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나드 1세 막 알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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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나드 1세 막 알핀은 9세기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스코틀랜드 건국 신화와 역사적 배경에서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10세기 말에 처음 기록된 그의 신화는 픽트랜드를 정복하고 달 리어타 왕국을 다스린 스코트인의 왕으로 묘사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그가 픽트인의 왕이었으며, 게일인과 픽트인의 왕위 융합을 시작한 인물로 본다. 그의 치세 동안 노르드인의 정착이 가속화되었고, 픽트인과 게일인의 융합이 진행되었다. 키나드 1세는 858년 사망했으며, 그의 부고는 "픽트인의 왕"의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알바의 왕위를 계승했고, 11세기 초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한 알핀 왕조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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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나드 1세 막 알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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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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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 정복왕) |
출생 | 810년 |
출생지 | 아이오나 |
사망 | 858년 2월 13일 (47세) |
사망 장소 | 포르테비오트, 퍼스셔, 스코틀랜드 |
매장지 | 아이오나 수도원 |
왕가 | 알핀 |
아버지 | 알핀 막 에크다크 |
자녀 | 카우산틴 막 키나다 아드 막 키나다 말 무ire 잉겐 키나다 알려지지 않은 딸 |
통치 | |
즉위 | 848년 |
퇴위 | 858년 2월 13일 |
선임자 | 드레스트 10세 |
후임자 | 도날 1세 |
달 리어타 왕 | |
즉위 | 841년–850년 |
선임자 | 알핀 막 에크다크 |
후임자 | 칭호 폐지 |
칭호 | |
즉위명 | 케네스 1세 |
사후 칭호 | 안 페르바사흐 |
2. 스코틀랜드 건국 신화와 역사적 배경
키나드 1세의 건국 신화는 10세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바 왕국 건국 신화는 키나드 2세 재위(971년–995년) 시절 편찬된 『알바 열왕연대기』에 처음 등장한다.
1570년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조지 뷰캐넌은 『스코틀랜드의 역사』(''Rerum Scoticarum Historia''la)에서 키나드 1세의 부친이 픽트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키나드 1세가 픽트인들을 정복하여 복수했다는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여 "키나드 1세가 픽트를 정복하고 스코틀랜드를 세움"이라는 줄거리에 살을 붙였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근거가 부족했다.
스코틀랜드 왕들의 계보에 따르면, 키나드 1세의 아버지는 알핀 막 에흐다흐이며, 스코틀랜드 서부에 존재했던 달 리어다의 왕이었다. 알핀은 아에드 핀의 손자로 여겨진다. 현대 역사가들은 달 리어다에서 알핀의 통치와 아에드와의 관계에 대해 회의적이며, 일부 기록은 필사자의 부주의로 인한 결과라고 믿는다. 키나드 1세의 할머니(알핀의 어머니)는 콘스탄틴 1세와 오엔거스 2세의 여동생인 픽트족 공주였다고 한다. 픽트족 전통에 따르면 왕족의 여성 대표자가 왕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1] 이러한 출신은 키나드 1세에게 픽트족 왕위에 대한 정당한 주장을 부여했다.
839년 또는 841년에 달 리어다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바이킹과 픽트족 세력을 정복하고, 843년에는 픽트 왕국의 상왕이 되어, 스코트인과의 통합을 이루어 알바 왕국을 건국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키나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는 신화의 역사적 근거는 빈약하다고 보고 있다.
