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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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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군주를 지칭하는 단일 칭호는 아니었으며, 로마 제국의 칭호를 계승하여 사용했다. 4세기부터는 라틴어 칭호가 사용되었고, 7세기에는 그리스어 바실레우스가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는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 그리스, 이탈리아,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지에 군림했지만, 점차 그리스 지역을 다스리는 제국으로 변모했다. 동로마 황제의 계보는 콘스탄티누스 왕조부터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헤라클리우스 왕조, 이사우리아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 두카스 왕조, 콤네노스 왕조, 앙겔로스 왕조, 라스카리스 왕조를 거쳐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이르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역사가 끝을 맺었다. 트라페주스 제국,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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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황제
기본 정보
칭호황제 및 전제자
원어 명칭(바실레우스 카이 아우토크라토르 로마이온)
통치 기간종신직
관저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 (초중기), 블라헤르네 궁전 (말기)
임명 방식불명, 사실상 세습}}
시작330년 5월 11일
종료1453년 5월 29일
마지막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
마지막 통치자 콘스탄티누스 11세, 1449년 1월 6일 – 1453년 5월 29일
정치
정치 체제전제군주제
역사
건국콘스탄티누스 1세
멸망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

2. 황제 칭호



정식 군주호로서 "동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단일 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4세기에는 고대 로마 제국의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아우구스투스" 등의 라틴어 칭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6세기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알레만족의, 고트족의, 프랑크족의, 게르만족의, 안테족의, 알란족의, 반달족의, 아프리카인의 아우구스투스"[14][15]라고 칭했다. 7세기의 헤라클리오스 치세 초기에는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 (제왕의 왕)"가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아우토크라토르[16],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세바스토스 또는 아우구스투스[17]" 등도 사용하게 되었다[18].

고대 로마식 정복 칭호는 헤라클리오스를 마지막으로 사용되지 않았다[19] (예외로 마누엘 1세는 고대풍의 정복 칭호를 사용했다[20]). 9세기가 되자 카롤루스 대제와의 칭호를 둘러싼 다툼의 결과 "로마인의"라는 수식어가 추가되면서[21][22][23], 이후 멸망할 때까지 일관되게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24].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 그리스, 이탈리아,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의 지역에 전제적인 군주로 군림했지만, 점차 동로마 제국은 본거지인 그리스 지역을 다스리는 제국으로 변해갔다. 또한, 문화적, 인적, 군사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이 강해져, 국외에서는 단순히 "그리스의 황제"로 간주되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서유럽 제국 및 루스 제국에서는 "그리스 황제"로 여겨졌다.

로마 제국에서 동서 분열이 영구화된 시대부터, 고대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계승하고,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군대, 원로원, 시민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다는 명분을 지켜나갔다.

일본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공용어가 라틴어였던 포카스까지를 라틴어로, 공용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헤라클레이오스 이후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기에서도 이에 따른다.

3. 왕조별 황제 목록

3. 1. 콘스탄티누스 왕조 (306-363)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시작되었다.[2]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분할하여 후계자들에게 넘겼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06년 7월 25일 부친의 죽음으로 서방 제국의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었으며,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후 서방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2] 324년에는 동방의 ''아우구스투스''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제국을 재통일하여 사망할 때까지 단독 황제로 재위했다.[2]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시작된 행정 및 군사 개혁을 완성했으며, 솔리두스 금화를 도입하여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2] 또한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로 재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널리 알려진 대규모 건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2] 그는 니케아 공의회 소집을 통해 기독교의 발전과 로마 세계의 기독교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후, 그의 아들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1세가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337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의 동쪽 3분의 1을 물려받았으며, 서쪽 찬탈자 마그넨티우스를 몰아낸 후 353년부터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3]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와 동등한 지위를 얻었고, 최초의 하기아 소피아가 건설되었다.[3]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의 뒤를 이어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3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손자였다. 그는 사산 제국에 대항한 군사 작전 중 사망했는데, 처음에는 고대 도시 크테시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했다. 그는 옛 로마 신들을 고수하고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기 때문에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의 사후, 요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그는 율리아누스의 측근이였으며, 율리아누스 황제가 원정에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급사하여, 원정군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3. 2. 특정 왕조 없음 (363-364)

요비아누스


'''요비아누스'''(Iobianos/Ἰοβιανόςgrc, ''Claudius Iovianus''[4])는 363년 6월 27일부터 364년 2월 17일까지 약 7개월 21일 동안 재위한 로마 황제이다. 요비아누스는 332년경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친위대 대장(''protector domesticus'')이었다. 율리아누스가 죽은 뒤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권력을 잡은 후 요비아누스는 로마군을 페르시아에서 철수시키고 페르시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6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안티오크에서 가을을 보낸 후,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자연사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묻혔다.

