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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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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제 수용소는 정부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집단을 격리, 구금하는 시설을 의미하며, 그 역사는 19세기 말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이 아프리카너들을 수용한 것이 시초로 여겨진다. 이후 20세기에는 소련, 나치 독일,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정치범, 소수 민족, 전쟁 포로 등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특히 나치 독일은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절멸 수용소를 운영하여 대규모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굴라크, 케냐의 영국 수용소,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의 수용소 등이 존재했으며, 현재도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북한 등에서 강제 수용소와 유사한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군부 독재 시절에 강제 수용소와 유사한 시설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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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수용소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유형억류 캠프
목적정치적 반대자, 소수 민족, 특정 민족이나 인종 집단의 사람들을 구금하다.
사용 시기18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관련 인물발터 니콜라이
제이콥 스미스
호레이쇼 키치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하인리히 힘러
아르투르 자이스잉크바르트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역사
최초 사용스페인-미국 전쟁 중 쿠바에서
20세기 초남아프리카 공화국, 필리핀-미국 전쟁, 러시아 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사용
나치 독일 시대대규모로 사용, 홀로코스트와 관련
소련 시대굴라크 시스템 운영
중국 시대라오가이 시스템 운영
정의 및 특징
정의대규모의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
전쟁 포로, 난민, 정치적 반대자, 소수 민족 등을 강제로 수용
특징수감자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다.
강제 노동, 학대, 영양실조,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생존 조건이 매우 열악하다.
수용자들은 즉결 처형되거나 고문, 강제 노역을 당할 수 있다.
사상, 신념, 정치적 견해, 종교, 인종, 국적, 사회적 지위 등으로 구분되어 수용된다.
기능정치적 반대자나 적대적인 인물을 억압
인구 집단을 격리 또는 제거
강제 노동력 제공
현대적 사용
사례신장 재교육 캠프 (중국)
미국의 과테말라 국경 검문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 러시아의 여과 캠프
법적 문제
법적 지위국제법상 불법적인 경우가 많음
국제 사회 비판인권 침해로 인해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음
관련 용어
관련 용어절멸 수용소
강제 노동 수용소
포로 수용소
억류소

2. 역사

"집중 수용소"라는 용어는 스페인군이 게릴라 부대와의 전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쿠바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구금했던 스페인-쿠바 10년 전쟁에서 유래했다.[2] 그 후 수십 년 동안, 보어 전쟁 당시 영국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미국도 집중 수용소를 사용했다.

리비아의 이탈리아 집중 수용소 중 하나인 엘 아게일라에 1만 명의 수감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리비아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


1918년 핀란드 내전 후 몇 달 후 탐페레의 칼레반칸가스 집중 수용소의 여성들


"집중 수용소"와 "수용소"라는 용어는 심각성, 사망률, 건축물이 크게 다른 다양한 시스템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이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수감자들이 법치 밖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2] 주된 목적이 살인인 절멸 수용소 또는 죽음의 수용소도 부정확하게 "집중 수용소"로 불린다.[3]

최초의 민간인 수용 사례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5] 영어 용어 "집중 수용소"는 10년 전쟁(1868-1878) 기간 동안 스페인 군대가 쿠바에 설치한 재집결 수용소(스페인어: ''reconcentrados'')를 가리키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6][7] 독일 제국은 헤레로와 나마쿼 학살(1904-1907) 기간 동안에도 집중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이 수용소의 사망률은 45%였다.[10]

이후 강제 수용소는 여러 국가와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2. 1. 초기 형태

19세기 말, 스페인쿠바에서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여 민간인들을 통제했다.[6][7] 영국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에서, 미국필리핀-미국 전쟁에서 강제 수용소를 사용했다.[6][8][9] 독일 제국은 헤레로와 나마쿼 학살에서 강제 수용소를 운영했는데, 사망률이 45%로 영국 수용소의 두 배였다.[10]

1896년 스페인의 재집결 정책의 희생자인 쿠바인들


제2차 보어 전쟁(1899년-1902년) 당시 영국 정부가 아프리카너들을 강제 수용했던 수용소(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너 여성과 어린이들을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설립된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이는 근대 세계 최초의 강제 수용소였다.[36] 제2차 보어 전쟁에서 아프리카너 3만 4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36]