2. 1. 키나드 1세의 신화
알바 왕국의 기원에 따르면, 픽트인들을 정복하고 알바 왕국을 세운 정복왕 키나드 1세의 신화는 실제 키나드 1세가 죽은 지 100여 년 뒤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신화는 10세기 말 키나드 2세(재위: 971년–995년) 때 편찬된 『알바 열왕연대기』에서 처음 나타난다.[9]15세기 앤드루 윈토운이 쓴 『스코틀랜드 원조연대기』의 내용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570년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조지 뷰캐넌은 『스코틀랜드의 역사』(''Rerum Scoticarum Historia''la)에서 키나드 1세의 부친이 픽트인들에게 살해당했고, 키나드 1세가 픽트인들을 정복해 복수했다는 내용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는 "키나드 1세가 픽트를 정복하고 스코틀랜드를 세움"이라는 줄거리에 살을 붙였지만, 역사적 근거는 부족했다. 뷰캐넌은 기랄두스 캄브렌시스의 「막 알핀의 배신」 같은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10]
19세기 말, 윌리엄 포브스 스콘 등은 고중세 사료 독해의 새 표준을 마련하면서 이런 신화를 상당히 제거했다. 스콘은 베다 베네라빌리스가 언급한 픽트인의 모계상속에 주목했고, 픽트 연대기에 기록된 픽트인의 왕사가 말이 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를 통해 키나드 1세가 픽트인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게일인 국가 달 리어타의 왕과 픽트인 왕녀 사이에서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9]
현대 역사학자들은 스콘 등의 결론 중 일부는 인정하고 일부는 기각하면서 비판적으로 계승했다. 중세학자 알렉스 울프는 2004년 키나드 1세는 최초의 스코트인의 왕이 아니라 뒤에서 다섯 번째 픽트인의 왕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
2. 2. 역사학계의 비판적 검토
윌리엄 포브스 스콘을 비롯한 19세기 말 역사학자들은 고중세 사료를 새롭게 해석하여 키나드 1세 관련 신화를 상당 부분 제거했다. 스콘은 베다 베네라빌리스가 언급한 픽트족의 모계 상속 전통에 주목, 키나드 1세가 달 리어타 왕과 픽트인 왕녀 사이에서 태어나 양쪽 왕위를 모두 물려받았다는 결론을 내렸다.[1] 이는 키나드 1세의 픽트 정복설을 부정하는 것이다.현대 역사학계는 스콘의 결론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알렉스 울프 등은 키나드 1세를 최초의 스코트인의 왕이 아닌 픽트인의 왕으로 본다.[9][10]
오늘날 역사학계는 게일인과 픽트인의 왕위가 점진적으로 융합되었으며,[11] 이 과정은 키나드 1세 때 시작되어 카우산틴 2세 때 완료되었다고 본다. "픽트인의 왕" 대신 "알바 국왕"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3. 키나드 1세의 출신과 배경
키나드 1세의 출신은 불확실하며, 그 이전의 픽트인의 왕 또는 달 리어타 국왕들의 실존 여부도 명확하지 않다. 중세 족보들은 신뢰성이 낮지만, 역사학자들은 키나드 1세가 달 리어타의 케넬 느가브란 또는 다른 지파 출신일 것으로 추정한다.[12]
알바인의 노래에는 키나드 1세의 아버지 알핀이 왕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 시는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 옹구스 2세 막 페르구사, 오가넌 막 옹구사, 아드 막 보단터의 치세를 언급한 후, 키나드 1세의 치세를 13년으로 기록한다.[13]
스코틀랜드 왕들의 계보에 따르면, 키나드 1세의 아버지는 알핀 막 에흐다흐였으며, 알핀은 아에드 핀의 손자로 여겨진다. 현대 역사가들은 알핀의 달 리어다 통치와 아에드와의 관계에 대해 회의적이며, 일부 텍스트에서 필사자의 부주의로 인한 결과라고 믿는다. 헌팅던 연대기는 알핀이 갈로웨이에서 픽트족을 물리쳤지만, 픽트족에게 패배하여 834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들은 알핀의 사망 연도를 840년 또는 841년으로 본다.
키나드 1세의 할머니(알핀의 어머니)는 콘스탄틴 1세와 오엔거스 2세의 여동생인 픽트족 공주였다고 한다. 픽트족 전통에 따르면 왕족 여성 대표가 왕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기에,[1] 키나드 1세는 픽트족 왕위에 대한 정당한 주장을 할 수 있었다.
키나드 1세는 810년경 아이오나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2][3] 아버지 사후 달 리어다 왕위를 계승했으며, 대관식은 840년 또는 841년에 거행되었다. ''알바 왕 연대기''는 키나드 1세부터 케네스 2세까지 스코틀랜드 왕들의 통치를 묘사한 10세기 자료이다.
픽트족 연대기에 따르면 키나드 1세는 픽타비아의 왕으로 여겨진다. 얼스터 연대기에는 '픽트인의 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839년 또는 841년에 달 리어다 왕국 왕위를 계승했고, 843년에는 픽트 왕국의 상왕이 되어 스코트인과의 통합을 통해 알바 왕국을 건국했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사실상 창시자로 여겨진다.
