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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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 국왕으로, 아버지 카를로스 4세의 퇴위 후 즉위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퇴위당하고 발랑세이 성에 유폐되었다. 이후 스페인 독립 전쟁이 발발하고, 1814년 복위했지만 절대 왕정을 부활시키고 1812년 헌법을 폐지했다. 그는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반프리메이슨 운동을 강화했으며, 아메리카 식민지 독립으로 제국 수입이 감소했다. 말년에는 왕위 계승 문제로 내전(카를리스트 전쟁)의 씨앗을 뿌렸으며, 역사학자들은 그의 통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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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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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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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르난도 7세 |
원어 이름 | Fernando VII |
전체 이름 | 페르난도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도밍고 비센테 페레르 안토니오 호세 호아킨 파스쿠알 디에고 후안 네포무세노 헤나리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라파엘 미겔 가브리엘 칼리스토 카예타노 파우스토 루이스 라이문도 그레고리오 로렌소 헤로니모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
별칭 | 열망왕 (el Desea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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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정보 | |
작위 | 스페인 국왕 |
첫 번째 재위 기간 | 1808년 3월 19일 – 1808년 5월 6일 |
선임자 | 카를로스 4세 |
후임자 | 호세 1세 또는 나폴레옹 1세 |
두 번째 재위 기간 | 1813년 12월 11일 – 1833년 9월 29일 |
후임자 | 이사벨 2세 |
섭정 | 빅토르 다미안 사에즈 (1823–1823) 카를로스 마르티네스 데 이루호, 카사 이루호 후작 (1823–1823) 나르시소 헤레디아, 오팔리아 백작 (1823–1824) 프란시스코 세아 베르무데스 (1824–1825) 페드로 데 알칸타라 알바레스 데 톨레도, 인판타도 공작 (1825–1826) 마누엘 곤살레스 살몬 (1826–1832) 안토니오 데 사베드라 이 호프레, 라 알쿠디아 백작 (1833–1833) |
총리 | "총리 목록" 참고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784년 10월 14일 |
출생지 | 엘에스코리알, 스페인 |
사망일 | 1833년 9월 29일 (48세) |
사망지 | 마드리드, 스페인 |
매장지 | 엘에스코리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1802년 결혼, 1806년 사망)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사벨 (1816년 결혼, 1818년 사망)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 (1819년 결혼, 1829년 사망)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29년 결혼) |
자녀 | 이사벨 2세 루이사 페르난다 데 보르본 |
아버지 | 카를로스 4세 |
어머니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
왕가 | |
왕가 | 부르봉 |
왕조 | 스페인 부르봉 왕조 |
2. 생애
페르난도 7세는 카를로스 4세와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으로, 마드리드 근교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왕위 계승자였으나, 부모와 총신 마누엘 고도이에 의해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1805년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1807년 10월 페르난도는 엘 에스코리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부모에게 항복했다.
아랑후에스 폭동으로 카를로스 4세가 1808년 3월 퇴위하자, 페르난도는 왕위에 올라 나폴레옹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808년 5월 6일 퇴위당하고, 발랑세이 성에 6년간 감금되었다. 찰스 오만은 나폴레옹이 전 외무장관 탈레랑을 놀리기 위해 발랑세이를 선택했다고 기록했다.[6]
스페인 상층부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지만, 국민들은 반발하여 반도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방 훈타가 결성되었고, 바일렌 전투 후 카스티야 의회는 1808년 8월 바욘느에서의 퇴위를 무효로 선언, 페르난도 7세를 다시 국왕으로 선포했다. 1809년 1월, 영국도 페르난도 7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7]
1813년 12월, 나폴레옹은 발렌사이 조약을 통해 페르난도 7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스페인 국민은 처음에는 페르난도를 환영했으나, 그는 외세 침략과 혁명으로 변화된 스페인을 마주했다. 그는 1812년 스페인 헌법에 따라 통치해야 했지만,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8]
1814년 3월, 프랑스는 페르난도를 스페인 군에 인계했고, 그는 보수파와 교회 지도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헌법 폐지를 명령하고 자유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그는 헌법이 불법적이라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코르테스 소집을 약속했지만, 실행하지 않고 부르봉 왕가의 절대왕정 교리를 재확인했다.
