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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스보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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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은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건물로, 여러 차례 재건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12세기 압살론 주교가 세운 요새가 전신이며, 이후 코펜하겐 성을 거쳐 1730년 크리스티안 6세에 의해 현재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이 건립되었다. 현재는 왕실 접견실, 덴마크 의회(폴케팅), 대법원, 총리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지하 유적에서는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을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시설로는 왕실 접견실, 의회, 승마 경기장, 극장 박물관 등이 있으며, 2014년에는 타워가 전망대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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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스보르성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원어 이름Christiansborg Slot
위치코펜하겐
국가덴마크
용도궁전
스타일바로크, 신고전주의, 네오 바로크
건축
건축가엘리아스 다비드 호이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 토르발 뢰르겐센
건설 시작1907년
완공1928년
소유 및 관리
소유자덴마크 정부
기타
비고(덴마크 의회)

2. 역사



중세 시대, 슬로츠홀멘 섬에 압살론 주교가 세운 요새가 오늘날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의 전신이다. 이 주교는 이 외에도 2개의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들 모두 "크리스티안스보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에 세워진 코펜하겐 성과 함께, 현재 그 일부는 크리스티안스보르 성 지하에서 유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1167년 로스킬레 주교였던 압살론이 코펜하겐 항에 위치한 작은 섬에 성을 세웠는데,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문헌에 따르면 이 성은 요새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3] 압살론 성은 주교의 궁전, 예배당 및 여러 부속 건물을 포함하는 석회암 연벽으로 둘러싸인 안뜰로 구성되었다.[3]

압살론 성은 200년 동안 존속했지만 소르브인 해적과 한자 동맹 세력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3][4] 136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한자 동맹 세력이 압살론 성을 점령했다. 외레순 해협에서 무역을 벌이는 과정에서 압살론 성의 존재를 두려워 했던 한자 동맹 소속 도시들은 석공을 보내서 압살론 성에 있던 돌들을 해체시키고 성을 파괴했다.[4]

현재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지하에는 압살론 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 내부에는 주거지나 참나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우물의 흔적 등이 발견되었고, 우물터에서는 대리석 건물 조각도 발견되어 교회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369년 한자 동맹에 의해 압살론 주교의 성이 파괴된 이후, 섬의 폐허는 토공사로 덮였고, 그 위에 새로운 요새인 코펜하겐 성이 건설되었다.[5] 성은 옹벽을 가지고 있었고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입구에는 크고 견고한 탑이 있었다. 코펜하겐 성은 완공된 후 로스킬레 주교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1417년 에리크 7세가 성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덴마크 왕실 소유가 되었다.[4]

15세기 중반부터 코펜하겐 성은 덴마크 왕의 주요 거주지이자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코펜하겐 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는데, 크리스티안 4세는 감옥으로 알려진 "푸른 탑"에 첨탑을 추가하기도 했다. 1720년대에는 프레데리크 4세에 의해 성을 개축하던 도중에 성곽이 붕괴되기도 했다.[4] 1730년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이 코펜하겐 성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이다. 압살론의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은 20세기 초에 발굴되었으며, 현재 궁전 아래의 지하 발굴 현장에서 볼 수 있다.[5]

1698년의 코펜하겐 성


1733년 크리스티안 6세는 건축가 엘리아스 다비드 하우서에게 초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궁전에는 전시 공간과 예배당이 포함되었다. 궁전 단지 대부분은 1745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이었다.[6]

1746년의 초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궁전과 교회는 1794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6] 전시 공간은 보존되었다. 크리스티안 6세가 짓게 한 것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제1기)이다. 1733년에 착공한 바로크 양식의 이 성은 덴마크 왕실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지만, 1794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건물은 마구간 뿐이다.

