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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4세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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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단체 초상화이다. 고야는 1789년부터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였으며, 1800년에 왕실 가족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1800년 5월부터 1801년 12월까지 제작했다. 이 작품은 고야가 궁정 화가가 된 지 1년 만에 완성되었으며, 왕비 마리아 루이사 데 팔마의 요청에 따라 각 인물을 따로 그린 후 한 화면에 배치했다. 작품은 왕실 가족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묘사하여, 풍자 또는 아첨이라는 상반된 해석을 낳았으며,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루이 미셸 반 로의 '펠리페 5세의 가족' 등 선행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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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4세의 가족
작품 정보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제목카를로스 4세의 가족
원어 제목 (스페인어)La familia de Carlos IV
화가프란시스코 고야
제작 연도1800–1801년
종류집단 초상화(가칭)
기법캔버스에 유화
크기가로 336cm, 세로 280cm
소장처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치마드리드

2. 제작 배경

1789년 고야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전에도 왕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항상 단독 초상화만 그렸다.[15] 1800년 봄, 고야는 왕실 가족 전체를 담은 대형 초상화를 의뢰받았다. 이는 스페인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최고 직위였으며, 이전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역임했다.

고야가 선배 거장인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을 본떠 이 작품을 제작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스페인이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나폴레옹의 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 등 어려운 시대 상황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

완성된 그림에서 왕가는 화가의 화실을 방문한 것처럼 보인다. 고야는 그림 왼쪽에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미래의 페르난도 7세아스투리아스 공,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여왕, 그리고 카를로스 4세 국왕을 중심으로 그림을 구성한 듯하다.[4] 왕비는 막내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등 가족 구성원 간의 친밀함이 드러난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달리 왕족의 하인이나 수행원은 등장하지 않으며, 서사 구조도 생략되어 단순히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여준다.[3]

''시녀들''처럼 화가는 캔버스 작업을 하고 있지만, 캔버스의 뒷면만 보인다. 벨라스케스 작품의 따뜻한 원근법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임박한 질식"과 같은 느낌을 준다. 왕족은 "관객을 마주한 무대"에 등장하는 반면, 화가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보고 스스로 판단하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2. 1. 제작 과정

1789년부터 고야는 카를로스 4세의 궁정 화가였다. 1800년 봄, 궁정 화가로 임명된 지 몇 달 후, 고야는 왕실의 모든 사람을 담은 큰 초상화를 제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 데 팔마가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 그림의 제작 및 구성 과정을 단계별로 확인할 수 있다.[15]

1800년 5월, 왕실이 아란후에스 궁전에서 한 시즌을 보내는 동안 고야는 이 작품에 착수했다. 그는 5월부터 7월까지 왕실 구성원 각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한 초상화를 그렸다. 왕비의 요청에 따라, 각 왕족을 따로 그림으로써 모두가 함께 포즈를 취하는 길고 지루한 시간을 피할 수 있었다.[16]

습작으로 그려진 소묘들은 모두 기본적인 형태를 포착하면서 붉은 기가 도는 밑칠과 같은 색조로 표현된 표정 구성에 공통점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화면의 비율이 정해지고, 색상의 농담에 음영이 더해졌다. 7월 23일 시점에서 고야는 10점의 초상화 습작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 중 5점에 서명하였으며, 이 5점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마리아 호세파 공주[17]
  • 스페인 왕자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18]
  • 스페인 왕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19]
  • 안토니오 파스쿠알 친왕[20]
  • 에트루리아 국왕 루이 1세[21]


잃어버린 습작은 아구스틴 에스테베나 공방에 의해 만들어진 모사가 많은 미술관과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예를 들어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이후 페르난도 7세의 초상화가 소장되어 있다.[22][23] 고야는 1800년 6월부터 1801년 12월까지 최종적인 작품 제작에 착수하여 완성 후 국왕에게 선보였다.[24]

3. 등장인물

''카를로스 4세의 가족''(숫자와 함께)


그림 속 인물들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다음과 같다.[6][37][38]

