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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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비오 10세는 183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사제로 서품된 후 만토바 주교, 베네치아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를 사목 표어로 삼고, 가난한 삶을 실천하며 매일 엄격한 일정을 소화했다. 전례 개혁과 성체성사, 첫 영성체를 강조하고 근대주의를 단죄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 이탈리아와의 갈등, 한국, 일본 등 세계 각지에 대한 사목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충격을 받고 선종했으며, 195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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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0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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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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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로마 주교 |
재임 시작 | 1903년 8월 4일 |
재임 종료 | 1914년 8월 20일 |
선임자 | 레오 13세 |
후임자 | 베네딕토 15세 |
서품 | 1858년 9월 18일 |
서품 집전자 | 조반니 안토니오 파리나 |
축성 | 1884년 11월 16일 |
축성 집전자 | 루치도 마리아 파로치 |
추기경 임명 | 1893년 6월 12일 |
추기경 임명자 | 레오 13세 |
출생 이름 |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
로마자 표기 | Giuseppe Melchiorre Sarto |
출생일 | 1835년 6월 2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롬바르도-베네치아 왕국 트레비소 리에제 |
사망일 | 1914년 8월 20일 |
사망지 |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도 궁전 |
이전 직책 | 살차노 수석 사제 (1867–1875) 트레비소 교구 교구 행정관 (1875–1884) 트레비소 교구 대리 (1879–1880) 만토바 교구 만토바 교구장 (1884–1893) 베네치아 총대주교 (1893–1903) 산 베르나르도 알레 테르메 성당 추기경 사제 (1893–1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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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 | Instaurare Omnia in Christo |
모토 (번역)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재건하다 |
축일 | 8월 21일 |
시복일 | 1951년 6월 3일 |
시복 장소 |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
시복 집전자 | 비오 12세 |
시성일 | 1954년 5월 29일 |
시성 장소 |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
시성 집전자 | 비오 12세 |
수호 성인 | 성 비오 10세회 애틀랜타 대교구 디모인 교구 첫 영성체 그레이트폴스-빌링스 교구 창가나체리 대교구 순례자 산타 루치자 스프링필드-케이프 지라도 교구 삼보앙가 대교구 트레비소 이민자 베네치아 총대주교구 교리교사 성 비오 10세 신학교 (더뷰크, 아이오와) |
성직 수임 정보 | |
부제 서품일 | 1858년 2월 27일 |
사제 서품 집전자 | 조반니 안토니오 파리나 |
사제 서품일 | 1858년 9월 18일 |
주교 서품 집전자 | 루치도 마리아 파로치 |
공동 서품 집전자 | 피에트로 로타 |
주교 서품일 | 1884년 11월 16일 |
추기경 서임자 | 교황 레오 13세 |
추기경 서임일 | 1893년 6월 13일 |
추가 정보 | |
다른 이름 | 비오 |
칭호 | 가톨릭 교회 성인 |
2. 생애 초기와 사목 생활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는 어린 시절 마을 본당 신부에게서 라틴어를 배웠고, 카스텔프랑코베네토의 김나지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850년 트레비소 교구장 주교에게서 삭발례를 받고 파도바 신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학, 철학, 신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64]
1858년 9월 18일 사제품을 받은 후 9년간 톰볼로에서 보좌 신부로, 8년간 살차노에서 본당 신부로 사목했다. 이후 트레비소 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와 교구 상서국장을 역임했다. 1867년에는 살차노의 수석사제가 되었다.
톰볼로에서 사목하는 동안 사르토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교회법을 연구하며 신학 지식을 넓혔고, 병약한 본당 신부의 업무를 도왔다. 그의 경건함은 널리 알려져 "돈 산토"라고 불리기도 했다.[6] 살차노에서는 지역 교회를 복원하고 병원을 확장했으며, 1870년대 초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트레비소 로마 가톨릭 교구에서는 재무를 맡아 공립 학교 학생들이 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고, 시골과 도시 청소년들의 종교 교육에도 헌신했다.
1879년 페데리코 마리아 치넬리 주교가 사망하자,[8] 1880년 6월 새 주교가 임명될 때까지 교구장 대리로 교구를 관리했다. 1880년 이후에는 트레비소 신학교에서 교의신학과 도덕신학을 가르쳤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는 1835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리에세(현재 이탈리아 베네토 주 트레비소 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을 우체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사르토(Giovanni Battista Sarto, 1792–1852)와 마르게리타 상손(Margherita Sanson, 1813–1894) 사이에서 태어난 10명의 자녀 중 둘째였다. 1835년 6월 3일 세례를 받았다.[5] 비록 가난했지만, 그의 부모는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주세페는 매일 6km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주세페에게는 세 명의 형제와 여섯 명의 자매가 있었다.