스페인 아메리카 독립 전쟁으로 스페인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페르난도의 정부는 불안정했고, 그는 자주 장관을 교체했다. 프리드리히 폰 겐츠는 1814년과 1815년에 페르난도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페르난도는 웰링턴 공작을 황금양모 기사단의 첫 개신교도 회원으로 임명했다.
멕시코 독립 전쟁 중,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와 후안 오도노후는 코르도바 조약을 체결하고 제1 멕시코 제국을 수립, 페르난도 7세에게 멕시코 황위를 제안했으나, 페르난도는 이를 거부했다.[10]
자유주의 3년 동안 여러 차례의 군사 반란이 있었고, 1820년 라파엘 델 리에고의 반란으로 1812년 스페인 헌법이 부활되었다. 페르난도 7세는 예수회를 복권시켰으나, 자유주의자들은 예수회를 공격했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강력히 반대하며 탄압했다.[12]
1823년,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스페인을 침공했고, 혁명 세력은 페르난도 7세를 카디스로 옮겼다. 트로카데로 전투 이후 페르난도 7세는 석방되었으나 보복이 뒤따랐다. 앙굴렘 공작은 페르난도의 행동에 항의했다.
페르난도 7세의 통치 마지막 10년("불길한 10년")은 절대주의 복고, 자유당 탄압, 1827년 카탈루냐 반란 진압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1830년 5월, 페르난도 7세는 1830년 실정법을 발표하여 딸들의 왕위 계승을 허용했다. 1830년 10월, 딸 이사벨 2세가 태어나면서 카를로스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14] 페르난도 7세 사후, 카를로스는 자신이 왕이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카를로스 전쟁이 발발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은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1833년 10월 사면령을 발표했다.[14][15]
2. 1. 유년기 및 청년기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 드 파르마의 장남으로 마드리드 인근 엘에스코리알의 광대한 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외손녀이다. 즉 페르난도의 외할머니인 엘리사베타는 루이 15세의 딸이기에 루이 16세는 그에게 외가쪽으로 아저씨가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고, 그에 따른 프랑스 혁명 전쟁과 연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전 유럽은 거대한 격랑에 휩싸였다. 전란은 체제의 부패와 노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페인에 큰 비극을 초래했고, 오랫동안 국제무대에서 벗어나 있던 스페인을 유럽에서 가장 큰 관심사로 만들었다.
소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왕위계승자의 지위에 있었지만, 부왕과 그들이 총애하는 마누엘 데 고도이(모친의 애인)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는 괴로운 입장에 내몰려, 원한을 가슴에 품고서도 자중하고 있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1805년 반란을 야기했다. 1807년 10월, 페르난도는 엘 에스코리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음모가 발각되자 페르난도는 부모에게 항복했다.
2. 2.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 (1807년)
1805년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는 등 정정 불안이 계속되던 1807년 10월, 페르난도는 〈에스코리알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되었다.[1] 이 음모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아 정부 내 자유주의 개혁파가 카를로스 4세 등을 축출하고 페르난도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었다.[1] 페르난도는 개혁파의 희망의 별이라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모가 발각되자 곧바로 그들을 배신하고 부모의 지시에 따랐다.[1]2. 3. 첫 번째 즉위와 퇴위 (1808년)
1808년 3월, 아버지 카를로스 4세가 아랑후에스에서 일어난 민중 폭동으로 퇴위하자 페르난도가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 페르난도는 프랑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직접 통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페르난도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친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세웠으며,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스스로를 호세 1세라고 칭했다. 그 후 스페인 본토는 나폴레옹 지배에 반발하는 민중이 조직한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7년 동안 스페인 독립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페르난도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뚜렷한 대책도 없는 상태로 프랑스 발랑세 성에 사로잡혀 있었다.[5]역사가 찰스 오만은 나폴레옹이 스페인 문제에 무관심했던 전 외무장관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의 성 소유주를 놀리기 위한 실질적인 장난으로 발랑세를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
