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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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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1904년부터 1918년까지 작센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다. 그는 1877년 작센 왕립군에 소위로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빠르게 진급하여 1912년 원수까지 올랐다. 1902년에는 독일 해군 보병의 명예 소속이 되었으며, 1904년 부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혁명으로 인해 퇴위했으며, 이후 슐레지엔에서 은거하다가 1932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루이제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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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작센)
기본 정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1914년)
칭호작센 국왕
통치 기간1904년 10월 15일 – 1918년 11월 13일
이전 군주게오르크
이후군주제 폐지
전체 이름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요한 루트비히 카를 구스타프 그레고르 필리프 폰 베틴
출생일1865년 5월 25일
출생지작센 왕국, 드레스덴
사망일1932년 2월 18일
사망지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 자유주, Landkreis Oels, 시빌레노르트 (현재 폴란드, 돌니실롱스크주, Szczodre)
매장지드레스덴, 카톨릭 궁정 교회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
가문
왕가베틴 가문, 알베르틴 가문
아버지게오르크
어머니마리아 아나 드 브라간사
결혼 및 자녀
배우자루이제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1891년 11월 21일 결혼, 1903년 이혼)
자녀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하인리히
공주 마리아 알릭스 카롤라
마르가레테 카롤라
마리아 알릭스 루이트폴다
안나

2. 군 경력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877년 12세의 나이로 작센 왕립군에 소위로 입대하여 왕족 신분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처음에는 작센 왕립 제1 (근위) 척탄병 연대 제100 연대에서 복무했다. 1883년 대위, 1887년 대위, 1889년 소령, 1891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892년 9월 22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격병(소총병)-연대 제108 연대를 지휘했다. 1894년 9월 20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 작센 보병 여단 제45 여단을 지휘했고, 1898년 5월 22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 작센 보병 사단 제23사단을 지휘했다. 1902년 8월 26일까지 사단을 지휘하다가 제12(제1 작센) 군단의 지휘를 맡았고, 한 달 후인 9월 24일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1904년 10월 왕위에 오를 때까지 군단을 지휘했으며, 이후 상급 대장을 거쳐 1912년 9월 9일에는 원수로 진급했다.

군사 훈련에 참가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빌헬름 2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1902년)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가 즉위한 후인 1902년 7월, 킬 방문 중에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독일 해군 보병의 명예 소속으로 임명되었다.

2. 1. 주요 보직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877년 12세의 나이로 작센 왕립군에 소위로 입대하여 왕족 신분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처음에는 작센 왕립 제1 (근위) 척탄병 연대 제100 연대에서 복무했다. 1883년 대위, 1887년 대위, 1889년 소령, 1891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892년 9월 22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격병(소총병)-연대 제108 연대를 지휘했다. 1894년 9월 20일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1 작센 보병 여단 제45 여단을 지휘했고, 1898년 5월 22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 작센 보병 사단 제23사단을 지휘했다. 1902년 8월 26일까지 사단을 지휘하다가 제12(제1 작센) 군단의 지휘를 맡았고, 한 달 후인 9월 24일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1904년 10월 왕위에 오를 때까지 군단을 지휘했으며, 이후 상급 대장을 거쳐 1912년 9월 9일에는 원수로 진급했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가 즉위한 후인 1902년 7월, 킬 방문 중에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독일 해군 보병의 명예 소속으로 임명되었다.

2. 2. 진급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1877년 12세의 나이로 작센 왕립군에 소위로 입대했다. 왕족 신분이었기에 계급이 빠르게 진급했다. 그는 처음에는 작센 왕립 제1 (근위) 척탄병 연대 제100 연대에서 복무했다. 1883년 대위, 1886년에 중위로 진급하여 제7척탄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887년 대위, 1889년 소령, 1891년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1년까지 그는 사격병(소총병)-연대 제108 연대 제1 대대장이었다. 1892년 9월 22일 대령으로 진급하여 같은 날 사격병(소총병)-연대 제108 연대를 지휘했다. 1894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1895년 5월 22일에 제23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1902년 8월 25일까지 재임했다. 1898년 5월 22일,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 작센 보병 사단 제23사단을 지휘했다. 그는 1902년 8월 26일까지 이 사단을 지휘하다가 제12(제1 작센)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사단장 퇴임 후 8월 26일에는 제12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 달 후인 9월 24일 그는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1904년 10월 왕위에 오를 때까지 군단을 지휘했다. 그의 군 경력은 사실상 왕위 계승과 함께 끝났지만, 이후 상급 대장으로, 1912년 9월 9일에는 원수로 진급했다.