3. 1. 족보 기록
키나드gd 1세의 족보는 12세기 필사본인 롤린슨 B 502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가브란 막 도망가르트의 후손으로 달 리어타 왕국의 케넬 느가브란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12] 해당 족보는 말 콜룸 2세의 조상을 언급하며, 키나드 1세를 알핀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알핀은 오하드의 아들이고, 오하드는 아드 핀드의 아들이며, 아드 핀드는 도망가르트의 아들, 도망가르트는 돔날 브레크의 아들, 돔날 브레크는 오하드 비더의 아들, 오하드 비더는 아단의 아들, 아단은 가브란의 아들이며, 가브란은 도망가르트의 아들, 도망가르트는 페르구스 모르의 아들로 이어진다.[12]하지만, 이 족보는 연대상 결함이 있다. 778년경에 사망한 아드 핀드가 673년경에 피살된 도망가르트 막 돔날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12] 이러한 이유로 역사학자들은 족보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지 않으며, 아드 핀드와 도망가르트 사이에 오하드 막 에크다크와 오하드 막 도망가르트를 추가하여 연대를 맞추기도 한다.
3. 2. 게일인설과 픽트인설
키나드 1세가 게일인이라는 설은 기각되지 않지만, 현대 역사학에서는 키나드 1세가 문화적, 혈통적으로 게일인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게일인 국가인 달 리어타의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구분하는 추세이다. 키나드 1세 이전에 픽트인의 왕을 지낸 브리데 4세 막 데르레, 그 형제 네크탄 4세 막 브리데, 그 다음 왕 옹구스 1세 막 페르구사 등도 키나드 1세처럼 픽트인이 아닌 게일인이거나 최소한 부분적으로 게일화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14] 아일랜드 편년사서들에서 픽트인의 왕들을 게일어 이름으로 기록한 것은 픽트인들의 이름에 대응하는 게일어 이름으로 번역한 것일 뿐이라는 설은 두플린 십자가에 새겨진 카우산틴 막 페르구사의 이름의 라틴어형이 명백히 게일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카우산틴 필리우스 피르쿠스(Custantin filius Fircus(sa)la)"인 것이 발견되면서 큰 도전을 받았다.[15]그 밖에도 지명들을 비롯한 다른 증거들은 키나드 1세 이전부터 수 세기 동안 게일인 문화가 픽트랜드 서부를 잠식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애솔(Atholl)은 그 이름이 『울라 편년사』의 739년 기사에 "새로운 에린"이라는 뜻으로(추측) 사용되었고, 아가일(Argyll)도 "동부 게일인"이라는 뜻의 "에르가이얼(Oir-Ghàidhealgd)"에서 비롯되었다.
4. 키나드 1세의 치세
포르트루를 기반으로 했던 픽트 전 왕조가 단절되면서, 키나드 1세는 권력을 잡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839년 오가넌 막 옹구사를 비롯한 픽트인 지도자들이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망하면서 계승 위기가 발생했고, 여러 대립왕들이 난립했다.[16]
픽트 연대기에 따르면 키나드 1세는 843년에 픽트인의 왕이 되기 2년 전부터 달 리어타 국왕이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키나드 1세는 849년에 콜룸바 히엔시스의 성유물을 이오나에서 둔켈드로 옮겼다.[16]
키나드 1세는 삭소니아를 여섯 번 침공하여 멜로스를 함락시키고 던바를 불태웠으며, 바이킹이 픽트랜드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오는 등 군사적 활동을 활발히 했다.[16] 또한, 딸들을 어스트라드클리드와 아일랜드 왕에게 시집보내 왕실 결혼 동맹을 맺었다.
키나드 1세는 858년 2월 13일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지는 스콘 근교로 추정되는 킨벨라헤르(Cinnbelachoir)이다. 모든 사료들은 그의 죽음을 "픽트인의 왕"의 죽음으로 기록하고 있다.[16]
4. 1. 픽트 왕국과의 통합 과정
839년 픽트인의 왕 오가넌 막 옹구사와 그 동생 브란, 아드 막 보안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다.[16] 이로 인해 픽트 왕국은 왕위 계승 위기를 겪었고, 최소 네 명 이상의 대립왕들이 왕위를 다투었다.키나드 1세는 843년부터 픽트 왕국의 왕위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마지막 대립왕을 쳐부수고 최종적으로 왕이 된 것은 848년경이었다.[16] 849년, 키나드 1세는 콜룸바 히엔시스의 성유물을 이오나에서 둔켈드로 옮겼다.[16]
『에린 왕국 편년사』에는 키나드 1세에 관한 언급이 있으나, 내용이 매우 불명확하여 신뢰하기 어렵다.[17]
키나드 1세의 치세에는 노르드인의 정착이 가속화되어 왕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연결이 약화되었고, 잉글랜드 및 유럽 대륙과의 연결은 끊어졌다.[18] 이러한 상황에서 키나드 1세와 그 후계자들은 픽트인과 게일인의 융합을 더욱 강화했고, 돔날 2세 막 카우산틴 시대에 이르러 "알바의 국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18]
4. 2. 대외 관계
키나드 1세는 삭소니아를 여섯 번 침공하여 멜로스를 함락시키고 던바를 불태웠다.[16] 바이킹은 픽트랜드 내륙 깊숙이까지 쳐들어왔다.[16]키나드 1세는 딸들을 어스트라드클리드와 아일랜드의 왕들에게 시집보내 왕실 결혼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그의 딸 말 미러 잉겐 키나다는 에린의 지고왕 아드 핀들리어흐와 결혼하여 니얼 글룬두브를 낳았고, 아드가 죽은 뒤에는 플란 너 시나너와 재혼하여 돔날 막 플란을 낳았다.
