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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탱 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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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캥탱 마시는 1465년 또는 1466년 루벤에서 태어난 플랑드르 화가로, 16세기 안트베르펜 화파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초기에는 대장장이였으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는 디르크 보우츠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으로 시작하여, 점차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했다. 마시스는 종교화와 초상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풍속화에서 인간의 부덕과 사회를 풍자하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환전상과 그의 아내》, 《추한 공작부인》, 《목수 길드의 제단화》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17세기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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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탱 마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쿠엔틴 마시스, [[요하네스 위릭스]]가 조각하고 [[도미니쿠스 람소니우스]]의 시가 담겨 있음. 마시스의 여자 친구가 망치질의 시끄러운 소리보다 조용한 붓을 더 선호했다는 내용
쿠엔틴 마시스, 요하네스 위릭스가 조각함
출생1466년경, 뢰벤, 벨기에
사망1530년, 안트베르펜, 벨기에
국적플랑드르인
활동 분야종교 및 풍자 초상화
영향 받은 예술가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조북방 르네상스
주요 작품
대표작추한 공작부인
양복장이와 그의 아내
불균형한 커플

2. 생애

캥탱 마시의 삶에 대한 초기 기록은 주로 전설로만 전해오며 그의 활동이나 인물상에 대한 현대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요한 몰라누스(J. Molanus)의 ''Historiae Lovaniensium''에 따르면 마시는 뢰번에서 태어나 철공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시는 1466년 4월 4일 ~ 9월 10일 사이 쯤에 대장장이었던 아버지 우스트 마시(Joost Matsys, 1483년 사망)와 어머니 카트린 반 킨켄(Catherine van Kincken) 사이에서 네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마시는 그림 그리는 일이 더 낭만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대장장이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플랑드르 예술가들의 전기를 집필한 카렐 판 만더르에 따르면 이는 거짓이고, 진짜 이유는 그가 대장간에서 일하기에는 몸이 허약했고 대신 카니발 축제를 위해 인쇄물을 장식했다고 한다.[23]

우스트 마시의 기록된 기부금과 소유물들을 통해 마시의 가족은 부유했으며 이로 인해 마시는 재정적인 이유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캥탱 마시는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화가 아드리안 판 오페르베케(Adriaen van Overbeke, 1508년 수료)로 추정되는 특정 아리아인,[24] Willem Muelenbroec(1501년 등록), Eduart Portugalois(1504년 등록, 1506년 수료), Hennen Boeckmakere(1510년 등록) 등 단 4명의 예술가들을 양성했다. 마시는 플란데런의 풍경화 화가로 유명한 요아힘 파티나르(Joachim Patinir)와 함께 공부했으며 둘은 함께 풍경화(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 등)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캥탱 마시와 요아힘 파티나르가 그린 《성 안토니오의 유혹》(The temptations of St. Antony Abbot), 1520년~1524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1465년 또는 1466년루벤에서 태어났으며[15][16], 아버지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다[17]。1507년에 완전히 독립적인 화가가 되기까지의 마시스의 경력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16]。아마 루벤의 디르크 보우츠의 공방에서 수련했을 것이다[15][18]。1491년에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하여 동지방의 화가 조합에 장인으로 등록[15][18], 이 무렵부터 대가로서 명성을 얻었다[19]。1492년경에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17]。1508년에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더 두었는데[17], 그 중에는 퐁텐블로 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가 얀 마시스가 있다[20]。동명의 손자(얀의 아들) 쿠엔틴 마사이/Quentin Metsys the Younger영어 역시 유명한 화가이다。1530년에 역병으로 사망했다[17]

