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교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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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교권주의는 성직자의 특권과 정치적 영향력에 반대하는 사상이나 운동을 의미하며,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타났다. 개신교 종교 개혁, 프랑스 혁명, 스페인 내전 등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며, 때로는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 정치가들이 반교권주의를 주도했으며, 교육 개혁과 같은 정책을 통해 교회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유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 재산 몰수, 종교 교육 금지 등이 이루어졌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란 혁명 이후 성직자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반교권주의가 나타나기도 했다. 국가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반교권주의가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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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권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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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직자주의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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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직자주의 | 성직자와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반대 |
반성직자주의의 주요 요인 |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반대 재산 축적에 대한 반대 특권 남용에 대한 반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 |
반성직자주의의 역사적 맥락 | 종교 개혁 프랑스 혁명 멕시코 혁명 스페인 내전 |
역사 | |
기원 | 고대 그리스 중세 시대 후기 |
초기 반성직자주의 | 종교 개혁 시기 |
프랑스 혁명 | 반성직자주의의 중요한 시기 |
19세기 |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확산 |
20세기 | 멕시코 혁명 스페인 내전 |
반성직자주의의 요인 | |
정치적 요인 | 성직자의 정치적 권력에 대한 반대 |
경제적 요인 | 교회의 부와 재산 축적에 대한 반대 |
사회적 요인 | 성직자의 특권과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 |
철학적 요인 | 계몽주의 세속주의 반교권주의 무신론 |
국가별 반성직자주의 | |
프랑스 | 프랑스 혁명 제3공화국 |
멕시코 | 멕시코 혁명 크리스테로 전쟁 |
스페인 | 스페인 내전 제2공화국 |
포르투갈 | 1910년 공화정 혁명 |
필리핀 | 필리핀 혁명 호세 리잘 |
반성직자주의의 결과 | |
정치적 결과 | 정교분리 |
사회적 결과 | 교육 시스템의 변화 종교적 영향력 감소 |
문화적 결과 | 반성직자주의 문학 및 예술 작품 등장 세속주의 확산 |
2. 유럽
프랑스 혁명기 비기독교화 운동 참조
개신교 종교 개혁 기간 동안, 반교권주의는 성직자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4]
2. 1. 프랑스
프랑스 혁명기 비기독교화 운동 참조프랑스 혁명 시대에 이성 숭배 운동이 일어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존재의 축제를 열었다.[12][13][14]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와 정권 사이에 균열이 생겼지만, 1801년의 종교 협약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가톨릭 교회는 화해했다.[17]

1790년 7월 12일에 통과된 성직자 민사 헌법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프랑스 정부, 나아가서는 점점 더 반성직자적인 국민 제헌 의회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160명의 주교 중 7명을 제외한 모두와, 교구 사제의 약 절반이 서약을 거부했다.[5] 성직자와 신자에 대한 박해가 반란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두 번째는 징집이었다.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은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으며, 미사에 가던 여성들은 거리에서 구타를 당했다.[5]
프랑스 혁명 당시의 반성직자주의는 처음에는 교회 부패와 고위 성직자들의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혁명 이전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공포 정치라고 알려진 2년 동안, 반성직자주의 사건들은 유럽이 공산주의 동유럽에서 국가 무신론이 부상할 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보다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혁명 당국은 교회를 탄압하고, 가톨릭 군주제를 폐지하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3만 명의 사제를 추방하고 수백 명을 더 죽였다.[6] 많은 교회들이 무신론적인 예배가 열리는 "이성의 사원"으로 개조되었다.[7][8][9][10] 이 운동이 대중적으로 동기 부여되었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이 많았다.[11] 프랑스를 비기독교화하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1793년 10월에는 기독교 달력이 혁명 날짜부터 계산하는 달력으로 대체되었고, 자유, 이성, 최고 존재 축제가 예정되었다. 최고 존재 숭배와 프랑스 최초의 국교 무신론 이성 숭배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도덕 종교가 등장했으며, 이러한 종교에 헌신하지 않은 모든 교회는 폐쇄되었다.[15] 1794년 4월과 5월에는 정부가 최고 존재 숭배 축제를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반성직자주의가 프랑스 혁명가들의 분명한 목표가 되자, 전통과 앙시앵 레짐을 되찾으려는 반혁명가들이 특히 방데 반란 (1793년~1796년)에서 무기를 들었다. 지역 주민들은 종종 비기독교화에 저항했고, 사임한 성직자들에게 다시 미사를 집전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는 비기독교화 캠페인을 비난하고 가톨릭의 미신이 없는 자체 종교를 설립하려고 했다.[16]
교황 비오 6세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1792–1797)에서 혁명에 반대 입장을 취하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1796).[17] 프랑스군은 1797년 교황을 투옥했고, 교황은 6주간의 감금 후 사망했다.[17]
마음이 변한 나폴레옹은 그 후 1801년의 정교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가톨릭 교회를 재건했고,[17] 최고 존재 숭배를 금지했다. 많은 반성직자 정책들이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영토에 진입하면 수도원은 종종 약탈당하고 교회 재산은 세속화되었다.[18][19][20][21]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는 반성직자주의 좌익이 반유대주의를 주장했다.[82]
프랑스 제3공화국 당시 공화주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반교권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레옹 강베타는 "교권주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적"이라고 선언하며 반교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83] 총리를 지낸 쥘 페리는 교권주의의 상징이자 사회적으로 비판받던 예수회를 추방하고, 이들 단체 소속 인물들의 교육기관 대표나 교사직을 금지하는 법령(1880~81)을 발표했다.[83] 이는 프랑스 반교권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쥘 페리의 교육 개혁은 공공교육 영역에서 가톨릭교회를 배제하려는 반교권주의자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제3공화국 당시 급진공화파 신문인 '르 라디칼(Le Radical)'은 1900년에 《교권주의의 범죄들》이라는 책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보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저지른 악행과, 이성과 과학 발전을 저해한 점을 비판했다.[84]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제3공화국은 사건의 배후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고 비판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급진공화파는 가톨릭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면 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01년 7월 1일 결사법이 제정되어 공공교육에서 종교교육이 폐지되고 예수회가 추방되었다.