스페인 정부 상층부는 페르난도의 퇴위와 나폴레옹이 그의 형제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선택한 것을 받아들였지만, 스페인 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반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새로운 프랑스 국왕에 반대하여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지방 훈타가 설립되었다. 바일렌 전투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후, 카스티야 의회는 스스로 입장을 바꾸어 1808년 8월 11일 바욘느에서 있었던 퇴위를 무효로 선언하였다. 8월 24일,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스페인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최고 중앙 훈타의 설립을 위한 의회와 지방 훈타 간의 협상이 완료되었다. 1809년 1월 14일, 영국 정부는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였다.[7]
2. 4. 스페인 독립 전쟁 (반도 전쟁, 1808년-1814년)
1808년 3월 아랑후에스에서 일어난 민중 폭동으로 아버지 카를로스 4세가 퇴위하자 페르난도가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다. 페르난도는 프랑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직접 통치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결국 페르난도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친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세웠으며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스스로를 호세 1세라고 칭했다. 그 후 스페인 본토는 나폴레옹 지배에 반발하는 민중이 조직한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7년 동안 스페인 독립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페르난도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뚜렷한 대책도 없는 상태로 프랑스 발랑세 궁전에 사로잡혀 있었다.2. 5. 두 번째 즉위와 복고 (1814년)
나폴레옹은 여러 전선에서 심각한 패배를 경험한 5년 후인 1813년 12월 11일, 페르난도 7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는 발렌사이 조약(Treaty of Valençay)에 서명했고, 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8] 스페인 국민들은 프랑스와의 지나치게 가까운 동맹으로 나폴레옹의 점령과 반도 전쟁을 야기했다고 비난받은 친프랑스파(afrancesados)의 정책을 비난하며 처음에는 페르난도를 환영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곧 외세의 침략과 국내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이 탄생했음을 알게 되었다.[8] 그의 이름으로 스페인은 독립을 위해 싸웠고, 그의 이름으로 준타(junta)가 스페인 아메리카를 통치했다. 스페인은 그가 6년 전 포기했던 절대 군주제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이제 자유주의적인 1812년 헌법에 따라 통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스페인 영토에 들어가기 전에 페르난도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헌법에 따라 통치할 것을 보장해야 했지만, 그렇게 할 것이라는 미지근한 암시만 주었다.[8]1814년 3월 24일, 프랑스는 그를 지로나(Girona)에서 스페인 군대에 인계했고, 따라서 마드리드로 향하는 그의 행렬이 시작되었다.[9] 이 과정과 그 후 몇 달 동안 그는 보수파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헌법을 거부하도록 격려받았다. 5월 4일, 그는 헌법 폐지를 명령했고, 5월 10일에는 헌법에 책임이 있는 자유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페르난도는 헌법이 그의 동의 없이 그리고 전통적인 형식 없이 그의 부재 중에 불법적으로 소집된 코르테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페르난도는 처음에 전통적인 코르테스를 소집할 것을 약속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고, 주권이 오직 그의 인격에만 있다는 부르봉 왕가의 교리를 재확인했다.

한편, 독립 전쟁이 아메리카에서 발발했고, 많은 공화당 반군이 분열되어 있고 많은 지역에서 왕당파 정서가 강했지만,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세금 수입을 운반하는 스페인 보물선(Spanish treasure fleet)이 중단되었다. 스페인은 거의 파산했다.
페르난도의 복고된 독재는 그의 총애를 받는 소수의 ''카마릴라(camarilla)''에 의해 이끌어졌지만, 그의 정부는 불안정해 보였다. 변덕스럽고 사나운 그는 몇 달마다 장관을 바꿨다. 1814년 프리드리히 폰 겐츠(Friedrich von Gentz)는 "국왕은 자신의 총리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을 체포하고 잔혹한 적들에게 넘겨줍니다"라고 썼고, 다시 1815년 1월 14일에는 "국왕은 자신을 너무 비하하여 그의 나라의 주요 경찰관이자 교도소장 이상이 되지 못했습니다"라고 썼다.
국왕은 자신의 편에 선 외국의 노력을 인정했다. 스페인 황금양모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의 수장으로서 페르난도는 반도 전쟁에서 영국군을 지휘한 웰링턴 공작을 기사단의 첫 번째 개신교도(Protestant) 회원으로 임명했다.
