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 쿠시 유팡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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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투 쿠시 유팡키는 만코 잉카 유팡키의 아들이자 빌카밤바의 잉카 제국 통치자였다. 스페인과의 협상 과정에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국민들의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주권 회복을 시도했다. 그는 1570년 스페인 선교사에게 증언하여 '페루 정복에 대한 잉카인의 기록'을 남겼으며, 이 기록은 잉카인의 시각에서 스페인 정복을 조명한다. 1571년 천연두로 사망했으며, 측근들이 독살 혐의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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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 쿠시 유팡키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돈 디에고 데 카스트로 티투 쿠시 유팡키 |
원어 이름 | 티투 쿠시 유팡키 |
로마자 표기 | Titu Kusi Yupanki |
칭호 | 돈 |
통치 정보 | |
직위 | 사파 잉카 |
통치 국가 | 네오 잉카 국가 |
재위 기간 | 1560년 - 1571년 |
즉위 | 1563년 |
이전 통치자 | 사이리 투팍 |
다음 통치자 | 투팍 아마루 |
가문 정보 | |
왕조 | 하나쿠 쿠스코 |
아버지 | 망코 잉카 유팡키 |
출생 및 사망 정보 | |
출생일 | 1529년 |
출생지 | 쿠스코, 잉카 제국, 현재의 페루 |
사망일 | 1571년 |
사망지 | 빌카밤바, 네오 잉카 국가, 현재의 페루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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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티투 쿠시 유팡키는 만코 잉카 유팡키의 아들이었으며, 사이리 투팍, 투팍 아마루와 형제였다.[1]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한 이후, 잉카인들은 빌카밤바를 수도로 삼아 스페인에 저항했다.[1]
1568년경 로마 가톨릭 교회로 세례를 받고 디에고 데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1] 1570년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잉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1] 1571년 5월, 천연두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티투 쿠시는 망코 잉카 유팡키의 아들이었으며, 사이리 투팍, 투팍 아마루와 형제 관계였다.[1]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한 이후, 잉카인들은 빌카밤바를 수도로 삼아 스페인에 계속 저항했다.[1]
2. 2. 빌카밤바에서의 통치
로페 가르시아 데 카스트로 임시 총독은 티투 쿠시 유팡키와 협상하기를 원했다. 협상은 쿠시가 빌카밤바를 떠나 왕실 연금을 받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협상이 격화된 후, 1568년경, 티투 쿠시는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여 디에고 데 카스트로가 되었다.[1]티투 쿠시는 투팍 아마루를 사제로 임명하고 만코 잉카의 시신을 빌카밤바에 보관하게 했다.
2. 3. 스페인과의 관계
로페 가르시아 데 카스트로 임시 총독은 빌카밤바에서 통치하던 티투 쿠시와 협상을 원했다. 협상의 주된 내용은 티투 쿠시가 빌카밤바를 떠나 왕실 연금을 받는 것이었다. 협상이 격화된 후, 1568년경 티투 쿠시는 세례를 받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여 디에고 데 카스트로라는 이름을 얻었다.[1]티투 쿠시는 투팍 아마루를 사제로 임명하고 만코 잉카의 시신을 빌카밤바에 보관하게 했다. 1571년 티투 쿠시가 사망한 후, 투팍 아마루가 잉카의 통치자가 되었다. 티투 쿠시의 측근이자 10년 넘게 잉카의 서기로 일했던 마르틴 데 판도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디에고 오르티즈는 티투 쿠시를 독살한 혐의를 받아 살해되었다.[1]
1570년 티투 쿠시는 스페인 선교사 프라이 마르코스 가르시아에게 자신의 증언을 구술했고, 그의 메스티소 조수 마르틴 데 판도가 이를 기록하여 ''페루 정복에 대한 잉카인의 기록''으로 남겼다.[1] 이 기록은 정복에 대한 잉카인의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스페인 사람들을 신(비라코차)으로 오인했던 첫 만남의 혼란과 오해가 묘사되어 있다. 티투 쿠시의 아버지이자 아타왈파의 형제인 만코 잉카가 해안 부족민으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의 도착에 대한 첫 소식을 접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1]
2. 3. 1. 펠리페 2세에게 보낸 편지
1570년 티투 쿠시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잉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호소하는 편지(Relación de cómo los españoles entraron en Pirú y el subceso que tuvo Mango Inca en el tiempo que entre ellos vivió)를 썼다.[1]2. 4. 죽음
1571년 5월, 천연두로 사망했다.[1] 1570년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국민들이 겪는 고통을 표현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1]3. 유산
티투 쿠시 유팡키는 스페인의 정복에 저항하면서도 현실적인 외교를 펼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된 '페루 정복에 대한 잉카인의 기록'은 잉카인의 관점에서 정복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그는 1570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국민들이 겪는 고통을 표현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1]
참조
[1]
서적
An Inca account of the Conquest of Peru
https://archive.org/[...]
University Press of Colorado
2005
[2]
서적
An Inca Account of the Conquest of Peru
University Press of Colorado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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