결사법은 피에르 발데크루소의 1899년 법률안을 기초로 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 확대를 중시했다. 법안 제출 후, 교황은 가톨릭의 자유를 위해 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공화파는 결사의 자유가 가톨릭 교권주의자들의 반공화국 활동을 위한 결사체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법 제정 논의는 예수회 등 가톨릭교회 수도회에 대한 규정에 집중되었다.
왕당파와 교권주의자들은 "모두를 위한 자유"를 주장했지만, 공화파는 공화국을 위협하는 예수회 등 수도회에 무한한 자유를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결사법은 6월 22일 하원에서 찬성 189표, 반대 95표로 통과되었고, 예수회 등 모든 가톨릭교회 수도회는 국가의 등록과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 법은 프랑스 교권주의를 억제하고 1905년 정교분리법 제정의 기반이 되었다.[85]
1801년 정교 협약 이후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았으나, 1880년대 여러 반교권주의 국제 모임이 파리에서 열리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유사상 전국 연맹은 반교권주의 단체로 재결집되었다. 1881~1882년 쥘 페리 정부는 쥘 페리 법을 통과시켜 무상 교육을 제정하고 학교에서 성직자와 종교 교육을 배제했다.

1880년과 1882년에는 베네딕토회 교육 수사들이 추방되었고, 1901년에 완료되었다.[22][23][24] 1904년 7월 7일의 법률은 종교 단체의 교육을 금지했고,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급진 사회주의자 에밀 콩브 정부에서 제정되었다.
''피슈 사건''(1904-1905)에서 에밀 콩브 정부의 반교권주의 국방부 장관 루이 앙드레 장군은 프랑스 메이슨 그랑 오리앙의 공무원 카드 색인을 토대로 승진을 결정하며 가톨릭 신자와 미사 참석자의 승진을 막으려 했다.[25]
기회주의 공화당원의 반교권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가톨릭 우파가 공화국과 세속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완화되었지만, 프랑스 사립학교 지원 문제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자유사상 전국 연맹''은 강력한 반교권주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에도 공화파에 반성직자주의가 많다.
2. 1. 1. 프랑스 혁명과 비기독교화 운동
1790년 7월 12일에 통과된 성직자 민사 헌법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프랑스 정부, 나아가서는 점점 더 반성직자적인 국민 제헌 의회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160명의 주교 중 7명을 제외한 모두와, 교구 사제의 약 절반이 서약을 거부했다.[5] 성직자와 신자에 대한 박해가 반란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두 번째는 징집이었다. 서약을 거부한 사제들은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으며, 미사에 가던 여성들은 거리에서 구타를 당했다.[5]프랑스 혁명 당시의 반성직자주의는 처음에는 교회 부패와 고위 성직자들의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조차도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혁명 이전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공포 정치라고 알려진 2년 동안, 반성직자주의 사건들은 유럽이 공산주의 동유럽에서 국가 무신론이 부상할 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보다 더 폭력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혁명 당국은 교회를 탄압하고, 가톨릭 군주제를 폐지하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3만 명의 사제를 추방하고 수백 명을 더 죽였다.[6] 많은 교회들이 무신론적인 예배가 열리는 "이성의 사원"으로 개조되었다.[7][8][9][10] 이 운동이 대중적으로 동기 부여되었는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이 많았다.[11] 프랑스를 비기독교화하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1793년 10월에는 기독교 달력이 혁명 날짜부터 계산하는 달력으로 대체되었고, 자유, 이성, 최고 존재 축제가 예정되었다. 최고 존재 숭배와 프랑스 최초의 국교 무신론 이성 숭배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도덕 종교가 등장했으며,[12][13][14] 이러한 종교에 헌신하지 않은 모든 교회는 폐쇄되었다.[15] 1794년 4월과 5월에는 정부가 최고 존재 숭배 축제를 시행하도록 명령했다. 반성직자주의가 프랑스 혁명가들의 분명한 목표가 되자, 전통과 앙시앵 레짐을 되찾으려는 반혁명가들이 특히 방데 반란 (1793년~1796년)에서 무기를 들었다. 지역 주민들은 종종 비기독교화에 저항했고, 사임한 성직자들에게 다시 미사를 집전하도록 강요했다. 결국,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는 비기독교화 캠페인을 비난하고 가톨릭의 미신이 없는 자체 종교를 설립하려고 했다.[16]
교황 비오 6세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1792–1797)에서 혁명에 반대 입장을 취하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1796).[17] 프랑스군은 1797년 교황을 투옥했고, 교황은 6주간의 감금 후 사망했다.[17]
마음이 변한 나폴레옹은 그 후 1801년의 정교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에 가톨릭 교회를 재건했고,[17] 최고 존재 숭배를 금지했다. 많은 반성직자 정책들이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영토에 진입하면 수도원은 종종 약탈당하고 교회 재산은 세속화되었다.[18][19][20][21]
프랑스 혁명 시대에 이성 숭배 운동이 일어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존재의 축제를 열었다. 이때부터 가톨릭 교회와 정권 사이에 균열이 생겼지만, 1801년의 종교 협약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가톨릭 교회는 화해했다.