덴마크 왕실은 아말리엔보르성을 임시 관저로 사용하던 동안에 덴마크의 건축가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의 개축에 착수했다. 개축 공사는 1803년부터 1828년까지 진행되었고 크리스티안스보르성(2기)은 엠파이어(Empire)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프레데리크 6세 시대부터 덴마크의 왕실 관저로 사용되면서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은 덴마크 왕가에게 즐거움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849년에 제정된 덴마크 헌법에 따라 덴마크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 덴마크 의회(릭스다겐)가 이 성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88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예배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전시장에서 바라본 2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왕가가 아말리엔보르 궁전의 임시 숙소에 머무는 동안, 함부르크 알토나의 건축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궁전을 재건축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불려왔다. 한센은 1803년에 프랑스 제국 양식으로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를 짓기 시작했다. 궁전이 1828년에 완공되었을 때,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6세는 결국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오직 오락을 위해서만 궁전을 사용했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7세는 궁전에서 살았던 유일한 군주였다. 그는 1852년에서 1863년 사이에 이곳에서 거주했다.

1849년 헌법과 함께 입헌 군주제가 도입된 후, 궁전의 남쪽 날개는 최초의 덴마크 의회(릭스다겐)의 양원 회의 장소가 되었다.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는 1884년에 불탔다.[4] 승마 학교, 궁정 극장 및 한센의 예배당을 포함한 전시장은 보존되었다.[4] 정치적 싸움으로 인해 폐허는 그 후 23년 동안 그대로 남았다.[4]

1907년부터 1928년까지 토르발 요르겐센이 설계한 세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궁전은 신 바로크 양식으로, 왕족, 입법부, 사법부를 위한 공간을 모두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7] 철근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덮인 외관으로 지어졌다. C.F. 한센의 궁전 조각들은 프린스 요르겐스 고르 (Prins Jørgens Gård)를 마주보는 북쪽 외관에 보존되었다. 원래 지붕은 타일로 덮여 있었지만, 국민 모금 이후 1937~1938년에 타일이 구리로 교체되었다. 두 개의 왕관이 있는 풍향계가 나중에 탑에 추가되어 106미터로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이 되었다.

1914년 세 번째 (그리고 현재) 궁전 건설


재건 공사 과정에서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1924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2. 1. 압살론 성 (1167년-1369년)

1167년 로스킬레 주교였던 압살론이 코펜하겐 항에 위치한 작은 섬에 성을 세웠는데,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문헌에 따르면 이 성은 요새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3] 압살론 성은 주교의 궁전, 예배당 및 여러 부속 건물을 포함하는 석회암 연벽으로 둘러싸인 안뜰로 구성되었다.[3]

압살론 성은 200년 동안 존속했지만 소르브인 해적과 한자 동맹 세력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3][4] 136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 국왕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던 한자 동맹 세력이 압살론 성을 점령했다. 외레순 해협에서 무역을 벌이는 과정에서 압살론 성의 존재를 두려워 했던 한자 동맹 소속 도시들은 석공을 보내서 압살론 성에 있던 돌들을 해체시키고 성을 파괴했다.[4]

현재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지하에는 압살론 성의 유적이 남아 있으며,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 내부에는 주거지나 참나무 통나무를 파서 만든 우물의 흔적 등이 발견되었고, 우물터에서는 대리석 건물 조각도 발견되어 교회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2. 코펜하겐 성 (1369년-1731년)

1369년 한자 동맹에 의해 압살론 주교의 성이 파괴된 이후, 섬의 폐허는 토공사로 덮였고, 그 위에 새로운 요새인 코펜하겐 성이 건설되었다.[5] 성은 옹벽을 가지고 있었고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입구에는 크고 견고한 탑이 있었다. 코펜하겐 성은 완공된 후 로스킬레 주교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1417년 에리크 7세가 성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덴마크 왕실 소유가 되었다.[4]

15세기 중반부터 코펜하겐 성은 덴마크 왕의 주요 거주지이자 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코펜하겐 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는데, 크리스티안 4세는 감옥으로 알려진 "푸른 탑"에 첨탑을 추가하기도 했다. 1720년대에는 프레데리크 4세에 의해 성을 개축하던 도중에 성곽이 붕괴되기도 했다.[4] 1730년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이 코펜하겐 성을 철거하고 새로운 성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이다. 압살론의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은 20세기 초에 발굴되었으며, 현재 궁전 아래의 지하 발굴 현장에서 볼 수 있다.[5]

2. 3.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1733년-현재)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은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1733년 크리스티안 6세는 건축가 엘리아스 다비드 하우서에게 초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궁전에는 전시 공간과 예배당이 포함되었다. 궁전 단지 대부분은 1745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이었다.