마시스는, 처음에는 베이덴, 보우츠, 구스 등의 영향을 받은[18] 종교적 소재를 그렸지만[15], 점차 풍속적인 회화로 옮겨갔다[15]。화풍도 기교적이고 우아해졌으며[18], 안트베르펜을 대표하는 매너리즘 양식의 화가가 되었다[18]。마시스가 이탈리아 회화, 특히 다 빈치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은 분명하며[15][16][18], 그것은 예를 들어 스푸마토 기법이나 캐리커처[18], 초상화의 구도[16]에서 볼 수 있다。또한 판 에이크의 전통적인 기법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 듯하다[15]。만년에는 화력이 쇠퇴하는 모습이 보이며, 그림에 감상적인 경향이 강해졌다[16]

마시스의 풍속화에는 도덕 교훈적인 내용이 종종 보인다[18]。이른바 인간의 부덕, 생명의 덧없음에 대한 고발이며, 마시스는 회화사에서 이 장르의 개척자로 여겨진다[19]。예를 들어 대표작 『환전상과 그의 아내』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은 에라스뮈스의 저작과의 관련성이 지적된다[16][20]。후자의 모티프는, 『우신예찬』의 한 구절인 "어린 계집애에게 반해서, 순진한 젊은이가 비켜줘야 할 광기를 저지른다"(와타나베 카즈오 역)에 해당한다[20]。(마시스는 에라스뮈스와 지인 사이였으며,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16]。) 또한 그러한 풍속화에는 그로테스크에 대한 편애가 엿보이며[18],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젊은이와 노인의 조합에 묘미를 느꼈던 것 같다[16]

2. 1. 초기 생애 및 배경 (1465/1466-1491)

캥탱 마시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전설에 의존하며, 동시대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23][3] 요한 몰라누스(J. Molanus)의 ''Historiae Lovaniensium''에 따르면, 마시는 루벤에서 태어나 대장장이로 일했다.[23][3] 1465년 또는 1466년에 솜씨 좋은 대장장이였던[17] 아버지 요스트 마시(Joost Matsys, 1483년 사망)와 어머니 카트린 반 킨켄(Catherine van Kincken) 사이에서 네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23][3] 출생일은 1466년 4월 4일 ~ 9월 10일 사이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마시는 그림이 더 낭만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대장장이 경력을 포기했다고 알려져 있다.[23][3] 그러나 카렐 판 만더르는 이 이야기가 거짓이며, 실제로는 마시가 몸이 허약하여 대장간에서 일하기 어려웠고, 카니발 축제를 위한 인쇄물을 장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3][3]

마시 가족은 기록된 기부금과 소유물들을 통해 부유했으며, 마시가 재정적인 이유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23][3] 1491년에 안트베르펜으로 이주하여 동지방의 화가 조합에 장인으로 등록하였고,[15][18] 이 무렵부터 대가로서 명성을 얻었다.[19] 아마 루벤의 디르크 보우츠의 공방에서 수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5][18]

''노인의 머리''

2. 2. 안트베르펜에서의 활동 (1491-1530)

캥탱 마시는 1491년 안트베르펜의 성 루가 길드에 화가로 등록되었으며, 안트베르펜에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6] 16세기 초 안트베르펜은 브뤼헤, 겐트, 브뤼셀, 메헬렌, 루벤을 제치고 저지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중심지로 부상했다.[5] 마시는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던 기간 동안 아드리안 판 오페르베케(Adriaen van Overbeke, 1508년 수료)로 추정되는 특정 아리아인,[24] 빌렘 뮐렌브로에크(Willem Muelenbroec, 1501년 등록), 에두아르트 포르투갈로이스(Eduart Portugalois, 1504년 등록, 1506년 수료), 헤넨 보크마케레(Hennen Boeckmakere, 1510년 등록) 등 4명의 예술가들을 양성했다.[23]

마시는 플란데런의 풍경화 화가 요아힘 파티나르와 함께 공부했으며, 둘은 함께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그 예시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 등이 있다.[25]

1492년경 마시는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고,[17] 1508년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17] 퐁텐블로 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가 얀 마시스를 포함하여 그의 자녀들 중 일부는 화가가 되었다.[20]

마시는 1530년 안트베르펜에서 사망했다.[17] 독실한 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동생 카트린과 그녀의 남편은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성경을 읽은 죄로 1543년 루뱅에서 처형되었다. 1629년, 마시스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앤트워프 대성당 정면에 부조 기념패가 세워졌으며, 후원자 코르넬리우스 판 데르 헤스트는 비문에 "그의 시대에는 대장장이였고, 이후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라고 적었다.[23]

앤트워프 대성당의 기념물. 화가 뤽 튀이만스는 이 해골 부조를 바탕으로 무지엄 안 데 스톰에 현대적인 모자이크를 제작했다.