2. 1. 2.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당시 공화주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반교권주의가 강하게 나타났다. 레옹 강베타는 "교권주의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적"이라고 선언하며 반교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83] 총리를 지낸 쥘 페리는 교권주의의 상징이자 사회적으로 비판받던 예수회를 추방하고, 이들 단체 소속 인물들의 교육기관 대표나 교사직을 금지하는 법령(1880~81)을 발표했다.[83] 이는 프랑스 반교권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쥘 페리의 교육 개혁은 공공교육 영역에서 가톨릭교회를 배제하려는 반교권주의자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제3공화국 당시 급진공화파 신문인 '르 라디칼(Le Radical)'은 1900년에 《교권주의의 범죄들》이라는 책을 통해 가톨릭 교회가 보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저지른 악행과, 이성과 과학 발전을 저해한 점을 비판했다.[84]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제3공화국은 사건의 배후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고 비판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급진공화파는 가톨릭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하면 공화국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01년 7월 1일 결사법이 제정되어 공공교육에서 종교교육이 폐지되고 예수회가 추방되었다.
결사법은 피에르 발데크루소의 1899년 법률안을 기초로 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 확대를 중시했다. 법안 제출 후, 교황은 가톨릭의 자유를 위해 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공화파는 결사의 자유가 가톨릭 교권주의자들의 반공화국 활동을 위한 결사체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법 제정 논의는 예수회 등 가톨릭교회 수도회에 대한 규정에 집중되었다.
왕당파와 교권주의자들은 "모두를 위한 자유"를 주장했지만, 공화파는 공화국을 위협하는 예수회 등 수도회에 무한한 자유를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결사법은 6월 22일 하원에서 찬성 189표, 반대 95표로 통과되었고, 예수회 등 모든 가톨릭교회 수도회는 국가의 등록과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 법은 프랑스 교권주의를 억제하고 1905년 정교분리법 제정의 기반이 되었다.[85]
1801년 정교 협약 이후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았으나, 1880년대 여러 반교권주의 국제 모임이 파리에서 열리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자유사상 전국 연맹은 반교권주의 단체로 재결집되었다. 1881~1882년 쥘 페리 정부는 쥘 페리 법을 통과시켜 무상 교육을 제정하고 학교에서 성직자와 종교 교육을 배제했다.
1880년과 1882년에는 베네딕토회 교육 수사들이 추방되었고, 1901년에 완료되었다.[22][23][24] 1904년 7월 7일의 법률은 종교 단체의 교육을 금지했고,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급진 사회주의자 에밀 콩브 정부에서 제정되었다.
''피슈 사건''(1904-1905)에서 에밀 콩브 정부의 반교권주의 국방부 장관 루이 앙드레 장군은 프랑스 메이슨 그랑 오리앙의 공무원 카드 색인을 토대로 승진을 결정하며 가톨릭 신자와 미사 참석자의 승진을 막으려 했다.[25]
기회주의 공화당원의 반교권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가톨릭 우파가 공화국과 세속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완화되었지만, 프랑스 사립학교 지원 문제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남아있다. ''자유사상 전국 연맹''은 강력한 반교권주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2. 2. 스페인

19세기 스페인에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반교권 폭력의 첫 번째 사례는 자유주의 삼년제 (1820-1823년 스페인 내전) 기간에 발생했다. 카탈루냐 폭동 동안, 20명의 성직자가 페르난도 7세의 절대주의 지지자 편을 든 교회에 대한 보복으로 자유주의 운동 구성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836년 제1차 카를리스타 전쟁 이후, 새 정권의 총리 후안 알바레스 멘디사발이 공포한 멘디사발의 교회 재산 몰수(Desamortización)로 스페인의 주요 수도원과 수도회가 폐지되었다.[33]
수년 후 급진 공화당 지도자 알레한드로 레루는 선동적인 의견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1808년 스페인을 공격하면서 반교권주의 움직임에 불이 붙었다. 나폴레옹은 1812년 제정된 헌법을 통해 악명높은 종교재판소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1814년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왕권을 되찾음으로 이 헌법은 폐지되었다.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1931년 집권 후 세속주의 원칙에 기반하여 교육 세속화, 학교 내 종교 교육 금지, 예수회 추방 등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1932년 오순절에 교황 비오 11세는 이에 항의하며 반환을 요구했고,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다. 1933년 6월 3일, 교황은 회칙 딜렉티시마 노비스를 발표하여 교회 건물, 주교 관저, 교구 사택, 신학교 및 수도원의 몰수를 설명했다.