3. 3.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364-379)

발렌티니아누스 1세 (''Flavius Valentinianus''; 321 - 375, 재위 : 364-375 서방 통치)는 군인 출신으로, 요비아누스 황제 사후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제위에 오른 후 동생 발렌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하고 자신은 서로마를 통치했다. 375년뇌출혈로 사망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렌스 (''Flavius Iulius Valens''; 328 - 378, 재위 : 364 - 378)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 364년에 동로마 황제로 임명되었다. 발렌스는 훈족의 침략으로 인해 고트족 부족들이 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자, 그들이 제국의 동맹이 되는 조건으로 정착을 허용했다. 그러나 고트족이 로마의 부당한 대우에 반란을 일으키자, 그라티아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맞서 싸우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사망했다.

발렌스


그라티아누스 (''Flavius Gratianus''; 359 - 383, 재위 : 375 - 383 서방통치)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아들로, 발렌스의 사후 동로마 제위를 테오도시우스에게 넘겼다.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중에 383년 암살되었다.

그라티아누스

3. 4. 테오도시우스 왕조 (379-457)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379년 - 395년)는 347년 1월 11일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귀족이자 군사 지도자였다. 379년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동방 황제로 임명되어 마케도니아와 다키아를 통치했다. 재위 기간 동안 정통 기독교를 국가의 공식 종교로 확립했다. 394년 9월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에우게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 전체를 통합했다. 395년 밀라노에서 열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두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서로마와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아르카디우스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395년 ~408년)는 377년/378년에 태어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이다. 395년 부친의 사망으로 로마 제국이 동서로 영구히 분할되자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궁정 관리들에게 휘둘렸으며, 408년 병으로 사망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8년 ~ 450년)는 401년 4월 10일에 태어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의 외아들이었다. 부친의 사망으로 408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프라이토리아니 안테미우스가 408년부터 414년까지 섭정이었고, 누나 아일리아 풀케리아는 섭정 및 공동 통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신학, 천문학, 서예에 관심을 가진 학구적인 성격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 소집, 438년 테오도시우스 법전 발행 등 중요한 업적이 있었다. 아틸라의 훈족과 조약을 맺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450년 사냥 중 낙마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

마르키아누스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450년 - 457년)는 396년에 태어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 그의 누이 풀케리아와 결혼하여 황제가 되었다. 괴저로 사망했다.

3. 5. 레오 왕조 (457-518)

457년 레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즉위하면서 레오 왕조가 시작되었다.[5] 레오 1세는 그리스어로 법을 제정한 최초의 황제였다.[5] 그는 다키아 아우렐리아나에서 태어났으며, 베시족 출신으로 하급 장교에서 시작하여 고트족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아스파르의 시종으로 복무했다.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사후, 아스파르는 레오 1세를 황제로 선택했다. 레오 1세는 다뉴브강을 평정하고 페르시아와 평화를 유지하여 서로마 제국 문제에 개입할 수 있었으며, 468년에는 반달족으로부터 카르타고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지원했다.[5] 초기에는 아스파르의 꼭두각시였지만, 레오 1세는 이사우리아인을 장려하여 아스파르의 고트족에 대한 균형추로 삼았고, 딸 아리아드네를 이사우리아 지도자 타라시코디사(제논)와 결혼시켰다.[5] 471년 아스파르는 이들의 지원으로 살해당했고 고트족의 군사적 권력은 붕괴되었다.[5]

레오 1세


레오 2세


474년 레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이자 제논의 아들인 레오 2세가 황제가 되었다.[5] 레오 2세는 아버지 제논을 공동 황제이자 섭정으로 임명했으나, 그 해 사망했다.[5]

제논


제논은 474년 아들 레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아들의 죽음 이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지만, 475년 바실리스쿠스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476년 복위했다.[6] 제논은 반달족과 평화를 맺고, 일루스와 베리나의 도전을 물리쳤으며, 테오도리크 대왕 치하의 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이동시켜 발칸 반도의 평화를 확보했다.[6] 이로써 제논은 제국 자원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6]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 황실이 종말을 맞이했다.[6] 제논의 단성설 지지 입장은 헤노티콘 반포로 이어져 교황청과의 아카키우스 분열을 초래했다.[6]

바실리스쿠스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1세의 매제이자 장군으로, 475년 제논을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으나, 476년 제논이 복위하면서 476년 혹은 477년에 사망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491년 제논이 사망한 후, 황실 시종장 출신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제논의 미망인 아리아드네에 의해 황제로 선택되었다.[7] 그는 홍채 이색증 때문에 "''디코루스''"라는 별명을 얻었다.[7]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제논의 후계자가 정통 기독교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리아드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선택했다.[7]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비잔틴 주화를 개혁하여 검소한 통치자임을 증명했고, 통치 말년에 상당한 잉여금을 남겼다.[7] 그러나 그의 단성설 지지는 비탈리아누스 반란과 아카키우스 분열 등 광범위한 반대를 초래했다.[7]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불가르족의 최초 발칸 반도 침략과 다라 건설을 둘러싼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있었다.[7] 그는 자녀 없이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레오 왕조가 막을 내렸다.[7]

3. 6.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602)

유스티누스 1세(''Flavius Iustinius''; 450 - 527, 재위 : 518 - 527)는 황실 경비대장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 - 565, 재위 : 527 - 565)는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그는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하고, 로마법을 집대성했으며, 수많은 서방 영토를 회복하고, 동방정교회의 발전에 힘썼다.