번호인물설명
1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국왕의 둘째 아들
2고야 (본인)배경 그림자에 희미하게 보임
3페르난도 7세국왕의 첫째 아들, 훗날의 왕
4마리아 호세파국왕의 누이
5마리아 안토니아 데 나폴레스제작 당시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음
6마리아 이사벨국왕의 딸
7마리아 루이사왕비
8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국왕의 막내 아들
9카를로스 4세국왕
10안토니오 파스쿠알국왕의 남동생, 돈
11카를로타 호아키나국왕의 장녀(머리 부분만)
12루이스 데 파르마국왕의 사위, 돈
13카를로스 루이스파르마 공작 부부의 아들(국왕의 손자), 훗날의 파르마 공작
14마리아 루이사국왕의 딸, 아기를 안고 있음


4. 작품 분석

이 단체 초상화는 고야가 궁정 화가가 된 지 1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최고 직위였으며, 이전에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역임했다. 왕가는 화가의 화실을 방문하는 것으로 보이며, 고야는 그림 왼쪽에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4]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의 가계도


그림 속 왕가 구성원들의 배열은 왕비 마리아 루이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화면 중앙에서 공주 마리아 이사벨의 어깨에 어머니답게 팔을 두른 그녀는 다른 손으로 왕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손을 잡고 있으며, 왕자는 다른 손을 왕과 잡고 있다. 왼쪽에는 훗날 페르난도 7세 (아스투리아스 공 = 황태자)와 그 등을 받쳐주는 듯한 왕자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가 있고, 우아한 복장으로 뒤돌아보는 듯한 자세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성은 당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황태자비이다. 오른쪽에는 공주 마리아 루이사가 남편인 파르마 공작루이스(루도비코)와 함께 어린 왕자 카를로스 루이스를 안고 있다. 배경에는 왕의 자매인 마리아 호세파와 안토니오 파스쿠알이 있고, 안토니오 파스쿠알 옆에는 옆모습만 보이는 여성이 있는데, 이 여성은 2년 전 사망한 안토니오 파스쿠알의 아내 또는 왕의 장녀로 수년 동안 스페인에 오지 않아 고야가 그릴 기회가 없었던 카를로타 호아키나 공주로 추정된다.[27][39][40]

이러한 인물 배열은 왕조의 연속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다산의 어머니로서 왕비의 모습을 강조하고, 미래의 황태자비를 그려 넣어 자손 번영을 시사하며, 마리아 루이사의 팔 안의 어린 왕자를 통해 이를 보장한다.[27]

고야는 왕실 사람들을 프리즈와 같이 배치하고, 호화로운 비단 의상을 입고 보석과 장식품을 착용한 모습으로 그렸다. 남성들은 카를로스 3세 훈장, 금양모 훈장 등을 착용하고, 여성들은 마리아 루이사 훈장의 수장을 착용하고 있다. 화가는 이러한 세부 묘사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왕실 인물들을 존엄하게 표현하고, 국왕의 온화한 성격을 강조했다.

벨라스케스에게 헌정된 듯한 표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두 왕조를 연결하고, 그들 왕조의 개념을 풍부하게 느끼게 한다.[27] 배경에는 2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작가와 주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4. 1. '시녀들'과의 비교

디에고 벨라스케스시녀들펠리페 4세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 그림은 카를로스 4세의 가족 그림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57]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구도와 자화상 배치 등의 영향을 받았다.[60]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하지만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나타난 바로크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더 집중했다.[62] 벨라스케스가 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했다면, 고야는 왕가의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두 그림의 공간 구성 또한 차이를 보인다. 시녀들의 공간은 깊이감과 역동성을 가지는 반면, 고야의 그림은 답답하고 밀폐된 느낌을 준다. 프레드 리히트는 벨라스케스의 화실과 달리 고야의 화실은 "불편하고 불쾌한 감옥"과 같다고 표현했다.[40]

Janis Tomlinsones에 따르면, 벨라스케스가 왕가를 신이 선택한 존재로 묘사하며 일종의 "공현"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고야는 왕가의 기원과 미래를 불분명하게 묘사하여 이러한 신성함을 제거했다.[40]