법에 따라 이들은 스페인 국가의 재산이 되었고, 교회는 사용을 위해 임대료와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폭력적으로 빼앗긴 것에 대한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34] 종교 의복, 전례 도구, 조각상, 그림, 꽃병, 보석 등도 몰수되었다.[35]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내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코와 국민군을 지지했다. 국민군은 반성직자 공격을 스페인 적색 테러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수도원과 교회 약탈 및 방화, 성직자 6,832명의 살해가 포함되었다.[36] 여기에는 13명의 주교, 4,172명의 교구 사제, 2,364명의 수도사 및 수사(클라렌시안, 프란체스코회, 피아리스트, 마리아 형제회, 그리스도교 형제회, 아우구스티노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 283명의 수녀가 포함되며, 일부는 심하게 고문당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묵주를 삼키도록 강요받고, 광산 갱에 던져지며, 사제들이 산 채로 매장되기 전에 자신의 무덤을 파도록 강요받은 이야기가 있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스페인 내전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했으며, 수백 명을 더 복자로 선언했다.
팔랑헤당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우익 정당 통합 연합에 합류하기 전에는 반성직자적 경향을 보이며 가톨릭 교회를 국가 완전 통제를 방해하는 엘리트 기관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팔랑헤당은 가톨릭 신자 대량 학살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왕당파 및 기타 민족주의 운동과의 동맹으로 교회를 지지하게 되었다.
2. 2. 1. 나폴레옹 헌법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1808년 스페인을 공격하면서 반교권주의 움직임에 불이 붙었다. 나폴레옹은 1812년 제정된 헌법을 통해 악명높은 종교재판소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1814년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왕권을 되찾음으로 이 헌법은 폐지되었다.2. 2. 2. 스페인 제2공화국
1931년 혁명을 통해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법률을 제정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예수회를 추방시켰다. 거기에 분노한 군중들은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고 사제와 수녀들이 살해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게되었다. 이에 맞서 가톨릭교회는 자체적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함께 공화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코의 독재정권은 공화파와 전쟁에 승리한 후 반교권주의 법률들을 폐지하고 공화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86]2. 2. 3. 스페인 내전과 적색 테러
스페인 제2공화국은 1931년 혁명으로 수립되었는데, 프랑스 제3공화국의 법률을 제정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예수회를 추방했다.[86]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공격하고 사제와 수녀들을 살해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가톨릭교회는 자체적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과 함께 공화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코의 독재정권은 공화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반교권주의 법률들을 폐지하고 공화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86]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1931년 집권 후 세속주의 원칙에 기반하여 교육 세속화, 학교 내 종교 교육 금지, 예수회 추방 등의 법률을 통과시켰다. 1932년 오순절에 교황 비오 11세는 이에 항의하며 반환을 요구했고,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맞서 싸울 것을 요청했다. 1933년 6월 3일, 교황은 회칙 딜렉티시마 노비스를 발표하여 교회 건물, 주교 관저, 교구 사택, 신학교 및 수도원의 몰수를 설명했다.
법에 따라 이들은 스페인 국가의 재산이 되었고, 교회는 사용을 위해 임대료와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폭력적으로 빼앗긴 것에 대한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34] 종교 의복, 전례 도구, 조각상, 그림, 꽃병, 보석 등도 몰수되었다.[35]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내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코와 국민군을 지지했다. 국민군은 반성직자 공격을 스페인 적색 테러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수도원과 교회 약탈 및 방화, 성직자 6,832명의 살해가 포함되었다.[36] 여기에는 13명의 주교, 4,172명의 교구 사제, 2,364명의 수도사 및 수사(클라렌시안, 프란체스코회, 피아리스트, 마리아 형제회, 그리스도교 형제회, 아우구스티노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등), 283명의 수녀가 포함되며, 일부는 심하게 고문당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묵주를 삼키도록 강요받고, 광산 갱에 던져지며, 사제들이 산 채로 매장되기 전에 자신의 무덤을 파도록 강요받은 이야기가 있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스페인 내전의 순교자를 성인으로 추대했으며, 수백 명을 더 복자로 선언했다.
팔랑헤당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우익 정당 통합 연합에 합류하기 전에는 반성직자적 경향을 보이며 가톨릭 교회를 국가 완전 통제를 방해하는 엘리트 기관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팔랑헤당은 가톨릭 신자 대량 학살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왕당파 및 기타 민족주의 운동과의 동맹으로 교회를 지지하게 되었다.