유스티누스 2세 (''Flavius Iustinius Iunior''; 520 - 578, 재위 : 565 - 578)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조카였다.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Flavius Tiberius Constantinus''; 540 - 582, 재위 : 574, 578 - 582)는 콤메스 에스큐비트리스(''Comes Excubitris'')이자 유스티누스 2세의 양자였다. 마우리키우스 (''Flavius Mauricius Tiberius''; 539 - 602, 재위 : 582 - 602)는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였다.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누스 2세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마우리키우스


유스티누스 1세는 베데리아나(유스티니아나 프리마) 다르다니아, 다르다니에서 년 출생했다. 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 치하의 엑스큐비토르 친위대의 장교이자 지휘관이었으며,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죽음 이후 군대와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2/483년 타우레시움 (타오르)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였으며 521년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유스티누스가 병이 들자 527년 4월 1일에 공동 황제로 격상되었다. 유스티누스 1세가 사망하자 황위를 계승했다. 그의 강력한 지휘관인 벨리사리우스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는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지역들은 이전에 서로 다른 게르만 부족(반달족과 고트족)에 의해 구 서 로마 제국을 희생하여 점령당했던 곳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성 소피아 대성당 건설을 포함하여 제국 전역에 대규모 건설 계획을 수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여러 현대 유럽 국가의 법률 기초가 되는 또는 "시민법전"을 담당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년 출생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로, 군대와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죽음과 함께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정신이상 상태가 되어, 573–574년에는 그의 아내 소피아의 섭정을 받았고, 574–578년에는 티베리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섭정을 받았다.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년 출생, 엑스큐비토르의 지휘관, 유스티누스의 친구이자 양자였다. 574년에 ''카이사르''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유스티누스 2세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마우리키우스는 539년 아라비소스,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났다. 마우리키우스는 관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티베리우스 2세 휘하의 동방 비잔틴 군대의 장군이 되어, 비잔틴-사산 전쟁 (572–591) 동안 사산 제국에 대항하여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2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티베리우스 2세의 죽음 이후 582년 8월 13일에 황제로 선포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제국의 동부 전선에서 사산 왕국, 발칸 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아바르족과 슬라브족과의 전쟁을 벌였고, 라벤나와 카르타고에서 비잔틴의 영토를 강화했다. 그는 비잔틴 군사 이론에 대한 공헌, 특히 전쟁에 관한 매뉴얼인 ''스트라테곤''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 마우리키우스는 590년에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포카스라는 백인대장에 의해 폐위되었으며, 602년 11월 27일 칼케돈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 7. 특정 왕조 없음 (602-610)

포카스(Φωκᾶς, ''Focas'') (? - 610, 재위 : 602년 11월 23일 - 610년 10월 5일)는 발칸 군대의 지휘관으로 마우리키우스에 반기를 들어 제위를 찬탈하였다. 집권 기간은 7년 10개월 12일이다. 점점 인기가 없어지고 폭정으로 치닫자,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포카스

3. 8. 헤라클리우스 왕조 (610-711)

이라클리오스(Ηράκλειος, 575년 - 641년, 재위: 610년 - 641년)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카르타고 총독의 아들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슬람의 팽창으로 팔레스타인이집트를 상실했다.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결정했다.

헤라클리우스의 장남 콘스탄티노스 3세(이라클리오스 콘스탄티노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Γ', 612년 - 641년, 재위: 641년)는 헤라클로나스와 공동 통치했다. 헤라클로나스(콘스탄티노스 헤라클리우스, Ηρακλωνάς, 626년 - 641년?, 재위: 641년)는 헤라클리우스의 아들로, 신체 절단 후 폐위되었다.

콘스탄티노스 3세의 아들 콘스타스 2세 ''포고나투스''(''털복숭이'', Πωγωνάτος, Κώνστας Β', 630년 - 668년, 재위: 641년 - 668년)는 궁정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4세(Κωνσταντίνος Δ', 649년 - 685년, 재위: 668년 - 685년)가 황위를 계승했다.