이름 | 출생-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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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페 사르토 (Giuseppe Sarto) | 1834년 출생, 6일 후 사망 |
안젤로 사르토 (Angelo Sarto) | 1837–1916 |
테레사 파롤린-사르토 (Teresa Parolin-Sarto) | 1839–1920 |
로사 사르토 (Rosa Sarto) | 1841–1913 |
안토니아 데이 베이-사르토 (Antonia Dei Bei-Sarto) | 1843–1917 |
마리아 사르토 (Maria Sarto) | 1846–1930 |
루치아 보스친-사르토 (Lucia Boschin-Sarto) | 1848–1924 |
안나 사르토 (Anna Sarto) | 1850–1926 |
피에트로 사르토 (Pietro Sarto) | 1852년 출생, 6개월 후 사망 |
[5]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가족에게 어떠한 특혜도 주지 않았다. 그의 형제는 우편 사무원으로 남았고, 조카는 마을 신부로, 세 명의 미혼 자매는 로마에서 검소하게 살았다.[5]
어린 시절 주세페는 "베피"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활력이 넘쳐 선생님은 자주 그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학업에 열중하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놀고 난 후 저녁 귀가 전에는 10분 동안 기도했으며,[6] 복사로도 봉사했다. 열 살 무렵 마을 학교의 초등 과정을 마치고 지역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이후 카스텔프랑코 베네토의 김나지움까지 약 6.44km를 걸어가 수업을 들었다. 그는 신발을 아끼기 위해 종종 신발을 들고 다녔으며, 가난 때문에 초라한 점심과 옷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6]
1850년 본당 신부로부터 삭발례를 받고, 파도바 신학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을 받았다. 신학교에서 그는 고전, 철학, 신학 공부를 훌륭하게 마쳤다.[7]
2. 2. 신학 수업과 사제 서품
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는 1850년 트레비소 교구장 주교로부터 삭발례를 받고, 파도바 신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학,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64] 1858년 9월 18일, 트레비소 로마 가톨릭 교구의 조반니 안토니오 파리나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6] 그 후 톰볼로에서 보좌 신부로 9년간 사목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을 연구했다.[6]2. 3. 주교 임명
1884년 11월 10일, 주세페 사르토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만토바 주교로 임명되었다.[9] 그는 6일 후 로마의 산탄토르나르 알레 테르메 네로니아네-알레산드리네 성당에서 루치도 파로키 추기경에 의해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피에트로 로타와 조반니 마리아 베렌고가 보좌했다.[9] 1891년 6월 19일에는 교황좌의 보좌관이라는 명예로운 직함을 받았다.[9] 사르토는 주교 서품 전에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박사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교황 면제를 받아야 했는데,[9] 이로 인해 그는 교황 프란치스코까지 박사 학위가 없는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사르토는 주교 서품 후 로마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즉시 어머니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그의 반지에 반복적으로 입을 맞추며 "아들아, 네가 이것이 없었다면 이 멋진 반지도 없었을 거야"라며 자신의 결혼반지를 보여주었다.[6]
3. 추기경과 총대주교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주세페 사르토를 추기경에 임명하고 산 베르나르도 알레 테르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했다.[10][11] 3일 후 사르토는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통일 이탈리아 왕국 정부가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행사하던 총대주교 임명권을 주장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1870년 교황령 병합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주교좌가 공석 상태였다.[48] 사르토는 1894년에야 총대주교 착좌를 허락받았다. 그는 총대주교로서 사목 활동과 교구 운영에 전념하며 정치 관여를 피했지만, 베네치아 시민들에게 보낸 첫 사목 서한에서 교황에 대한 완전한 순명을 강조했다. 1903년 4월, 교황 레오 13세는 로렌조 페로시에게 사르토 추기경을 자신의 후계자로 굳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12]
3. 1. 추기경 서임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6월 12일 비밀 교황 회의에서 주세페 사르토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10] 같은 해 6월 15일 공개 회의에서 레오 13세는 사르토에게 추기경의 붉은 갈레로를 수여하고, 산 베르나르도 알레 테르메 성당을 그의 명의 성당으로 지정했으며,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했다.[11] 그러나 통일 이탈리아 왕국 정부가 이전 통치자인 오스트리아 황제가 행사했던 총대주교 지명 권한을 주장하면서 어려움이 발생했다. 1870년 로마 점령 이후 로마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관계 악화는 주교 임명에 부담을 주었고, 이로 인해 공석이 된 주교좌는 30개에 달했다. 사르토는 1894년에 가서야 총대주교직을 맡도록 허락받았다.[48]
3. 2. 베네치아 총대주교 임명과 갈등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6월 12일 주세페 사르토를 추기경에 임명하고, 산 베르나르도 알레 테르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10][11] 6월 15일, 사르토 추기경은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통일 이탈리아 왕국 정부가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총대주교 임명권을 주장하면서 어려움이 발생했다. 1870년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교구장 임명에 문제가 발생했고, 이탈리아 정부의 방해로 공석이 된 주교좌는 30개에 달했다.[48] 결국 주세페 사르토는 1894년에야 베네치아 총대주교 착좌를 허락받았다.사르토 추기경-총대주교는 사목 활동과 교구 운영에 전념하고 정치 관여는 피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시민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한에서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이나 의문, 개인적인 반발심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순명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교황에게 온전히 순명할 것을 강조하였다.
3. 3. 총대주교로서의 활동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 6월 12일 주세페 사르토를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주세페 사르토는 산 베르나르도 알레 테르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3일 후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10][11] 그러나 통일 이탈리아 왕국 정부가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행사했던 권리에 근거를 두고 총대주교 임명권을 주장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1870년 교황령이 이탈리아에 병합된 이래, 로마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불편한 관계는 교구장 임명에 악영향을 끼쳤고, 이탈리아 정부의 방해로 공석이 된 주교좌는 30개에 달하게 되었다. 주세페 사르토는 1894년에 가서야 총대주교 착좌를 사실상 허락받았다.[48]사르토 추기경-총대주교는 사목 활동과 교구 운영에 전념하였으며,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시민들에게 보낸 첫 번째 서한에서 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이나 의문, 개인적인 반발심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순명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교황에게 온전히 순명할 것을 주문하였다.
