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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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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왕조 출신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딸이다. 414년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어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 역할을 했으며, 정절 서약을 지키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 정책에 깊이 관여하여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교리를 비판하고,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정통 교리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으나 정절을 유지했고, 453년 사망 후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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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케리아
기본 정보
이름풀케리아
로마자 표기법Pulcheria
칭호아우구스타
통치
재위450년 8월 25일 – 453년 7월
배우자마르키아누스
왕조테오도시우스
부친아르카디우스
모친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출생 및 사망
출생일398년 1월 19일 또는 399년 1월 19일
출생지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일453년 7월 (53–55세)
사망지추정 콘스탄티노폴리스
기타
종교니케아 기독교
풀케리아의 솔리두스

2. 초기 생애

풀케리아의 부모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이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아르카디우스 통치 시기, 황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3] 성 소피아 대성당 밖에 세워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이 주된 갈등 원인이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를 비난했고, 에우독시아는 그를 폐위시켰다. 훗날 풀케리아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유물을 교회에 안치했다.[5]

에우독시아는 404년, 아르카디우스는 408년에 사망하여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가 황제가 되었다. 근위대 대장 안테미우스가 초기 섭정을 맡았고, 황궁 관리 안티오쿠스가 테오도시우스의 교육을 담당했으나, 성년이 된 황제는 그를 해임했다.

2. 1. 가족 관계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왕조 출신으로, 로마 제국 동방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통치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이리아 에우독시아였다. 풀케리아의 언니 플라킬라는 397년에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남동생과 여동생으로는 아르카디아(400년생), 훗날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2세(401년생), 마리나(401년생)가 있었다.[2]

2. 2. 부모의 통치와 갈등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왕조 출신으로, 후기 로마 제국의 동방 지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통치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황후 아이리아 에우독시아였다. 풀케리아의 언니 플라킬라(Flaccilla)는 397년에 태어났지만 아마도 어린 나이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녀의 남동생과 여동생으로는 아르카디아(400년생), 미래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1년생), 그리고 마리나(Marina, 401년생)가 있었다.[2]

아르카디우스의 통치 기간에는 그의 아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3] 소조메네스(Sozomen)는 그 경쟁의 대부분이 대성당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대성당 외부에 세워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에 기반을 두었다고 전한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를 비난했다. "황후의 은상은 … 반암 기둥 위에 놓였고, 그 행사는 큰 환호와 춤, 게임 및 기타 대중적 환희의 표현으로 축하되었다… 요한은 이러한 행위가 교회에 불명예를 반영한다고 선언했다."[4] 소조메네스에 따르면 크리소스토모스는 그의 설교에서 황후의 과장된 스타일을 비난했고, 이는 그녀를 격분시켜 크리소스토모스의 즉각적인 폐위로 이어졌다. 후에 풀케리아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유물을 돌려주고 그의 경건한 삶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회에 안치했다.[5]

에우독시아는 404년에, 아르카디우스는 408년에 사망했다. 그들은 402년부터 아버지의 명목상의 공동 황제였고 이제는 단독 황제가 된, 당시 7세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를 포함한 네 명의 어린 자녀를 남겼다. 근위대 대장 안테미우스가 처음에는 정부 업무를 이끌었다. 황궁 관리 안티오쿠스가 테오도시우스의 교육을 담당했지만, 황제는 성년기에 이르자 그를 해임했다.

3. 아우구스타

414년 7월 4일, 풀케리아는 정녀 서약을 하고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풀케리아는 자신의 형제이자 그의 정부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6] 비잔티움 상원에는 다른 아우구스티들의 흉상과 함께 그녀의 흉상이 세워졌다.[7] 풀케리아는 ''데오 코로나타 (deo coronata)''였으며 ''바실레이아 (basileia)''를 소유했다.[8]

3. 1. 정절 서약과 정치적 의미

414년 7월 4일, 풀케리아는 정녀 서약을 하고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다. 그때부터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풀케리아는 자신의 형제이자 그의 정부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6]

풀케리아는 궁정에서 매우 존경받았다. 비잔티움 상원에는 다른 아우구스티들의 흉상과 함께 그녀의 흉상이 세워졌다.[7] 풀케리아는 ''데오 코로나타 (deo coronata)''였으며 ''바실레이아 (basileia)''를 소유했다.[8]

