여진을 물리친 공으로 양구진국(攘寇鎭國)의 공신호와 수사도(守司徒)·연영전대학사(延英殿大學士) 관직을 받았다.[10]

그러나 이듬해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하자 윤관(尹瓘)과 함께 출정했으나, 공험진(公嶮鎭)에서 여진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했다.[24] 고려군은 화친을 받아들였고, 1110년(예종 5) 오연총은 재신(宰臣)들의 탄핵으로 관직과 공신호를 박탈당했다.[10]

같은 해 표문을 올려 사양했음에도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로 복직되었다.[10]

2. 5. 말년

1112년(예종 7) 2월 27일 수사도(守司徒)·판병부사(判兵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더해졌고,[25] 같은 해 9월 12일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했다.[26] 이듬해 12월 다시 수태위(守太尉)·판예병부사(判禮兵部事)·상주국(上柱國),[27] 1114년(예종 9)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28] 1114년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녹훈되었다. 1114년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수사도, 수태위, 삼수국사 상주국 판이부, 예부, 병부판사(兵部判事)를 지내고 스스로 퇴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예종은 그가 유명한 학자이자 지략을 두루 갖춘 군인임을 들어 끝까지 그의 조언을 받고자 퇴직을 윤허하지 않았다.[29]

이후 병 때문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왕은 원로인 그에게서 계속 도움을 받고 싶었으므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10] 1116년 수사도(守司徒)를 거쳐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太尉監修國史上柱國)이 되었다.

1116년 3월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제수되었다. 1116년(예종 11) 5월 향년 62세로 졸하자,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0] 왕은 그의 장례 때 모든 신하들이 참석하도록 했다.[10]

아들이 없던 그는 조카뻘 되는 친척 오익(吳翊)을 양자로 입계(入系)하고 딸 1명은 윤관의 아들에게 출가하였다.

2. 6. 사후

1441년(세종 23년) 함경북도 북청 안북사(按北祠)에 배향되었고, 1925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덕산사(德山祠)가 건립되어 제향되었다.[1] 같은 해 3월 함경남도에 있던 문양공 사우에서 영정을 복사하여 덕산사에 봉안했으며, 덕산사는 남한 땅에 단 한 곳 밖에 없는 유일한 오연총의 사당이다.[1] 그의 후손과 유림들이 매년 음력 3월 3일 제를 올리고 있다.[1]

3. 평가

《고려사》는 오연총에 대해 그의 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30]

恂恂|순순중국어하게 행동을 삼갔으며, 충성과 검소를 자부하며 영예를 구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의 지론(持論)은 시폐(時弊)를 제거하는 데 힘쓰는 것이었으며,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공익에 피해를 준 적이 없었으므로, 왕이 그를 중히 여겼다고 한다.

여진족을 토벌하고 강동 6주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평화시에는 문신으로 임금을 모셨고 전시에는 장군으로 나라를 지키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문무를 겸비했다는 시각도 있다.[30]

1794년 홍양호가 편찬한 조선시대 명장의 전기인 『새로 풀어 쓴 해동명장전』에 오연총이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오씨
아들오익
사위윤관


5. 기타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시늉을 하며 풍류를 즐겼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1794년 홍양호(洪良浩)가 편찬한 조선시대 명장의 전기인 『새로 풀어 쓴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오연총(吳延寵)이 선정되어 있을 정도로,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연총은 고려 성종(成宗) 시대에 중국에서 건너온 오인유(吳仁裕)의 후손이다.[4]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논문
[5] 문서 김함(金諴) 묘지명
[6] 간행물 고려사 1116-05-10
[7] 서적 오씨30세계도 1397
[8] 문서 1397년 문헌
[9] 문서 김함(金諴) 묘지명
[10] 간행물 고려사
[11] 웹사이트 오연총:네이트 한국학 http://koreandb.nate[...]
[12] 간행물 고려사 1096-10-28
[13] 간행물 고려사 1100-07-12, 1101-06-07
[14] 서적 국역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15] 웹사이트 오연총 연보 http://xn--vk1b3pl92[...]
[16] 간행물 고려사 1104-07-27
[17] 간행물 고려사 1104-08-20
[18] 간행물 고려사 1105-06-09
[19] 간행물 고려사 1105-11-04
[20] 간행물 고려사 1105-11-23
[21] 간행물 고려사 1105-12-16
[22] 간행물 고려사 1106-01
[23] 문서 윤관
[24] 간행물 고려사 1109-05-16
[25] 간행물 고려사 1112-02-27
[26] 간행물 고려사 1112-09-12
[27] 간행물 고려사 1113-12-09
[28] 간행물 고려사 1114-03-13
[29] 서적 국역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30] 웹사이트 오연총 http://xn--vk1b3pl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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