콘스탄티노스 4세의 아들 유스티니아노스 2세 ''리노트메투스''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668년 - 711년, 재위: 685년 - 695년)는 코와 혀가 잘리고 폐위당해 추방되었다. 이후 레온티오스(Λεόντιος, 재위: 695년 - 698년)가 제위를 찬탈했으나, 코가 잘린 후 폐위,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처형되었다. 티베리오스 3세(Τιβέριος Γ' ο Αψίμαρος, 재위: 698년 - 705년)는 게르만족 출신으로 제위를 찬탈했으나, 폐위, 처형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705년 복위되었으나, 711년 다시 폐위, 처형되었다.

초상이름출생재위 기간즉위 배경사망
헤라클리오스
FLAVIVS HERACLIVS AVGVSTVS
헤라클리오스/Ηράκλειοςel
575년경610년 10월 5일 – 641년 2월 11일아르메니아 귀족 대 헤라클리오스의 아들. 카르타고 총독이었던 아버지가 황제 포카스에 대항하여 반란. 헤라클리오스(아들)가 610년 10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함대를 이끌고 공격, 수도는 항복. 포카스는 처형, 헤라클리오스가 황제로 즉위.641년 2월 11일
콘스탄티누스 3세
콘스탄티노스 3세 헤라클리오스/Κωνσταντίνος Γ' Ηράκλειοςel
612년 5월 3일641년 2월 11일 – 641년 5월 24일헤라클리오스의 장남, 전처 에우도키아와의 아들. 아버지의 죽음으로 즉위. 유언에 따라 이복 동생 헤라클로나스와 공동 통치.641년 5월 24일
헤라클로나스
헤라클로나스/Ηρακλεωνάςel
626년641년 2월 11일 – 641년 9월헤라클리오스의 4번째 자녀, 후처(조카) 마르티나와의 아들. 아버지의 죽음 후, 유언에 따라 이복 형 콘스탄티누스 3세와 공동 황제. 즉위 4개월 만에 콘스탄티누스가 급사, 헤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641년?
콘스탄스 2세 "포고나토스"
(수염이 있음)
콘스타스 2세 헤라클리오스/Κώνστας Β' Ηράκλειοςel
630년 11월 7일641년 9월 – 668년 9월 15일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 아버지의 죽음 후에 헤라클로나스를 옹호한 마르티나가 권력 장악, 하지만 중앙군 사령관 발렌티노스를 중심으로 하는 콘스탄티누스 3세 파와 수도 시민(서커스 파벌)의 힘으로 11세에 공동 황제. 또한 원로원 등의 책략으로 헤라클로나스 등이 폐위 · 추방, 콘스탄스가 단독 황제.668년 9월 15일
콘스탄티누스 4세
콘스탄티노스 4세 포고나토스/Κωνσταντίνος Δ' ο Πωγώνατοςel
650년경668년 9월 15일 – 685년콘스탄스 2세의 장남. 654년 4월에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 668년에 아버지가 암살되자 황제.685년 7월 10일?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토스"
(코가 잘린 남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 리노트메토스/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el
668년?685년 – 695년콘스탄티누스 4세의 장남. 아버지의 죽음으로 즉위.711년 11월 7일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Λεόντιοςel
?695년 - 698년이수리아 출신. 콘스탄티누스 4세 시대부터 테마 아나톨리콘의 장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의해 아르메니아 전선에 투입. 황제의 불만을 사 692년경 투옥. 695년 사면, 테마 헬라스의 장관 임명, 서커스 파벌의 힘을 빌려 쿠데타, 황제 체포, 코를 잘라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추방, 스스로 황제.706년 2월 15일?
티베리우스 3세
티베리오스 3세 압시마로스/Τιβέριος Γ' ο Αψίμαροςel
?698년 – 705년 8월키비라이오타이의 지휘관. 698년 카르타고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빼앗기고 크레타 섬까지 철수, 함대에 옹립되어 반란. 서커스 파벌이 호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 레온티오스를 폐위, 황제.706년 2월 15일?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토스" (복위)
유스티니아노스 2세 리노트메토스/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el
668년?705년 8월 – 711년잘린 코 대신 황금 코를 붙이고 황위 복귀. 하자르 칸국으로 도망, 카간의 누이와 결혼.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테르벨 왕이 복위 지지, 그 힘을 배경으로 티베리우스 3세를 타도, 복위.711년 11월 7일


3. 9. 특정 왕조 없음 (711-717)


  •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Φιλιππικός Βαρδάνης)는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711년부터 713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눈이 뽑힌 후 폐위되었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Αναστάσιος Β')는 필리피코스의 궁정비서 출신으로, 713년부터 715년까지 재위했다. 폐위된 후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
  • 테오도시오스 3세 (Θεοδόσιος Γ')는 징세관 출신으로, 715년부터 717년까지 재위했다.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갔다.