3. 화풍 및 영향

3. 1. 초기 화풍: 후기 고딕 양식

캥탱 마시의 초기 화풍은 디르크 보우츠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의 특징을 보인다.[5] 그는 한스 멤링과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 또한 루벤으로 가져왔다.[5] 149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서 장인이 된 마시는 얀 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의 경향에 따라 플랑드르 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마시의 작품은 강한 종교적 감성을 담고 있으며, 그로테스크함을 선호하는 현실주의가 동반된다.[5] 윤곽의 견고함, 명확한 모델링, 세부 사항의 철저한 마무리는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을 받았고, 투명한 안료의 빛나는 풍부함은 디르크 보우츠를 통해 반 에이크와 멤링으로부터 왔다.[5] 마시의 작품은 표현의 진지함, 세밀한 묘사, 빛과 그림자의 절제된 효과를 반영하며, 보석, 의복의 가장자리,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5]

마시는 성자들의 우울한 세련됨, 간수와 사형 집행인의 잔인한 몸짓을 강조하고, 개인적인 성격 표현에 노력을 기울였다.[5] 상인 은행가들의 그림(루브르 박물관 및 윈저)에서는 탐욕을 드러내는 풍자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5] 베를린과 암스테르담에 있는 두 개의 성모자와 아기의 복제본에서는 부드러운 감정에 대한 몰두를 볼수 있다.[5]

마시는 초상화에도 능숙했는데, 토머스 모어에게서 찬사를 받은 《에기디우스(피터 질레스)》가 그 중 하나이다.[5] 그의 초상화는 현실주의를 기법으로 고수하며,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감성적 특징을 보여준다.[5]

3. 2. 성숙기 화풍: 르네상스 양식의 도입

캥탱 마시는 디르크 보우츠의 예술적 특징을 반영하는 스타일을 보였으며, 보우츠는 한스 멤링과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을 루벤으로 가져왔다.[5] 25세에 안트베르펜에 정착한 마시는 얀 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의 경향에 따라 플랑드르 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149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서 장인이 되면서 루벤을 떠났다.

마시의 작품은 강한 종교적 감성과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며, 종종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사용했다.[5] 윤곽의 견고함, 명확한 모델링, 세부 묘사의 철저함은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을 보여준다.[5] 디르크 보우츠를 통해 반 에이크와 멤링으로부터 전해진 투명한 안료의 빛나는 풍부함이 나타난다.[5] 마시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표현의 진지함, 세밀한 묘사, 빛과 그림자의 절제된 효과를 반영한다. 당시 대부분의 플랑드르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보석, 의복의 가장자리,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5]

''돈 바꾸는 사람과 그의 아내'' (1514)
유화, 71 × 68 cm
루브르 아부다비


마시는 초상화에도 능숙했는데, 토머스 모어로부터 라틴어 시로 찬사를 받은 《에기디우스(피터 질레스)》가 그 예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초상화(암스테르담 갤러리)도 그의 작품이다.[5] 마시의 초상화는 현실주의를 기법으로 고수하는 그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감성적 특징을 보여준다.