5. 해석 논란: 풍자 vs. 아첨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는 이 작품을 '막 복권에 당첨된 구멍가게 주인'의 그림이라고 묘사했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보고 "왕은 마치 바텐더 같고, 왕비는 여급 같다!"라고 외쳤다고 한다.[29][30][4] 이들은 고야가 왕족을 풍자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미술 평론가 로버트 휴즈는 이러한 풍자설을 일축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풍자하면서 궁정 화가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이건 조롱이 아니다. 오히려 아첨에 가깝다."라고 주장했다.[7] 그는 고야가 미래의 페르난도 7세를 꽤 위엄 있게 묘사한 점을 예로 들었다.[7]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경우, 잦은 출산과 질병으로 인해 실제로는 아름다움을 잃은 상태였지만, 고야는 그녀를 이상화하여 묘사했다.[8] 물론, 조악한 틀니, 창백한 피부,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의 대조 등은 풍자의 소재로 볼 여지가 있다.[9]

존 J. 치오팔로는 "벨라스케스는 예술과 자연 세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했지만, 고야는 낭만주의 시대의 부산물로, 예술과 자신의 마음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했다"고 평했다.[10]

5. 1. 정치적 맥락

이 그림은 고야가 궁정 화가로 임명된 지 1년 후에 완성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1808년에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카를로스 4세의 왕실은 붕괴되었다.[3]

훗날 왕위를 회복한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36]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훗날 이 작품에 대해 "고야는 일족의 미래마저 이 작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 그렸다"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36]

6. 선행 작품의 영향

스페인에서는 단체 초상화가 드물게 제작되었다. 종교화에서는 작품 제작에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을 그려 넣는 경우가 있었는데,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나 코엘료의 『카를로스 2세에 의한 성체 숭배』와 같이 복잡한 구성을 가진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왕실 초상화의 선례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있었으며, 고야는 이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57]

반 로의 『펠리페 5세의 가족』은 스페인 부르봉 왕조 궁정 단체 초상화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고야는 이 작품의 이상화된 표현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58] 반 로의 작품은 왕실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혈통과 아름다움의 이상에 가깝게 묘사하기 위해 웅장한 가구와 왕실 사람들의 이상화된 태도를 강조했지만, 고야는 이러한 특성을 버리고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국왕을 그렸다.

반 로, ''펠리페 5세의 가족'', 1743년.


고야는 이전에도 『돈 루이스 데 보르본 친왕의 가족』(1783년, 이탈리아 파르마현)에서 자화상을 포함시킨 적이 있는데, 이는 『시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59] 고야는 『돈 루이스 데 보르본 친왕의 가족』에서 왕자가 트럼프를 하는 동안 그의 가족, 친구, 하인들이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묘사했지만, 자신의 모습은 그림자 속에 겸손하게 그려 넣어 주제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고야, ''돈 루이스 데 보르본 친왕의 가족'', 1783년.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고야는 『시녀들』과 유사하게 캔버스 뒤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지만, 수석 궁정 화가로서 벨라스케스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벨라스케스에게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고야는 여기서도 겸손하게 거리를 두는 수법을 사용하여 "배경의 그림자 속에 들어간 캔버스의 위치에 자리했다".[59]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시녀들』을 연상시키는 또 다른 특징은 후경 벽에 두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점과, 고야가 캔버스 뒤에서 왕을 섬기는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그렸다는 점이다.[60] 고야는 렘브란트, 자연과 함께 벨라스케스를 자신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여겼다.[61] 그러나 고야는 벨라스케스의 걸작과도 거리를 두었고, 유사성은 주변적인 세부 사항에서만 발견되며, 그려진 공간은 깊이가 없고 바로크적인 암시는 없다.[62]

아라곤주 출신의 고야는 밀폐되고 빛이 부족한 좋지 않은 공간에 인물을 배치했는데, 이는 화가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리히트는 벨라스케스와 달리 화가의 공방이 고야에 의해 "불편하고 불쾌한 감옥"으로 변환되었다고 언급하였다.

고야는 궁정에서 아미고니가 그린 『페르난도 6세와 바르바라 데 브라간자의 궁정』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이 작품은 현재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남아 있는 것은 이 작품을 바탕으로 한 판화뿐이며, 국왕 부처가 화면 중앙에 배치되고 가족과 측근들이 양쪽에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고야의 작품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40]

아미고니의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을 바탕으로 한 판화, ''페르난도 6세와 바르바라 데 브라간자의 궁정''.