남아프리카 연방(1961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한 인권 운동가들이 정치범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넬슨 만델라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 반역죄로 로벤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90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미국에서는 원주민인디언들이 당국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37] 강제 이주도 이루어졌고, 인디언들이 보내진 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라고 불렸지만, 인디언들에게는 강제 수용소 그 자체였다.[38]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백인과의 혼혈을 포함한 애보리진 아동들이 부모에게서 떨어져 감옥과 같은 열악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39]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러시아 제국은 강제 추방과 강제 노역을 결합한 카토르가(katorga) 시스템을 운영했다. 이는 중범죄자에게 적용되는 형벌이었다. 1906년에는 약 6,000명, 1916년에는 28,600명의 카토르가 수감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수용소들은 소련 시대 정치범 수용의 모델이 되었다.[11]

러시아 내전레닌과 볼셰비키는 체카(Cheka)의 통제하에 "특별" 수용소와 "특별" 가스실을 설립했다.[12][13] 레닌이 구상한 이 수용소들은 명백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4]

2. 3.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1933년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 당원 등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처음 설립했다.[21] 1937년에는 로마니족, 노숙자, 정신 질환자 등 "반사회적 인물"을, 1938년부터는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았다.[22]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수용소는 확장되어 최대 1만 5천 개의 수용소[23]와 최소 71만 5천 명의 동시 수감자[24]를 보유할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약 165만 명이 수감되었고, 그중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24] 많은 수용소에서 "노동에 의한 학살" 정책으로 수감자들은 기아, 질병, 총살 등으로 사망했다.[25] 나치 독일은 절멸 수용소 6곳을 설립하여 가스실을 이용해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26][2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일본, 미국, 캐나다 등도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국 연방 국가들에서는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수용이 이루어져 일본인과 일본계 주민들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전후 미국 정부 등은 사과하고 보상했다. 일본에서는 스타르히닌이 적성 외국인으로 수용되었고, 오키나와 전투 직후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수용되었다.

나치 강제수용소는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을 수용하고 홀로코스트를 목적으로 했다고 여겨진다. 독일 국내 프리슬란트 지방에 설치된 정치범 대상 강제수용소에서는 가스실 대신 가혹한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 독일 국내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수용자들의 무장 봉기로 해방되었다. 또한, 강제수용소 내에 독일 수용소 매춘숙이 있었다.

2. 4. 냉전 시대와 그 이후

마우마우 반란 (1952~1960) 기간 중 케냐의 영국 수용소[29][30]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973~1990)의 군사 독재 시대 칠레에 설립된 수용소[31]가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최대 300만 명의 위구르족과 다른 이슬람 소수 민족 구성원들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중국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으며, 미국 뉴스 보도에서는 이를 종종 "강제 수용소"라고 부른다.[32][33] 이 수용소들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정부 하에 2010년대 후반에 설립되었다.[34][35]

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에서는 호찌민시 남쪽 약 220km 해상에 있는 꼰손섬을 수용소 또는 감옥으로 사용했다. 이 시설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설치된 것을 베트남이 독립한 후에도 확장하여 사용한 것으로, 다수의 수용소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용자들의 처우는 비인도적인 시설에서 동물에 가까운 열악한 것이었고, 1970년대 라이프지가 "호랑이 우리"로 소개하여 전 세계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43] 1975년 베트남 전쟁 종결 시 수용소는 해방되었으며, 이후 관광지로 정비되기 시작하고 있다.[44]

3. 유형 및 특징

"집중 수용소"라는 용어는 스페인군이 게릴라 부대와의 전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쿠바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구금했던 스페인-쿠바 10년 전쟁에서 유래했다.[2] 그 후 수십 년 동안, 보어 전쟁 당시 영국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미국도 집중 수용소를 사용했다.