4. 교황 선출
1903년 레오 13세가 사망하면서, 사르토 추기경은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여했다. 사르토는 콘클라베 전, 교황이 될 가능성에 대해 "교황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로 부담감을 느꼈다. 또한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교황 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거부권 행사로 유력한 후보였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이 탈락하고, 사르토 추기경이 1903년 8월 4일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사르토는 교황직을 수락한 후, 교황 비오 9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비오 10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는 "제가 고통받을 것이므로, 저 역시 고통받았던 교황들의 이름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설명했다.[48] 비오 10세의 교황 즉위식은 1903년 8월 9일에 거행되었다.
4. 1. 콘클라베 개최와 거부권 행사
1903년 7월 20일 교황 레오 13세가 선종하자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개최되었다. 유력한 후보는 교황청 국무원장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이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 추기경은 24표, 고티 추기경은 17표, 사르토 추기경(훗날의 비오 10세)은 5표를 얻었다. 두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 추기경은 5표를 더 얻어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14]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변인이었던 폴란드 추기경 얀 푸지나 데 코시엘슈코가 람폴라 추기경에 대한 황제의 거부권을 행사했다.[13] 많은 추기경들이 이에 항의했지만, 세 번째 투표가 진행되어 사르토 추기경이 21표를 얻으며 지지도가 상승했다. 네 번째 투표에서는 람폴라 추기경 30표, 사르토 추기경 24표를 얻어 추기경들의 마음이 사르토 추기경에게 기울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다음 날 아침, 다섯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 추기경은 10표, 고티 추기경은 2표, 사르토 추기경은 50표를 얻어 1903년 8월 4일 사르토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4] 1903년 콘클라베는 세속 군주가 교황 선거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콘클라베로 기록되었다.
사르토 추기경은 처음에 교황직을 거절했으나, 추기경들의 요청과 기도를 통해 결국 수락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부당함을 느껴, 이후 콘클라베에서 세속 군주의 거부권 행사를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파문하겠다고 선언했다.[13]
4. 2. 사르토 추기경의 선출
1903년 8월, 레오 13세가 사망한 후 열린 콘클라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의향에 따라 거부권이 행사된 마지막 선거가 되었다. 거부권은 유력한 후보였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에게 행사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르토가 비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비오 10세는 콘클라베에서 거부권을 폐지했다.역사가들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국무원장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이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는 24표, 고티는 17표, 사르토는 5표를 얻었다. 두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는 5표를 더 얻었고 사르토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람폴라가 선출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대신하여 폴란드 추기경 얀 푸지나 데 코시에츠코가 크라쿠프에서 람폴라의 선출에 반대하는 거부권(''jus exclusivae'')을 선포했다.[13] 콘클라베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항의했고, 심지어 거부권을 무시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러나 세 번째 투표가 이미 시작되었고, 뚜렷한 승자는 없었지만 사르토에 대한 지지가 증가하여 21표를 얻었다. 네 번째 투표에서는 람폴라가 30표, 사르토가 24표를 얻었다. 추기경들이 사르토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음 날 아침, 다섯 번째 투표에서 람폴라가 10표, 고티가 2표, 사르토가 50표를 얻었다.[14] 그리하여 1903년 8월 4일, 사르토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군주가 행사한 마지막 교황 거부권으로 알려진 사건이었다.
처음에 사르토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지명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거부권에 깊이 슬퍼했고, 이러한 권한을 철회하고 콘클라베 중에 그러한 거부권을 통보한 모든 사람을 파문하겠다고 맹세했다.[13] 추기경들이 그에게 재고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바울 경당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깊은 기도를 드린 후 그 자리를 수락했다. 추기경 루이지 마키는 오전 12시 10분경에 사르토의 선출을 발표했다.
5. 교황 재위기
교황 비오 10세의 재위 기간은 보수적인 신학과 전례, 교회법 개혁으로 유명하다. 1903년 교황이 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라"는 뜻의 ''Instaurare Omnia in Christo''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평민 출신으로 금도금한 금속 흉배 십자가를 대관식에 착용하고, 측근들이 경악하자 항상 착용하던 것이라며 다른 십자가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다.[15]
교황 우르바노 8세 이후 교황이 혼자 식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했으며, 로마 사교계가 그의 평민 출신 누이들을 교황 백작 부인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자 "나는 그들을 교황의 누이로 만들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15]
만토바와 베네치아의 거리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며 교리문답을 가르쳤고, 교황 알현 중에는 아이들을 불러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바티칸 산 다마소 안뜰 주간 교리문답 수업에는 항상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었다.[15]
1905년, 비오 10세는 서한 ''Acerbo nimis''에서 전 세계 모든 본당에 그리스도교 교리 협회(교리 수업) 설립을 지시했다.[15]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은 전 세계에서 통일적으로 사용할 간결하고 명확한 교리 문답을 실현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회법은 지역마다 달랐다. 1904년 3월 19일, 교황은 보편적 법률 제정을 위해 추기경 위원회를 임명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된 자코모 델라 키에사, 교황 비오 12세가 된 에우제니오 파첼리가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첫 교회법전은 1917년 5월 27일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반포, 1918년 5월 19일에 발효되었으며,[2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현대 교회법을 반포한 1983년 대림절까지 유효했다.[28]
1908년 6월 29일 헌장 ''사피엔티 콘실리오(Sapienti Consilio)''로 로마 교황청을 개혁하고,[29] 교령 ''피에니 라니모''(Pieni l'animo)로 주교의 신학교 감독 강화 규칙을 명시했다.[30] 지역 신학교를 설립하고(일부 소규모 신학교는 폐쇄), 신학교 교육 계획을 공포했으며, 성직자의 사회 단체 관리를 금지했다.
