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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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1877년 칠레에서 태어나 군 경력을 거쳐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1927년 대통령 선거에서 9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독재 정권을 운영하며 공공 사업을 추진했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면서 망명했다. 이후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지만,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 임기를 마쳤다. 이바녜스는 196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지명과 공항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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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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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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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
원어 이름 | Carlos Ibáñez del Campo |
존칭 접두사 | 장군 |
존칭 접미사 | OMCh |
출생일 | 1877년 11월 3일 |
출생지 | 리나레스, 칠레 |
사망일 | 1960년 4월 28일 |
사망지 | 산티아고, 칠레 |
사망 원인 | 알려지지 않음 |
안장 장소 | 산티아고 일반 묘지 산티아고, 칠레 |
배우자 | 로사 키로스 데 아빌라 그라시엘라 레텔리에르 벨라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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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Kalloseu Ibaneseu del Kampo |
군 경력 | |
소속 | 칠레 육군 |
복무 기간 | 1898년–1924년 |
계급 | 중령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
대통령 재임 기간 (1차) | 1927년 7월 21일 – 1931년 7월 26일 |
대통령 재임 기간 (2차) | 1952년 11월 3일 – 1958년 11월 3일 |
대통령 (19대) | 전임: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라라인 후임: 페드로 오파소 레텔리에르 |
대통령 (25대) | 전임: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 후임: 호르헤 알레산드리 로드리게스 |
내무부 장관 | 대통령: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임기 시작: 1927년 2월 9일 임기 종료: 1927년 4월 7일 전임: 마누엘 리바스 비쿠냐 후임: 카를로스 프뢰덴 |
국방부 장관 |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루이스 바로스 보르고뇨 (대행)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임기 시작: 1925년 1월 25일 임기 종료: 1927년 2월 25일 전임: 후안 에밀리오 오르티스 베가 후임: 후안 에밀리오 오르티스 베가 |
2. 유년 시절
1877년 11월 3일 프란시스코 이바녜스와 마리아 니에베스 델 캄포의 아들로 마울레 주 리나레스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아버지가 소유한 산프란시스코 농장에서 보냈다.
1896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산티아고에서 복무했으며, 1903년 엘살바도르 군사 작전에 참가하여 엘살바도르군 중령, 칠레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엘살바도르에서 로사 키로스 이 아빌라와 결혼했다. 경찰학교 교관, 이키케 경찰부장 등을 거쳐 1920년 남부 아라우카니아 지역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3. 군 경력
3. 1. 쿠데타 가담
1924년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던 중 육군 총사령관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바녜스도 이에 동참했다.[1] 알레산드리는 사임했고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1]
그러나 마르마두케 그로브 공군 대령과 이바녜스는 이듬해 쿠데타를 일으켜 알타미라노를 축출하고 에밀리오 벨로 코데시도를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군사정권을 수립했다.[2] 이바녜스와 그로브는 알레산드리가 돌아와 임기를 마칠 것을 요청했다.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무능한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커졌다.[3]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이끄는 칠레군이 사브르 소동(''ruido de sables'')을 일으켰는데, 이는 군인들이 의회 바닥에 칼을 두드리는 시위였다.[3] 군의 위협 속에서 알레산드리는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임을 제출했다. 이 사임은 의회에서 승인되지 않았지만, 알레산드리는 국외로 떠났고 알타미라노는 군사 정부 위원회를 수립했다.[3]
4. 정치 입문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대통령 재임 시절, 이바녜스는 육군 총사령관과 내무 장관을 겸임했다.[1] 알레산드리는 이바녜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알레산드리가 이바녜스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1] 결국 알레산드리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망명했다.[1]
이후 이바녜스는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혔지만, 보수당, 자유당, 급진당 등 칠레의 3대 주요 정당은 모두 이바녜스의 출마에 반대하며 그에게 압력을 가했다.[1]
4. 1. 1927년 대통령 선거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 이바녜스는 출마를 선언했으나, 보수당, 자유당, 급진당 등 칠레의 3대 주요 정당은 이바녜스의 출마에 반대하며 압력을 가했다.[1] 세 정당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단일 후보로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라라인을 합의하여 내세웠다.[1]이바녜스의 최측근 고문인 좌파 호세 산토스 살라스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바녜스가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했다.[1]
피게로아가 71%의 득표율로 승리했지만, 이바녜스는 내무부 장관으로 유임되었다.[1] 그러나 피게로아는 이바녜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27년에 사임했다.[1] 칠레 헌법에 따라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바녜스는 부통령이 되었고, 그 해 5월 22일에 대통령 선거를 발표했다.[1]
