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6세
1. 개요
프레데리크 6세는 1768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와 캐롤라인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왕의 섭정으로 1784년부터 1808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했으며, 1808년 크리스티안 7세가 사망한 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섭정 시절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여 농노제 폐지, 노예 무역 폐지 등을 단행했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로 전환했다.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했으며, 1834년 제한적 의회를 설립하여 민주적 개혁을 수용했다. 1839년 사망했으며, 후사가 없어 사촌 크리스티안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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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섭정 -
마르그레테 1세
마르그레테 1세는 14세기 말 칼마르 동맹을 성립시켜 스칸디나비아 3국을 통합한 덴마크 여왕이자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섭정으로, 아들 올라프 2세 사후 에리크를 후계자로 삼아 3국의 왕으로 옹립하여 동맹을 통치하며 북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덴마크의 섭정 -
오스트리아의 이사벨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이사벨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와 결혼하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으나, 정치적 격변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남편의 왕위 복귀를 위해 노력하다 만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1768년 출생 -
루이 라자르 오슈
루이 라자르 오슈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군인으로, 혁명 전쟁에서 활약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 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
1768년 출생 -
마리아네 부르농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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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덴부르크가 -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는 프레데리크 왕자와 조피 프리데리케 사이에서 태어나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과 결혼하여 1남 5녀를 두었고, 예술과 시에 관심을 보이며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다가 사위에게 유리하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사망했다. -
올덴부르크가 -
크리스티안 4세
크리스티안 4세는 1588년부터 1648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한 국왕으로, 국방 및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30년 전쟁과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패배하여 발트 해에서의 세력을 상실했으며, 르네상스 군주로서 예술과 문화를 장려하다가 1648년 사망했다.
2. 생애
프레데리크 6세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크리스티안 7세 국왕과 그레이트브리튼의 캐롤라인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티안 7세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섭정이 국정을 대신했다. 1772년에는 삼촌 프레데리크 세습왕자가 섭정으로 즉위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나 마리아가 실권을 행사했다.
1784년 4월 14일 섭정으로 즉위하여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1788년에는 농노제를 폐지했다. 1790년에는 헤센카셀의 마리 조피와 결혼하여 슬하에 8명의 자녀를 두었다. 1808년 3월 13일 아버지 크리스티안 7세가 사망하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809년 스웨덴 왕위가 공석이 되자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의 독립을 이끈 구스타브 1세 바사의 후손이었던 프레데리크 6세는 스웨덴 국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원수가 스웨덴의 왕세자로 임명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덴마크가 프랑스에 패배하면서 1814년 킬 조약을 통해 노르웨이를 상실했고, 프레데리크 6세는 노르웨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자유주의적 생각을 버리고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노선을 걸었다.
1839년 12월 3일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성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프레데리크 6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촌인 크리스티안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1. 초기 생애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크리스티안 7세 국왕과 그의 아내인 그레이트브리튼의 캐롤라인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7세는 조현병으로 의심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섭정이 국정을 대신했다. 1772년 1월 8일에는 자신의 삼촌이었던 프레데리크 세습왕자가 크리스티안 7세의 섭정으로 즉위했지만, 프레데리크 세습왕자의 어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나 마리아가 실권을 행사했다.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제가 천연두 유행병 동안 왕세자 프레데리크에게 성공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하여, 왕세자의 어머니인 캐롤라인 마틸다 여왕의 신임을 얻었다. 여왕과 스트루엔제는 모두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 스트루엔제가 권력을 잡고 있는 동안, 어린 프레데리크는 루소가 그의 저서인 에밀에서 옹호한 교육적 접근 방식에 대한 해석에 따라 히르스홀름 궁전에서 양육되었다. 프레데리크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대신, 스트루엔제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평민 소년들과 함께 놀면서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배우도록 기대되었다.
1772년 궁정 쿠데타로 스트루엔제는 처형되었고, 국왕과 여왕은 이혼했다. 캐롤라인 마틸다 여왕은 추방되었고, 네 살 된 프레데리크와 그의 여동생은 남겨져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프레데리크의 18세 이복 삼촌인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왕세자 프레데리크의 계모할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율리아나 마리아 왕대비가 오베 호에그-굴드베르의 도움을 받아 행사했다.
2.2. 섭정 시기 (1784년 ~ 1808년)
1784년 4월 14일, 프레데리크는 섭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국모에게 충성하는 대신들을 해임했다. 쿠데타 중에 그는 섭정을 놓고 이복 숙부와 주먹다짐을 벌였다고 한다. 그는 부왕 크리스티안 7세가 1808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덴마크-노르웨이의 섭정으로 활동했다. 섭정 초기에 프레데리크는 안드레아스 페테르 번스토르프 수상의 도움을 받아 광범위한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는데, 여기에는 1788년 덴마크의 농노제 폐지와 1789년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사형 시 교수형 폐지가 포함되었다. 1803년에는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이 덴마크-노르웨이에서 폐지되었다.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1784년 성년으로 선언되고 섭정을 맡게 된 후, 덴마크 왕실은 그를 위한 결혼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그는 프로이센 공주와 결혼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계모 할머니 율리아나 마리아와 그의 매형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지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 덴마크-노르웨이와 영국 왕실과 밀접한 결혼 관계를 맺고 있는 독일 가문의 일원인 사촌 마리 소피 폰 헤센카셀을 직접 선택했다. 그들은 1790년 7월 31일 고토르프에서 결혼했으며, 8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의 장녀 카롤리네 공주는 아버지의 사촌 페르디난드 덴마크의 세습공과 결혼했다. 막내딸 빌헬미네 마리 덴마크 공주는 미래의 프레데리크 7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아들들은 모두 요절했고, 그의 사후에는 사촌 크리스티안 8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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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재위 시기 (1808년 ~ 1839년)
1808년 3월 13일 부왕 크리스티안 7세가 홀슈타인 공국 렌츠부르크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프레데리크 6세는 40세의 나이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계승했다.