최초의 민간인 수용 사례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5] 영어 용어 "집중 수용소"는 10년 전쟁(1868-1878) 기간 동안 스페인 군대가 쿠바에 설치한 재집결 수용소(스페인어: ''reconcentrados'')를 가리키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6][7] 이 명칭은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 기간 동안 미국이 설치한 수용소에도 다시 적용되었다.[8] 보어 전쟁(1899-1902) 기간 동안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을 수용했을 때 "집중 수용소"라는 용어의 사용이 확대되었다.[6][9] 독일 제국은 헤레로와 나마쿼 학살(1904-1907) 기간 동안에도 집중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이 수용소의 사망률은 45%로 영국 수용소의 두 배였다.[10]

3. 1. 강제 수용소 vs 절멸 수용소

"집중 수용소"와 "수용소"라는 용어는 다양한 수감 시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수감자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2] 주된 목적이 살인인 절멸 수용소는 종종 "집중 수용소"라고 잘못 불리기도 한다.[3]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은 "집중 수용소"를 "정부가 위험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청문회 없이, 가혹한 조건 하에서 구금하는 수용소"로 정의한다.[4]

나치 강제 수용소는 정치범,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을 가두고 강제 노동을 시켰으며, 일부 수용소는 홀로코스트와 같이 대량 학살을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독일의 나치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 약칭: KZ)가 유명하다. 당시 주요 수용자는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홀로코스트(대량학살)를 목적으로 했다고 여겨진다. 정치범을 대상으로 한 강제수용소만 예외적으로, 여기서는 가스실이 아닌 이탄 지대에서의 가혹한 강제 노동이 중심이었다.

나치는 1933년 처음으로 수만 명의 정치범을 수용하는 강제 수용소를 설립했다.[21] 1937년에는 "반사회적 인물" 수만 명을 체포했고, 1938년부터는 유대인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수용소는 더욱 확장되고 치명적으로 변했다.[22] 나치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최대 1만 5천 개의 수용소[23]와 최소 71만 5천 명의 동시 수감자[24]를 보유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약 165만 명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중 약 100만 명이 수감 중 사망했다.[24] 강제 수용소 외에도 나치 독일은 수백만 명을 살해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6개의 절멸 수용소를 설립했다.[26][27]

3. 2. 나치 강제 수용소의 특징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에 따른 범죄였다. 마이클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21]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21]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21]

나치 학살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하우,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 작센하우젠, 나츠바일러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21]

이러한 생체 실험을 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 여러 실험을 하였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21]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21]

나치는 살해 대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주로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다다랐는데, 전쟁 중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 결과가 바로 가스실이다. 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이 가스라고 생각했다.[21]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이었다.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S트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치의 6개 절멸수용소 중 트레블링카,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보르 절멸수용소[26]에서는 1944년까지 이 수용소들이 모두 폐쇄될 때까지 일산화탄소 중독을 주된 처형 방식으로 이용했다. 이 수용소들은 가스실에 거대한 고정된 엔진을 부착했고 갖가지 연료(주로 석유)를 이용해 엔진을 공회전시켜 희생자들을 질식시켰다. 이 4개 절멸수용소에서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21]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인 치클론 B는 당시 독일 국방군이 마구간 방역용으로 I.G 파르벤에서 대량으로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는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치클론 B는 아우슈비츠(희생자 110만~120만), 마이다네크 수용소(희생자 최소 8만)에서 사용되었다.[21]

4. 주요 사례

"집중 수용소"라는 용어는 스페인군이 쿠바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구금했던 스페인-쿠바 10년 전쟁에서 유래했다.[6][7] 그 후 보어 전쟁 당시 영국과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미국도 집중 수용소를 사용했다.

"집중 수용소"와 "수용소"라는 용어는 수감자들이 법치 밖에 놓여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수용소의 심각성, 사망률, 건축물은 매우 다양하다.[2] 주된 목적이 살인인 절멸 수용소도 "집중 수용소"로 불리기도 한다.[3]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은 "집중 수용소"를 "정부가 위험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집단에 속한 것을 이유로, 일반적으로 청문회 없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혹한 조건 하에서 사람들이 구금되는 수용소"로 정의한다.[4]

최초의 민간인 수용 사례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5] "집중 수용소"라는 용어는 10년 전쟁(1868-1878) 동안 스페인 군대가 쿠바에 설치한 재집결 수용소(''reconcentrados'')를 가리키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6][7] 이후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 기간 동안 미국,[8] 보어 전쟁(1899-1902) 기간 동안 영국이 설치한 수용소에도 사용되었다.[6][9] 독일 제국은 헤레로와 나마쿼 학살(1904-1907) 기간 동안 집중 수용소를 설치했는데, 사망률은 45%로 영국 수용소의 두 배였다.[10]