풀케리아가 414년에 정녀 서약을 했을 때, 그녀의 자매들도 그녀의 본보기를 따랐다. 이것은 잠재적인 구혼자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소조메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신에게 바쳤고,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스캔들과 음모의 기회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남자도 자신의 궁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결심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신, 사제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을 증인으로 삼았습니다…[9]

풀케리아가 결혼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다른 동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잠재적인 남편에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풀케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의 남편들은 어린 동생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10]

점점 더 황궁은 이전 정권보다 수도원과 같은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소조메네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풀케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의 경건한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들은 모두 같은 생활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집에 참석하는 데 부지런했고,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자비를 보였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밤낮으로 함께 신을 찬양하며 보냈습니다.[11]

황궁 내 의식에는 성경 구절을 찬송하고 암송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2] 자매들은 대부분의 황실 여성들이 착용했던 사치스러운 보석과 의복을 버렸다.

3. 2. 궁정 생활과 종교적 실천

414년 7월 4일, 풀케리아는 정녀 서약을 하고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다. 그때부터 테오도시우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풀케리아는 자신의 형제이자 그의 정부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6]

풀케리아는 궁정에서 매우 존경받았다. 비잔티움 상원에는 다른 아우구스티들의 흉상과 함께 그녀의 흉상이 세워졌다.[7] 풀케리아는 ''데오 코로나타 (deo coronata)''였으며 ''바실레이아 (basileia)''를 소유했다.[8]

414년 풀케리아가 정녀 서약을 했을 때, 그녀의 자매들도 그녀의 본보기를 따랐다. 이것은 잠재적인 구혼자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소조메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신에게 바쳤고,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스캔들과 음모의 기회를 피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남자도 자신의 궁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결심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신, 사제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백성을 증인으로 삼았습니다…[9]

풀케리아가 결혼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다른 동기로는 잠재적인 남편에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라는 점과, 풀케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의 남편들이 어린 동생에게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 있다.[10]

점점 더 황궁은 이전 정권보다 수도원과 같은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소조메네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풀케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의 경건한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들은 모두 같은 생활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집에 참석하는 데 부지런했고, 낯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자비를 보였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밤낮으로 함께 신을 찬양하며 보냈습니다.[11]

황궁 내 의식에는 성경 구절을 찬송하고 암송하며,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이 포함되었다.[12] 자매들은 대부분의 황실 여성들이 착용했던 사치스러운 보석과 의복을 버렸다.

3. 3. 테오도시우스 2세 교육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성년이 되었을 때 성공적인 황제가 되는 데 필요한 많은 지시를 내렸다.[13] 소조메누스에 따르면,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예절, 승마, 의복 착용법을 가르쳤다.[14] 또한 황실 직무와 관습을 훈련시켰으며, 그의 미성년 시절에는 황제의 칙령을 처리하기도 했다.[16] 그러나 성인이 된 테오도시우스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무기력한 지도력을 보였다는 비난을 받았다.[15]

4. 교회와 유대교 정책

풀케리아는 레오 1세 교황에게서 큰 경건함과 이단을 경멸했다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17] 교회 문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풀케리아는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테오도시우스 2세와 함께 수도에서의 유대교 예배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회당 건설을 금지하고 기존 회당을 파괴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후 유대인 집단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8][19]

풀케리아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교회와 빈민을 위한 건물을 많이 세웠으며[20], 그녀가 진행한 건축 사업이 광범위해서 한 지역 전체가 '풀케리아나이(Pulcherianai)'로 명명될 정도였다.[21] 또한 해임된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플라비아누스와 같은 주교들의 유해를 교회의 유물로 반환하는 등 기독교 교회에 크게 기여했다.[22]

4. 1. 교회 정책

레오 1세 교황은 편지에서 풀케리아의 큰 경건함과 이단에 대한 경멸을 칭찬했다.[17]

풀케리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수도에서 유대교 예배에 대한 법률 제정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 이전에는 회당이 사유 재산으로 간주되어 제국 정부에 의해 보호받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회당 건설을 금지하고 기존 회당을 파괴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후 유대인 집단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8][19]

풀케리아는 자선 사업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많은 교회와 빈민을 위한 건물을 세웠다.[20] 콘스탄티노플에서 풀케리아가 진행한 건축 사업은 매우 광범위해서 한 지역 전체가 '풀케리아나이(Pulcherianai)'로 명명될 정도였다.[21] 도시에 새로운 교회와 지역을 기여한 것 외에도 풀케리아는 해임된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플라비아누스와 같이 다른 주교들의 유해를 교회의 유물로 반환함으로써 기독교 교회에 크게 기여했다.[22]