3. 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

마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판화 형태로 접하고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7] 특히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는 다 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7] 마시스는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아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마시스는 한스 홀바인을 잉글랜드로 가는 길에 여러 번 만났을 가능성이 있으며, 알브레히트 뒤러는 1520년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그는 또한 화가가 죽은 후 요아킴 파티니르의 아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성모와 그리스도》, 《에케 호모》, 《슬픔의 성모》(런던과 안트베르펜)는 평온하고 위엄있는 솜씨로 유명하며, 원숙한 시기의 작품에서 섬세함과 뉘앙스가 더해졌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아 마시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적어도 잠시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4. 풍속화의 개척

캥탱 마시는 디르크 보우츠의 예술적 특징을 반영하며, 한스 멤링과 로히르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을 루벤으로 가져왔다.[5] 149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서 장인이 되면서, 얀 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의 경향에 따라 플랑드르 예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그의 독자적인 스타일은 풍속화 장르를 개척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마시의 가장 잘 알려진 풍자 작품으로는 《노인의 초상》(1513)과 《돈 바꾸는 사람과 그의 아내》(1514)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인간의 감정과 사회 전반에 대한 해설을 제공한다.[5] 그의 작품은 강한 종교적 감성을 담고 있으며, 그로테스크함을 선호하는 현실주의가 동반된다.[5] 마시는 윤곽의 견고함, 명확한 모델링 및 세부 사항의 철저한 마무리를 통해 반 데르 바이덴의 영향을 보여주었으며, 디르크 보우츠를 통해 반 에이크와 멤링으로부터 투명한 안료의 빛나는 풍부함을 표현했다.[5]

마시의 작품은 표현의 진지함, 세밀한 묘사, 빛과 그림자의 절제된 효과를 반영하며, 보석, 의복의 가장자리, 장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5]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분위기가 아니라, 캐리커처의 사실성이다.[5] 상인 은행가들의 그림(루브르 박물관 및 윈저)에서는 그들의 탐욕과 탐욕을 드러내는 풍자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5]

thumb, 런던]]

마시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머스 모어로부터 라틴어 시로 찬사를 받은 그의 《에기디우스(피터 질레스)》가 그 중 하나이다.[5] 마시의 초상화는 현실주의를 기법으로 고수하는 그의 모습을 반영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감성적 특징을 보여준다.[5]

4. 주요 작품


  • 《성스러운 친족 제단화》(1507년-1509년) 브뤼셀 왕립 미술관
  • 성모자와 천사들(1509년경) 리옹 미술관
  • 목공 길드의 제단화(그리스도의 애도의 제단화) (1511년경)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
  • 추녀의 초상화(1513년경) 내셔널 갤러리(런던)
  • 성모자와 어린 양(1513년경) -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 환전상과 그의 아내(1514년) 루브르 박물관(루브르 아부다비에 기탁)[21]
  • 《에라스무스의 초상》(1517년) 바르베리니 미술관
  • 《페트루스 아이기디우스의 초상》(1517년 이후) 롱퍼드(아일랜드), 래드너 컬렉션
  • 《어울리지 않는 커플》(1520년대) 내셔널 갤러리(워싱턴)

『추녀의 초상』, 내셔널 갤러리 (런던)


4. 1. 제단화

캥탱 마시의 작품으로는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있는 《성스러운 친족 제단화》(1507년-1509년)와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에 있는 《목공 길드의 제단화 (그리스도의 애도 제단화)》(1508-1511)가 있다.[21] 목수 길드의 제단화는 앤트워프 왕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4. 2. 종교화



캥탱 마시의 종교화로는 《성모자와 천사들》(1509년경)이 리옹 미술관에,[21] 《성모자와 어린 양》(1513년경)이 포즈난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1] 또한, J. 폴 게티 미술관에는 《슬픔의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전시되어 있다.[21] 《성스러운 친족 제단화》(1507년-1509년)는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21] 목공 길드의 제단화(1511년경)는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21]

4. 3. 풍속화



캥탱 마시의 풍속화로는 《환전업자와 그의 아내》(1514), 《어울리지 않는 커플》(1520년대) 등이 있다.[21] 《환전업자와 그의 아내》는 루브르 아부다비에, 《어울리지 않는 커플》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4. 4. 초상화



캥탱 마시의 주요 초상화 작품으로는 《추한 공작부인》(1513년경, 내셔널 갤러리)[21], 《노인의 초상》(1513), 《에라스무스의 초상》(1517년, 바르베리니 미술관)[21], 《페트루스 아이기디우스의 초상》(1517년 이후, 롱퍼드(아일랜드), 래드너 컬렉션), 그리고 《여인의 초상화》(1520년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21] 등이 있다.