궁전과 교회는 1794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전시 공간은 보존되었다. 크리스티안 6세가 짓게 한 것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제1기)이다. 1733년에 착공한 바로크 양식의 이 성은 덴마크 왕실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지만, 1794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건물은 마구간 뿐이다.

덴마크 왕실은 아말리엔보르성을 임시 관저로 사용하던 동안에 덴마크의 건축가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의 개축에 착수했다. 개축 공사는 1803년부터 1828년까지 진행되었고 크리스티안스보르성(2기)은 엠파이어(Empire)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프레데리크 6세 시대부터 덴마크의 왕실 관저로 사용되면서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은 덴마크 왕가에게 즐거움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849년에 제정된 덴마크 헌법에 따라 덴마크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 덴마크 의회(릭스다겐)가 이 성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88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예배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왕가가 아말리엔보르 궁전의 임시 숙소에 머무는 동안, 함부르크 알토나의 건축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궁전을 재건축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불려왔다. 한센은 1803년에 프랑스 제국 양식으로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를 짓기 시작했다. 궁전이 1828년에 완공되었을 때,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6세는 결국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오직 오락을 위해서만 궁전을 사용했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7세는 궁전에서 살았던 유일한 군주였다. 그는 1852년에서 1863년 사이에 이곳에서 거주했다.

1849년 헌법과 함께 입헌 군주제가 도입된 후, 궁전의 남쪽 날개는 최초의 덴마크 의회(릭스다겐)의 양원 회의 장소가 되었다.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는 1884년에 불탔다. 승마 학교, 궁정 극장 및 한센의 예배당을 포함한 전시장은 보존되었다. 정치적 싸움으로 인해 폐허는 그 후 23년 동안 그대로 남았다.

왕실 사람들이 아말리엔보르 성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는 동안, 덴마크 건축가 한센(크리스티안 프레데릭 한센)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제2기)의 개축에 착수했다. 개축 공사는 1803년부터 1828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성은 앙피르 양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6세 이후에는 아말리엔보르 성이 덴마크 왕실의 주요 거처가 되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은 왕가의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장소, 입법 및 행정 기관이 위치한 성이 되었다.

1907년부터 1928년까지 토르발 요르겐센이 설계한 세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궁전은 신 바로크 양식으로, 왕족, 입법부, 사법부를 위한 공간을 모두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 철근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덮인 외관으로 지어졌다. C.F. 한센의 궁전 조각들은 프린스 요르겐스 고르 (Prins Jørgens Gård)를 마주보는 북쪽 외관에 보존되었다. 원래 지붕은 타일로 덮여 있었지만, 국민 모금 이후 1937~1938년에 타일이 구리로 교체되었다. 두 개의 왕관이 있는 풍향계가 나중에 탑에 추가되어 106미터로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이 되었다.

재건 공사 과정에서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1924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1907년부터 1928년까지 크리스티안스보르성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성이 바로 네오바로크 건축 양식을 띤 크리스티안스보르성(3기)이다. 재건 공사 과정에서 압살론의 성, 코펜하겐성 유적이 발견되어 오늘에 이른다.

2. 3. 1. 첫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1733년-1794년)

1733년 크리스티안 6세는 건축가 엘리아스 다비드 하우서에게 초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고, 웅장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궁전에는 전시 공간과 예배당이 포함되었다. 궁전 단지 대부분은 1745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이었다.[6]

궁전과 교회는 1794년 화재로 소실되었지만,[6] 전시 공간은 보존되었다. 크리스티안 6세가 짓게 한 것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제1기)이다. 1733년에 착공한 바로크 양식의 이 성은 덴마크 왕실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지만, 1794년의 화재로 소실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건물은 마구간 뿐이다.