4. 2. 반유대주의 정책

풀케리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반유대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수도에서 유대교 예배에 대한 법률 제정에 기여했을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 이전에는 회당이 사유 재산으로 간주되어 제국 정부에 의해 보호받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회당 건설을 금지하고 기존 회당을 파괴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후 유대인 집단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8][19]

4. 3. 자선 활동

풀케리아는 자선 사업으로 유명했다.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많은 교회와 빈민을 위한 건물을 세웠다.[20] 콘스탄티노플에서 풀케리아가 진행한 건축 사업은 매우 광범위해서 한 지역 전체가 '풀케리아나이(Pulcherianai)'로 명명되었다.[21] 도시에 새로운 교회와 지역을 기여한 것 외에도 해임된 주교들을 복직시키고 플라비아누스와 같이 다른 주교들의 유해를 교회의 유물로 반환함으로써 기독교 교회에 크게 기여했다.[22]

5. 페르시아와의 전쟁

풀케리아 시대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있었다. 전쟁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여동생의 정절 서약을 통해 승리할 수 있었다고 선전했다. 그는 풀케리아가 신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서약했기에, 신의 도움으로 로마 군대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24]

5. 1. 전쟁 배경

풀케리아가 아우구스타로 있던 시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지속적인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페르시아 왕 야즈데게르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제단을 파괴한 기독교 주교를 처형하자, 황궁에서는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23] 테오도시우스는 소크라테스가 "기독교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군대를 전투에 투입했다.[23] 전쟁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비문에는 테오도시우스가 여동생들의 정절 서약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선포되어 있다.[24] 따라서 테오도시우스는 여동생의 정절을 전쟁 선전의 도구로 삼았고, 그녀가 오직 신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서약했기에, 신의 손길이 로마 군대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했다.

5. 2. 풀케리아의 역할

풀케리아가 아우구스타로 있던 시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지속적인 갈등으로도 특징지어진다. 페르시아 왕 야즈데게르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제단을 파괴한 기독교 주교를 처형하자, 황궁에서는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23] 테오도시우스는 소크라테스가 "기독교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군대를 전투에 투입했다.[23] 전쟁은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남아 있는 비문에는 테오도시우스가 여동생들의 정절 서약을 통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선포되어 있다.[24] 따라서 테오도시우스는 여동생의 정절을 전쟁 선전의 도구로 삼았고, 그녀가 오직 신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서약했기에, 신의 손길이 로마 군대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했다.

6.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와의 관계

풀케리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인 아이리아 에우도키아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두 여인은 서로 다른 배경과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년에 걸쳐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25] 이들의 경쟁 관계는 에우도키아가 예루살렘에서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절정에 달했을 수 있다.[30] 그러나 자료에는 이 시기에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

6. 1. 경쟁의 원인

아이리아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과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년에 걸쳐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25] 에우도키아는 원래 아테나이스라는 이름으로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사학 교수의 딸로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녀는 "금화 백 개"만 남기고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25] 절망한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숙모를 찾아갔다. 421년 6월 7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테나이스와 결혼했고, 그녀의 이름은 에우도키아로 바뀌었다. 요한 말라라스가 주장한 것처럼 풀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오빠에게 에우도키아를 추천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6] 일부 학자들은 두 사람의 경쟁 관계가 에우도키아가 궁정에서 풀케리아의 권력을 질투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7]

수 세기 후, 테오파네스 고백자는 에우도키아와 최고 장관인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테오도시우스를 설득하여 여동생의 영향력에 덜 의존하고 새 아내의 영향력에 더 의존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440년대 후반 풀케리아는 황궁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 11.27km 떨어진 항구 도시인 "헤브도몬"에 거주하게 되었다.[28] 그러나 에우도키아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녀의 출발 시기는 테오파네스의 기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29]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의 경쟁 관계는 에우도키아가 예루살렘에서 수도원의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절정에 달했을 수 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에는 이 시기에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