2. 3. 독일
19세기 후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내 가톨릭 교회의 역할과 권한을 축소하려는 정책인 문화 투쟁을 시행했다.[29]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줄임으로써 자유주의자와 개신교도에게 호소하려 했다.[29]문화 투쟁은 주로 프로이센에서 진행되었으며, 바이에른과 같은 다른 독일 국가로는 확대되지 않았다.[29] 예수회, 프란체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여러 종교 단체가 추방되었고,[29] 사제와 주교는 체포되거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프로이센 주교의 절반이 감옥에 있거나 망명했으며, 많은 교구에 사제가 없었고, 수도원과 수녀원이 폐쇄되었다.[30]
하지만 문화 투쟁은 가톨릭 신자들을 결집시켜 중앙당의 성장을 초래하고, 폴란드 저항을 부활시키는 등 역효과를 낳았다.[30] 결국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하며 문화 투쟁을 끝내고,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 등 보수적인 정책에서 중앙당의 지지를 얻었다.
2. 4. 오스트리아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재위 1765년 ~ 1790년)는 "관상적인" 종교 기관, 즉 지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은둔형 가톨릭 기관에 반대했다.[27] 요제프 2세의 이러한 정책은 요제프주의에 포함된다.요제프는 오스트리아 주교가 교황청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스트리아-슬라브 지역의 1,188개 수도원 중 500개 이상(헝가리에는 100개 추가)이 해산되었고, 국가는 6천만 플로린을 확보했다. 이 재산은 1,700개의 새로운 교구와 복지 기관을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제 교육 또한 교회에서 분리하여 6개의 국영 "중앙 신학교"를 설립했다. 1783년, 결혼 특허를 통해 결혼을 종교 기관이 아닌 시민 계약으로 간주했다.
가톨릭 역사가들은 요제프와 반성직자 프리메이슨 사이에 동맹이 있었다고 주장한다.[28]
2. 5.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반교권주의는 1870년 폐지된 교황령의 절대주의에 대한 반작용과 관련이 있다.[31] 오랫동안 교황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교황령을 침략한 이탈리아 왕국의 공적 생활에 가톨릭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교황은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라고 선언했다.[31] 주세페 가리발디, 카밀로 카보우르와 같이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일부 정치인들은 교회의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에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졌다.[31] 자유주의 이탈리아의 역사에서 이탈리아 정부와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반교권주의자들은 이념적, 정치적 논쟁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유지했다.[31]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양측이 부상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상호 적대감을 보이면서 교회와 국가 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31] 반교권주의적이었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러한 수사를 완화했고, 독재자로서 성좌와 이탈리아 국가 사이의 공식적인 적대감은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해결되었다.[31]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교권주의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에 의해 구현되었으며, 바티칸의 지원을 받는 정당 기독교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알도 모로 하의 기독교 민주주의는 중도 좌파로 돌아섰고, 1978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지원으로 기독교 민주주의가 이끄는 연립 정부는 가톨릭교회와 기독교 민주주의 보수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합법화했다.
1980년대 이탈리아 사회당 총리 베티노 크락시에 의한 라테란 조약의 개정으로 가톨릭교회의 "국교" 지위가 폐지되었지만, 천 분의 팔 법,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등 특권은 여전히 부여되었다.
최근 이탈리아 사회는 점점 더 세속화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입법 및 규제 행위에 대한 신자들과 가톨릭 국회의원에 대한 투표 지침을 통해 이탈리아 정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개입에 이의를 제기한다. 예를 들어, 추기경 카밀로 루이니의 2005년 이탈리아 생식법 국민투표에 대한 입장, 2007년 동성 결합 인정을 제공할 법안에 대한 그의 반대는 비판을 받았다.
2. 6. 폴란드
폴란드에서는 야누시 팔리코트가 반교권주의 정당인 당신의 운동을 창당하여 2011년 폴란드 총선에서 1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현대 폴란드 미디어에서 반교권주의는 잡지 NIE와 로만 코틀린스키의 신문 팍티 이 미티/Fakty i Mitypl에 의해 홍보되었다.
2. 7. 포르투갈
공화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되면서 반교권주의 활동이 다시 일어났다. 대부분의 교회 재산은 국가 통제 하에 놓였고, 교회는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다.[32] 이 혁명과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1931년 스페인 헌법, 1917년 멕시코 헌법과 유사한 "적대적인" 정교 분리 접근 방식을 취했다.[32]반교권 혁명의 일환으로, 주교들은 교구에서 쫓겨났고, 성직자들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되었으며, 사제복 착용이 금지되었다.[32] 모든 소규모 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5개의 주요 신학교를 제외한 모든 신학교가 폐쇄되었다. 1918년 2월 22일의 법에 따르면, 국내에 단 두 개의 신학교만 허용되었지만, 그들은 재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수도회는 국외로 추방되었으나, 1917년에 일부 수도회는 다시 설립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종교 교육은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모두에서 금지되었다. 종교적 서약과 교회세 또한 폐지되었다.