5. 유산

캥탱 마시는 16세기 안트베르펜 화파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17세기까지 숭배의 대상이었다.[5]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추녀》는 존 테니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여공작을 묘사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8] 이 작품은 골 형성 부전증을 앓는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지만,[9] "마울타슈"로 알려진 마가렛, 티롤 백작 부인의 은유적 초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대형 삼면 제단화 《성친족》 또는 《성 안나 제단화》(1507–1509)와 《주님 매장》(1508–1511)은 강한 종교적 감정과 정밀한 묘사가 특징이다.[5] 마시는 리스본의 마드레 데 데우스 수도원의 제단화 일부를 그렸는데,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 왕비 D. 레오노르가 1509년에 설립했다.[10] 그의 《슬픔의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J. 폴 게티 미술관에 있다.[11]

''여인 초상'', 1520


그의 아들 얀 마시스는 예술을 물려받았지만, 초기 작품인 1537년작 《성 제롬》과 1564년작 《토비아스의 치유》에서 독창성 대신 모방을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5] 또 다른 아들인 코르넬리스 마시스도 화가였다. 얀의 아들인 캥탱 메시스 더 영거는 튜더 왕조의 화가였으며,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 《체질 초상》을 그렸다.

안트베르펜 성모 대성당 앞에는 "마시스 우물"로 알려진 단조 철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은 장차 화가가 될 캥탱 마시스가 만든 것이다. 영국의 작가 피어스 이간 더 영거가 쓴 1839년작 페니 연재 소설의 제목은 《퀸틴 마시스》였다.

목수 조합 제단화, 퀸틴 마시스, (1511), 앤트워프 왕립 미술관, 245-248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Quinten Massijs http://vlaamseprimit[...] 2019-08-27
[3] 웹사이트 Quintijn Messijs http://www.dbnl.org/[...]
[4] 웹사이트 The Temptations of Saint Anthony -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https://www.museodel[...] 2020-12-25
[5] EB1911 Matsys, Quintin
[6] 서적 The Paintings of Quinten Massys with Catalogue Raisonne Rowman & Allanheld
[7] 서적 A History of art https://archive.org/[...] Prentice-Hall
[8] 웹사이트 Christ presented to the People -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https://www.museodel[...] 2020-12-25
[9] 뉴스 Solved: mystery of The Ugly Duchess – and the Da Vinci connection https://www.theguard[...] 2008-10-11
[10] 웹사이트 http://www.matriznet[...]
[11] 웹사이트 Acquisitions of the month: November 2018 https://www.apollo-m[...]
[12] 서적 西洋美術家辞典 エム・エフ・ジー
[13] 문서
[14] 문서
[15] 서적 新潮世界美術辞典 新潮社
[16] 서적 オックスフォード西洋美術事典 講談社
[17] 웹사이트 MASSYS, Quentin http://www.wga.hu/fr[...] Web Galery of Art 2012-04-30
[18] 서적 西洋絵画作品名辞典 三省堂
[19] 웹사이트 《金貸しとその妻》 http://www.louvre.fr[...] ルーヴル美術館 2012-04-30
[20] 서적 世界美術大全集西洋編 小学館
[21] Citation Le prêteur et sa femme https://collections.[...] 1514
[22] 웹사이트 Quinten Massijs http://vlaamseprimit[...] 2019-08-27
[23] 웹사이트 Quintijn Messijs http://www.dbnl.org/[...]
[24] 웹사이트 Quinten Massijs http://vlaamseprimit[...] 2019-08-27
[25] 웹인용 The Temptations of Saint Anthony - The Collection - Museo Nacional del Prado https://www.museodel[...] 20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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