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894년)
1. 개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94년 ~ 1979년)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에서 활동했다. 1910년 사회주의 노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독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동베를린 시장을 역임하고 국가평의회 부의장, 의장 권한대행을 지냈으며, 동독의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92년 독일 재통일 이후 동베를린 명예 시민 자격은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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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유니오어 |
|---|---|
| 원어 이름 | Friedrich Ebert junior독일어 |
| 출생일 | 1894년 9월 12일 |
| 출생지 | 브레멘, 자유 한자 도시 브레멘, 독일 제국 (현재의 독일) |
| 사망일 | 1979년 12월 4일 |
| 사망지 | 동베를린, 동독 |
| 안장지 | 프리드리히스펠데 중앙 묘지, 베를린, 독일 |
| 국적 | 동독 |
| 직업 | 정치인 인쇄공 언론인 |
| 아버지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 어머니 | 루이제 에베르트 |
| 자녀 | 프리드리히 3세 게오르크 |
| 소속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SPD)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SED) |
|---|---|
| 군 복무 | 독일 제국군 (1914–1918) 국방군 (1939–1940) |
| 국가평의회 의장 권한대행 | 시작: 1973년 8월 1일 종료: 1973년 10월 3일 |
|---|---|
| 국가평의회 의장 권한대행 전임 | 발터 울브리히트 |
| 국가평의회 의장 권한대행 후임 | 빌리 슈토프 |
| 인민의회 부의장 | 시작: 1971년 6월 종료: 1979년 12월 4일 |
| 동독 인민의회 부의장 전임 | 헤르만 마턴 |
| 동독 인민의회 부의장 후임 | 게랄트 괴팅 |
|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서기 | 시작: 1971년 6월 19일 종료: 1979년 12월 4일 |
|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서기 전임 | 게르하르트 그뤼네베르크 |
|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서기 후임 | 파울 페르너 |
| 동베를린 시장 | 시작: 1948년 11월 30일 종료: 1967년 7월 5일 |
| 동베를린 시장 전임 | 루이제 슈뢰더 |
| 동베를린 시장 후임 | 헤르베르트 페흐너 |
| 인민의회 의원 | 시작: 1948년 3월 18일 종료: 1979년 12월 4일 |
|---|---|
| 인민의회 의원 전임 | 선거구 신설 |
| 인민의회 의원 후임 | 귄터 스크리페크 |
| 국회 의원, 포츠담 I 선거구 | 시작: 1928년 6월 13일 종료: 1933년 6월 22일 |
| 국회 의원 전임 | 다수 의원 선거구 |
| 국회 의원 후임 | 선거구 폐지 |
| 국가평의회 부의장 | 1971–1979 |
|---|---|
| 국가평의회 의원 | 1960–1979 |
| 임시 주 의회 의원 | 1949–1950 |
| 브란덴부르크 주 의회 의원 | 1946–1950 |
| 프로이센 주 의회 의원 | 1933 |
|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 의회 의원 | 1927–1933 |
| 충성 | |
|---|---|
| 군 종류 | 독일 제국군 국방군 |
| 복무 기간 | 1914–1918 1939–1940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동독의 국가원수 -
에곤 크렌츠
에곤 크렌츠는 동독 정치인으로, 1989년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에 올라 짧은 기간 집권하며 베를린 장벽 붕괴를 겪고 정권 붕괴 후 사임했으며, 현재는 은퇴했으나 과거 동독 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
동독의 국가원수 -
에리히 호네커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의 공산당 지도자이자 국가 원수로,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으로서 동독을 통치하며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을 자행했고, 베를린 장벽 건설과 탈출자 사살 명령에 대한 책임으로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 -
빌리 브란트
빌리 브란트는 서독의 사회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총리 재임 시절 동방정책을 통해 독일의 분단 극복에 기여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기욤 사건으로 사퇴한 후에도 독일 재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고 사회복지 정책을 통해 서독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는 독일의 정치인이자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총리실장, 외무장관, 부총리를 거쳐 2017년부터 독일 제12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으며, 동방 정책 추진과 민스크 협정 체결에 기여했으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
1894년 출생 -
전영택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개신교 목사인 전영택은 1919년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고, 단편소설 〈화수분〉, 〈소〉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개신교 관련 간행물 발행, 중앙신학교 및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한국문인협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
1894년 출생 -
김형직
김형직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김일성의 아버지로, 조선국민회에 참여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북한에서는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로 추앙받지만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2. 생애
1894년 브레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SPD) 정치가이자 훗날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인쇄소에서 도제로 일했으며, 1910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인 사회주의 노동청년단에 가입했다. 1913년 SPD에 입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 독일군에 징집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신문사에서 근무했고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불법 정치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징역 8개월을 복역했다. 1939년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고, 1940년 출판청에서 근무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종전 후, 소련군 점령 하에 있던 브란덴부르크주에서 SPD 지구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6년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 활동하던 SPD와 독일 공산당이 소련의 압력으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합당되면서, SED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1월 30일부터 1967년 7월 5일까지 동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다.