2. 3. 2.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1803년-1884년)

덴마크 왕실은 아말리엔보르성을 임시 관저로 사용하던 동안에 덴마크의 건축가인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의 개축에 착수했다. 개축 공사는 1803년부터 1828년까지 진행되었고 크리스티안스보르성(2기)은 엠파이어(Empire) 스타일로 바뀌게 된다. 프레데리크 6세 시대부터 덴마크의 왕실 관저로 사용되면서 크리스티안스보르성은 덴마크 왕가에게 즐거움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1849년에 제정된 덴마크 헌법에 따라 덴마크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면서 덴마크 의회(릭스다겐)가 이 성을 의사당으로 사용했다. 188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예배당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왕가가 아말리엔보르 궁전의 임시 숙소에 머무는 동안, 함부르크 알토나의 건축가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한센이 궁전을 재건축하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불려왔다. 한센은 1803년에 프랑스 제국 양식으로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를 짓기 시작했다. 궁전이 1828년에 완공되었을 때,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6세는 결국 그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결정했고, 오직 오락을 위해서만 궁전을 사용했다.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7세는 궁전에서 살았던 유일한 군주였다. 그는 1852년에서 1863년 사이에 이곳에서 거주했다.

1849년 헌법과 함께 입헌 군주제가 도입된 후, 궁전의 남쪽 날개는 최초의 덴마크 의회(릭스다겐)의 양원 회의 장소가 되었다.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는 1884년에 불탔다.[4] 승마 학교, 궁정 극장 및 한센의 예배당을 포함한 전시장은 보존되었다.[4] 정치적 싸움으로 인해 폐허는 그 후 23년 동안 그대로 남았다.[4]

왕실 사람들이 아말리엔보르 성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는 동안, 덴마크 건축가 한센(크리스티안 프레데릭 한센)이 크리스티안스보르성(제2기)의 개축에 착수했다. 개축 공사는 1803년부터 1828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성은 앙피르 양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6세 이후에는 아말리엔보르 성이 덴마크 왕실의 주요 거처가 되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은 왕가의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한 장소, 입법 및 행정 기관이 위치한 성이 되었다.

2. 3. 3. 세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1907년-현재)

1907년부터 1928년까지 토르발 요르겐센이 설계한 세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궁전은 신 바로크 양식으로, 왕족, 입법부, 사법부를 위한 공간을 모두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7] 철근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덮인 외관으로 지어졌다. C.F. 한센의 궁전 조각들은 프린스 요르겐스 고르 (Prins Jørgens Gård)를 마주보는 북쪽 외관에 보존되었다. 원래 지붕은 타일로 덮여 있었지만, 국민 모금 이후 1937~1938년에 타일이 구리로 교체되었다. 두 개의 왕관이 있는 풍향계가 나중에 탑에 추가되어 106미터로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이 되었다.

재건 공사 과정에서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1924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3. 궁전의 주요 시설

'''1''': 궁전, '''2''': 왕의 문, '''3''': 궁전 광장, '''4''': 내부 안뜰, '''5''': 국회 입구, '''6''': 릭스다그 안뜰, '''7''': 극장 박물관, '''8''': 왕립 마구간, '''9''': 대리석 다리, '''10''': 전시장, '''11''': 승마 학교, '''12''': 토르발센 미술관, '''13''': 대법원 입구, '''14''': 여왕의 문, 왕실 접견실 입구, '''15''' 궁전 예배당, '''16''': 게오르그 왕자 안뜰


궁전은 대략 중앙을 기준으로 나뉘어 남쪽 날개에는 의회가, 북쪽 날개에는 왕실 접견실, 대법원과 총리실이 자리 잡고 있다.

궁전의 여러 부분은 공표된 일정에 따라 유료 가이드 투어와 함께 일반에 공개된다. 코펜하겐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여왕의 문''은 왕실 접견실의 주요 입구이다.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의 왕실 접견실은 궁전 북쪽 절반의 1층과 2층에 위치해 있다. 이 방들은 연회, 국빈 만찬, 신년 레베, 외교 사절 신임장 제정, 알현 및 국무회의 회의와 같은 군주의 공식 행사에 사용된다.