레오 13세와 달리 라파엘 메리 델 발을 국무원 추기경으로 임명, 세속 정부에 강경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가 이탈리아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방문 시, 교황령 병합을 거부하며 항의, 만남을 거부했다. 프랑스와 외교 단절, 1905년 프랑스 교회와 국가 분리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교회는 정부 지원을 잃었다. 프랑스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바티칸과 단교했다.
포르투갈, 아일랜드, 폴란드, 에티오피아 등 가톨릭 국가에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이탈리아 반대로 이들 국가, 영국, 러시아도 분노했다.
1908년 교황 칙령 ''Ne Temere''로 혼합 결혼이 복잡해졌다. 가톨릭 사제 집행 외 결혼은 합법이나 성사상 무효였고, 일부 개신교는 개신교 교회나 시민 서비스 결혼 부부에게 이혼 권고를 우려했다.[31]
세속 권력 도전에 비오 10세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탈리아 가톨릭 협회 활동 조정 ''Opera dei Congressi'' 중단, 교회-자유주의 정치 견해 화해 시도 프랑스 사회 운동 ''르 실롱'' 비난, 가톨릭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노동 조합 반대,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 투표 금지 칙령 부분 해제, 이탈리아 정부 불인정.
러시아 내 폴란드 가톨릭 신자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가 1903년 2월 22일 종교 자유 약속 칙령, 1905년 종교 자유 포함 헌법 공포했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위협을 느껴 엄격했다. 교황 칙서 불허, 바티칸 연락 불법.
1910년, 로마 감리교 협회 연설 전 부통령 찰스 W. 페어뱅크스, 연설 예정 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면담을 거부했다.[15][35]
1914년 7월 8일, 제임스 기번스 추기경 요청에 워싱턴 D.C. 무염시태 국립 성지 건설 현장 무염시태의 수호성인 보호 요청 승인.
일본 가톨릭 교회에 막부 말기 이래 파리 외방 전교회 외 수도회 선교 허가, 예수회에 일본 활동 의뢰, 조치 대학 창립.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 카를에게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전쟁 위험성 인식 촉구 편지 등 제1차 세계 대전 회피 노력. 치세에 대전쟁 발발 충격으로 1914년 사망.
5. 1. 기본 사목 방향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0절에 나오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Instaurare Omnia in Christo)”[65]를 사목표어로 삼아 교황직을 시작하였다. 비오 10세는 1903년 8월 4일 발표한 첫 회칙 《최고 사도좌로부터》(E Supremi Apostolatus)를 통해 “나는 하느님의 권위를 옹호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권위와 계명을 인정해야 하며, 그에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하며, 존경해야 합니다.”라며 자신의 사목 방향을 밝혔다.[65]가난한 가정 출신인 비오 10세는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66]고 말할 만큼 가난한 삶을 사랑하였다. 그는 즉위 미사 때 종래의 호화스럽던 교황 의식을 간소화했으며,[67] 교황 우르바노 8세가 확립했던 교황 혼자 식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였다.
비오 10세는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토바와 베네치아에 있을 당시 그는 주머니에 항상 사탕을 넣고 다니면서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교리를 가르치곤 하였다.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항상 어린이들을 가까이 곁에 두고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친절하게 대답해주곤 하였다. 매주 바티칸의 산 다마소 안뜰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문답식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67]
5. 2. 소탈한 행보
비오 10세는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66]고 말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사랑했다. 그는 즉위 미사를 종래의 호화스러움을 생략하고 간소하게 치렀으며[67], 교황 우르바노 8세 때부터 내려오던 교황 혼자 식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했다.그는 매일 일정한 일과를 보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6시에 미사를 집전하고, 8시부터 개인 연구와 알현을 받았다. 정오에는 공식 회견을, 1시에는 측근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짧은 휴식 후 다시 업무에 복귀했고, 저녁 식사는 9시에 했지만 밤늦게까지 일했다.