2. 6. 자유주의 3년 (1820년-1823년)
1820년 라파엘 델 리에고가 이끄는 군대의 반란으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난도 7세는 곧바로 붙잡혔다. 복위 후 예수회를 복권시켰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예수회를 탄압과 절대주의의 상징으로 여겨 공격했고, 1822년 마드리드에서 25명의 예수회 신부가 살해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 자유주의 정권은 예수회를 추방했고, 권위주의 정권은 예수회를 복권시켰다.페르난도 7세는 스페인의 프리메이슨을 자유주의 혁명의 도구이자 스페인 왕관과 가톨릭 신앙의 적이며, 주로 프랑스 대동방과 같은 외세에 종속된 존재로 간주하며 강력히 반대했다.[12] 스페인 종교재판과 예수회를 복권시킨 후, 1814년 5월 4일 그는 모든 스페인 프리메이슨을 공개적으로 반역자로 선언했다.[12] 같은 해 교황 비오 7세는 프리메이슨에 반대하는 교령을 발표했고, 페르난도 7세는 이를 승인하여 스페인 종교재판의 칙령으로 삼았다. 스페인 사회 고위층의 프리메이슨들이 체포되었고 프리메이슨 조직은 탄압받았다.
페르난도 7세는 1820년 쿠데타와 자유주의 3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식민지의 상실을 프리메이슨의 탓으로 돌렸고, 소위 "불길한 10년"이라 불리는 그의 복위 이후 반프리메이슨 운동이 강화되었으며, 프리메이슨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12] 그는 경찰에게 스페인 사회에서 활동하는 프리메이슨과 전 프리메이슨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13]
1823년 봄, 부르봉 왕가가 복위한 프랑스의 루이 18세는 "앙리 4세의 후손에게 스페인 왕좌를 보존하고, 그 훌륭한 왕국을 유럽과 화해시키기 위해, 성 루이의 신을 불러" 스페인을 침공했다. 1823년 5월 혁명 세력은 페르난도 7세를 카디스로 옮겼고, 그는 자유로워질 때까지 헌법 개정을 약속했다.
트로카데로 전투 이후 카디스가 함락되고 페르난도 7세가 석방된 후 보복이 뒤따랐다.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은 페르난도 7세가 그의 군사 공로에 대해 수여한 스페인 훈장을 거부하며 페르난도 7세의 행동에 항의했다.
1820년 1월 1일, 라파엘 델 리에고 이 누녜스 대령이 남미 독립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세비야주 카베사스 데 산 후안에 집결해 있던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곧 1812년 헌법 부활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고, 페르난도 7세는 곧 체포되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부모에게 했던 것처럼 반란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한 페르난도 7세는 암중에서 예수회에 협력을 요청했고, 1822년 예수회 신부 25명이 마드리드에서 살해당한 것처럼, 예수회는 해방 시대에 왕당파의 억압과 전제 정치를 지지하며 자유주의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9세기 스페인에게 있어 예수회의 추방과 재건은 자유주의와 전제 정치의 끊임없는 다툼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1810년 이후 독립 운동으로 흔들리고 있던 식민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서는 독립에 강력히 반대하던 왕당파가 페르난도 7세를 지지하며 리에고 대령 등 혁명파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현지 주민들은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게 되었고, 멕시코 독립을 가속화시켰다.
1823년 초 베로나 회의 결론으로 프랑스가 "앙리 4세의 가계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시키고, 유럽과 그 훌륭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성 루이의 신의 가호를 구하여" 스페인을 침공하자, 5월에 혁명파는 페르난도 7세를 카디스로 연행했다. 유폐 중 페르난도 7세는 헌법 부활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석방될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앙굴렘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트로카데로 전투에서 혁명파 군대를 패퇴시킨 후 카디스를 점령하고 페르난도 7세를 석방했다. 권력에 복귀하자 페르난도 7세는 사면의 서약을 즉각 어기고 보복에 나섰다. 리에고 이 누녜스 대령 등 혁명파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었고, 테러 정치는 3년간 지속되었다.