1809년 스웨덴의 왕위가 공석이 될 가능성이 보이자, 프레데리크 6세는 스웨덴 왕위 계승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칼마르 동맹에서 스웨덴의 독립을 이끈 구스타브 1세 바사의 후손이었기에, 스웨덴 왕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텐보르크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투스 공작이 먼저 스웨덴 왕위에 선출되었고, 그 뒤를 프랑스 베르나도트 원수가 이으면서 프레데리크 6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나폴레옹 전쟁 초기, 프레데리크 6세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이 코펜하겐을 폭격하자, 덴마크-노르웨이는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연합군은 덴마크에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참가를 요구했지만, 프레데리크 6세는 이를 거부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프레데리크 6세를 고집스럽고 무능하며, 나폴레옹에 대한 그릇된 충성심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했지만, 최근 일부 역사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프레데리크 6세는 곡물 수입에 의존하고 스웨덴의 영토적 야심의 대상이었던 노르웨이의 위태로운 상황을 보호하기 위해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유지했다. 그는 전쟁이 나폴레옹이 주요 발언권을 갖는 대규모 국제 회담으로 끝나, 특히 노르웨이에서 덴마크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덴마크는 킬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프레데리크 6세는 섭정 시절의 자유주의적 사상을 버리고,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통치를 펼쳤다. 검열과 반대파 탄압, 그리고 국가 경제의 열악한 상태는 그의 통치 기간을 암울하게 만들었지만, 프레데리크 6세는 선의의 전제 군주로서의 입장을 유지했다. 1830년대부터 경제 불황이 완화되면서, 1834년 프레데리크 6세는 의회 설립을 통해 제한적인 민주적 개혁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는 슐레스비히 공국에서 덴마크인과 독일인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고, 슐레스비히 지역 의회는 두 민족 집단 간의 갈등의 장이 되었다.
2.4. 사망과 계승
1839년 12월 3일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프레데리크 6세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왕위는 사촌인 크리스티안 8세가 승계받았다.
3. 유산
프레데리크 6세는 천문학 후원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1832년에는 망원경으로 혜성을 발견한 사람에게 금메달을 수여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1850년까지 이를 이어갔으나, 이 상은 3년 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1827년 2월 23일, 왕립 칙허장을 수여하여 덴마크령 인도의 세람포르 칼리지에 대학교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코펜하겐 대학교와 킬 대학교에 이어 덴마크에서 세 번째 대학교가 되었다.
4.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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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6세는 1790년 7월 31일 고토르프에서 마리 소피 폰 헤센카셀과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카롤리네 공주와 빌헬미네 마리 공주 두 딸만이 성년까지 생존하였다.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크리스티안 | 1791년 9월 22일 | 1791년 9월 23일 | |
| 마리 루이즈 | 1792년 11월 19일 | 1793년 10월 12일 | 프레데릭스보르에서 사망 |
| 카롤리네 | 1793년 10월 28일 | 1881년 3월 31일 |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페르디난트와 결혼, 자녀 없음 |
| 루이즈 | 1795년 8월 21일 | 1795년 12월 7일 | |
| 크리스티안 | 1797년 9월 1일 | 1797년 9월 5일 | |
| 율리아나 루이즈 | 1802년 2월 12일 | 1802년 2월 23일 | |
| 프레데리케 마리 | 1805년 6월 3일 | 1805년 7월 14일 | |
| 빌헬미네 마리 | 1808년 1월 18일 | 1891년 5월 30일 | 프레데리크 7세와 이혼 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카를 공작과 결혼, 자녀 없음 |
또한, 프레데리크 6세는 첩 Frederikke Dannemand덴마크어(벤테 모텐스다터 안데르센(라프스테드))과의 사이에서 4명의 서자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루이즈 프레데리케 다네만, 다네만 백작부인 | 1810년 4월 16일 | 1888년 12월 28일 | 빌헬름 폰 자카리아와 결혼 |
| 캐롤라인 아우구스타 다네만, 다네만 백작부인 | 1812년 | 1844년 | 아돌프 프레데릭 샤크 폰 브로크도르프와 결혼 |
| Frederik Wilhelm Dannemand덴마크어, 다네만 백작 | 1813년 7월 20일 | 1888년 3월 12일 | |
| 프레데리크 발데마르 다네만, 다네만 백작 | 1819년 6월 6일 | 1835년 3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