3. 10. 이사우리아 왕조 (717-802)

레오 3세 ''이사우리아인''(Λέων Γ' ο Ίσαυρος)은 스트라테고스 출신으로 675년 태어나 717년부터 741년까지 재위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2차 아랍 포위전을 격퇴하고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 ''코프로니무스''(Κωνσταντίνος Ε' ο Κοπρώνυμος ή Καβαλίνος)는 718년 태어나 741년부터 775년까지 재위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책을 이어받아 아랍인과 불가르족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다.

레오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레오 3세의 사위인 아르타바스도스(Αρτάβασδος ο Εικονόφιλος)는 741년부터 743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확보하는 반란을 주도했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패배하여 폐위되었다.

아르타바스도스


레온 4세(Λέων Δ' o Χαζάρος)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아들로, 750년 태어나 775년부터 780년까지 재위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Κωνσταντίνος ΣΤ')는 771년 태어나 780년부터 797년까지 재위했으나, 어머니 이리니(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에게 눈이 뽑혔다. 이리니는 755년 태어나 797년부터 802년까지 재위했으며, 레온 4세의 아내이자 콘스탄티노스 6세의 어머니였다. 폐위되어 레스보스 섬에 유배되었다.

레오 4세


콘스탄티노스 6세


이레네

3. 11. 니키포로스 왕조 (802-813)

니키포로스 1세 (Νικηφόρος Α')는 궁정 재무 대신 출신으로, 802년부터 811년까지 재위하였다. 불가르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그의 해골은 불가르족 칸 크룸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사망했다.

스타우라키오스 (Σταυράκιος Φωκάς)는 니키포로스 1세의 아들로, 811년에 잠시 재위하였다. 크룸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결국 사망하였다. 플리스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마비되었고, 강제로 퇴위당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미하일 1세 랑가베 (Μιχαήλ Α' Ραγκαβής)는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로, 궁정 장관을 역임하다가 811년부터 813년까지 재위하였다. 스스로 제위에서 내려와 수도원에 들어갔다. 아르메니아의 레오의 반란 이후 사임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하여 844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남인 테오필락토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

3. 12. 특정 왕조 없음 (813-820)

레온 5세 아르메니아인(Λέων Ε' ο Αρμένιος, 775년 - 820년, 재위 : 813년 - 820년)은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출신으로 미카일 1세에게 반기를 들고 황제가 되었다. 813년에 아들 심바티오스를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을 부활시켰으며, 암모리아 출신 미카일 2세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했다.

레오 5세

3. 13. 아모리아 왕조 (820-867)

미하일 2세(Μιχαήλ Β' ο Τραυλός ή Ψελλός)는 스트라테고스 출신으로 콘스탄티노스 6세의 사위였다. 770년 아모리움에서 태어나 군 장교가 되었으며, 레오 5세의 친구였으나 그를 살해하는 음모를 주도했다. 토마스 슬라브의 반란에서 살아남았고, 크레타를 아랍인에게 잃었으며, 시칠리아의 무슬림 정복의 시작을 맞이했고, 성상파괴주의를 강화했다. 820년 12월 25일부터 829년 10월 2일까지 재위했다.

미카엘 2세


테오필로스(Θεόφιλος)는 미카엘 2세의 아들로, 829년 10월 2일부터 842년 1월 20일까지 재위했다. 813년에 태어나 821년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황제위를 계승했다.

테오필로스


미하일 3세(Μιχαήλ Γ' ο Μέθυσος)는 테오필로스의 아들로, 842년 1월 20일부터 867년 9월 24일까지 재위했다. 테오도라가 842년부터 855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미하일 3세는 867년 암살당했다. 840년 1월에 태어났으며, 성상파괴주의를 종식시켰다. 그는 향락을 즐기는 통치자로, 후대의 친 바실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술고래"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미카엘 3세

3. 14. 마케도니아 왕조 (867-1056)