그의 아버지의 즉위 이후, 그는 1902년 7월 방문 중에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독일 해군 보병의 명예 소속으로 임명되었다.

3. 작센 국왕 즉위

1904년 10월 15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부왕의 사망으로 작센 왕에 즉위했다.[19] 그는 예술과 사냥을 좋아했고, 군주로서는 경제를 촉진했으며, 다른 독일 왕실과도 격의 없이 교류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던 부왕 때문에 잃었던 작센 국민의 신뢰를 회복했다.[19] 1912년 9월 11일에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초청하여 군사 훈련을 성공시킨 공적으로 원수에 임명되었다.[19]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4. 퇴위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군주국을 지키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왕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군대를 동원하여 알트마르크트에서 노동자들이 주도한 봉기를 진압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그는 측면 문을 통해 조용히 드레스덴 성을 떠나 모리츠부르크 성으로 향했다.

구테보른에서 피신해 있는 동안, 그는 헤르만 플라이스너가 11월 10일에 작센 자유주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흘 뒤, 그는 "나는 왕위를 포기한다."라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 한 장의 종이에 퇴위 서명을 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이후 모든 작센인들에게 군주국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해제하고, 단결을 촉구하며 시민들에게 국가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 노력하라고 당부한 후, 그가 사적으로 소유한 브레슬라우 근처의 지빌레노르트 궁전으로 물러났다.

5. 퇴위 이후



퇴위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슐레지엔의 쥐빌레노르트(현재 폴란드 돌노실롱스크주 올레시니차군 시초드레)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며, 카나리아 제도, 실론섬, 브라질로 사냥을 가는 등 여생을 보냈다.

1932년 2월 18일 쥐빌레노르트 성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20]. 유해는 23일 드레스덴에 도착하여 가톨릭 궁정 교회/Katholische Hofkirche영어에 매장되었다. 관은 바이마르 공화국군이 호위했으며, 세 아들과 전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 루프레히트가 참석했다. 작센 각지에서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드레스덴에 모였다고 한다.

왕세자였던 장남 게오르크는 1923년에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작센 왕가 가문의 지위는 차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이었다.

5. 1. 은거 생활



퇴위 후에는 슐레지엔의 쥐빌레노르트(현재 폴란드의 돌노실롱스크주올레시니차군 시초드레)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며, 카나리아 제도, 실론섬, 브라질로 사냥을 가는 등 여생을 보냈다.

1932년 2월 18일에 은거지인 쥐빌레노르트 성에서 뇌졸중을 일으켜 오후 10시에 사망했다[20]. 유해는 23일에 드레스덴에 도착하여, 가톨릭 궁정 교회/Katholische Hofkirche영어에 매장되었다. 관은 바이마르 공화국군이 호위했으며, 세 아들과 전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 루프레히트가 참석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작센 각지에서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드레스덴에 모였다고 한다.

왕세자였던 장남 게오르크(1893년 - 1943년)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여 1923년에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작센 왕가 가문의 지위는 차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1893년 - 1968년)이 이었다.

5. 2. 사망



퇴위 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슐레지엔의 쥐빌레노르트(현재 폴란드 돌노실롱스크주 올레시니차군 시초드레)에서 가족과 함께 은거하며, 카나리아 제도, 실론섬, 브라질로 사냥을 가는 등 여생을 보냈다.

1932년 2월 18일 쥐빌레노르트 성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20]. 유해는 23일 드레스덴에 도착하여 가톨릭 궁정 교회에 매장되었다. 관은 바이마르 공화국군이 호위했으며, 세 아들과 전 바이에른 왕국의 왕세자 루프레히트가 참석했다. 작센 각지에서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드레스덴에 모였다고 한다.

왕세자였던 장남 게오르크는 1923년에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작센 왕가 가문의 지위는 차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이었다.