대통령 선거에서 전통적인 정당들은 불참하기로 결정했다.[1] 이바녜스의 유일한 경쟁자는 공산당의 엘리아스 라페르테였으나, 그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후안 페르난데스 군도에 유배되었다.[1] 이바녜스는 9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1]
5. 제1차 집권 (1927년 ~ 1931년)
이바녜스는 정권을 잡은 이후 독재 정치를 실시하였고, 의회의 정적으로 간주되는 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옛 동맹인 마르마두케 그로브도 포함되었다.[1] 그는 법령(decretos con fuerza de ley)을 활용하고, 의회 선거를 중단했으며, 상원과 하원 의원을 직접 임명하는 등 권력을 행사했다.[2]
이바녜스는 미국 차관에 많이 의존했는데, 이는 칠레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대규모 공공 사업을 건설하고 공공 지출을 늘렸다.[1][2][3]
1927년 칠레 카라비네로스(경찰)를 창설하였고 스스로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다.[1][3]
1929년 리마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 조약에 따라 칠레는 태평양 전쟁 당시 소유하던 타크나를 페루에 돌려주었다.[1][3]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찾아오면서 칠레 경제는 붕괴되었고 그의 지지율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바녜스의 대규모 공공 지출은 상황을 완화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망명 중인 그로브와 알레산드리를 포함한 반(反) 이바녜스 세력들은 복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1][2] 대규모의 대중적 불안이 있은 후, 이바녜스는 1931년 7월 26일 상원 의장인 페드로 오파소에게 직무를 위임한 후 망명길에 올랐으며,[2] 오파소는 내무부 장관인 후안 에스테반 몬테로에게 대통령직을 넘겼다.[3]
6. 망명과 귀국
1932년까지 이바녜스는 칠레로 귀국하지 못했다. 1937년 귀국한 이바녜스는 인민자유동맹(APL)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인민자유동맹은 사회주의자 연맹과 칠레 국가사회주의운동(MNS)으로 구성된 세력이었다.
1938년 9월 5일, 칠레 국가사회주의운동 당원 일부가 알레산드리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조기에 진압되었고, 참여한 약 60명의 칠레 국가사회주의운동 당원은 무장 해제된 후 카라비네로스에 의해 노동 보험 빌딩[3] 앞에서 거의 전원이 처형되었다. 노동 보험 빌딩 학살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이바녜스는 대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다. 인민자유동맹은 인민 전선의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1939년에는 아리오스토 에레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 쿠데타는 이바녜스 지지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곧 진압되었다.
1942년 대선에서 이바녜스는 여러 정당의 지지를 받았으나,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에게 패배했다.
7. 제2차 집권 (1952년 ~ 1958년)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바녜스는 농민노동당(Partido Agrario Laborista)과 인민사회당 등의 지지를 받아 출마했다. 그는 "빗자루"로 정치 부패를 "청소"하겠다고 약속하며 "희망의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존 정당을 비판했지만, 구체적인 제안은 부족했고 정치적 입장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
1952년의 볼리비아 혁명은 이바녜스의 추종자들에게 국민 포퓰리즘의 모델로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 임기 동안, 이바녜스는 노령과 건강 악화로 인해 내각에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당시 칠레 경제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했는데, 1954년에는 71%, 1955년에는 83%까지 치솟았다. 이바녜스는 클라인-삭스 미션의 도움으로 인플레이션을 33%까지 낮추는 데 성공했지만, 대중교통 비용은 50% 상승했고 경제 성장은 2.5%로 둔화되었다.[2]
정치적으로 중도 성향을 띠게 된 이바녜스는 ''민주주의 수호법''을 폐지하여 공산당을 합법화했다. 또한, 범죄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유화적인 접근을 취했다.[2]
일부 퇴역 군 장교들은 "리네아 렉타"(Línea Recta, 직선) 그룹을 결성하여 새로운 독재 정권 수립을 모의했다. 이바녜스는 이들과 만났으나, 자체 쿠데타 계획은 언론에 폭로되면서 스캔들로 번져 실패하고, 결국 퇴임하게 되었다.
8. 은퇴와 사망
이바녜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산티아고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0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숙적 아르투로 알레산드리의 아들인 호르헤 알레산드리 로드리게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그는 칠레 정치에 어떠한 지적 유산도 남기지 못했다.[2]
아이센 델 헤네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주는 아이센과 마가야네스의 고립된 지역을 칠레에 통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 푼타아레나스에 있는 헤네랄 이바녜스 공항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
9. 유산
아이센 델 헤네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주와 푼타 아레나스에 있는 프레시덴테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국제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0.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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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선거 | 칠레의 대통령 | 23대 | 무소속 | 98.0% | 223,741표 | 1위 | |
1952년 선거 | 칠레의 대통령 | 29대 | 무소속 | 46.79% | 446,439표 | 1위 |
참조
[1]
논문
"Nacional y Popular": Vínculos y transferencias entre la Revolución boliviana y el ibañismo, 1952-1956
https://www.scielo.c[...]
[2]
뉴스
El Chacal de Pupunahue: 64 años de los brutales homicidios de Máfil
https://www.diariofu[...]
2021-07-08
[3]
문서
労働保険ビ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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