비오 10세는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도 유명했다. 만토바와 베네치아 시절, 길거리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교리를 가르쳤다. 교황이 된 후에도 어린이들을 가까이 두고 궁금한 것에 답해주었으며, 매주 바티칸에서 아이들을 위한 문답식 교리 교육을 실시했다.[67]
5. 3.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
교황 비오 10세는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만토바와 베네치아에 있을 때 그는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며 길거리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교리를 가르쳤다. 교황이 된 후에도 그는 항상 어린이들을 가까이 두고 그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매주 바티칸의 산 다마소 안뜰에서 아이들을 위한 문답식 교리교육을 실시하였다.[67]5. 4. 교회 개혁과 신학
교황 비오 10세는 보수적인 신학을 옹호하고 전례와 교회법을 개혁하는 데 힘썼다. 1903년 교황직을 시작하면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0절에 나오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Instaurare Omnia in Christo)”[65]라는 사목 표어에 따라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하게 죽고 싶다."[66]고 말할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비오 10세는 교황 우르바노 8세가 확립했던 교황 혼자 식사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식사하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어린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도 유명했는데, 만토바와 베네치아에서 길거리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교리를 가르쳤고, 교황이 된 후에도 매주 바티칸에서 아이들을 위한 교리 교육을 실시했다.[67]
비오 10세는 재위 기간 동안 근대주의와 상대주의를 경계하며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1907년에는 교령 《비통한 결과에 대해서》(Lamentabili Sane Exitu)를 통해 근대주의자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규탄하고, 회칙 《주님의 양떼의 사목》(Pascendi Dominici Gregis)에서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총집합’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모든 성직자에게 《반근대주의 선언》(Sacrorum antistitum)을 통해 근대주의에 반대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37]
비오 10세는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을 편찬하여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통일된 교리 교육 지침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 교리 문답은 간결하고 명확한 설명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호평을 받았다.[24][25]
또한, 비오 10세는 교회법을 개정하고 로마 교황청 조직을 개편하는 등 교회 행정에도 힘썼다. 그는 지역마다 달랐던 교회법을 통일하고, 1917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반포된 역사상 최초의 보편 교회법 제정에 기여했다.[70][71]
5. 4. 1. 그레고리오 성가 장려
비오 10세는 교황으로 즉위한 지 3주 만에 자의교서 《목자의 역할을 다함에 있어서》(Tra le sollecitudini)를 발표하였다.[67] 교회 음악계에서는 오랫동안 그레고리오 성가를 클래식한 바로크풍으로 구성하는 것을 선호해왔다. 그러나 비오 10세는 이러한 유행을 반대하고, 로렌초 페로시 몬시뇰을 위시한 초창기 교회 음악 양식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하였다. 1898년부터 시스티나 경당 성가대의 단장을 맡고 있던 페로시 몬시뇰의 성가단장직을 종신직으로 만들어 주었다. 비오 10세는 새 성가 작업에 대한 권한을 돔 조셈 포티에 아빠스에게 위탁하였으며, 이는 곧 그레고리오 성가의 솔렘식 창법을 공식 채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5. 4. 2. 전례 개혁과 영성체 강조
비오 10세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전례에 복원하는 것 외에도, 성찬례를 새롭게 강조하며 "성체성사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이라고 말했다.[15] 그는 성체성사를 자주 영할 것을 권장했는데, 이는 "분별력의 나이"에 도달한 어린이에게도 적용되었다. 다만, 고대 동방교회의 유아 성찬례 관행은 허용하지 않았다.[15] 또한, 성체성사를 합당하게 영하기 위해 고해성사에 자주 참여할 것을 강조했다.[15]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비오 10세의 신심은 그에게 "축성된 성사의 교황"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1910년, 비오 10세는 칙서 ''Quam singulari''를 발표하여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나이를 12세에서 7세, 즉 분별력의 나이로 변경하였다.[15] 그는 어린이들의 마음에 이 사건을 각인시키고 부모들이 새로운 종교적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나이를 낮추었다.[15] 그러나 이 칙서는 첫 영성체가 빨라지면 부모들이 자녀를 가톨릭 학교에서 조기에 빼낼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15]
비오 10세는 자신에게 소개된 다음 날, 성사의 의미를 탁월하게 이해한 네 살짜리 소년에게 직접 첫 영성체를 주기도 했다.[6] 사람들이 수령 연령을 낮춘 것에 대해 비판하자, 그는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했다.
비오 10세는 얀센주의의 영향으로 성체 배령을 꺼리는 신자들이 많아진 상황을 우려하여 잦은 성체 배령과 어린 시절의 첫 영성체를 장려했다.
그는 1903년 ''교황 자의 교서'' ''Tra le sollecitudini''에서 "참된 그리스도교 정신의 주요하고 필수적인 원천은 가장 거룩한 신비와 교회의 공적이고 공식적인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5]
또한, 비오 10세는 박수 갈채를 위한 기회를 없앰으로써 교황 의식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1903년 11월 추기경 임명을 위한 첫 번째 공개 추기경 회의에 들어갈 때, 그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제의용 의자'' 위에서 군중 위로 운반되지 않고, 궁정 근위대의 이중 줄 뒤에 거의 가려진 채 주교 행렬의 끝에서 제의용 옷과 주교관을 쓰고 걸어서 도착했다.[19]
5. 4. 3. 첫 영성체 연령 하향 조정
1910년 교황 비오 10세는 교령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가》(Quam Singulari Christus Amore)를 반포하여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나이를 12세 이상에서 7세 이상으로 낮추었다.[15] 이는 분별력의 나이로, 10세 혹은 12세까지 첫 영성체 나이를 늦추던 기존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비오 10세는 7세가 지나고도 첫 영성체 시기를 미루는 것은 성체를 치유가 아니라 보상으로 여기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6]비오 10세는 “존엄한 성체성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관행은 많은 악의 원인이 됐다.”며 이런 관습이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영적 양식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그는 어린이들의 마음에 이 사건을 각인시키고 부모들이 새로운 종교적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기를 원했다.[15]
어린이가 자신에게 소개된 다음 날, 성사의 의미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준 네 살짜리 소년에게 직접 첫 영성체를 주기도 하였다.[6] 사람들이 비오 10세가 수령 연령을 낮춘 것을 비판했을 때, 그는 예수의 말씀인 "어린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를 인용했다.