6. 가족 관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1891년 11월 21일 에서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4세의 딸 루이제와 결혼했다. 루이제는 시아버지와의 불화로 1902년 스위스로 도주했고, 1903년 이혼이 성립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와 자녀들 (1914년)


이들 부부는 슬하에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게오르크 (1893년–1943년): 예수회 사제가 된 후 1923년 왕세자 권리를 포기했다. 1943년 SS 또는 게슈타포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893년–1968년): 투른 운트 탁시스 공녀 엘리자베트 헬레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에른스트 하인리히 (1896년–1971년):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의 딸 룩셈부르크의 조피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고, 이후 버지니아 듈론과 재혼했다(모르간 결혼).
  • 마리아 알릭스 카롤라 (1898년 사산)
  • 마르가레테 카롤라 빌헬미네 (1900년–1962년): 호엔촐레른의 프리드리히 공과 결혼했다.
  • 마리아 알릭스 루이트폴다 (1901년–1990년): 호엔촐레른-엠덴의 프란츠 요제프 공과 결혼했다.
  • 안나 모니카 피아 (1903년–1976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란츠 대공과 결혼했고, 이후 레지날드 카잔지안과 재혼했다.


장남 게오르크와 차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모두 1893년에 태어났지만, 게오르크는 1월생이고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12월생이므로 쌍둥이는 아니다.

6. 1. 자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1891년 11월 21일 에서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트 4세의 딸 루이제와 결혼했다. 루이제는 시아버지와의 불화로 1902년 스위스로 도주했고, 1903년 이혼이 성립되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게오르크 (1893년–1943년): 예수회 사제가 된 후 1923년 왕세자 권리를 포기했다. 1943년 SS 또는 게슈타포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1893년–1968년): 투른 운트 탁시스 공녀 엘리자베트 헬레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에른스트 하인리히 (1896년–1971년): 룩셈부르크 대공 기욤 4세의 딸 룩셈부르크의 조피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고, 이후 버지니아 듈론과 재혼했다(모르간 결혼).
  • 마리아 알릭스 카롤라 (1898년 사산)
  • 마르가레테 카롤라 빌헬미네 (1900년–1962년): 호엔촐레른의 프리드리히 공과 결혼했다.
  • 마리아 알릭스 루이트폴다 (1901년–1990년): 호엔촐레른-엠덴의 프란츠 요제프 공과 결혼했다.
  • 안나 모니카 피아 (1903년–1976년):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란츠 대공과 결혼했고, 이후 레지날드 카잔지안과 재혼했다.


장남 게오르크와 차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모두 1893년에 태어났지만, 게오르크는 1월생이고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은 12월생이므로 쌍둥이는 아니다.

7. 성격 및 일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형식과 왕족의 사치에 얽매이지 않는 인기 있는 군주였다. 그는 평상복을 즐겨 입었고, 고지 작센 방언으로 편안하게 말했으며, 드레스덴의 술집에서 신하들과 스카트를 즐기기도 했다.[2] 그의 겸손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 제복을 입고 역 플랫폼에 서 있었을 때, 한 부인이 트렁크를 옮겨달라고 부탁하자 "부인, 저는 짐꾼이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2]
  • 1918년 독일 공화국이 선포되었을 때, 전화로 퇴위 의사를 묻자 "아, 글쎄요, 그래야 할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3]
  • 퇴위 후 기차역에서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을 때, 기차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당신들은 훌륭한 공화주의자들이오, 내가 말하겠소!"라고 외쳤다.[3]


루이제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에 대해 "잘생기고 얼굴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말했다.[21] 왕세자 시절에는 "종교적,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솔직한 그는 모범적인 섭정이었으며,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왕족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때문에 그는 높은 인기를 모았다"고 평가받았다.[22]

그는 등산을 즐겨 그로스글로크너 산이나 알프스 산맥의 산들을 등산했다.[23]