3.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반교권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나타났다. 이러한 반교권주의는 종종 성직자, 특히 교회의 행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고위 성직자가 공교육 및 경제 개발과 같은 분야에서 사회 발전을 방해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졌다.[48][49] 라틴 아메리카가 종교의 자유를 늦게 받아들인 것은 식민 유산과 탈식민 시대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문화에서 종교가 국가의 이념적 부속물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토착 종교 구조를 스페인 왕좌와 밀접하게 연결된 가톨릭 교회로 대체하는 것이 비교적 쉬웠다.[50]
182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련의 자유주의 정권이 집권했다.[51] 이 자유주의 정권의 일부 구성원들은 1830년대 스페인(그리고 반세기 전의 혁명 프랑스)을 모방하려 했다. 그 결과, 이러한 자유주의 정권 중 다수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교육, 결혼 및 장례를 세속 권위 아래 두려고 시도했다. 교회 재산 몰수 및 종교적 자유의 범위 변경은 일반적으로 세속주의적 및 정부 개혁을 동반했다.[52]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대통령과 페론주의자들은 국가주의를 추진했기에 성직자의 개입을 꺼렸다. 1966년에 정교 협약이 체결되어 아르헨티나 정부는 바티칸의 허가 없이 교구를 변경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황제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노골적으로 가톨릭 중시 정책을 펼쳤다. 이는 합스부르크가 지배 하와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서도 지속되었으며, 1910년에 발생한 멕시코 혁명까지 이어졌다. 혁명 당시 라사로 카르데나스대통령은 교회가 선을 긋는 정책을 분명히 했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시나르키스타"라는 친 가톨릭 조직이 만들어져 대통령에게 저항했다. 중남미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 제국에 의해 강요된 문화로 여겨져, 교회와 거리를 두려는 권력자들이 잇따랐다. 그 때문에 우익 진영이나 국가주의자들 중에서도 반성직자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3. 1. 멕시코
1824년 멕시코 헌법은 공화국이 가톨릭 신앙 이외의 종교의 행사를 금지하도록 요구했다.[53]1855년부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고, 정교 분리 원칙을 시행하며, 종교 단체를 탄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고, 종교 단체와 성직자에게 기본적인 시민적,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었다.
황제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노골적으로 가톨릭 중시 정책을 펼쳤다. 이는 합스부르크가 지배 하와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서도 지속되었으며, 1910년에 발생한 멕시코 혁명까지 이어졌다. 혁명 당시 라사로 카르데나스대통령은 교회가 선을 긋는 정책을 분명히 했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시나르키스타"라는 친 가톨릭 조직이 만들어져 대통령에게 저항했다. 중남미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 제국에 의해 강요된 문화로 여겨져, 교회와 거리를 두려는 권력자들이 잇따랐다. 그 때문에 우익 진영이나 국가주의자들 중에서도 반성직자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3. 1. 1. 멕시코 혁명과 크리스테로 전쟁
1910년 멕시코 혁명 이후 제정된 1917년 멕시코 헌법에는 반교권주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3조는 학교에서 세속 교육을 요구하고 교회가 초등 교육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제5조는 수도회를 불법화했고, 제24조는 교회 밖에서의 공적 예배를 금지했으며, 제27조는 종교 단체의 재산 소유 권리에 제한을 두었다. 제130조는 성직자에게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를 박탈했다.[54] 이러한 조항들은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은 농민 반란인 크리스테로 전쟁(1926-1929)으로 이어졌다.[54]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대통령의 카예스 법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교회의 탄압에는 많은 교회의 폐쇄와 사제 살해가 포함되었으며, 특히 무신론자[55] 토마스 가리도 카나발 지사 치하의 타바스코에서 가장 심했다.
1926년에서 1934년 사이에 최소 40명의 사제가 살해되었고,[56] 3,000명이 넘는 사제가 추방되거나 암살되었다.[57][56] 반란 이전에는 4,500명의 사제가 있었지만, 1934년에는 정부가 허가한 사제는 334명에 불과했으며,[56][58] 10개의 주에는 사제가 한 명도 남지 않았다.[58]
크리스테로 반군은 자신들의 몫만큼 폭력을 저질렀으며, 이는 공식적인 적대 행위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공립학교 교사들이 이전 크리스테로 반군에 의해 고문을 받고 살해되기도 했다.[59][60][61] 1935년에서 1939년 사이에 약 300명의 시골 교사가 이런 방식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산된다.[62]
3. 2. 아르헨티나
1853년 제정된 아르헨티나 헌법은 모든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가톨릭 신자여야 하며, 아르헨티나 의회의 임무는 원주민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후 이 조항들은 가톨릭교를 "유지"하라는 의무를 제외하고 모두 삭제되었다.[69] 1880년대 자유주의적 반교권주의자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헌법적 지위는 유지하면서 국가가 이전에는 교회가 담당했던 많은 기능을 통제하는 새로운 교회-국가 관계를 확립했다.[69] 국가적 가치와 도덕성을 정의하는 역할을 주장하는 보수 가톨릭교도들은 이에 반발하여 가톨릭 민족주의로 알려진 우익 종교 정치 운동에 참여했다.[69]후안 페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교회는 이전의 지위를 회복했다.[69] 페론은 페론주의가 "가톨릭 사회 교리의 진정한 구현"이며, 가톨릭 교회 자체보다 더 가톨릭교를 구현했다고 주장했다.[69] 그러나 1954년, 페론이 국가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려 하자 교회는 광범위한 파괴, 성직자 비난, 가톨릭 학교 몰수를 겪었고, 페론은 파문되었다.[69] 1955년 페론은 가톨릭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군 장군에 의해 전복되었다.[69] 1966년에 정교 협약이 체결되어 아르헨티나 정부는 바티칸의 허가 없이 교구를 변경하는 것이 인정되었다. 페론주의자들은 국가주의를 추진했기에 성직자의 개입을 꺼렸다.