'''마케도니아 왕조'''(867년-1056년)는 미카일 3세의 궁정신하 출신인 바실리오스 1세가 창건한 왕조이다. 바실리오스 1세는 미카일 3세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의 아들 레온 6세는 법전 편찬으로 '현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테살로니카 약탈과 시메온 1세와의 전쟁을 겪었다.[9] 레온 6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7세는 국정론(제국 통치에 관하여la)과 의례 (''의례에 관하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9]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자 공동 황제였던 로마노스 1세는 아들들에게 폐위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로마노스 2세의 아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르족 학살자'로 불리며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의 치세는 중세 비잔틴 제국의 절정기로 여겨진다. 바실리오스 2세 사후, 그의 형제 콘스탄티노스 8세가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 조이는 로마노스 3세, 미카일 4세, 콘스탄티노스 9세와 차례로 결혼하여 이들이 황제가 되었다. 조이의 여동생 테오도라는 조이와 함께 공동 여제로 즉위하기도 했으며, 콘스탄티노스 9세 사후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다가 미카엘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초상이름재위 기간비고
center바실리오스 1세867년 – 886년아르메니아계 농민 출신으로 미카일 3세의 총애를 받아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미카일 3세를 암살하고 황제가 되었다.
center레오 6세886년 – 912년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혹은 미카일 3세의 아들). 현자로 불리며 법전을 편찬했다.
center알렉산드로스912년 – 913년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이자 레오 6세의 동생. 조카 콘스탄티노스 7세의 섭정이었다.
center콘스탄티노스 7세913년 – 959년 (920년 – 944년 공동 황제)레오 6세의 아들.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에게 실권을 빼앗겼으나, 944년 로마노스 1세를 몰아내고 황제권을 회복했다.
center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920년 – 944년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자 공동 황제. 아들들에게 폐위되어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center로마노스 2세959년 – 963년콘스탄티노스 7세의 아들.
center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 – 969년로마노스 2세의 황후와 결혼하여 바실리오스 2세의 섭정이 되었으나,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에게 암살당했다.
center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969년 – 976년로마노스 2세의 매제이자 니케포루스 황후의 연인. 바실리오스 2세의 섭정이었다.
center바실리오스 2세976년 – 1025년로마노스 2세의 아들. 불가르족 학살자로 불리며 불가리아를 정복했다.
center콘스탄티노스 8세1025년 – 1028년로마노스 2세의 아들이자 바실리오스 2세의 동생.
center로마노스 3세 아르기루스1028년 – 1034년조에의 첫 남편. 콘스탄티노스 8세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었으나, 조에와 미카일 4세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center조에1028년 – 1050년 (여제, 공동 통치자)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 로마노스 3세, 미카일 4세, 콘스탄티노스 9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했다.
center미카일 4세1034년 – 1041년조에의 두 번째 남편.
center미카일 5세1041년 – 1042년미카일 4세의 조카이자 조에의 양자. 조에와 테오도라에 의해 폐위되었다.
center테오도라1042년, 1055년 – 1056년콘스탄티노스 8세의 딸. 조에와 공동 여제(1042년)였으며, 콘스탄티노스 9세 사후 단독 통치했다(1055-1056년).
center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1042년 – 1055년조에의 세 번째 남편.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간의 대분열이 일어났다.[11]


3. 15. 특정 왕조 없음 (1056-1059)



미카엘 6세 브링가스는 "군인 황제" 또는 "노인"으로 불렸으며, Μιχαὴλ Βρίγγας ὁ Στρατιωτικός/ὁ Γέρωνgrc라고 표기한다. 1056년 8월 31일부터 1057년 8월 30일 또는 31일까지 약 1년 8일간 재위하였다. 조정 관료이자 군사부 재무관이었던 그는 1056년 8월 22일 테오도라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사키우스 1세 콤네노스 휘하 군대의 반란으로 폐위되었으며, 수도원에서 은퇴하여 1059년에 사망했다.

이사키우스 1세 콤네노스 (Ισαάκιος Α' ο Κομνηνόςgrc)는 1007년경에 태어나 1060년에 사망했으며, 1057년부터 1059년까지 재위하였다. 장군 출신으로 반란을 통해 즉위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제위를 사양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3. 16. 두카스 왕조 (1059-1081)

콘스탄티누스 10세


콘스탄티노스 10세(Κωνσταντίνος Ι' ο Δούκας)는 미카일 프셀로스의 영향으로 황제가 되었다. 1006년에 태어나 1059년부터 1067년까지 재위한 그는 이사키오스 1세의 측근이었으며, 그의 퇴위 후 황위를 계승했다. 그는 아들 미카엘 7세, 안드로니코스, 콘스탄티우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의 사후 그의 미망인은 로마노스 4세가 즉위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로마노스 4세


로마노스 4세(Ρωμανός Δ' Διογένης)는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공동 황제가 되었다. 1032년에 태어나 1068년부터 1071년까지 재위한 그는 유능한 장군으로,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들을 보호하는 수석 황제가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두카스 지지자들에 의해 폐위되었고, 1072년 6월 실명형을 당한 후 추방되어 곧 사망했다.

미카일 7세


미카일 7세(Μιχαήλ Ζ' Δούκας Παραπινάκης)는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아들로, 원래 두 형제 및 로마노스 4세와 공동 황제였다. 1050년에 태어나 1071년부터 1078년까지 재위한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황위를 계승했다.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1067–1068년에는 어머니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의 섭정을 받았고, 1068–71년에는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로마노스 4세 아래에서 부황제로 격하되었다. 1071–78년 수석 황제였으며,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형제들과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그는 니케포로스 3세의 반란 전에 퇴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통화 가치가 25% 평가 절하되었고, 이로 인해 "마이너스 쿼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니케포로스 3세


