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4세 (스페인)
1. 개요
카를로스 4세는 스페인의 국왕으로, 카를로스 3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지적인 면에서는 부친에 미치지 못했지만, 강인한 체력을 지녔다. 1788년 즉위 후 사냥에 몰두하고 국정을 왕비의 총신인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맡겼다. 프랑스 혁명 이후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으나 패배했고, 바젤 조약을 통해 히스파니올라 섬 일부를 프랑스에 넘겨야 했다. 이후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트라팔가 해전에서 패배하며 관계가 약화되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퇴위하여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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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호 | 스페인 국왕 |
|---|---|
| 전체 이름 | 카를로스 안토니오 파스쿠알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후안 네포무세노 호세 야누아리오 세라핀 디에고 데 보르본 이 사호니아 |
| 출생일 | 1748년 11월 11일 |
| 출생지 | 나폴리 왕국, 포르티치 |
| 사망일 | 1819년 1월 20일 |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팔라초 바르베리니 |
| 매장지 | 엘 에스코리알 |
| 종교 | 가톨릭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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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 1788년 12월 14일 |
|---|---|
| 퇴위 | 1808년 3월 19일 |
| 선임자 | 카를로스 3세 |
| 후임자 | 페르난도 7세 |
| 섭정 유형1 | 수석 장관 |
| 섭정1 | 플로리다블랑카 백작 (1788-1792) 아란다 백작 (1792-1792) 평화 공작 (1792-1798) 프란시스코 사아베드라 데 상로니스 (1798-1799) 마리아노 루이스 데 우르키호 (1799-1799) 페드로 세바요스 (1799-1808) 곤살로 오파릴 (1808-1808) |
| 배우자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1765년 결혼, 1819년 사망) |
|---|---|
| 자녀 | 카를로타 조아키나,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여왕 마리아 아말리아 왕녀 마리아 루이사, 에트루리아 여왕 페르난도 7세 카를로스, 몰리나 백작 마리아 이사벨라, 양시칠리아 여왕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왕자 |
| 왕가 | 부르봉 |
| 왕조 | 스페인 부르봉 왕조 |
| 아버지 | 카를로스 3세 |
| 어머니 | 마리아 아말리아 데 사호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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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4세 (스페인)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카를로스 4세의 의뢰로 1800년에서 1801년 사이에 그린 단체 초상화로, 고야가 궁정 화가가 된 후 왕족 전체를 묘사한 첫 작품이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카를로스 4세 (스페인) -
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
마리아 루이사 디 파르마 공녀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왕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친프랑스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염문설로 비판받았고 나폴레옹 침략으로 망명 생활을 했다. -
아스투리아스 공 -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후계자 부재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야기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을 가져온 스페인 국왕이다. -
아스투리아스 공 -
펠리페 2세
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며 종교 개혁 세력을 탄압하다가 1598년에 사망했다. -
1819년 사망 -
카메하메하 1세
카메하메하 1세는 하와이 제도를 통일하고 하와이 왕국을 건국했으며, 뛰어난 외교술로 하와이의 독립을 지킨 인물이다. -
1819년 사망 -
제임스 와트
제임스 와트는 뉴커먼 기관을 개량하여 현대적인 증기 기관을 개발하고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여 산업 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와트(단위)로 기념된다.
2. 어린 시절
카를로스 3세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차남으로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형 펠리페는 지능 발달 문제와 간질로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카를로스 4세는 어머니로부터 좋은 체격과 강인한 체력을 물려받았고, 젊은 시절 레슬링을 즐겼다.
지적인 면에서는 아버지와 달리 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사촌 여동생인 파르마 공녀 마리아 루이사와의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바보같은 카를로스야! 여자 따위는 모두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3. 즉위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군주의 신성함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절대적이고 강력한 왕의 모습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정부에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 카를로스 4세는 사냥에 열중했고, 정부의 일은 그의 아내 마리아 루이사와 그가 제1차관으로 임명한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맡겨졌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된 직후 벌어진 1차 대불동맹 전쟁에 스페인은 동맹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툴롱 포위전과 피레네 전쟁에서 패배했다. 1795년 바젤 조약을 체결하여 히스파니올라섬 일부를 프랑스에 넘기는 조건으로 종전에 합의했다.
1796년 산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선전포고했으나, 상비센테 곶 해전에서 패배했다. 1800년 비밀리에 산일데폰소 조약을 맺고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1803년 딸 마리 루이즈가 천연두에 감염되자, 의사 프란시스코 데 바르미스에게 국비로 스페인 식민지에 백신을 전하도록 지시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대륙봉쇄령을 지원했다. 나폴레옹이 1807년에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고도이는 친프랑스 기조로 전환했지만, 프랑스는 더 이상 스페인과의 동맹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4. 퇴위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포르투갈을 응징하기 위해 1807년 퐁텐블로 조약을 맺고 스페인 영토를 통과했다. 1808년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내 주요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이 커졌다. 1808년 3월 18일, 아란후에스(Aranjuez)에서 왕세자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1808년 3월 19일, 카를로스 4세는 퇴위하고 페르난도 7세가 즉위했으나, 며칠 뒤 퇴위를 번복하고 나폴레옹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이는 나폴레옹에게 스페인 정치에 개입할 명분을 주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모두 바요나로 유도하여 강제로 폐위시키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했다. 카를로스 4세는 퐁텐블로에 감금되었고, 페르난도 7세는 발렌시아 성에 유폐되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영국과 양모 밀무역을 하며 대륙봉쇄령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스페인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5. 망명과 죽음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조를 폐위시킨 후, 카를로스 4세 전 국왕과 그의 아내, 그리고 전 총리 고도이는 프랑스에서 먼저 콩피에뉴 성에 억류되었고, 그 후 3년 동안 마르세유(그의 이름을 딴 구역이 생겼다)에 억류되었다. 나폴레옹이 세운 정권이 붕괴된 후, 페르난도 7세가 왕좌에 복위했다. 카를로스 4세는 1812년까지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 정착했다. 그의 아내는 1819년 1월 2일에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 4세도 같은 해 1월 20일에 사망했다. 프랜시스 로널즈 경은 그의 여행 일기에 장례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았다.
6. 자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와 1765년에 결혼하여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7명이 성년까지 생존했다.
| 이름 | 생애 | 비고 |
|---|---|---|
| 카를로타 조아퀴나 | 1775년 4월 25일 – 1830년 1월 7일 | 포르투갈 왕비 (주앙 6세와 결혼) |
| 마리아 아말리아 | 1779년 1월 9일 – 1798년 7월 22일 | 스페인 왕자비 |
| 마리아 루이사 | 1782년 7월 6일 – 1824년 3월 13일 | 에트루리아 왕비 (루도비코 1세와 결혼) |
| 페르난도 7세 | 1784년 10월 14일 – 1833년 9월 29일 | |
|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베니토 | 1788년 3월 29일 – 1855년 3월 10일 | |
| 마리아 이사벨 | 1789년 7월 6일 – 1848년 9월 13일 | 양시칠리아 왕비 (프란체스코 1세와 결혼) |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1794년 3월 10일 – 1865년 8월 13일 |
7. 평가
카를로스 4세는 선량하고 독실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전제적이고, 무기력하며, 멍청하다'라고 묘사되기도 했다. 그는 한때 레슬러였으며 사냥을 즐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카를로스 4세의 공식 궁정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는데, 많은 미술 평론가들은 이를 국왕의 둔하고 공허한 모습에 대한 풍자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