5. 4. 4. 근대주의 단죄
비오 10세의 재위 기간 동안 가장 큰 걱정거리는 가톨릭 신앙에 큰 위협을 끼쳤던 근대주의와 상대주의였다.[65] 근대주의와 상대주의는 교회 내에도 침투하여 칸트 등 근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톨릭 신학에 도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철학, 신학뿐만 아니라 성경 주석에도 이러한 사상이 침투했으며, 특히 미국에서 발행된 간행물에서 두드러졌다.근대주의자들은 교회의 신앙이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하며, 시대에 맞게 교회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반근대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모든 교리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면 교리의 본질마저 부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근대주의가 이신론, 불가지론, 무신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07년 7월 3일, 비오 10세는 교령 《비통한 결과에 대해서》(Lamentabili Sane Exitu)를 통해 65명의 근대주의자 및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 언급하며 공식적으로 규탄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의 본질, 계시, 성경 주해, 성사,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회칙 《주님의 양떼의 사목》(Pascendi Dominici Gregis)에서는 근대주의를 ‘모든 이단의 총집합’이라고 규정했다. 비오 10세는 《반근대주의 선언》(Sacrorum antistitum)을 작성하여 모든 성직자에게 근대주의 반대를 서약하게 했다.[37]
또한 비오 10세는 성직자, 신학자, 정치인들을 감시하는 경건한 형제회(Sodalitium Pianum)를 격려했다. 움베르노 베니니 몬시뇰이 조직한 이 비밀조직은 반근대주의 성향을 띠며, 전통적 신학 견해를 가진 이들을 추천하거나 근대주의, 상대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의 명단을 교황청에 보고했다. 1913년 이 단체에 대한 악명과 적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14년 교황 베네딕토 15세 즉위 후 해체되었다.
5. 4. 5. 경건한 형제회 지원
비오 10세는 성직자, 신학자, 정치가들을 감시하도록 도와준 경건한 형제회(Sodalitium Pianum)를 격려하였다. 움베르노 베니니 몬시뇰이 조직한 반근대주의 성향의 비밀조직인 경건한 형제회는 전통적인 신학적 견해를 가진 이들을 추천하거나, 근대주의나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진 이들의 명단을 교황청에 보고했던 일종의 정보 제공 단체였다.[65] 1913년에 이 단체에 대한 악명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1914년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경건한 형제회는 해체되었다.5. 4. 6.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
비오 10세는 전 세계에서 통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간결하고 명확하며 대중적인 교리 문답서인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을 완성하였다. 이 교리문답은 우선 로마 관구에서만 통용되다가 몇 년 후에는 이탈리아의 다른 관구에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은 가톨릭교회 전체 통용으로 집필된 것은 아니었다.[68] 비오 10세의 글은 설명은 지극히 단순했지만 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은 장차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1905년 4월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은 회칙 《교리 교육에 관하여》에서 당시 최고의 종교 교과서로 격찬받았다. 성 비오 10세의 교리문답은 1908년 발간되었으며, 그 쪽수는 115페이지 정도였다.[69]
2003년에 거의 100년이나 된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이 여전히 유효한지 질문을 받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 그 자체는 항상 동일합니다. 따라서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은 항상 그 가치를 유지합니다. 반면에 믿음의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은 바뀔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이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25] 성 비오 10세회(정식 지위가 불규칙한, 전통주의 가톨릭 단체)는 1992년 ''가톨릭교회 교리서''보다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을 권장한다.[26]
1905년, 비오 10세는 서한 ''Acerbo nimis''에서 전 세계 모든 본당에 그리스도교 교리 협회(교리 수업)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15]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은 로마의 교회 관할 구역과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몇 년 동안 사용되었지만, 전 세계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규정되지는 않았다.[24][25] 이 교리 문답은 1905년 4월의 회칙 ''Acerbo nimis''에서 종교 교육 방법으로 칭송받았다.
''성 비오 10세의 교리 문답''은 1908년 이탈리아어로 출판되었으며, 제목은 ''Catechismo della dottrina Cristiana, Pubblicato per Ordine del Sommo Pontifice San Pio X''이다.
5. 4. 7. 교회법 개정
비오 10세는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이 지역마다 다른 점을 개선하고자 1904년 3월 19일 추기경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 위원회에는 훗날 교황이 되는 자코모 델라 키에사(교황 베네딕토 15세)와 에우제니오 파첼리(교황 비오 12세)도 참여했다. 역사상 최초의 보편 교회법은 1917년 5월 27일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1918년 5월 19일부터 1983년 대림시기 전까지 법적 효력을 가졌다.[70][71]5. 4. 8. 교회 조직 개편
비오 10세는 로마 교황청 기구를 전면 재정비하고, 사제 교육을 쇄신하고자 노력하여 신학교와 그 교육 과정을 개혁했다.[36]- 교황령 《Sapienti Consilio》를 반포하여 로마 교황청 기구를 전면 재정비하였다.[36]
- 회칙 《Pieni L'Animo》를 반포하여 주교의 신학교에 대한 감독권 실행과 관련한 새로운 규정을 첨부하였다.
- 각 지역마다 신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몇몇 소규모 신학교는 폐교), 신학생들을 가르칠 새로운 교육계획을 발표하였다.