접견실은 두 개의 이전 궁전에서 구출한 가구와 예술 작품, 그리고 니콜라이 아브라함 아빌고르, 크리스토퍼 빌헬름 에커스베르크, 로리츠 턱센, 요아킴 스코브고르 및 비에른 뇌르가르와 같은 최고의 덴마크 예술가들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왕실 접견실에 가려면 '여왕의 문'(Dronningeporten)을 통과하여 '할버디어의 방'(Drabantsalen)을 거쳐 '왕의 계단'(Kongetrappen)으로 간다. 계단 아래에는 '알현실'(Audiensgemakket)과 '국무회의실'(Statsrådssalen)이 있다. 국왕은 격주 월요일마다 알현을 하고, 필요한 경우(보통 수요일) 정부와 함께 국무회의에 참석하며, 국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법안에 서명한다. 알현실과 국무회의실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유일한 왕실 접견실이다.

왕의 계단은 '탑 홀'(Tårnsalen)로 연결된다. 탑 홀에는 요아킴 스코브고르가 그린 만화에서 따온 모티프가 있는 일련의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다.

''왕좌의 방''은 외국 대사들이 국왕에게 신임장을 전달하는 곳이다.


궁전 광장을 마주보고 있는 타원형의 '왕좌의 방'(Tronsalen)에서는 외국 대사들이 프레데리크 10세 국왕에게 신임장을 전달한다. 왕좌의 방은 덴마크 군주가 선포되는 발코니로 연결된다. 왕좌의 방은 1219년 에스토니아에서 덴마크 국기인 단네브로가 하늘에서 떨어진 모습을 묘사한 크레텐 이베르센의 대형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왕실 접견실에는 크리스티안 9세 국왕과 그의 가족 전체가 프레데릭스보르 궁전에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로리츠 턱센의 그림이 있는 '프레덴스보르 홀'(Fredensborgsalen)과 여왕의 도서관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비에른 뇌르가르의 태피스트리가 있는 ''대강당''.


대강당은 왕실 접견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당은 길이가 40m이고 천장 높이가 10m이며, 복도가 방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강당은 400명의 손님을 수용하며 연회, 국빈 만찬 및 리셉션에 사용된다. 대강당은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개조되었으며, 비에른 뇌르가르의 덴마크 역사를 담은 17개의 태피스트리가 벽에 걸렸다. 이 태피스트리는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덴마크 재계에서 선물한 것이다.

'알렉산더 홀'(Alexandersalen)은 베르텔 토르발센의 대리석 프리즈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 입성하다"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프리즈는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화재에서 일부가 살아남았다. 이후 복원되어 이 방에 설치되었다. 이 홀은 소규모 리셉션 및 공식 만찬, 특히 국빈 방문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폴케팅 의사당


크리스티안스보르성 내부에는 알현실, 서재, 예배당 외에도 국회의사당, 대법원, 총리 집무실 등이 있다.

; 알현실: 요인의 알현, 만찬 등이 열린다.

; 예배당: 한센의 예배당. 왕실 결혼식 등 다양한 의식이 거행된다. 1992년에 화재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 마구간: 크리스티안스보르성 초창기부터 있던 건물. 2층에는 궁정 극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연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대리석 다리와 파빌리온: 로코코 양식.

; 왕립 도서관 정원: 궁전과 인접한 왕립 도서관을 잇는 정원. 중앙에는 키르케고르의 동상이 있다.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남쪽 날개에는 덴마크 의회 (폴케팅) 회의장이 위치하고 있다. 1849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의회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953년 단원제 채택 이후 폴케팅 회의장이 주요 회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폴케팅(Folketing) 회의장


로비 (Vandrehallen)


란스팅(Landsting) 회의장


의사당 별관 1층은 로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비 양쪽 끝에는 이전 양원제 의회인 릭스다겐의 회의장이 있었다. 란스팅(Landsting) 회의장은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복도를 따라 국회의장실과 행정실 등 다양한 방이 있다.

크리스티안스보르성에는 폴케팅 의사당, 알현실, 서재 외에도 다양한 시설이 있다.

궁전 북쪽 날개에는 대법원과 총리실이 있다. 대법원은 덴마크 최고 사법 기관이며, 총리실은 덴마크 총리의 집무 공간이다.

