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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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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종무열왕릉비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 현재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화강석으로 제작되었으며, 귀부는 장방형 기석 위에 놓여 있고, 이수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전서로 새겨져 있다. 귀부와 이수의 조각은 통일신라 시대 석조 예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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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대한민국 지정 국보 제25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한글경주 태종무열왕릉비
한자慶州 太宗武烈王陵碑
가타카나ギョンジュ テジョンムヨルワンヌンビ
히라가나けいしゅう たいそうぶれつおうりょうひ
로마자 표기Gyeongju Taejong Muyeolwangneungbi
상세 정보
이름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영어 이름Stele for King Taejong Muyeol, Gyeongju
국가대한민국
유형국보
번호25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4-1
시대남북국 시대
소유국유
좌표35°49′23″N 129°09′29″E
문화재청 ID11,00250000,37

2. 역사

태종무열왕릉비는 문무왕 원년(661년, 662년[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1]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13] 귀부의 길이는 약 3.33미터, 폭은 2.54미터이며, 이수의 높이는 약 1.1미터이다. 이수는 6룡(龍)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로 양각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경주 서악동 고분군의 동쪽 끝[4],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태종무열왕(재위 654년-661년) 릉 옆에 위치한다. 문무왕 원년(661년〈662년[5]〉)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1], 조선에서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석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6][7]

3. 조각

태종무열왕릉비의 조각은 통일신라 초기 조각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귀부는 거북 모양으로,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힘차게 뻗어 앞으로 전진하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등에는 4중 육각형 귀갑문(龜甲文)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머리 위와 목 아래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새겨져 있다. 등 부분 중앙에는 비신(碑身)을 얹기 위한 연화좌(蓮花座)가 마련되어 있다.

이수는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으로,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기법이 돋보인다. 용들은 좌우 대칭을 이루며, 서로의 앞발을 꼬리로 꼬는 등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당시 조각 기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태종 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당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점을 가지며, 통일신라 초기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15]

3. 1. 귀부

귀부는 길이 약 3.33m, 폭 약 2.54m이다. 현재 비신은 없고 화강석으로 된 귀부만 남아 있는데, 장방형 기석 위에 얹혀 있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 모양이며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앞으로 전진하는 듯하다. 비좌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 육각형 귀갑문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대석 거북받침에는 등갑에 귀갑문, 그 주위에 비운문, 머리 위와 목 아래에 보상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등 부분 중앙에는 비신을 얹기 위한 연화좌가 있다. 이는 통일신라 초기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15][11][13]

귀부

3. 2. 이수

이수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1.1미터이다. 여섯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자태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15]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은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 용의 비늘 하나하나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점을 보이며, 통일신라 초기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15]

이수에는 6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좌우대칭을 이루며, 왼쪽과 오른쪽에서 서로 얽히면서 중앙의 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앙 하부에는 높이 42cm, 폭 33cm 크기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2행 8자의 전서 전액이 양각되어 있다.[4][9]

3. 3. 양식

귀부는 길이 약 3.33미터, 폭 2.54미터이며, 이수는 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화강석으로 된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귀부는 장방형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이수는 6마리의 용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웅장한 구 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의 글씨로 전해지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로 양각되어 있다.[15]

귀부의 머리는 거북 모양으로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龜甲)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 용의 비늘 하나하나가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되는 점을 보여주며, 통일신라 초기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15]

비석은 서남쪽을 향하고 있으며[4], 전체 높이는 2.1미터이다.[8] 자라 형태를 본뜬 귀부는 높이 1.03미터[4][9], 전체 길이 3.8미터(3.33m[5]), 폭 2.49미터(2.54m[5])[10]이며, 직사각형 기단 위에 놓여 있다.[11] 비석의 이수는 높이 1.06미터[9][12], 폭 1.36미터, 두께 0.36미터이다. 비좌는 1.73×0.86미터이다.[10]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는 비신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고[10], 화강암으로 만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13]

좌대석 거북받침의 머리 부분이나 등딱지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등에는 귀갑문, 그 주위에 비운문(飛雲文), 머리 위와 목 아래에 보상화문(寶相華文)이 보인다. 등 부분 중앙에는 비신을 얹기 위한 연화좌가 있다.[11][13]

이수에는 6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좌우대칭을 이루며[8], 왼쪽과 오른쪽에서 서로 얽히면서[9] 중앙의 구체(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13] 그 중앙 하부 높이 42cm, 폭 33cm에[10]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의 2행 8자 전서 전액이 양각되어 있다.[4][9]

4. 사진


참조

[1] 문서 藤井 (1999)
[2] 웹사이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 太宗武烈王陵碑)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2-12
[3] 문서 韓国文化財保護協会 (1991)
[4] 문서 東、田中 (1988)
[5] 문서 山本 (1978)
[6] 문서 篠原 (2012)
[7] 문서 藤井 (1999)
[8] 웹사이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慶州太宗武烈王陵碑)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2-12
[9] 문서 藤井 (1999)
[10] 문서 韓国文化財保護協会 (1991)
[11] 문서 関野 (1944)
[12] 문서 東、田中 (1988)
[13] 웹사이트 武烈王陵 https://kotobank.jp/[...] 2023-02-12
[14] 웹사이트 螭首 https://kotobank.jp/[...] 2023-02-15
[15] 웹인용 경주 태종무열왕릉비(慶州太宗武烈王陵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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