- 성직자들이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5. 5. 정치
비오 10세는 레오 13세의 유화적인 외교 정책과 달리 라파엘 메리 델 발을 국무원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세속 정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15] 특히 이탈리아 왕국의 교황령 병합을 인정하지 않아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방문한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를 비난하고 만남을 거부했다. 이는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과 1905년 프랑스 교회와 국가 분리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교황은 회칙 ''Vehementer Nos''와 ''Gravissimo officii munere''에서 이 법을 비난하며 제3공화국을 인정한 프랑스 주교 두 명을 해임했다. 결국 프랑스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포르투갈, 아일랜드, 폴란드, 에티오피아 등 가톨릭 국가에서도 비슷한 강경책을 유지하여 이들 국가와 영국, 러시아 등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다수의 ''자치 통치''가 비오 10세의 영향을 받은 ''로마 통치''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1908년 교황 칙령 ''Ne Temere''는 가톨릭 사제가 집행하지 않은 혼합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아일랜드의 정치적 갈등에 영향을 미쳤다.[31][32]
비오 10세는 ''Opera dei Congressi''와 ''르 실롱''을 비난하고, 가톨릭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노동 조합에 반대하는 등 더욱 강경해졌다.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 투표 금지 칙령을 부분 해제했지만, 이탈리아 정부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1905년 회칙 ''Il fermo proposito''la를 통해 주교들에게 특정 상황에서 신자들의 입법 권한 행사를 허용했다.[33]
1903년 미국 정부와 협상하여 필리핀 내 가톨릭 수도자 소유 토지를 700만달러에 구매하도록 허용했고,[34] 1908년 미국 교회의 성장을 인정하여 선교 지역 지위에서 해제했다.[15] 1910년 감리교 협회 연설을 이유로 부통령 찰스 W. 페어뱅크스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면담을 거부했다.[15][35]
일본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외 수도회의 선교를 허가하고 예수회에 일본 활동을 의뢰하여 조치 대학 창립에 기여했다. 조선에는 1911년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를 분할했다.[15]
5. 5. 1. 프랑스와의 관계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은 진보좌파와 공화주의자들이 집권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드레퓌스 사건 때 가톨릭 교회가 진실을 외면하고 반(反)드레퓌스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반교권주의 투쟁이 다시 격렬하게 시작되었다.[72] 에밀 루베 대통령하의 에밀 콩브(Émile Combes) 내각(1902~1905)은 다소 급진적인 정교분리(라이시테) 정책을 추진하였다. 1905년 12월 9일,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관한 법을 통하여 "어떠한 종교도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예배행위에도 봉급을 주거나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72] 아울러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체결한 1801년의 정교조약을 폐기하고, 교회 재산은 평신도 협회로 이전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하여 미인가 종교단체를 추방하고 3,000개의 가톨릭계 학교를 폐쇄하였다.이런 조치에 대해 교황 비오 10세는 프랑스를 맹렬히 비난했고(1906. 2. 11.), 주교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협상도 불허했다(1906. 8. 10.).[73] 이로 인하여 양국은 수년 동안 관계가 악화되었다. 비오 10세는 세속 정부에 대한 레오 13세의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뒤집고 라파엘 메리 델 발을 국무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가 이탈리아 군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00–1946)를 방문했을 때, 비오 10세는 여전히 이탈리아의 교황령 병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프랑스 대통령의 방문을 꾸짖고 그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이는 프랑스와의 외교적 결별로 이어졌고,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이 제정되어 프랑스 내에서 교회가 정부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 교황은 그의 회칙 ''Vehementer Nos'' 와 ''Gravissimo officii munere''에서 이 법을 비난하고, 제3공화국을 인정한 두 명의 프랑스 주교를 해임했다. 결국 프랑스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5. 5. 2. 이탈리아 왕국과의 관계
비오 10세는 재위 초기에는 이탈리아 왕국과의 모든 접촉을 끊고 바티칸에 칩거하며 '바티칸의 포로' 상태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발흥하자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했던 'Non Expedit'를 사실상 중지시켰다. 1905년 회칙 《확고한 목적》(Il Fermo Proposito)을 통해 사회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사회주의자가 아닌 지방 의원에게 투표하는 것을 허락했다.[33]비오 10세는 이탈리아 가톨릭 신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 Non Expedit를 부분적으로 해제했지만, 이탈리아 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세속 정부에 대한 레오 13세의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뒤집고 라파엘 메리 델 발을 국무원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가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방문했을 때, 비오 10세는 여전히 이탈리아의 교황령 병합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 대통령의 방문을 꾸짖으며 그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이는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로 이어졌고, 1905년 교회와 국가 분리법이 제정되어 프랑스 내에서 교회가 정부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 교황은 회칙 ''Vehementer Nos'' 와 ''Gravissimo officii munere''에서 이 법을 비난하고, 제3공화국을 인정한 두 명의 프랑스 주교를 해임했다. 결국 프랑스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바티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교황은 포르투갈, 아일랜드, 폴란드, 에티오피아와 같은 가톨릭 인구가 많은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이탈리아와의 국제 관계에 대한 그의 반대는 이들 국가의 세속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와 같은 몇몇 다른 국가들도 분노하게 했다.