1949년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성립과 함께 인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에 SED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국가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1년 국가평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73년 8월 1일 발터 울브리히트 국가평의회 의장 사망 후, 1973년 10월 3일 빌리 슈토프가 새 의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국가평의회 의장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1979년 동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카를 마르크스 훈장, 조국 공로 훈장, 인민 우정 훈장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 시장 퇴임과 함께 동베를린 명예 시민으로 위촉되었지만, 독일의 재통일 이후인 1992년 취소되었다.
2.1. 초기 생애 (1894-1933)
1894년 브레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SPD) 정치가이자 훗날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인쇄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했으며, 1910년 독일 사회민주당의 청년 조직인 사회주의 노동청년단에 가입했다. 1913년 SPD에 입당했다.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의 형제 두 명은 전사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SPD 계열 신문사에서 근무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포어베르츠의 편집자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는 사회민주주의 언론 서비스에서, 1925년부터 1933년까지는 브란덴부르크 신문의 편집자로 일했다.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1933년까지 재임했다.
2.2. 나치 치하 (1933-1945)
1933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에베르트는 불법 정치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를 포함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39년에는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고, 1940년부터는 출판청에서 근무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2.3. 동독에서의 정치 활동 (1945-1979)
1946년, 소비에트 연방의 압력으로 소련군 점령 지역 (후의 동독)의 SPD와 독일 공산당이 합동하여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SED)이 성립되자, 에베르트는 SED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1월 30일부터 1967년 7월 5일까지 동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 전념하여 브란덴부르크 문, 빨간 시청사, 무기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복원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
1949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성립과 함께 인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에는 국가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1년에는 국가평의회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8월 1일 발터 울브리히트 국가평의회 의장이 사망한 뒤부터 1973년 10월 3일 빌리 슈토프가 국가평의회 새 의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국가평의회 의장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1979년 동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카를 마르크스 훈장, 조국 공로 훈장, 인민 우정 훈장을 받았다.
3. 유산
카를 마르크스 훈장, 조국 공로 훈장, 인민 우정 훈장을 수여받았다. 동베를린 시장직에서 사임한 후, 동베를린 행정부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수여했지만, 1992년에 무효화되었다.
4. 평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동독 정권 수립과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동베를린 시장으로서 전후 도시 재건에 기여했으며, 브란덴부르크 문, 빨간 시청사, 무기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다만, 소련의 압력에 의한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일 공산당(KPD)의 합당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1946년 소련 점령 지역에서 두 정당의 지부 통일이 소련의 압력 하에 이루어졌고,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이 창설된 후 에베르트는 중앙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서독에서는 이러한 그의 행적을 '배신'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에베르트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활동하며 권력을 누렸다는 점이 대비된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 훈장, 애국 공로 훈장, 인민 우호 훈장, 노동 깃발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