니케포로스 3세(Νικηφόρος Γ' Βοτανειάτης)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출신으로, 미카일 7세의 아내와 중혼했다. 1001년에 태어나 1078년부터 1081년까지 재위한 그는 아나톨리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였다. 그는 1월 7일에 황제로 선포되었고 3월 27일 또는 4월 3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여러 반란을 견뎌냈지만 콤네노스 가문에 의해 전복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두카스 왕조와 두카스 왕조 시대의 비잔틴 제국도 참고

3. 17. 콤네노스 왕조 (1081-1185)

알렉시오스 1세는 이사아키오스 1세의 조카이자 콘스탄티누스 10세의 손조카와 결혼 하였으며, 1081년부터 1118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뛰어난 장군으로, 니케포로스 3세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노르만족과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제1차 십자군이 도착하여 독립적인 십자군 국가들이 건국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로, 1118년부터 1143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투르크와의 전쟁에 집중했으며,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경건하며 검소한 통치로 "선량한 요안니스"로 알려졌다.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

마누엘 1세는 요안니스 2세의 아들로, 1143년부터 1180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정력적인 통치자였으며, 투르크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고, 헝가리 왕국을 굴복시켰으며,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의 사치와 끊임없는 원정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알렉시오스 2세는 마누엘 1세의 아들로, 1180년부터 1183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섭정 하에 있었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폐위되고 살해당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요안니스 2세의 조카로, 1183년부터 1185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알렉시오스 2세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는 폐위되고 고문당한 후 처형되었으며, 트라페주스 제국의 콤네노스 가계의 시조가 되었다.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


마누엘 1세 콤네노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3. 18. 앙겔로스 왕조 (1185-1204)

알렉시우스 1세의 증손자인 이사키우스 2세 앙겔로스는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에 대한 민중 반란을 이끌고 황제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는 발칸반도에서의 반란과 전쟁, 특히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1195년, 이사키우스 2세의 형인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형을 실명시키고 투옥한 뒤 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우스 3세의 통치는 무능함과 지방 유력자들의 자율성 증가로 특징지어졌으며, 1203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폐위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삭 2세''' 앙겔로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이사키우스 2세 앙겔로스는 복위되었고,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 앙겔로스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아버지를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제4차 십자군을 모집했으며, 1203년 7월 19일부터 복위된 아버지와 함께 통치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군의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1204년 1월 알렉시우스 5세 두카스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사키우스 2세는 아마도 독살당하여 사망했고, 알렉시우스 4세는 1204년 2월 8일에 목 졸려 살해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알렉시우스 5세 무르주플루스는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이자 저명한 귀족으로, 궁정 쿠데타를 통해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올랐다. 그는 십자군을 격퇴하려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실패하고 도망쳤다. 이후 알렉시우스 3세와 합류했으나, 알렉시우스 3세에 의해 실명당하고 십자군에 붙잡혀 1205년 12월에 처형되었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무르추플로스"

3. 19. 라스카리스 왕조 (니케아 제국, 1204-1261)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는 공식적인 즉위 없이 1204년에 잠시 동로마 황제를 지냈다.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Θεόδωρος Α' Λάσκαρηςel, 1174년 ~ 1222년, 재위 1204년 ~ 1222년)는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로, 형인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가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직전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도시 약탈 전에 니케아로 도망쳤다. 테오도루스 1세는 그곳에서 라틴인에 대한 그리스 저항을 조직했고, 1205년 콘스탄티누스의 죽음 이후 황제로 선포되었지만, 1208년 부활절에야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아시아에서 라틴인의 진격을 막고 셀주크의 공격을 격퇴하여 니케아 제국을 그리스 계승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테오도르 1세 라스카리스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Ιωάννης Γ' Δούκας Βατάτζηςel, 1192년 ~ 1254년, 재위 1222년 ~ 1254년)는 테오도루스 1세의 사위로, 간질을 앓았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이자 군인이었고, 라틴 제국, 불가리아, 에피루스 전제공국을 상대로 영토를 확장했다.

요한 3세 바타체스


테오도루스 2세 두카스 라스카리스(Θεόδωρος Β'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el, 1221년 ~ 1258년, 재위 1254년 ~ 1258년)는 요한네스 3세의 아들이다. 그의 통치는 귀족 가문에 대한 적대감과 불가리아에 대한 승리, 알바니아로의 확장이 특징이었다.

테오도르 2세 라스카리스


요한네스 4세 두카스 라스카리스(Ιωάννης Δ' Δούκας Λάσκαρηςel, 1250년 ~ 1305년, 재위 1258년 ~ 1261년)는 테오도루스 2세의 아들로, 미카일 8세에 의해 폐위되어 실명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요한 4세 라스카리스

3. 20. 팔레올로고스 왕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 1259-1453)

미카엘 8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Μιχαήλ Η' Παλαιολόγοςel) (1224 - 1282, 재위 : 1259 - 1282)는 알렉시우스 3세의 증손자로, 요안니스 4세의 섭정이었다. 그의 군대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에 성공, 제국을 복원했다. 그는 1261년 요안니스 4세를 폐위하고 단독 황제가 되었다.