3. 3. 콜롬비아
콜롬비아에서는 1849년부터 1884년까지 30년 이상 반교권주의 법안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65][66][67][68] 1930년 자유당 집권 시기, 반교권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당원들은 공립학교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종식시키려는 법안을 추진했다. 이들은 교회의 지적 후진성이 콜롬비아의 정신적, 물질적 진보 부족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지방 정부, 도 정부, 중앙 정부는 종교 단체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세속 학교를 설립했으며, 이는 때때로 폭력적으로 시행되어 성직자, 보수주의자, 온건 자유당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라 비올렌시아는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콜롬비아 자유당 지지자와 콜롬비아 보수당 지지자 사이에서 벌어진 콜롬비아 시골 지역의 내전 시기를 말한다. 전국 각지에서 무장 세력들은 교회, 수녀원, 수도원을 공격하여 사제들을 살해하고 무기를 찾았으나, 쓸 만한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3. 4.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에서는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 정부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반교권주의 정책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효력을 유지했다.3. 5. 에콰도르
에콰도르에서는 시에라와 교회의 이익을 대표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코스타와 반교권주의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유주의자들 간의 지속적인 분쟁 속에서 반교권주의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63][64] 1875년, 보수주의 대통령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가 세 번째 임기를 위해 선출된 후, 반교권 프리메이슨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63][64]3. 6. 쿠바
피델 카스트로 통치 하의 쿠바는 무신론을 장려하며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다.[70] 대주교와 150명의 스페인 사제가 추방되었고, 가톨릭 신자들은 공직 및 교육에서 차별받았으며, 쿠바 공산당 당원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70]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30만 명의 사람들이 섬을 탈출하면서 쿠바 내 가톨릭 교회는 더욱 약화되었다.[70]4. 이슬람 세계
다양한 이슬람 전통에서 이슬람 율법(피크)에 정통하지 않은 무슬림은 전문가(무즈타히드)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72][73] 이슬람 율법에 정통한 성직자에게 무슬림이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한 파트와 또는 ‘법적 의견’을 묻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공식적인 성직자가 없는 수니파 이슬람의 맥락에서 우르프로 알려진 지역 관습과 관행의 중요성과 연결된다.
시아파 이슬람은 이맘에 중앙 집권적인 성직자 교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에는 시아파 ''울라마''가 신자들에게 "타클리드의 원천"(''마르자 알-타클리드'')으로 알려진 최고위 성직자에게 의지하도록 가르쳤다.[74]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시아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유일한 무슬림 국가에서, 성직자들에게 더욱 체계적인 권력이 부여되었다. 이슬람 율법학자 통치, 즉 벨라얏-에 파키 교리에 따라 이슬람 성직자는 통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슬람은 쇠퇴할 것이다. 이란의 국가 원수는 성직자이며, 성직자들은 많은 강력한 정부 직책을 관리한다.
