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인문은 태종 무열왕과 문희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능했고, 당나라에 숙위하며 백제 정복과 고구려 정복에 참여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외교적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당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 사망했다. 사후 태대각간으로 추증되었으며, 묘비 발견과 관련하여 역사적 논란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29년 출생 - 우나나가라 하타다타
우나나가라 하타다타는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왕족으로, 691년 왕위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양위하고 상왕으로 지내다 696년 사망했다.
김인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김인문 (金仁問) |
휘 | 인문(仁問) |
자 | 인수(仁壽) |
군호 | 임해군(臨海君) |
출생 | 629년 |
출생지 | 신라 금성 |
사망 | 694년 4월 29일(65세) |
사망지 | 당나라 장안 |
매장지 | 신라 금성 |
신분 | |
목록 | 신라의 왕자 |
성별 | 남성 |
국적 | 신라 |
종교 | 불교 |
가족 관계 | |
부왕 | 김춘추 |
모친 | 문명왕후 |
2. 생애
김인문은 태종 무열왕과 문희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능하고 식견이 넓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1] 651년부터 당나라에서 숙위하며 삼국통일 전쟁에 참여하고, 이후 당나라와 신라 사이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676년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려 할 때 당 고종에 의해 신라 왕으로 임명될 뻔했으나, 신라의 사죄로 무산되었다.[1] 이후에도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 694년 장안에서 사망하여 신라로 운구되어 경주에 묻혔다.[1]
2. 1. 어린 시절
태종 무열왕과 그의 부인 문희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 법민의 친동생이며, 문왕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였고, 활쏘기와 말 타기, 음률, 예서에 능하였으며, 식견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1]2. 2. 당나라에서의 활동과 삼국통일 기여
진덕여왕 5년(651년)에 당나라에 숙위(宿衛)로 파견되었고, 태종무열왕 즉위 후 압독주 총관(押督州摠官)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공신으로 인정받아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받았다.[1] 백제의 잦은 침공에 대응하여 당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요청했고,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官)으로,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임명하여 백제 정벌에 참전시켰다.[1]이후 김인문은 당나라에서 숙위하며 고구려 정벌에 필요한 양곡 보급을 담당했고, 668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 참전했다.[1] 653년 아버지 무열왕의 명으로 신라의 경쟁국인 백제에 대항하기 위한 당나라 군사 동맹을 확보하는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백제로 진격한 당나라 군대에 합류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을 사로잡는 데 기여했다. 그는 한국의 통일 전쟁 기간과 그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당나라와 신라 조정 사이의 정기적인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생애 대부분을 당나라 수도에서 보냈다.
660년에는 고종의 백제 원정군의 부장으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을 이끌었고, 661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원정 때는 고종의 명령을 본국에 전달하여 신라군을 통솔하고, 평양으로의 군량 보급에 힘썼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666년 고종의 태산 봉선 제사에 참여했으며, 우효위대장군을 수여받았다. 668년에 고종이 이적에게 고구려 토벌을 다시 명했을 때, 신라군을 합류시켰다.
674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신라-당나라 동맹이 악화된 후, 김인문은 당나라 황제에 의해 신라 왕으로 임명되어 왕위를 이을 형제를 대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로 돌아가던 중 신라 사절단을 만나 당나라에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위가 철회되어 당나라 수도로 돌아갔다.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 등 유민들을 백제의 옛 땅으로 데려와 신라의 괴뢰 국가를 수립하려 하자, 674년에는 고종이 김인문을 임해군 공으로 봉하고, 문무왕 대신 신라왕, 계림주 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려 했으나, 김인문은 이를 굳게 거절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문무왕의 사죄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679년에는 진군대장군행우무위대장군으로 전임되었으며, 690년에는 보국대장군상주국, 좌우림군대장군을 수여받았으나, 694년에 장안에서 병사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따르면, 그의 작위는 임해공(臨海公)이며 웅천주(熊川州)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1]
2. 3. 나당전쟁과 이후
651년 진덕여왕의 명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김인문은 총 7차례에 걸쳐 22년간 숙위하며 고종에게 좌령군위장군을 수여받는 등 당과 신라 사이의 외교를 주도했다. 653년 귀국 후에는 압독주 총관에 임명되어 무열왕의 신임을 얻었다.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백제 원정군 부장으로 참전했고, 661년부터는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여 고종의 명을 신라에 전달하고 신라군을 통솔하며 평양으로 군량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 이후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 666년 고종의 태산 봉선 제사에 참여하고 우효위대장군을 제수받았다. 668년 고종이 이적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자 신라군을 합류시켰다.