6. 2. 크리사피우스의 영향

풀케리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인 아이리아 에우도키아 사이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두 여인은 서로 다른 배경과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수년에 걸쳐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25] 에우도키아는 원래 아테나이스라는 이름으로 아테네에서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사학 교수의 딸로 태어났다. 후대의 자료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녀는 "금화 백 개"만 남기고 거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25] 그녀는 절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숙모를 찾아갔다. 421년 6월 7일, 테오도시우스는 아테나이스와 결혼했고, 그녀의 이름은 에우도키아로 바뀌었다. 요한 말라라스가 주장한 것처럼 풀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오빠에게 에우도키아를 추천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6] 일부 학자들은 두 여인 사이의 라이벌 관계가 에우도키아가 궁정에서 풀케리아의 권력을 질투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7]

수 세기 후, 테오파네스 고백자는 에우도키아와 최고 장관인 환관 크리사피우스가 테오도시우스를 설득하여 여동생의 영향력에 덜 의존하고 새 아내의 영향력에 더 의존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440년대 후반 풀케리아는 황궁을 떠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 11.27km 떨어진 항구 도시인 헤브도몬에 거주하게 되었다.[28] 그러나 에우도키아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녀의 출발 시기는 테오파네스의 기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29] 에우도키아와 풀케리아의 라이벌 관계는 에우도키아가 예루살렘에서 수도원의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절정에 달했을 수 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에는 이 시기에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

7.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풀케리아는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아스파르의 측근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신분이 낮았지만, 풀케리아와의 결혼 조건으로 정절 서약을 존중하고 준수했다. 교회는 이 결혼을 옹호했으며, 결혼 후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크리사피우스를 처형했다.[36]

7. 1. 결혼 배경

테오도시우스 2세가 450년에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낙마하여 척추 부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2] 섭정 기간 동안 정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 사망 후 풀케리아가 약 한 달 동안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 기간은 주로 테오도시우스의 국장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1] 사망한 황제에게는 남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풀케리아는 자신과 결혼함으로써 외부인에게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풀케리아는 정식 결혼 후에도 정절 서약을 지켰다.[32] 풀케리아는 아스파르 장군의 측근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는데, 이는 아스파르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3] 마르키아누스는 이전 황제들에 비해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고대 귀족이나 황실 혈통이 없는 변변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었고, 따라서 '케데이아'(kedeia)의 유대는 곧 '바실레이아'(basileia)에 대한 자격을 부여했습니다."[31] 마르키아누스가 풀케리아의 정절 서약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이 결혼의 한 가지 조건이었고, 그는 이를 지켰다.[34] 이 결혼이 로마 국가에 부끄러운 일로 비춰지지 않도록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이 결합을 후원했으므로 충격이나 부당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35] 결혼 후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크리사피우스를 처형했다.[36]

7. 2. 마르키아누스의 배경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는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이틀 후 사망했다.[2]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 풀케리아는 한 달 가량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은 주로 테오도시우스의 국장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1] 사망한 황제에게는 살아남은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풀케리아는 그와 결혼함으로써 외부인에게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식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절 서약을 지켰다.[32] 그녀는 집정관이자 장군 아스파르의 측근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아스파르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3] 마르키아누스는 이전 황제들에 비해 낮은 신분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고대 귀족이나 황실 혈통이 없는 변변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었고, 따라서 '케데이아'(kedeia)의 유대는 곧 '바실레이아'(basileia)에 대한 자격을 부여했습니다."[31] 결혼의 한 가지 조건은 마르키아누스가 풀케리아의 정절 서약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했다.[34] 결혼이 로마 국가에 부끄러운 일로 비춰지지 않도록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이 결합을 후원했으므로 충격이나 부당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35]

7. 3. 정절 서약 유지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말을 타고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쳐 이틀 후 사망했다.[2] 섭정 기간 동안 정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 사망 후 풀케리아가 약 한 달 동안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 기간은 주로 테오도시우스의 국장을 준비하는 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1] 사망한 황제에게는 살아남은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풀케리아는 그와 결혼함으로써 외부인에게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식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절 서약을 지켰다.[32] 풀케리아는 집정관이자 장군 아스파르의 측근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아스파르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3] 마르키아누스의 출신은 이전 황제들에 비해 낮은 신분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고대 귀족이나 황실 혈통이 없는 변변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인이었고, 따라서 '케데이아'(kedeia)의 유대는 곧 '바실레이아'(basileia)에 대한 자격을 부여했습니다."[31] 결혼의 한 가지 조건은 마르키아누스가 풀케리아의 정절 서약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렇게 했다.[34] 결혼이 로마 국가에 부끄러운 일로 비춰지지 않도록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이 결합을 후원했으므로 충격이나 부당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선포했다.[35] 결혼 후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크리사피우스를 죽였다.[36]