2. 7. 프랑스의 개입과 절대 왕정 복귀 (1823년)
1823년 초 베로나 회의 결론에 따라 프랑스는 "앙리 4세의 가계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시키고, 유럽과 그 훌륭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성 루이의 신의 가호를 구하여" 스페인을 침공했다. 이에 5월에 혁명파는 페르난도 7세를 카디스로 연행했다.[1] 유폐 중 페르난도 7세는 헌법 부활을 약속했지만, 이는 석방될 때까지만 유효했다.[1]앙굴렘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트로카데로 전투에서 혁명파 군대를 패퇴시킨 후 카디스를 점령하고 페르난도 7세를 석방했다.[1] 권력에 복귀한 페르난도 7세는 사면 약속을 즉각 어기고 보복을 시작했다.[1] 리에고 이 누녜스 대령 등 혁명파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었고, 3년간 테러 정치가 지속되었다.[1] 그 잔혹함은 왕당파조차도 질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1]
2. 8. 아메리카 식민지 상실
1820년 1월 1일, 라파엘 델 리에고 이 누녜스 대령이 남미 독립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세비야주 카베사스 데 산 후안에 집결해 있던 부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곧 1812년 헌법 부활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고, 페르난도 7세는 곧 체포되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부모에게 했던 것처럼 반란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한 페르난도 7세는 암중에서 예수회에 협력을 요청했고, 1822년 예수회 신부 25명이 마드리드에서 살해당한 것처럼, 예수회는 해방 시대에 왕당파의 억압과 전제 정치를 지지하며 자유주의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9세기 스페인에게 있어 예수회의 추방과 재건은 자유주의와 전제 정치의 끊임없는 다툼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1810년 이후 독립 운동으로 흔들리고 있던 식민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서는 독립에 강력히 반대하던 왕당파가 페르난도 7세를 지지하며 리에고 대령 등 혁명파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현지 주민들은 스페인 본국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게 되었고, 멕시코 독립을 가속화시켰다.1823년 초 베로나 회의 결론으로 프랑스가 "앙리 4세의 가계에 스페인 왕위를 계승시키고, 유럽과 그 훌륭한 왕국을 보호하기 위해 성 루이의 신의 가호를 구하여" 스페인을 침공하자, 5월에 혁명파는 페르난도 7세를 카디스로 연행했다. 유폐 중 페르난도 7세는 헌법 부활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석방될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개입을 위해 진격해 온 앙굴렘 공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트로카데로 전투에서 혁명파 군대를 패퇴시킨 후 카디스를 점령하고 페르난도 7세를 석방했다. 권력에 복귀하자 페르난도 7세는 사면의 서약을 즉각 어기고 보복에 나섰다. 리에고 이 누녜스 대령 등 혁명파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었고, 테러 정치는 3년간 지속되었다. 그 잔혹함은 왕당파조차도 질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7]
2. 9. 왕위 계승 분쟁과 카를리스트 전쟁
1830년 5월, 페르난도 7세는 딸들도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실정법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1789년 코르테스에서 승인되었지만 공식적으로 공포된 적은 없었다. 1830년 10월 10일, 페르난도 7세의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딸 이사벨라를 낳았고, 이로 인해 이사벨라의 삼촌인 카를로스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14]
페르난도 7세는 1829년 두 시칠리아 왕국의 공주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네 번째 결혼을 했지만, 자녀가 없었고 동생 카를로스가 왕위 계승자로 유력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자녀의 즉위를 바랐지만, 스페인 부르봉 왕조 성립 이래 왕위 계승법이었던 살리카 법에 따라 여성의 왕위 계승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딸만 낳더라도 왕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 계승법 개정을 설득했다. 결국 두 딸만 태어났지만,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노력으로 장녀 이사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승 순서 변경에 대해 교회와 귀족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카를로스의 즉위를 주장했고, 이는 곧 내전(카를리스트 전쟁)으로 이어졌다. 페르난도 7세 사후, 카를로스는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합법적인 왕이라고 주장했다. 딸 이사벨 2세를 위한 섭정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은 지지를 얻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지했다.[15] 그녀는 1833년 10월 23일 사면령을 발표했고, 망명 중이던 자유주의자들이 귀국하여 수십 년 동안 스페인 정치를 지배했다.[14][15]
3. 평가
페르난도 7세의 통치는 스페인 자국 역사학자들조차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학자 스탠리 G. 페인은 페르난도 7세를 두고 "많은 면에서 스페인 역사상 가장 비열한 국왕이었다. 겁이 많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럽고 의심 많고 복수심에 불타는 페르난도 7세는 공공의 이익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기술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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