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오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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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시오스 3세는 715년부터 717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혼란의 20년'으로 불리는 정치적 불안정 시대에 즉위했으며, 해군 반란으로 세무 장관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테오도시오스 3세는 무능하고 의지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레오 3세의 반란으로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으며, 아랍의 위협과 불가르족과의 조약 체결 등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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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오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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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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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테오도시우스 3세 |
로마자 표기 | Theodósios 3se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
왕조 | 20년의 무정부 시대 |
통치 | |
퇴위 | 717년 3월 25일 |
선임자 | 아나스타시우스 2세 |
후임자 | 레오 3세 |
가족 | |
자녀 | 테오도시우스 |
아버지 | 티베리오스 3세? |
사망 | |
사망 시기 | 717년 이후, |
2. 역사적 배경
674년부터 678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의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격퇴된 후, 아랍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잠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 후, 비잔틴 황제유스티니아누스 2세 (재위: 685년 - 695년, 705년 - 711년)가 전쟁 행위를 재개했지만, 아랍 측의 승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들은 매년 비잔틴 제국의 영내로 침입하여 요새와 도시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를 점차 잠식해 갔다. 712년 이후, 아랍 측의 습격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비잔틴 영내 깊숙이 미치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방어 능력은 저하되었고, 이러한 습격에 대한 비잔틴 측의 반격도 부진해졌다. 변방 지역의 많은 곳에서는 주민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추방당했고, (특히 킬리키아) 변방의 요새는 점차적으로 포기되었다. 이러한 습격의 성공은 아랍 측의 태도를 자극하여, 칼리프 알-왈리드 1세 (재위: 705년 - 715년)의 치세에는 일찍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왈리드 1세 사망 후에는 후계자인 술레이만 (재위: 715년 - 717년)이 군사 작전 계획을 이어받았다. 술레이만은 716년 말에 알레포 북쪽에 위치한 다비크 평원에서 군대 소집을 시작했고, 군대 지휘를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Maslama ibn Abd al-Malik영어에게 맡겼다.
그 한편으로 비잔틴 제국의 북방 변방에서는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에 의한 위협이 증대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재위: 711년 - 713년) 치세 중에는 불가리아의 칸인 테르벨/Tervel of Bulgaria영어 (재위: 700년 - 721년)이 이끄는 불가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진군하여 주변 토지를 약탈했는데, 이때 약탈당한 토지 중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자들이 종종 여름에 머물던 수도 가까운 별장과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3세가 정권의 자리에 있던 시기는 "혼란의 20년"으로 불렸고, 황제와 유력자들의 다툼과 빈번한 제위 교체가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귀족은 소아시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황제의 강대화를 저지하고 체제를 혼란시키는 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 외에 강력한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혼란의 20년은 69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레온티오스 (재위: 695년 - 698년)에 의해 타도되고, 8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종언을 맞이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치 혼란 시대에는 한때 복위했던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포함해 7명의 황제가 즉위했다. 현대 역사가인 로밀리 젠킨스/Romilly Jenkins영어는 695년부터 717년 사이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 3세 (재위: 698년 - 705년)와 아나스타시우스 2세 (재위: 713년 - 715년) 단 두 명뿐이었다고 언급했다. 이 위기의 시대는 테오도시우스 3세를 타도한 레오 3세 (재위: 717년 - 741년)의 즉위로 종결되었고, 레오 3세가 연 왕조 (이사우리아 왕조)는 85년 동안 지속되었다.
2. 1. 20년 무정부 시대
wikitext674년부터 678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의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격퇴된 후, 아랍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잠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 후, 비잔틴 황제유스티니아누스 2세 (재위: 685년 - 695년, 705년 - 711년)가 전쟁 행위를 재개했지만, 아랍 측의 승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들은 매년 비잔틴 제국의 영내로 침입하여 요새와 도시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를 점차 잠식해 갔다. 712년 이후, 아랍 측의 습격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비잔틴 영내 깊숙이 미치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방어 능력은 저하되었고, 이러한 습격에 대한 비잔틴 측의 반격도 부진해졌다. 변방 지역의 많은 곳에서는 주민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추방당했고, (특히 킬리키아) 변방의 요새는 점차적으로 포기되었다. 이러한 습격의 성공은 아랍 측의 태도를 자극하여, 칼리프 알-왈리드 1세 (재위: 705년 - 715년)의 치세에는 일찍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왈리드 1세 사망 후에는 후계자인 술레이만 (재위: 715년 - 717년)이 군사 작전 계획을 이어받았다. 술레이만은 716년 말에 알레포 북쪽에 위치한 다비크 평원에서 군대 소집을 시작했고, 군대 지휘를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Maslama ibn Abd al-Malik영어에게 맡겼다.