8. 교회 정책

풀케리아는 에페소 공의회, 제2차 에페소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 주요 공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교회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네스토리우스성모 마리아 교리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것에 반대하며, 키릴로스레오 1세를 지지하여 네스토리우스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키릴로스레오 1세의 교리를 종합하여 테오토코스 교리를 확립하고,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강도 공의회'로 규탄하며 결과를 번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풀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파나기아 호데게트리아 수도원, 블라케르나이 성모 마리아 교회, 칼코프라테이아 등 세 개의 교회를 건립했다.[44]

8. 1. 에페소 공의회 (431년)

43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재위 시절 열린 에페소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키릴로스(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두 주교의 대립을 둘러싸고 열렸다.[37] 이 분쟁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38]

네스토리우스는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Theotokos, 신의 어머니) 교리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키릴로스의 동맹들로 가득 찬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을 비난했다.[40] 이전 공의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키릴로스를 규탄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처음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지만 결국 키릴로스를 지지했다. "성모 마리아"라는 칭호는 정통으로 선포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파면되어 안티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41]

8. 1. 1. 네스토리우스와의 갈등

에페소 공의회는 43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재위 시절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키릴로스(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두 주교의 대립을 둘러싸고 열렸다.[37] 이 분쟁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38]

네스토리우스는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Theotokos, 신의 어머니) 교리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주장했다. 이는 처녀 황후였던 풀케리아의 종교적 신념과 상충되었고, 그들 사이에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네스토리우스는 풀케리아에 대한 중상모략을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또한 풀케리아의 의사에 반하여 제단에서 풀케리아의 이미지와 제단보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39] 그러나 풀케리아와 그녀의 동맹들, 특히 도릴라이움의 에우세비우스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여 맞섰다. 한편 키릴로스는 이미 네스토리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황실에 "성모 마리아" 교리가 정확하다고 서한을 보냈다. 테오도시우스와 그의 조언자들은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여 네스토리우스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키릴로스의 동맹들로 가득 찬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을 비난했다.[40] 이전 공의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키릴로스를 규탄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처음에 중간 지점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키릴로스를 지지했다. "성모 마리아"라는 칭호는 정통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또한 네스토리우스를 파면하고 안티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따라서 풀케리아의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공격은 성공적이었지만, 교회 논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41]

8. 1. 2. 키릴로스의 역할

에페소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키릴로스(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두 주교의 대립을 둘러싸고 열렸다.[37] 이 분쟁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되었다.[38]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황실에 "성모 마리아"(Theotokos, 신의 어머니) 교리가 정확하다고 서한을 보냈다. 테오도시우스와 그의 조언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고자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키릴로스의 동맹들로 가득 찬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입장을 비난했다.[40] 이전 공의회에 참여할 수 없었던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키릴로스를 규탄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는 처음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지만 결국 키릴로스를 지지했다. "성모 마리아"라는 칭호는 정통으로 선포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파면되어 안티오크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41]

8. 2. 에페소 공의회 (449년)

449년 그리스도론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에페소스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 레오 1세는 풀케리아의 교리 주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토마 즉, 장문의 편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플라비아누스 대주교에게 보냈다. 그 안에서 그는 두 가지 본성을 주장했지만, 에우티케스를 두 본성을 부정했다고 정죄한 것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때 디오스코루스(키릴알렉산드리아 후임)의 당파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고, 레오는 두 번째 공의회를 요청하여 에페소스의 그 공의회를 ''강도 공의회''라고 불렀다.[42]

이 공의회에서 플라비아누스는 구타당해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나중에 성인과 순교자로 선포되었다.[43]

8. 3. 칼케돈 공의회 (451년)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에우티케스의 교리를 정죄하고 키릴로스레오 1세의 교리를 종합하여 테오토코스 교리를 확립했다. 또한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강도 공의회'로 규탄하며 결과를 번복했다. 아베릴 캐머런에 따르면, 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발전시켜 강생 이후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느님이자 완전한 인간임을 명확히 선언했다.[42] 이로 인해 칼케돈파와 단성론자 사이에 깊은 갈등이 발생했다.