5. 5. 3. 러시아와 폴란드
비오 10세 재위 기간 동안 러시아 내 폴란드 가톨릭 신자들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1903년 2월 22일 가톨릭 교회에 종교적 자유를 약속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1905년에는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는 헌법을 공포했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를 위협으로 여겨 엄격한 입장을 고수했다. 교황의 칙서는 러시아에서 허용되지 않았고, 바티칸과의 접촉은 불법이었다.5. 5. 4. 한국
1911년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는 조선의 가톨릭 신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관할 구역이 넓어지자 대목구를 분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교황청에 건의하였다. 비오 10세는 뮈텔 주교의 요청을 허락하여 조선 대목구를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할하였다. 대구 대목구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포괄하였으며, 초대 대목구장으로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가 임명되었다.[15]5. 5. 5. 일본
비오 10세는 일본 가톨릭 교회에도 배려하여, 막부 말기 이래 파리 외방 전교회만 들어와 있던 일본에 다른 수도회의 선교를 허가했다. 또한 예수회에 일본에서의 활동을 의뢰했는데, 이는 이후 조치 대학 창립으로 이어졌다.6. 선종
비오 10세는 평소 애연가였으며, 1913년 심근경색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914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급격히 쇠약해졌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따른 충격과 우울증을 겪다가 1914년 8월 20일 심근경색으로 선종하였다.[44][45] 사망 직전, 비오 10세는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는 그분의 무궁한 선하심으로 유럽이 겪고 있는 공포를 저에게 면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6]
비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의 소박한 무덤에 안장되었다.[47] 그는 생전에 교황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관행을 금지했기 때문에, 그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지 않았다. 비오 10세의 무덤은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 근처에 있다.
7. 시성
비오 10세는 1954년에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선포되었지만, 선종 직후부터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았다.[74] 1916년 9월 24일, 몬시뇰 레오는 니코테라와 트로페아의 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오 10세를 '위대한 성인이자 위대한 교황'이라고 칭송했다.[74] 수많은 순례자들이 비오 10세의 무덤을 참배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소를 방문했으며, 수용 인원이 초과되자 바티칸 당국은 성 베드로 대성전 바닥에 교황 비오 10세의 이름(Pius Papa X)을 새긴 작은 철제 십자가를 설치하여 순례자들이 경의를 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74]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비오 10세에 대한 신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1923년 2월 14일, 비오 10세의 교황 즉위 20주년을 기념하여 시성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1939년 8월 19일, 교황 비오 12세는 카스텔간돌포에서 비오 10세에게 헌사를 바쳤다. 1943년 1월 12일, 비오 10세는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것이 인정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1944년 5월 19일, 시성 조사를 위해 비오 10세의 유해가 담긴 관이 지하 묘소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십자가형 경당으로 옮겨졌다. 검시관들은 비오 10세의 시신이 방부처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지났음에도 매우 잘 보존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비오 12세는 비오 10세를 가경자로 선포하고, 유해는 45일간 일반에 공개되었다.
교황청 시성성은 비오 10세의 전구로 이루어진 두 가지 기적 사례를 공식 인가했다. 첫 번째는 골암을 앓던 마리 프랑수아 데페라스 수녀가 1928년 12월 7일 9일 기도를 바치던 중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이고, 두 번째는 암에 걸린 베네데타 데 마리아 수녀가 1938년부터 비오 10세의 유품을 지니고 9일 기도를 바친 후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이다.
1951년 2월 11일, 비오 12세는 두 사례를 비오 10세의 전구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으로 공식 인준하고, 3월 4일 비오 10세를 복자로 선포했다. 1951년 6월 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23명의 추기경, 수백 명의 주교 및 대주교, 10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오 10세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비오 12세는 강론에서 비오 10세를 '성체성사의 교황'이라 칭하며 어린이 신자들을 위한 예식 확장을 그의 공로로 돌렸다.
시복식 후 1952년 1월 17일, 비오 10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비오 10세에게 봉헌된 제대에 안치되었다. 유해는 유리와 청동 관 안에 안치되어 신자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954년 5월 29일, 시성성에서 비오 10세의 전구로 이루어진 두 가지 기적 사례를 추가 승인하자, 비오 12세는 비오 10세를 시성했다. 첫 번째 기적은 폐농양에 걸렸던 변호사 프란체스코 벨사미가 비오 10세의 사진을 가슴에 얹자 기적적으로 치유된 사례이고, 두 번째는 신경계 바이러스에 감염된 마리아 루도비카 스코르치아 수녀가 9일 기도를 바친 후 완전히 치유된 사례이다.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가 주재하는 비오 10세의 시성식에는 전 세계에서 80만 명의 신자들이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아왔다. 비오 10세는 1712년 비오 5세 이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 되었다.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서 교황 비오 10세를 기념하는 축일은 8월 21일이며, 전통 전례력에서는 9월 3일에 기념한다.
비오 10세는 총 131명을 시복했고, 4명을 시성했다. 시복된 사람으로는 마리-제느비에브 뫼니에, 로즈-크레티앙 드 라 뇌빌, 발렌틴 데 베리오초아, 클레르 드 낭트, 즈디슬라바 베르카, 요한 루이스브루크, 안드레아 남 퉁, 아가타 린, 아녜스 데, 잔 다르크, 요한 에우데스 등이 있다. 시성한 사람들은 알렉산데르 사울리, 제라르 마젤라,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호세프 오리올이다.
1908년, 비오 10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설교가들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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