안드로니쿠스 2세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Β' ο Γέροςel) (1258 - 1332, 재위 : 1282 - 1328)는 미카엘 8세의 아들이다. 그는 수도승과 지식인을 선호하여 군사비를 대폭 삭감했고, 이로 인해 비잔틴 제국의 소아시아 지위가 붕괴되었다. 장기화된 내전 끝에 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에게 제위에서 물러났다.

안드로니쿠스 3세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Γ' Παλαιολόγος ο Νέοςel) (1297 - 1341, 재위 : 1328 - 1341)는 안드로니쿠스 2세의 손자이다. 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에미레이트에게 패배했지만, 에피루스와 테살리아를 회복하는 등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요안니스 5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Ιωάννης Ε' Παλαιολόγοςel) (1332 - 1391)는 안드로니쿠스 3세의 아들로, 요안니스 6세에게 폐위당했다가 복위되었다. 그는 파괴적인 내전과 또 다른 내전을 겪었다. 성공적인 투르크 침략과 아드리아노폴리스 점령 이후,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71년에 오스만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Ιωάννης Στ' Καντακουζηνόςel) (1295 - 1383, 재위 : 1347 - 1354)는 요안니스 5세의 장인으로, 폐위되어 수도원에 들어갔다.

안드로니쿠스 4세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Ανδρόνικος Δ' Παλαιολόγοςel) (1348 - 1385, 재위 : 1376 - 1379)는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이다. 반란 끝에 한쪽 눈을 실명당했고, 나중에 반란에 성공했다가 다시 폐위되었다.

요안니스 7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Ιωάννης Ζ' Παλαιολόγοςel) (1370-1408)는 1390년에 잠시 제위를 차지했다가,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마누엘 2세 (마누일 팔레올로고스/Μανουήλ Β' Παλαιολόγοςel) (1350 - 1425, 재위 : 1391 - 1425)는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이다. 그는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 궁정을 여행하며 도움을 요청했으며,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것을 이용하여 일부 영토를 되찾고 봉신 관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요안니스 8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Ιωάννης Η' Παλαιολόγοςel) (1392 - 1448, 재위 : 1425 - 1448)는 마누엘 2세의 아들이다. 그는 1439년에 교회 연합을 비준했는데, 이는 정교회와 니케아 기독교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Παλαιολόγος Δραγάσηςel) (1405 - 1453, 재위 : 1449 - 1453)는 마누엘 2세의 아들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은 멸망한다.

4. 동로마계 국가

4. 1. 트라페주스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국 중 하나이다.

4. 2. 니케아 제국

니케아 제국 시기의 황제에 대해서는 니케아 제국 문서를 참고하라.

4. 3. 에페이로스 공국

에페이로스 공국은 서기 1205년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건국했다. 미하일 1세는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사촌이었다. 처음에는 라틴 제국에 복속했지만,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테살로니카 왕국을 멸망시키고 테살로니카를 점령했다. 이후 니케아 제국과 대립하다가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주요 속국이 되었다.

참조

[1] 문서 Regnal numbers were never used in the Byzantine Empire. Instead, the Byzantines used nicknames and patronymics to distinguish rulers of the same name. The numbering of Byzantine emperors is a purely historiographical invention.
[2] 간행물 Constantine I the Great
[3] 간행물 Constantius II
[4] 학술 논문 Flavius : a Nicety of Protocol https://www.jstor.or[...] 1988
[5] 간행물 Leo I
[6] 간행물 Zeno
[7] 간행물 Anastasios I
[8] 문서 Often enumerated as '''Constantine III''', whereby the regnal numbering follows [[Constantine II (emperor)|Constantine II]], emperor in the West (317–340). More rarely, he is instead enumerated as '''Heraclius II.'''
[9] 간행물 Constantine VII Porphyrogennetos
[10] 간행물 Constantine VIII
[11] 간행물 Constantine IX Monomachos
[12] 간행물 Michael IX Palaiologos
[13] 간행물 Constantine XI Palaiologos
[14] 문서 井上・粟生沢1998、p.40。
[15] 문서 井上2009、p.297。
[16] 문서 ラテン語のインペラートルに相当
[17] 문서 ラテン語のアウグストゥスのギリシア語訳
[18] 문서 アウトクラトールとセバストスはギリシア訳語として帝政初期以来東方におけるギリシア語碑文や文学作品で用いられていた用語である
[19] 문서 井上2009、p.298。
[20] 문서 井上・粟生沢1998、p.191。
[21] 문서 尚樹1999、pp.403-404。
[22] 문서 オストロゴルスキー2001、p.257。
[23] 문서 井上2009p20
[24] 문서 オストロゴルスキー2001、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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