8. 3. 1. 공의회의 결정

2년 후,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452명의 주교가 참석한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교리를 모두 정죄하고 키릴로스와 레오 1세 교황의 교리를 하나로 발전시켰으며 "테오토코스" 교리를 정교한 것으로 선포했다. 또한 에페소스 제2차 공의회의 결정을 뒤집고 '강도 공의회'로 규탄했다. 역사가 아베릴 캐머런에 따르면, 칼케돈 공의회는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니케아 신경을 발전시키고 명확히 하여, 강생 이후 그리스도가 언제나 온전히 하느님이자 온전히 인간이라고 더욱 선포했습니다."[42]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모두 공의회에서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와 "새로운 헬레나"로 칭송받았다. 이 공의회에서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한 칼케돈파와 이에 반대한 단성론자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났다.

8. 3. 2.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의 역할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2년 후 452명의 주교가 참석한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와 에우티케스의 교리를 모두 정죄하고 키릴로스와 레오 1세 교황의 교리를 하나로 발전시켰으며 "테오토코스" 교리를 정교한 것으로 선포했다. 또한 에페소스 제2차 공의회의 결정을 뒤집고 '강도 공의회'로 규탄했다. 역사가 아베릴 캐머런에 따르면, 칼케돈 공의회는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니케아 신경을 발전시키고 명확히 하여, 강생 이후 그리스도가 언제나 온전히 하느님이자 온전히 인간이라고 더욱 선포했습니다."[42] 풀케리아와 마르키아누스는 공의회에서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와 "새로운 헬레나"로 칭송받았다. 이 공의회에서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한 칼케돈파와 이에 반대한 단성론자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이 생겨났다.

풀케리아는 여생을 "테오토코스"에 바쳤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세 개의 교회, 즉 파나기아 호데게트리아 수도원, 블라케르나이 성모 마리아 교회, 칼코프라테이아를 건립했다.[44]

9. 사망과 성인 추대

풀케리아는 453년에 사망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던 그녀의 죽음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45] 풀케리아는 유언을 통해 남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여 이러한 유대감을 더욱 강화했다.[45] 사후에 그녀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46]

9. 1. 사망과 유산

풀케리아는 453년에 사망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2] 그녀는 아마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던 그녀의 죽음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45]

풀케리아는 마지막 날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녀는 유언장에서 남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지시하며, 시민들과의 유대감을 더욱 강화했다.[45]

사후에 풀케리아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다.[46]

9. 2. 성인 추대

풀케리아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46]

10. 예술 작품 속 풀케리아

테오도시우스 2세와 풀케리아로 여겨지는 왕족 행렬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트리어 상아판.


풀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교회에 많은 성유물을 가져왔다. 현재 독일 트리어 대성당 보물 창고에 소장되어 있는 트리어 아드벤트 상아판(Trier Adventus Ivory)은 이러한 성유물 중 하나의 안치식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7] 그러나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48] 다른 의견으로는 이 상아판이 8세기의 교회 개조를 후원한 이레네 황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49]

10. 1. 트리어 상아판



풀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교회에 많은 성유물을 가져왔다. 현재 독일 트리어 대성당 보물 창고에 소장되어 있는 트리어 아드벤트 상아판(Trier Adventus Ivory)은 이러한 성유물 중 하나의 안치식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47] 그러나 이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48]

10. 1. 1. 해석 논란



풀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교회에 많은 성유물을 가져왔다. 현재 독일 트리어 대성당 보물 창고에 소장되어 있는 트리어 아드벤트 상아판(Trier Adventus Ivory)은 이러한 성유물 중 하나의 안치식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역사가 케네스 홀럼(Kenneth Holum)은 이 상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아판에서 테오도시우스는 독특한 의상을 입고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행렬의 일부이며 따라서 의례적 맥락의 일부에 불과하다. 마차의 움직임 방향은 오른쪽 장면, 즉 아우구스타(Augusta)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작은 여성 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 그녀가 성유물을 봉납한 곳이다."[47]

그러나 이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48] 다른 의견으로는 이 상아판이 8세기의 교회 개조를 후원한 이레네 황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49]

참조

[1] 서적 Theodosian Empresses: Women and Imperial Dominion in Late Antiqui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서적 The Prosopography of the Later Roma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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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Divine Heiress: The Virgin Mary and the Creation of Christian Constantinopl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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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Sozomen: Comprising a History of the Church from A.D. 324 to A.D. 440 Henry G. B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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