그 한편으로 비잔틴 제국의 북방 변방에서는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에 의한 위협이 증대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재위: 711년 - 713년) 치세 중에는 불가리아의 칸인 테르벨/Tervel of Bulgaria영어 (재위: 700년 - 721년)이 이끄는 불가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진군하여 주변 토지를 약탈했는데, 이때 약탈당한 토지 중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자들이 종종 여름에 머물던 수도 가까운 별장과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3세가 정권의 자리에 있던 시기는 "혼란의 20년"으로 불렸고, 황제와 유력자들의 다툼과 빈번한 제위 교체가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귀족은 소아시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황제의 강대화를 저지하고 체제를 혼란시키는 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 외에 강력한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혼란의 20년은 69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레온티오스 (재위: 695년 - 698년)에 의해 타도되고, 8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종언을 맞이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치 혼란 시대에는 한때 복위했던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포함해 7명의 황제가 즉위했다. 현대 역사가인 로밀리 젠킨스/Romilly Jenkins영어는 695년부터 717년 사이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 3세 (재위: 698년 - 705년)와 아나스타시우스 2세 (재위: 713년 - 715년) 단 두 명뿐이었다고 언급했다. 이 위기의 시대는 테오도시우스 3세를 타도한 레오 3세 (재위: 717년 - 741년)의 즉위로 종결되었고, 레오 3세가 연 왕조 (이사우리아 왕조)는 85년 동안 지속되었다.
2. 1. 1. 우마이야 왕조의 위협
674년부터 678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의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격퇴된 후, 아랍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잠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 후, 비잔틴 황제유스티니아누스 2세 (재위: 685년 - 695년, 705년 - 711년)가 전쟁 행위를 재개했지만, 아랍 측의 승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들은 매년 비잔틴 제국의 영내로 침입하여 요새와 도시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를 점차 잠식해 갔다。 712년 이후, 아랍 측의 습격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비잔틴 영내 깊숙이 미치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방어 능력은 저하되었고, 이러한 습격에 대한 비잔틴 측의 반격도 부진해졌다. 변방 지역의 많은 곳에서는 주민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추방당했고, (특히 킬리키아) 변방의 요새는 점차적으로 포기되었다。 이러한 습격의 성공은 아랍 측의 태도를 자극하여, 칼리프 알-왈리드 1세 (재위: 705년 - 715년)의 치세에는 일찍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왈리드 1세 사망 후에는 후계자인 술레이만 (재위: 715년 - 717년)이 군사 작전 계획을 이어받았다。 술레이만은 716년 말에 알레포 북쪽에 위치한 다비크 평원에서 군대 소집을 시작했고, 군대 지휘를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Maslama ibn Abd al-Malik영어에게 맡겼다。
그 한편으로 비잔틴 제국의 북방 변방에서는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에 의한 위협이 증대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재위: 711년 - 713년) 치세 중에는 불가리아의 칸인 테르벨/Tervel of Bulgaria영어 (재위: 700년 - 721년)이 이끄는 불가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진군하여 주변 토지를 약탈했는데, 이때 약탈당한 토지 중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자들이 종종 여름에 머물던 수도 가까운 별장과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2. 1. 2. 불가르족의 발흥
674년부터 678년에 걸쳐 이어진 아랍인의 첫 번째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가 격퇴된 후, 아랍과 비잔틴 제국 사이에는 잠시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 후, 비잔틴 황제유스티니아누스 2세 (재위: 685년 - 695년, 705년 - 711년)가 전쟁 행위를 재개했지만, 아랍 측의 승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장군들은 매년 비잔틴 제국의 영내로 침입하여 요새와 도시를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를 점차 잠식해 갔다。 712년 이후, 아랍 측의 습격이 소아시아 (아나톨리아)의 비잔틴 영내 깊숙이 미치게 되면서 비잔틴 제국의 방어 능력은 저하되었고, 이러한 습격에 대한 비잔틴 측의 반격도 부진해졌다. 변방 지역의 많은 곳에서는 주민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추방당했고, (특히 킬리키아) 변방의 요새는 점차적으로 포기되었다。 이러한 습격의 성공은 아랍 측의 태도를 자극하여, 칼리프 알-왈리드 1세 (재위: 705년 - 715년)의 치세에는 일찍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왈리드 1세 사망 후에는 후계자인 술레이만 (재위: 715년 - 717년)이 군사 작전 계획을 이어받았다。 술레이만은 716년 말에 알레포 북쪽에 위치한 다비크 평원에서 군대 소집을 시작했고, 군대 지휘를 형제인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Maslama ibn Abd al-Malik영어에게 맡겼다。
