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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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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3세의 장남으로, 1205년부터 120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블라디미르 대공위를 두고 동생 유리 2세와 갈등을 겪었으며, 1216년 리피차 전투에서 승리하여 블라디미르 대공에 즉위했다. 1218년 사망했으며, 블라디미르 대공위는 유리 2세에게 돌아갔다. 콘스탄틴은 세 아들에게 영지를 분할하여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을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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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
기본 정보
대천사 성당 - 북동쪽 기둥, 1층, 남쪽 - 프세볼로도비치 콘스탄틴
대천사 성당 북동쪽 기둥에 묘사된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
이름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
로마자 표기Konstantin Vsevolodovich
러시아어Константи́н Все́володович
출생일1186년 5월 18일
출생지로스토프
사망일1218년 2월 2일
사망지블라디미르
배우자마리아 무스티슬라브나 스몰렌스카야
자녀바실리코 콘스탄티노비치
프세볼로트 콘스탄티노비치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가문유리예비치 가문
아버지프세볼로트 3세
어머니마리아 슈바르노브나
통치
작위블라디미르 대공
통치 기간1216년 – 1218년
이전 통치자유리 2세
다음 통치자유리 2세

2. 생애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3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시바르노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1] 1205년부터 120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1208년부터 1218년까지 로스토프 공작을 역임했다.[1]

아버지 프세볼로트 3세는 유리에게 로스토프 공작위를, 콘스탄틴에게는 블라디미르 공작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콘스탄틴은 두 공작위를 모두 원했다.[1] 이로 인해 콘스탄틴과 유리는 블라디미르 공작위를 두고 분쟁을 벌였다.[1]

1216년 리피차 전투에서 유리 2세야로슬라프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즉위했다.[1] 1218년 사망하여 유리 2세가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복위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가계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3세 대공과 그의 아내 마리아 시바르노브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1] 1196년, 10세의 나이로 스몰렌스크 공작 므스티슬라프 노공의 딸 아가피야와 결혼했다.[1]

1190년대 후반을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에서 보냈으며,[1] 이후 아버지 프세볼로드는 콘스탄틴을 노브고로드 공작에 임명하여 1205년부터 1208년까지 재임했다.[1] 그 후 아버지는 그에게 로스토프, 야로슬라블, 우글리치를 주었다.[1]

2. 2. 공작 즉위와 권력 투쟁

콘스탄틴 프세볼로도비치는 프세볼로트 3세 대공과 그의 아내인 마리아 시바르노브나(Maria Shvarnovna)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1] 1196년에는 10세의 나이로 스몰렌스크 공작므스티슬라프 노공의 딸 아가피야와 결혼했다. 1205년부터 1208년까지 노브고로드 공작을 역임했으며,[1] 1190년대 후반을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에서 보냈다. 이후 아버지 프세볼로드는 콘스탄틴을 노브고로드 공작에 임명했다.

아버지 프세볼로트 3세는 아들들에게 공작위를 물려주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유리에게 로스토프 공작위를, 콘스탄틴에게 블라디미르 공작위를 주려고 했다.[1]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신이 로스토프와 블라디미르 두 공작위를 모두 갖기를 원했다.[1] 결국 프세볼로트 3세는 유리에게 블라디미르 공작위를 넘겨주었지만, 이로 인해 콘스탄틴과 유리는 블라디미르 공작위를 놓고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1]

1216년, 콘스탄틴은 리피차(Lipitsa) 전투에서 동생인 유리 2세야로슬라프 2세 형제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고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즉위했다.[1] 1211년에는 아버지와 영토를 두고 다퉜으며, 1216년에 동생 유리 2세와 야로슬라프(후의 야로슬라프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블라디미르로 들어가 대공이 되었다.

1218년에 콘스탄틴은 사망했고, 유리 2세가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복위했다.[1] 콘스탄틴은 세 아들에게 세습 영지를 분할하여, 바실리코에게는 로스토프를, 블라디미르에게는 우글리치를, 프세볼로트에게는 야로슬라블을 유증했다. 그리고 대공위는 동생 유리에게 넘어갔다.

2. 3. 리피차 전투와 블라디미르 대공 즉위

1216년 리피차 전투에서 유리 2세, 야로슬라프 2세 형제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고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즉위했다.[1] 1218년에 사망했으며, 유리 2세가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복위했다.[1]

2. 4. 사망과 유산

1216년 리피차 전투에서 유리 2세, 야로슬라프 2세 형제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고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즉위했다.[1] 1218년에 사망했으며 유리 2세가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복위했다.[2]

세 아들에게 세습 영지를 분할하여 로스토프(로스토프 공국)는 바실리코에게, 우글리치(우글리치 공국)는 블라디미르에게, 야로슬라블(야로슬라블 공국)은 프세볼로트에게 유증했다. 대공위는 동생 유리에게 넘어갔다.

참조

[1] 학위논문 A history of the Muscovite civil war: the reign of Vasili II (1425–1462) https://www.proquest[...] 2023-05-07
[2] 서적 Lines of Succession Little, Brown & Company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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