4. 1. 이란

아시아 최초의 민주 혁명인 이란 입헌 혁명 동안 시아파 마르자 아쿤드 호라사니와 그의 동료들은 이맘의 부재 시 종교적 세속주의 모델을 이론화했는데, 이는 여전히 시아파 신학교에서 통용되고 있다.[75] 이상적인 통치자인 이맘 알 마흐디가 부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이용 가능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입헌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을 열두 번째 이맘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 그는 입헌 민주주의에 대한 전적인 지지를 선언하고 "입헌주의의 기초"에 대한 반대는 비이슬람적이라고 발표했다. 아쿤드에 따르면 "정당한 종교는 인간의 행동과 행위에 조건을 부과"하는데, 이는 성경이나 논리적 추론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제약은 본질적으로 전제 정치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는 무오류한 이맘이 이끄는 경우가 아니면 이슬람 통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성직자와 현대 학자들은 적절한 법률이 국가의 폭정을 줄이고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무하마드 카짐 호라사니는 "시아파 교리에 따르면, 무오류한 이맘만이 통치하고, 사람들의 업무를 처리하고, 무슬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절대적 보호가 무오류한 사람과 함께하지 않으면 비이슬람 정부가 될 것이며, 잠복의 시대이므로 비이슬람 정권에는 공정한 민주주의와 폭정 정부 두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샤리아와 이성의 눈에서 모두 정의로운 것이 부당한 것보다 우세하며, 민주주의가 국가의 폭정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쿤드는 "성스러운 율법과 종교에 의해 승인된" 대로 무오류한 이맘에 의해서만 신정 정부가 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75] 아카 부주르그 테흐라니 또한 아쿤드 호라사니가 어떤 시대에 진정으로 정당한 이슬람 통치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면, 신은 이맘의 은폐를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인용했다. 따라서 그는 이슬람 법학자의 절대적 보호의 개념을 반박했다. 아쿤드에 따르면 시아파 법학자들은 민주적 개혁을 지지해야 하며, 개인적인 의견보다 집단 지혜()를 선호하며, 법학자의 역할을 신자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종교적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제한한다.[75] 그는 민주주의를 국가 원수와 정부 직원에 대해 "법률과 각 국가의 종교가 결정하는 경계" 내에서 일하도록 일련의 "제한 및 조건"을 시행하는 통치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아쿤드는 현대 세속 법률이 전통 종교를 보완한다고 믿으며, 종교적 판결과 종교의 범위를 벗어난 법률 모두 "국가의 폭정"에 맞선다고 주장한다. 입헌주의는 "국가의 고유하고 자연스러운 자유"를 옹호하는 아이디어에 기초하며, 절대 권력은 부패하므로 민주적인 권력 분배는 국가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1925년, 레자 칸은 스스로를 국가의 샤로 선포했다. 그의 서구화 프로그램으로, 통치 성직자의 전통적인 역할은 최소화되었고, 이슬람 학교는 세속화되었으며, 여성은 히잡을 착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샤리아 법은 폐지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은 교육 및 종교 환경에서 분리되었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이러한 관행을 계속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1978-79년의 이슬람 혁명과 샤의 망명에 기여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혁명 후 한 달 만에 권력을 잡았을 때, 샤의 반성직자 조치는 대부분 뒤집히고, 이슬람 법학자들이 통치하는 원칙에 기반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대체되었으며, 벨라야트 에 파기에서 성직자들은 국가 원수와 판사로 활동하고,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법률을 거부하며, 대통령이나 의회에 출마할 수 있는 사람을 통제한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반성직주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란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종교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점점 더 반성직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종교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성직자에 대한 모호한 감정을 가진 일부 가톨릭 국가와 유사하다. 이란인들은 물라를 조롱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에 대해 가벼운 농담을 한다.[77] "성직자들은 왕처럼 살고, 우리는 가난하게 산다!"와 같은 구호를 사용하는 시위대도 있었다. 한 보고서는 "노동자 계급 이란인들은 자신들의 빈곤에 직면하여 성직자의 부를 한탄했다"고 주장했으며, "선도적인 성직자들의 스위스 은행 계좌에 대한 이야기가 테헤란의 소문 공장에서 유포되었다."고 한다.[77]
4. 2. 인도네시아
1998년 수하르토 퇴진 당시, 반유왕기에서 마법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마녀사냥이 대규모 폭동과 폭력 사태로 번졌다.[78][79] 마법사로 지목된 사람 외에도 이슬람 성직자들이 표적이 되어 살해당했으며, 나들라툴 울라마 회원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78][79]5. 아시아
5. 1. 필리핀
필리핀의 반교권주의는 19세기 스페인의 반교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세 리잘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일루스트라도'' 계층 출신이자 필리핀의 가장 저명한 국민 영웅 중 한 명으로, 처형일 전에 결국 철회하기 전까지 반교권주의적 견해를 가졌다.[37][38] 리잘의 처형 이후 필리핀 혁명을 주도한 비밀 결사 카티푸난 또한 반교권주의로 유명했다.[39]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교회 계층과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을 향해 공격적인 언사를 취했다.[40] 2015년,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수도의 교통 체증에 대해 비난하고 저주했는데, 나중에 사과하며 그것이 교황의 잘못이 아니라 정부의 잘못이라고 밝혔다.[41] 2019년에는 교회의 세속적 종말을 25년 안에 예측했다.[42] 그러나 두테르테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적대감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강조하며, 그렇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 성직자를 상대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43]
6. 국가 무신론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f802518a_df6bc279.svg|thumb|right|400px|국가가 과거 또는 현재 무신론을 시행하는 국가를 보여주는 세계 지도.[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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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무신론은 다수의 국가,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소련에서는 반성직주의가 국가를 통해 표현되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첫 5년 동안 28명의 주교와 1,200명의 사제가 처형되었다.[71] 러시아에서는 제정 말기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권력에 개입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파멸시켰다는 교훈과 소비에트 연방 성립으로 인해 반성직자주의가 확립되었다.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에 우사 신궁이 고켄 천황에게 도쿄에게 황위 계승을 맡겨야 한다는 신탁을 내린 우사하치만궁 신탁 사건이 발생, 그 이후 조정에는 승려를 정치에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정착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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