그 한편으로 비잔틴 제국의 북방 변방에서는 슬라브인과 불가르족에 의한 위협이 증대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황제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 (재위: 711년 - 713년) 치세 중에는 불가리아의 칸인 테르벨/Tervel of Bulgaria영어 (재위: 700년 - 721년)이 이끄는 불가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진군하여 주변 토지를 약탈했는데, 이때 약탈당한 토지 중에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자들이 종종 여름에 머물던 수도 가까운 별장과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3세가 정권의 자리에 있던 시기는 "혼란의 20년"으로 불렸고, 황제와 유력자들의 다툼과 빈번한 제위 교체가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 시대의 귀족은 소아시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황제의 강대화를 저지하고 체제를 혼란시키는 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 외에 강력한 정치적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혼란의 20년은 69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레온티오스 (재위: 695년 - 698년)에 의해 타도되고, 80년간 정권을 유지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종언을 맞이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정치 혼란 시대에는 한때 복위했던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포함해 7명의 황제가 즉위했다。 현대 역사가인 로밀리 젠킨스/Romilly Jenkins영어는 695년부터 717년 사이 유능하다고 할 수 있는 황제는 티베리우스 3세 (재위: 698년 - 705년)와 아나스타시우스 2세 (재위: 713년 - 715년) 단 두 명뿐이었다고 언급했다。 이 위기의 시대는 테오도시우스 3세를 타도한 레오 3세 (재위: 717년 - 741년)의 즉위로 종결되었고, 레오 3세가 연 왕조 (이사우리아 왕조)는 85년 동안 지속되었다。
2. 2. 테오도시우스 3세의 즉위 과정
715년 초, 아나스타시오스 2세 황제는 아랍인의 공격에 대비하여 비잔틴 해군을 로도스에 집결시키고 포이니쿠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도스에서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 요한을 살해하고 아드라미티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무 장관이었던 테오도시오스를 황제로 선포했다.역사가 J. B. 버리는 테오도시오스가 황제로 선택된 이유가 단지 제국적인 이름을 가졌고, 무명이었으며, 옵시키온 군대에 의해 쉽게 통제될 수 있다는 점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잔틴학자 그레이엄 섬너는 테오도시오스가 티베리우스 3세의 아들 테오도시오스와 동일인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그가 해군 반란으로 황제가 된 아버지로부터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에 군대에 의해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비잔틴 역사가 키릴 망고와 로저 스콧은 이 이론이 테오도시오스가 퇴위 후 3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럴 것 같지 않다고 본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오스는 황제가 되기를 꺼렸으며, 반란군에게 발견되어 황제로 추대될 때 언덕으로 도망쳐 숨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오스는 715년 5월경 아드라미티움에서 옵시키온 군대에 의해 테오도시오스 3세 황제로 추대되었다.
2. 2. 1. 즉위 배경에 대한 논란
715년 초, 아나스타시오스 2세 황제는 아랍인의 공격에 대비하여 비잔틴 해군을 로도스에 집결시키고 포이니쿠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로도스에서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 요한을 살해하고 아드라미티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세무 장관이었던 테오도시오스를 황제로 선포했다.역사가 J. B. 버리는 테오도시오스가 황제로 선택된 이유가 단지 제국적인 이름을 가졌고, 무명이었으며, 옵시키온 군대에 의해 쉽게 통제될 수 있다는 점 외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잔틴학자 그레이엄 섬너는 테오도시오스가 티베리우스 3세의 아들 테오도시오스와 동일인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그가 해군 반란으로 황제가 된 아버지로부터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에 군대에 의해 선택되었을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비잔틴 역사가 키릴 망고와 로저 스콧은 이 이론이 테오도시오스가 퇴위 후 3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럴 것 같지 않다고 본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오스는 황제가 되기를 꺼렸으며, 반란군에게 발견되어 황제로 추대될 때 언덕으로 도망쳐 숨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시오스는 715년 5월경 아드라미티움에서 옵시키온 군대에 의해 테오도시오스 3세 황제로 추대되었다.
3. 테오도시우스 3세의 통치
테오도시우스 3세가 황제로서 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황제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가 제거했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묘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 복원한 것이었으며, 이 조치로 인해 그는 ''교황 연대기''에서 "정통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비잔틴 자료에 따르면 무능하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테오도시우스는 그의 신하들 중 다수가 옵시키안 테마 군대의 꼭두각시 황제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그의 각 장군]]/레오 3세와 아르타바스도스 휘하의 아나톨리콘 테마와 아르메니아콘 테마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아나스타시우스의 전복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테오도시우스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했고, 레오는 716년 여름에 스스로 비잔틴 황제를 선포했다. 그는 또한 비잔틴의 분열을 유리하게 보고, 혼란이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기 더 쉽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아랍인들의 지원을 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불가리아인 칸 테르벨()과 조약을 협상했는데, 이는 임박한 아랍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약은 비잔티움 제국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사이의 국경을 트라키아로 고정하고, 자고리 지역을 불가리아에게 양도했으며, 불가리아에 대한 조공 지불, 도망자 반환, 그리고 일부 무역 협정을 규정했다.