궁전 예배당은 199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왕실의 종교 의식 및 덴마크 의회의 의회 개원 예배 등에 사용된다.

크리스티안스보르 승마 경기장과 왕실 마구간


승마 경기장은 최초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부분으로,[8] 왕실 마구간, 승마 학교, 궁정 극장(현재는 극장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마구간은 국가 행사와 축제 행사에서 덴마크 왕실의 의전 수송에 사용되는 말과 마차가 있는 곳이다.[8] 1789년에는 270마리의 말이 마구간에 수용되면서 말의 수가 정점에 달했지만, 현재는 약 20마리의 말이 남아 있다.[8]

배경에 발코니가 있는 왕실 관람석이 있는 승마 학교


승마 학교는 승마 쇼에 사용되며 왕실 마구간의 말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된다.[9] 때때로 오페라나 연극 공연과 같은 다양한 문화 행사에 사용되기도 한다.[9]

|thumb|궁정 극장의 강당

극장 박물관은 승마장 단지의 남쪽 별관의 마구간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승마 학교 맞은편에 있다. 1922년부터 극장 박물관의 소장품을 소장해 왔으며,[9] 강당은 종종 연극 공연, 강연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사용된다.[9]

|thumb|대리석 다리와 파빌리온]]

대리석 다리와 파빌리온은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로, 궁전의 정문 역할을 한다.

1927년 크리스티안스보르 승마장에 크리스티안 9세 기마상이 세워졌다.

지하 유적에는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으며, 192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타워는 2014년 일반에 공개된 전망대에서는 코펜하겐 시내를 조망할 수 있으며, 레스토랑도 운영되고 있다.

3. 1. 왕실 공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의 왕실 접견실은 궁전 북쪽 절반의 1층과 2층에 위치해 있다. 이 방들은 연회, 국빈 만찬, 신년 레베, 외교 사절 신임장 제정, 알현 및 국무회의 회의와 같은 군주의 공식 행사에 사용된다.

접견실은 두 개의 이전 궁전에서 구출한 가구와 예술 작품, 그리고 니콜라이 아브라함 아빌고르, 크리스토퍼 빌헬름 에커스베르크, 로리츠 턱센, 요아킴 스코브고르 및 비에른 뇌르가르와 같은 최고의 덴마크 예술가들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왕실 접견실에 가려면 '여왕의 문'(Dronningeporten)을 통과하여 '할버디어의 방'(Drabantsalen)을 거쳐 '왕의 계단'(Kongetrappen)으로 간다. 계단 아래에는 '알현실'(Audiensgemakket)과 '국무회의실'(Statsrådssalen)이 있다. 국왕은 격주 월요일마다 알현을 하고, 필요한 경우(보통 수요일) 정부와 함께 국무회의에 참석하며, 국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법안에 서명한다. 알현실과 국무회의실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유일한 왕실 접견실이다.

왕의 계단은 '탑 홀'(Tårnsalen)로 연결된다. 탑 홀에는 요아킴 스코브고르가 그린 만화에서 따온 모티프가 있는 일련의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다.

궁전 광장을 마주보고 있는 타원형의 '왕좌의 방'(Tronsalen)에서는 외국 대사들이 프레데리크 10세 국왕에게 신임장을 전달한다. 왕좌의 방은 덴마크 군주가 선포되는 발코니로 연결된다. 왕좌의 방은 1219년 에스토니아에서 덴마크 국기인 단네브로가 하늘에서 떨어진 모습을 묘사한 크레텐 이베르센의 대형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왕실 접견실에는 크리스티안 9세 국왕과 그의 가족 전체가 프레데릭스보르 궁전에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로리츠 턱센의 그림이 있는 '프레덴스보르 홀'(Fredensborgsalen)과 여왕의 도서관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대강당은 왕실 접견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당은 길이가 40m이고 천장 높이가 10m이며, 복도가 방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강당은 400명의 손님을 수용하며 연회, 국빈 만찬 및 리셉션에 사용된다. 대강당은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개조되었으며, 비에른 뇌르가르의 덴마크 역사를 담은 17개의 태피스트리가 벽에 걸렸다. 이 태피스트리는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50세 생일을 기념하여 덴마크 재계에서 선물한 것이다.