러시아 제국은 강제 추방과 강제 노역을 사법적 처벌 형태로 사용했다. 중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카토르가(katorga)는 노동 수용소 수감과 관련된 특징을 가졌다. 역사학자 앤 애플봄에 따르면, 1906년에는 약 6,000명, 1916년에는 28,600명의 카토르가 수감자들이 있었다.[11] 러시아 내전 중에 레닌과 볼셰비키는 체카의 통제하에 "특별" 수용소와 "특별" 가스실을 설립했다.[12][13] 1929년에는 범죄자와 정치범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고,[16] 수용소 관리가 국가정치합동국으로 이관되어 크게 확장되었다.[17] 구락(Gulag) 시스템은 대부분 수백 개의 수용소로 구성되었으며,[18] 1929년부터 1953년까지 약 1,800만 명을 수감했다.[19] 흐루쇼프 해빙 기간 동안 구락은 이전 규모의 4분의 1로 축소되었다.[20]

나치는 1933년 처음으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하여 수만 명의 정치범, 주로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 당원들을 수용했다.[21] 1937년에는 "반사회적 인물" 수만 명을 체포했고, 1938년부터는 유대인들이 표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수용소는 대규모로 확장되어 더욱 치명적이 되었다.[22] 나치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최대 1만 5천 개의 수용소[23]와 최소 71만 5천 명의 동시 수감자[24]를 보유했다. 약 165만 명이 수감되었고, 그중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24] 나치는 "노동에 의한 학살" 정책을 시행하여 수감자들이 기아, 질병, 총살로 사망하도록 했다.[25] 나치는 또한 6개의 절멸 수용소를 설립하여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26][27]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일본, 미국, 캐나다군에 의해 강제 수용소가 설립되었다.

마우마우 반란(1952-1960) 기간 중 케냐의 영국 수용소[29][30]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 시대 칠레에 설립된 수용소[31]도 강제 수용소로 언급된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최대 300만 명의 위구르족과 이슬람 소수 민족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중국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32][33] 이 수용소들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정부 하에 2010년대 후반에 설립되었다.[34][35]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현재 반체제 인사로 간주된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2]

4. 1. 남아프리카 공화국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너 여성과 어린이들을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설립된 수용소에 강제 수용했으며, 이는 근대 세계 최초의 강제 수용소였다[36]. 제2차 보어 전쟁에서 아프리카너 3만 4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많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36].

또한, 남아프리카 연방(1961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한 넬슨 만델라와 같은 인권 운동가들이 정치범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넬슨 만델라1964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 반역죄로 로벤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90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4. 2. 미국, 캐나다, 호주

미국에서는 원주민인디언들이 당국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37]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는데, 인디언들에게는 강제 수용소 그 자체였다.[38]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백인과의 혼혈을 포함한 애보리진 아동들이 부모에게서 떨어져 감옥과 같은 열악한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3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국 연방 국가들에서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수용이 이루어져 수많은 일본인과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전후 미국 정부 등 수용을 실시한 정부는 사과하고 보상하였다. 일본에서는 스타르히닌이 적성 외국인으로 수용된 사례, 오키나와 전투 종결 직후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수용된 사례가 있다.

최근에는 미국 남부 사령부의 관타나모 기지(쿠바) 내 감옥(관타나모 만 수용 캠프), 아프가니스탄 주둔군의 바그람 공군 기지 내 감옥이 국제앰네스티에 의해 “수용소”로 판정되었다. 2005년 11월에는 CIA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체포한 “용의자”들을 동유럽의 몇몇 국가에 있는 구 소련 시대 정치범 수용소에, 그리고 2006년에는 “테러리스트 또는 그 관계자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시리아의 비밀 수용 시설에 법적 근거 없이 수감·구금했던 것이 발각되었다. 미국 상원 군사 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전쟁 시대 중국 공산당군의 수용소에서 받은 고문을 참고했다고 한다.

4. 3. 소비에트 연방

소련은 세계 역사상 가장 조직적으로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운영한 국가이다. 소련 국내에는 라게리라고 불리는 강제 수용소가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직전인 1986년까지 다수 존재했다.