이 무렵 술레이만은 비잔틴 영토로 진격하여 아모리움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별도의 군대가 카파도키아로 진입했다. 레오와의 협상을 통해 그들은 물러났다. 레오는 황제를 선포한 직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군대를 진격시키기 시작했는데, 먼저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여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여러 관리를 체포한 후 크리소폴리스로 진군했다. 그의 아들이 체포된 후, 테오도시우스는 총대주교 게르마누스와 비잔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퇴위하고 레오를 황제로 인정하기로 동의했다. 존 배그넬 버리는 아랍의 위협이 없었다면 테오도시우스가 권력을 유지하고, 궁정 관리와 엘리트들이 통제하는 명목상의 황제들이 그를 따랐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717년 3월 25일 레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하자, 테오도시우스 3세와 그의 아들은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이후 에페소스의 주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754년 7월 24일에 사망하여 에페소스의 성 필립 교회에 묻혔다.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3. 1. 레오 3세와의 대립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로서 필리피쿠스가 제거했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묘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 복원했다. 이 조치로 ''교황 연대기''에서 "정통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비잔틴 자료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는 무능하고 의지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며, 많은 신하들로부터 옵시키안 테마 군대의 꼭두각시 황제로 여겨졌다. 레오 3세와 아르타바스도스 휘하의 아나톨리콘 테마와 아르메니아콘 테마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레오는 716년 여름에 스스로 비잔틴 황제를 선포하고, 아랍인들의 지원을 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불가리아인 칸 테르벨과 조약을 협상하여, 임박한 아랍의 공격에 대비해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 이 조약은 비잔틴 제국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사이의 국경을 트라키아로 고정하고, 자고리 지역을 불가리아에 양도했으며, 불가리아에 대한 조공 지불, 도망자 반환, 그리고 일부 무역 협정을 규정했다.
술레이만은 비잔틴 영토로 진격하여 아모리움을 포위했고, 별도의 군대가 카파도키아로 진입했다. 레오와의 협상을 통해 그들은 물러났다. 레오는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여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여러 관리를 체포한 후 크리소폴리스로 진군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총대주교 게르마누스와 비잔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퇴위하고 레오를 황제로 인정하기로 동의했다. 존 배그넬 버리는 아랍의 위협이 없었다면 테오도시우스가 권력을 유지하고, 궁정 관리와 엘리트들이 통제하는 명목상의 황제들이 그를 따랐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3. 2. 불가르족과의 조약
테오도시우스 3세는 불가리아인 칸 테르벨()과 조약을 협상했는데, 이는 임박한 아랍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약은 비잔티움 제국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사이의 국경을 트라키아로 고정하고, 자고리 지역을 불가리아에게 양도했으며, 불가리아에 대한 조공 지불, 도망자 반환, 그리고 일부 무역 협정을 규정했다.3. 3. 퇴위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가 된 후 필리피쿠스 바르다네스가 제거했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묘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 복원하여 ''교황 연대기''에서 "정통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비잔틴 자료에 따르면 그는 무능하고 의지가 없는 인물로 묘사되며, 많은 신하들이 그를 옵시키안 테마 군대의 꼭두각시 황제로 여겼다.이수리아 출신 레오와 아르타바스도스 휘하의 아나톨리아 테마와 아르메니아 테마는 테오도시우스 3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오는 716년 여름에 스스로 비잔틴 황제를 선포하고, 아랍의 지원을 구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불가리아 칸 테르벨과 조약을 협상하여 임박한 아랍의 공격에 대비해 지원을 확보하려 했다. 이 조약은 트라키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사이의 국경을 고정하고, 자고리 지역을 불가리아에 양도했으며, 불가리아에 대한 조공 지불, 도망자 반환, 일부 무역 협정을 규정했다.
술레이만이 아모리움을 포위하는 등 비잔틴 영토를 침공했지만, 레오와의 협상을 통해 물러났다. 레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니코메디아를 점령하고 테오도시우스 3세의 아들을 포함한 여러 관리를 체포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총대주교 게르마누스와 비잔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퇴위하고 레오를 황제로 인정했다.
717년 3월 25일 레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하자, 테오도시우스 3세와 그의 아들은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이후 에페소스의 주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754년 7월 24일에 사망하여 에페소스의 성 필립 교회에 묻혔다.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4. 평가 및 영향
4. 1. 부정적 평가
4. 2. 긍정적 재평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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