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리쿠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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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디리쿠 3세는 1355년 13세의 나이로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나폴리 왕국의 침공에 시달렸으며,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화해를 맺었다. 1361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딸 마리아를 낳았고, 1372년 안토니아 델 발초와 재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377년 사망 후 왕위는 딸 마리아가 계승했으나, 이후 내분으로 시칠리아 왕국은 아라곤에 재병합되었다.

피디리쿠 3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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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간소왕의 피에르알레 은화
군주 칭호시칠리아 국왕
통치 기간1355년 10월 16일 - 1377년 7월 27일
선임자루이스
후임자마리아
배우자콘스탄사 데 아라곤
안토니아 델 발초
자녀마리아
왕가바르셀로나
아버지페드로 2세
어머니엘리자베타 디 카린치아
출생일1341년 9월 1일
출생지카타니아, 시칠리아 왕국
사망일1377년 7월 27일
사망지메시나, 시칠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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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형 루도비코의 요절로 인해, 1355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나폴리 왕국의 침공에 시달렸고,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굴욕적인 화해를 맺게 되었다. 1361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아 공주를 낳았다. 1372년 안토니아 델 발초와 재혼했지만, 자녀 없이 사별했다.

페데리코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77년 사망 후 왕위는 첫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마리아가 계승했다. 그러나 이후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고,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콘스탄사의 이복 남동생이자 페데리코의 여동생 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틴 1세에 의해 아라곤에 재병합되었다.

2.1. 어린 시절과 즉위

피데리쿠 3세는 형 루도비코가 요절하자 1355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나폴리 왕국의 침공에 시달렸고,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화해를 맺었다. 1361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아를 낳았다. 1372년 안토니아 델 발초와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페데리코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77년 사망 후 왕위는 마리아가 계승했다. 그러나 이후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고,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콘스탄사의 이복 남동생이자 페데리코의 여동생 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틴 1세에 의해 아라곤에 재병합되었다.

2.2. 나폴리의 침공과 굴욕적인 화해

루도비코 형이 요절하자 1355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나폴리 왕국의 침공에 시달렸다.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굴욕적인 화해를 맺게 되었다.

2.3. 빌뇌브 조약과 통치권 인정

2.4. 결혼과 후계

1361년 4월 11일, 피디리쿠 3세는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딸인 콘스탄체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들은 딸 마리아를 두었다. 1372년 1월 17일, 피디리쿠는 보의 안토니아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1372년 빌뇌브 조약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조약으로 피디리쿠의 시칠리아 통치 권한이 나폴리로마 교황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피디리쿠는 다시 안토니아 비스콘티와 약혼했지만, 결혼 전에 사망했고 그의 유일한 자녀인 여왕 마리아가 계승했다.

형 루도비코의 요절로 인해, 1355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1361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아 공주를 낳았다.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굴욕적인 화해를 맺게 되었다.

1372년 안토니아 델 발초와 재혼했지만, 자녀 없이 사별했다. 페데리코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77년 사망 후 왕위는 첫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마리아가 계승했다. 그러나 이후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고,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콘스탄사의 이복 남동생이자 피디리쿠의 여동생 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틴 1세에 의해 아라곤에 재병합되었다.

2.5. 사망과 왕위 계승

루도비코의 요절로 인해, 1355년 1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나폴리 왕국의 침공에 시달렸고, 1373년에는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굴복하는 굴욕적인 화해를 맺게 되었다. 1361년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외동딸 마리아 공주를 낳았다. 1372년 안토니아 델 발초와 재혼했지만, 자녀 없이 사별했다.

페데리코 3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377년 사망 후 왕위는 첫 번째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마리아가 계승했다. 그러나 이후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발생했고,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콘스탄사의 이복 남동생이자 페데리코의 여동생 레오노르의 아들인 마르틴 1세에 의해 아라곤에 재병합되었다.

3. 페데리코 3세/4세 표기 문제

페데리코 2세(1272년 - 1337년, 본 항목 인물의 할아버지)를 "페데리코 3세", 본 항목 인물을 "페데리코 4세"로 표기하는 문헌도 있다. 이는 시칠리아 왕 페데리코 1세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이탈리아식 이름을 사용하면 페데리코 2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