674년 문무왕이 안승 등 고구려 유민들을 백제 땅에 정착시켜 신라의 괴뢰 국가를 세우려 하자, 고종은 김인문을 임해군 공으로 봉하고 문무왕 대신 신라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김인문은 이를 사양하고 귀국길에 올랐고, 문무왕의 사죄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 679년 진군대장군행우무위대장군, 690년 보국대장군상주국, 좌우림군대장군을 제수받았으나, 694년 장안에서 병사했다. 유해는 신라로 보내져 효소왕이 태대각간의 관위를 추증했다.
2. 4. 사망과 추증
694년 4월, 김인문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김인문에 대한 짧은 전기가 실려 있는데, 그의 사망 기록은 당나라 역사서에서도 확인된다.[1] 당나라 황제는 김인문의 시신을 신라로 운구하기 위해 특별 사절단을 보냈다.[1] 신라에서는 그에게 태대각간 (太大角干)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경주 신라 수도 서쪽 평원에 묻었다.[1] 효소왕은 김인문에게 태대각간의 관위를 추증했다.13세기 삼국유사에는 김인문이 신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당나라 역사서와 삼국사기에 반복적으로 기록된 김인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장례 사절단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이 기록은 의심스럽다.[1]
3. 사후
김인문은 사후 신라로 이송되어 금성 남부 서원에 장사되었고, 효소왕은 그를 태대각간으로 추증하였다. 그의 묘비는 1931년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서악리(현 경주시 서악동) 서악서원에서 상부가 잘린 채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90년대 이후 묘비명이 판독되면서 김성한과 김알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다. 김주원의 증손자 김흔은 김인문을 자신의 조상이라 주장하여, 신라김씨 족보와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3. 1. 묘비 발견과 역사적 논란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이송되어 금성 남부 서원에 장사되었다. 효소왕은 그를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그의 묘비는 후대에 잃어버렸다가 1931년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서악리(현 경주시 서악동 서악 2길 23번지) 서악서원(西岳書院) 영귀루(詠歸樓) 서편 누문(樓門) 아래에서 상부가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이 묘비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990년대 이후 묘비명이 일부 판독되었는데, 묘비명과 문무왕 묘비명에서 신라 태조를 성한왕이라 기록한 구절이 발견되어 김성한과 김알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김주원의 증손자 김흔은 임해공 휘 인문이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후대에 김문왕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신라김씨 족보와는 다소 다른 의견을 보인다.
3. 2. 후손 관련 이견
김인문의 사후 시신은 신라로 이송되어 금성 남부 서원에 장사되었다. 그 뒤 효소왕은 그를 증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그의 묘비는 후대에 잃어버렸다가 1931년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서악리(현, 경주시 서악동 서악 2길 23번지)에 있던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영귀루(詠歸樓) 서편 누문(樓門) 아래에서 상부가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990년대 이후 그의 묘비명이 일부 판독되었고, 그의 묘비명과 문무왕 묘비명에서 신라 태조를 성한왕이라 기록한 구절이 발견되어 김성한과 김알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또한 김주원의 증손자 김흔은 임해공 휘 인문이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후대에 김문왕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신라김씨 족보와는 다소 이견을 보인다.
4. 평가
김인문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기고 다재다능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신라와 당 사이의 외교에서도 훌륭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숙위로서 당에 머물면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외교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와 당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
백제를 정복할 때는 당나라 장군으로, 고구려를 정복할 때는 신라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신라를 이끌었다. 나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은 문무왕을 폐위하고 김인문을 신라의 새로운 왕으로 삼으려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결국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이 당에 사죄함으로써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김인문이 중재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1]
김인문은 유교뿐만 아니라 노장사상과 불교에도 정통했으며, 무예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651년 진덕여왕의 명으로 처음 당나라에 건너간 이후, 총 7차례에 걸쳐 22년간 숙위하며 고종으로부터 좌령군위장군 직을 받는 등 당과 신라 사이의 외교를 주도했다. 653년 귀국 후에는 압독주 총관에 임명되었고, 무열왕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660년 고종의 백제 원정군 부장으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이끌었으며, 661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원정에서는 고종의 명령을 신라에 전달하여 신라군을 통솔하고 평양으로의 군량 보급을 담당했다. 이후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 666년 고종의 태산 봉선 제사에 참여하고 우효위대장군 직을 받았다. 668년 고종이 이적에게 고구려 정벌을 다시 명했을 때 신라군을 합류시켰다.
674년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승 등 유민들을 백제 옛 땅으로 데려와 신라의 괴뢰 국가를 세우려 하자, 고종은 김인문을 임해군 공으로 봉하고 문무왕 대신 신라왕, 계림주 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려 했다. 그러나 김인문은 이를 굳게 사양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문무왕의 사죄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간 그는 679년 진군대장군행우무위대장군으로 전임되었고, 690년에는 보국대장군상주국, 좌우림군대장군 직을 받았으나, 694년 장안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신라로 옮겨졌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관위를 추증했다.
5. 대중 문화 속 김인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