참조

[1] 웹사이트 The Family of Carlos IV https://www.museodel[...] 2018-07-23
[2] 서적 1995
[3] 서적
[4] 서적 1989
[5] 서적 Gardner's Art Through the Ages https://archive.org/[...] Thomson/Wadsworth 1991
[6] 웹사이트 Edward J. Olszewski – ''Exorcising Goya's "The Family of Charles IV"'' http://myhomepage.fe[...]
[7] 기타 'Goya, Crazy like a Genius' An Oxford Film and Television Production for BBC and RM associates
[8] 서적 The Self-Portraits of Francisco Goya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9] 서적 The Self-Portraits of Francisco Goya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0] 서적 The Self-Portraits of Francisco Goya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11] 웹사이트 «La familia de Carlos IV» http://www.museodelp[...] 2010-10-21
[12] 웹사이트 «La familia de Felipe V» http://www.museodelp[...] 2010-10-21
[13] 웹사이트 «La familia de Felipe IV, o Las Meninas» http://www.museodelp[...] 2010-10-21
[14] 간행물 El retrato español del Greco a Picasso
[15] 서적
[16] 서적
[17] 웹사이트 «María Josefa de Borbón y Sajonia, infanta de España» http://www.museodelp[...] 2010-10-21
[18] 웹사이트 «Carlos María Isidro de Borbón y Borbón-Parma, infante de España» http://www.museodelp[...] 2010-10-21
[19] 웹사이트 «Francisco de Paula Antonio de Borbón y Borbón-Parma, infante de España» http://www.museodelp[...] 2010-10-21
[20] 웹사이트 «Antonio Pascual de Borbón y Sajonia, infante de España» http://www.museodelp[...] 2010-10-21
[21] 웹사이트 «Luis de Borbón, príncipe de Parma y rey de Etruria» http://www.museodelp[...] 2010-10-21
[22] 서적
[23] 웹사이트 Ferdinand VII (1784–1833), When Prince of Asturias http://www.metmuseum[...] 2010-12-21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간행물 El retrato español del Greco a Picasso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웹사이트 リアル・マドリード プラド美術館とスペイン王室宮殿 3/4 かくして王家の歴史は永遠に…… 新たな異国の王がやってきた https://crea.bunshun[...] CREA TRAVELLER/文藝春秋 2012-12-10
[32] 서적 Francisco Goya https://books.google[...] Parkstone International 2019-12-09
[33] 기타 'Goya, Crazy like a Genius' An Oxford Film and Television Production for BBC and RM associates
[3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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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웹사이트 フランシスコ・デ・ゴヤ「カルロス4世の家族」 https://www.tv-tokyo[...] テレビ東京 2020-02-03
[37] 서적 Gardner's Art Through the Ages https://archive.org/[...] Thomson/Wadsworth 1991
[38] 웹사이트 Edward J. Olszewski – ''Exorcising Goya's "The Family of Charles IV"'' http://myhomepage.fe[...] 2012-12-24
[39] 문서 Rapelli, pág. 58
[40] 웹사이트 Licht, ficha en Museo del Prado http://www.museodelp[...]
[41] 문서 Camón, t. III, págs. 124-126
[42] 문서 Triadó Tur, pág. 51
[43] 문서 Bozal, 1994, pág. 18
[44] 문서 Rapelli, pág. 60
[45] 문서 Rapelli, pág. 61
[46] 문서 Triadó Tur, pág. 52
[47] 문서 Glendinning (2005), pág. 98
[48] 문서 Glendinning (2005), pág. 99
[49] 문서 Stoichita, pág. 293
[50] 웹사이트 «Retrato del Infante Carlos María Isidro», ''Catálogo de la exposición celebrada en el Museo de Zaragoza del 3 de octubre al 1 de diciembre de 1996'', n.º 9: «Cristo crucificado» http://www.almendron[...] 2010-10-24
[51] 문서 Hagen, pág. 28
[52] 문서 Triadó Tur, pág. 53
[53] 문서 Mena, Catálogo de la exposición ''El retrato español de Goya a Picasso'', 2005, pág. 211
[54] 문서 Triadó Tur, pág. 54
[55] 문서 Hagen, pág. 29
[56] 문서 Triadó Tur, pág. 55
[57] 문서 Glendinning (2005), pág. 100
[58] 문서 Glendinning (2005), pág. 101
[59] 문서 Nigel Glendinning, Catálogo de la exposición ''El retrato español del Greco a Picasso'', 2005, p. 232
[60] 문서 Cirlot, pág. 72-73
[61] 문서 Glendinning (2005), pág. 121
[62] 문서 Bozal, op.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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