레닌은 반정부파 수용소와 가스실을 "발명"했고[40], 스탈린이 이를 크게 이용했다. 스탈린 시대인 1926년에는 형법 58조, 즉 "반혁명죄"가 제정되어 많은 공산당원, 민간인, 외국인이 이 죄목으로 라게리에 연행되었다. 라게리에는 반혁명파로 간주된 정치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포로, 또는 적대적으로 여겨진 민족(핀란드인, 폴란드인, 독일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몰다비아인, 유대인, 튀르크계 민족 등), 적계급(쿨락, 자본가, 귀족 등)에 속한 사람들이 수용되어 강제 노동에 종사했다. 가혹한 노동으로 많은 수감자들이 형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독소전쟁에서 얻은 독일 및 주변 추축국 포로가 소련 각지의 수용소에 (독일인 추방) 수용되었고, 대일 참전에서 얻은 일본 포로가 시베리아 수용소에 수용되었다(시베리아 억류).

소련의 수용소는 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1940년대까지 확장되었고, 1950년대 초에 최대 규모에 도달하여 소비에트 경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수용소는 전국에 최소 500곳 가까이 존재했고, 수용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 명에서 수천만 명에 달했으며, 전체 노동력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조직적인 운영으로 소련은 근대·현대에 사실상 노예 제도를 공적으로 가진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스탈린 사후, 후계자인 베리아는 자유화 캠페인으로 수용소 규모를 축소하고 수감자를 해방하는 등 조건을 다소 완화했다.

4. 4. 독일

제2차 세계 대전독일의 나치 강제수용소(Konzentrationslager, 약칭 KZ)가 악명 높았다. 나치는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정치범 등을 홀로코스트(대량 학살)할 목적으로 수용했다.[21]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가스실 대신 이탄 지대에서의 가혹한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용소는 독일 국내, 특히 네덜란드 국경 근처 동프리슬란트 지방에 설치되었다.[21] 대부분의 수용소는 독일 국외에 있어 독일 패전으로 해방되었지만, 독일 내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수용자들의 무장 봉기로 해방되었다. 강제 수용소 내에는 독일 수용소 매춘숙도 존재했다.

4. 5. 중화인민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인 전범들은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다.[41]

티베트 망명 정부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티베트인들이 감옥이나 노동개조소에 수감되어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수용자의 7할이 사망했다고 한다.[41]

2010년대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족 200만 명 이상이 구금되었고, 자치구 내에 재교육 수용소가 수십 곳이나 건설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다.[42]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최대 300만 명의 위구르족과 다른 이슬람 소수 민족 구성원들이 신장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32][33] 이 수용소들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의 정부 하에 2010년대 후반에 설립되었다.[34][35]

4.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현재에도 반체제 인사로 간주된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존재한다.[2]

5. 한국과 강제 수용소

(빈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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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뉴스 Chilean coup: 40 years ago I watched Pinochet crush a democratic dream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3-09-07
[32] 뉴스 As the U.S. Targets China's 'Concentration Camps', Xinjiang's Human Rights Crisis is Only Getting Worse https://www.newsweek[...] Newsweek 2019-05-22
[33] 뉴스 Uighurs and their supporters decry Chinese 'concentration camps', 'genocide' after Xinjiang documents leaked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2019-11-17
[34] 뉴스 'Absolutely No Mercy': Leaked Files Expose How China Organized Mass Detentions of Muslim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9-11-16
[35] 뉴스 Stop Calling China's Xi Jinping 'President', U.S. Panel Says https://www.wsj.com/[...] The Wall Street Journal 2019-11-14
[36] 서적 森(2002:8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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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뉴스 市民の権利がいかに重要かを学ぶ - ロサンゼルス http://www.nikkansan[...] 2014-03-15
[39] 뉴스 収容所から脱出し、1600キロを徒歩で逃げたアボリジニ3少女 http://nationalgeogr[...] 201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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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웹사이트 刑務所や強制労働収容所での死亡事例 https://web.archive.[...] ダライ・ラマ法王日本代表部事務所 2014-03-15
[42] 웹사이트 ウイグル問題が米中の新しい火種に 200万人拘束情報も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8-09-01
[43] 웹사이트 「トラの檻」(政治犯収容所)があったコンソン島 https://new.fuji-qhb[...] FUJI教育基金 2021-03-23
[44] 뉴스 政治犯の島、観光地に衣替え 197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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