8. 훈장

작센 국왕의 문장

  • 작센 왕국:[4]
  • * 루 왕관 기사(1877)[5]; 대수장 (1904년 10월 15일)
  • * 성 헨리 군사 훈장 기사 (1914년 10월 21일)[6]
  • * 알베르트 훈장 대수장
  • * 작센 민간 훈장 대수장
  • * 작센 근속 훈장 1등급 (25년 근속)
  • 바덴:[7]
  • * 충절 기사 (1884)
  • * 베르톨트 1세 훈장 기사 (1884)
  • 바이에른 왕국:
  • * 성 후베르투스 기사 (1886)[8]
  • *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 대십자
  • 에르네스틴 공국: 작센-에르네스틴 가문 훈장 대십자 (1886)[9]
  • 헤센 대공국: 루트비히 훈장 대십자 (1893년 5월 13일)[10]
  • 메클렌부르크: 벤디쉬 왕관 대십자, 금관 포함[4]
  • 올덴부르크: 페터 프리드리히 루이 공작 훈장 대십자, 훈장 띠 포함[4]
  • 프로이센:
  • * 검은 독수리 기사 (1882년 9월 19일)[11]; 훈장 띠 포함
  • * 푸르 르 메리트 (군사) (1916년 12월 29일)[6]
  • * 철십자 훈장 (1914), 1등 및 2등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백색 매 대십자 (1886)[12]
  • 샤움부르크-리페: 샤움부르크-리페 가문 훈장 명예 십자, 1등급[4]
  • 뷔르템베르크: 뷔르템베르크 왕관 대십자 (1894)[13]
  • 오스트리아-헝가리:[14]
  • * 헝가리 성 슈테판 왕립 훈장 대십자 (1886)
  • * 금양모 기사 (1889)
  • *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대십자 (1917)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대 띠[4]
  • 불가리아 왕국: 성 키릴과 메토디우스 기사, 훈장 띠 포함[15]
  • 그리스: 구세주 대십자[4]
  • 몰타 기사단: 명예와 헌신의 발리프 대십자[15]
  • 오스만 제국: 오스마니예 훈장, 1등급[4]
  • 포르투갈 왕국:[4]
  • * 두 개의 훈장 띠 대십자
  • * 탑과 칼 대십자
  • 러시아 제국:[4]
  • * 성 안드레 기사
  • * 성 알렉산더 넵스키 기사
  • 스웨덴: 세라핌 기사 (1910년 3월 12일)[16]
  • 샴: 차크리 왕가 기사 (1897년 8월 24일)[17]
  • 스페인 왕국: 카를로스 3세 대십자, 훈장 띠 포함 (1907년 3월 18일)[18]
  • 토스카나 대공 가문: 성 요셉 대십자[4]

9. 가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의 게오르크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아나 인판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작센의 요한과 바이에른의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2세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참조

[1] 뉴스 Latest intelligence - the German Emperor and Saxony The Times 1902-07-05
[2] 간행물 In Saxony http://www.time.com/[...] 2008-08-09
[3] 간행물 Milestones, Feb. 29, 1932 http://www.time.com/[...] 2010-05-02
[4] 서적 Rangliste de Königlich Preußischen Armee https://babel.hathit[...] Ernst Siegfried Mittler & Sohn
[5] 문서 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78)
[6] 웹사이트 Friedrich August III. Johann Ludwig Karl Gustav König von Sachsen http://prussianmachi[...] 2020-08-05
[7]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8]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für den Königreich Bayern (1906) https://archive.org/[...]
[9] 문서 Staatshandbücher für das Herzogtum Sachsen-Coburg und Gotha https://zs.thulb.uni[...]
[10] 서적 Großherzoglich Hessische Ordensliste Staatsverlag
[11] 서적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https://babel.hathit[...]
[12] 문서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https://zs.thulb.uni[...]
[13]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https://archive.org/[...]
[14]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2019-11-02
[15] 서적 Almanach de Gotha https://archive.org/[...] Justus Perthes
[16] 서적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18-01-06
[17] 학술지 พระราชทานเครื่องราชอิสริยาภรณ์ ที่ประเทศยุโรป http://www.ratchakit[...] 2019-05-08
[18] 서적 Guía Oficial de España 2020-07-12
[19] 서적 Die deutschen Generale sowie Kriegsministerien und Generalstäbe von 1871 bis 1914.
[20] 서적 Die Wettiner.
[21] 서적 Mein Leben
[22] 서적 Friedrich August III. Sachsens volkstümlichster König. Ein Bild seines Lebens und seiner Zeit.
[23] 문서 Allerlei. König Friedrich August von Sachsen Mitglied der S. Vill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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