4. 3. 알바 왕국의 기틀 마련
키나드 1세의 치세에는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외곽지역(셰틀랜드, 오크니, 케이스네스, 서덜랜드, 서부 군도, 맨섬, 로스 일부)에 노르드인의 정착이 가속화되었다.[18] 이에 따라 키나드 1세의 왕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연결은 약화되었고, 잉글랜드 및 유럽 대륙과의 연결은 아예 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나드 1세와 그 후계자들은 왕국 내에서 자신들의 작위를 통합하고, 이미 수 세기 동안 진행 중이던 픽트인과 게일인의 융합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8] 돔날 2세 막 카우산틴 시대에 이르러 왕호를 어느 민족의 왕이 아닌 "알바의 국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러한 융합의 측면에서 시사적이다.[18]5. 키나드 1세의 죽음과 후계
키나드 1세는 858년에 사망했다. 울스터 연대기는 그가 종양으로 인해 2월에 포르테비오트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역사가들은 이 날짜가 2월 13일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키나드는 이오나 수도원에 묻혔다. 왕위 계승은 탄니스티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키나드의 후계자는 장남이 아닌 그의 형제 도널드 1세였다. 도널드 1세 사후, 키나드의 아들 콘스탄틴 1세(Causantín mac Cináeda)와 아에드(Áed mac Cináeda)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11세기 초까지 스코틀랜드를 통치한 알핀 왕조는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울스터 연대기에는 키나드 1세가 '픽트인의 왕'(Cináed rex Pictorum)으로 기록되어 있다.[2] 동시대 아일랜드 연대기는 키나드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에게 픽트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지만,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통치한 4명의 픽트족 왕에게만 주어졌던 포르트리우의 왕이라는 칭호는 부여하지 않았다.[1] 픽트족의 왕이라는 칭호는 키나드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이 픽타비아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의 지배 영역의 범위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1]
6. 키나드 1세의 가족
키나드 1세의 왕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픽트족 공주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7] 키나드 1세는 최소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이름 | 설명 |
---|---|
카우산틴 1세 | 알바의 왕 |
아드 | 알바의 왕 |
이름 미상 |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 룬 압 아르흐갈과 결혼하여 오하드 막 룬을 낳았다. 오하드는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 및/또는 픽트인의 왕으로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
말 미러 잉겐 키나다 | 에린의 지고왕 아드 핀들리어흐와 결혼했다. |
더블린의 왕 올라프 크누트손의 아내가 키나드 1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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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th I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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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
[2]
웹사이트
Scottish diocese hopes to be a faith refuge
https://www.ncronlin[...]
2021-02-2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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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Kenneth I
https://www.undiscov[...]
2021-02-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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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stor.or[...]
2021-04-27
[5]
학술지
The Law of the Throne: Tanistry and the Introduction of the Law of Primogeniture: A Note on the Succession of the Kings of Scotland from Kenneth MacAlpin to Robert Bruce.
https://www.jstor.or[...]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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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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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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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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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뉴스
"First king of the Scots? Actually he was a P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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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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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After Herbert, Rí Éirenn, Rí Alban, kingship and identity in the ninth and tenth centuries,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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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enealogies from Rawlinson B 502: ¶1696 Genelach Ríg n-Al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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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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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an Albanach
http://sejh.pagesp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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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un, Pictish King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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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ster, Picts, Gaels and Scots, pp. 95–96; Fergus would appear as Uurgu(i)st in a Pictish form.
[16]
서적
Regarding Dál Riata, see Broun, "Kenneth mac Alpin"; Foster, Picts, Gaels and Scots, pp. 111–112.
[17]
서적
Ó Corráin's Vikings in Ireland and Scotland, available as etext, and Woolf, Kingdom of the Isles, may be helpful
[18]
서적
Lynch, Michael, A New History of Scot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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