'알렉산더 홀'(Alexandersalen)은 베르텔 토르발센의 대리석 프리즈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 입성하다"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프리즈는 두 번째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화재에서 일부가 살아남았다. 이후 복원되어 이 방에 설치되었다. 이 홀은 소규모 리셉션 및 공식 만찬, 특히 국빈 방문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3. 2. 의회 (폴케팅)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남쪽 날개에는 덴마크 의회 (폴케팅) 회의장이 위치하고 있다. 1849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의회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953년 단원제 채택 이후 폴케팅 회의장이 주요 회의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사당 별관 1층은 로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비 양쪽 끝에는 이전 양원제 의회인 릭스다겐의 회의장이 있었다. 란스팅(Landsting) 회의장은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복도를 따라 국회의장실과 행정실 등 다양한 방이 있다.

3. 3. 기타 시설

크리스티안스보르성에는 폴케팅 의사당, 알현실, 서재 외에도 다양한 시설이 있다.

궁전 북쪽 날개에는 대법원과 총리실이 있다. 대법원은 덴마크 최고 사법 기관이며, 총리실은 덴마크 총리의 집무 공간이다.

궁전 예배당은 199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왕실의 종교 의식 및 덴마크 의회의 의회 개원 예배 등에 사용된다.

승마 경기장은 최초의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유일하게 남은 부분으로,[8] 왕실 마구간, 승마 학교, 궁정 극장(현재는 극장 박물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마구간은 국가 행사와 축제 행사에서 덴마크 왕실의 의전 수송에 사용되는 말과 마차가 있는 곳이다.[8] 1789년에는 270마리의 말이 마구간에 수용되면서 말의 수가 정점에 달했지만, 현재는 약 20마리의 말이 남아 있다.[8]

승마 학교는 승마 쇼에 사용되며 왕실 마구간의 말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된다.[9] 때때로 오페라나 연극 공연과 같은 다양한 문화 행사에 사용되기도 한다.[9]

|thumb|궁정 극장의 강당

극장 박물관은 승마장 단지의 남쪽 별관의 마구간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승마 학교 맞은편에 있다. 1922년부터 극장 박물관의 소장품을 소장해 왔으며,[9] 강당은 종종 연극 공연, 강연 및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사용된다.[9]

|thumb|대리석 다리와 파빌리온]]

대리석 다리와 파빌리온은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로, 궁전의 정문 역할을 한다.

1927년 크리스티안스보르 승마장에 크리스티안 9세 기마상이 세워졌다.

지하 유적에는 압살론 성과 코펜하겐 성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으며, 1924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타워는 2014년 일반에 공개된 전망대에서는 코펜하겐 시내를 조망할 수 있으며, 레스토랑도 운영되고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http://stm.dk/_a_275[...] 2018-09-19
[2] 문서 Larsen et al
[3] 간행물 Copenhagen https://www.britanni[...] 2018-09-19
[4] 웹사이트 The History of Christiansborg https://www.thedanis[...] 2017-03-07
[5] 웹사이트 Ruins under Christiansborg Palace http://www.visitcope[...] 2018-03-29
[6] 웹사이트 Amalienborgs hemmelige gange http://www.b.dk/kult[...] 2015-09-14
[7] 웹사이트 Christiansborg Palace https://web.archive.[...] 2018-09-20
[8] 웹사이트 Coaches and horses https://web.archive.[...] The Danish Monarchy 2012-07-21
[9] 웹사이트 About the museum http://www.teatermus[...] Teatermuseet 2012-07-21
[10] 웹사이트 Tårnet, Christiansborg Slot http://www.visitcope[...] Visit Copenhagen 2015-06-26
[11] 웹사이트 Practical Info, Tårnet https://web.archive.[...] Tårnet 2015-06-26
[12] 웹사이트 Photographs of Slotsholmen, November 2016 https://independent-[...] independent-travellers.com 2017-08-29
[13]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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