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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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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로 3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으로, 하이메 1세의 아들이자 시칠리아의 콘스탄차와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카탈루냐 공국을 상속받았으며, 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계기로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튀니지를 침공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는 등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적으로는 귀족과의 갈등을 겪었다. 페로 3세는 1285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아라곤 왕국은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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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칭호아라곤의 왕
별칭대왕
출생일1239년경
출생지발렌시아, 아라곤 왕국
사망일1285년 11월 11일
사망지빌라프랑카델페네데스, 카탈루냐 공국, 아라곤 왕국
매장지산테스크레우스 수도원
통치 정보
아라곤 및 발렌시아 왕 즉위1276년 7월 27일
아라곤 및 발렌시아 왕 퇴위1285년 11월
이전 통치자하이메 1세
다음 통치자알폰소 3세
시칠리아 왕 즉위1282년 9월 4일
시칠리아 왕 퇴위1285년 11월
이전 통치자카를 1세
다음 통치자하이메 1세
공동 통치자콘스탄차 2세
가족 관계
왕가바르셀로나 가문
아버지하이메 1세
어머니비올란테 데 웅가리아
배우자콘스탄사 디 시칠리아 (1262년 6월 13일 결혼)
자녀알폰소 3세
하이메 2세
이사벨, 포르투갈 왕비
페데리코 3세
욜란다, 칼라브리아 여공
기타 정보
아라곤 왕으로서의 호칭페로 3세
시칠리아 왕으로서의 호칭페트루 1세
발렌시아 왕으로서의 호칭페로 1세
"누오바 크로니카" 세부 묘사

2. 생애 초기

페드로 3세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1]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딸이자 상속녀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2세와 1262년 6월 13일에 결혼했다.[2] 젊은 시절과 청년 시절에 무어인에 맞선 아버지의 ''레콩키스타'' 전쟁에서 많은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3]

1275년 6월, 반역을 일으킨 이복 형제 페르난도 산체스 데 카스트로를 포마르 데 친카에서 포위, 점령, 처형했다.

1276년 아버지 하이메 1세가 사망하자 아라곤 왕관의 영토는 두 아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카탈루냐 공국은 장남인 페드로 3세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 왕국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백작령은 차남에게 돌아가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가 되었다.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타라고나 대주교에 의해 콘스탄스와 함께 대관식을 치렀다.

2. 1. 출생과 가계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1] 남동생으로 하이메(후일 마요르카 왕 자우메 2세)가 있으며, 누이로는 비올란테 (후일 카스티야 왕비)와 이사벨 (후일 프랑스 왕비)가 있다.

1260년 또는 그 이전에, 페드로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의 막내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 아사니나와 약혼했다. 그러나 1261년에 에우도키아의 남동생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가 황제위를 잃었기 때문에 약혼은 해소되었고, 에우도키아는 페드로가 아닌 텐다 백작과 결혼했다. 1262년 6월 13일,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딸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자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2세와 결혼했다.[2]

2. 2. 결혼과 자녀

시칠리아의 쿠스탄차 2세(만프레디의 딸)와 1262년 6월 13일에 결혼하여[1]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2]

자녀설명
알리폰소
차이메
이사벨포르투갈 왕비 (1271년 - 1336년), 포르투갈의 디니스와 결혼.
프레데리코
비올란트나폴리의 로베르토와 결혼하여 칼라브리아 공작부인 됨.
페로



페드로 3세는 1260년 또는 그 이전에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의 막내딸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 아사니나와 약혼했었다. 그러나 1261년에 에우도키아의 남동생 요한네스 4세 라스카리스가 황제위를 잃었기 때문에 약혼은 해소되었고, 에우도키아는 페드로 3세가 아닌 텐다 백작과 결혼했다.[2]

3. 아라곤 국왕 즉위

페드로 3세는 즉위 후 발렌시아 왕국 평정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카탈루냐 공국에서 카르도나 자작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고,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3세, 팔라르스 소비라 백작 아르노 로제 1세, 우르젤 백작 에르멩골 10세가 이에 가담했다.[1] 이들은 페드로 3세의 가혹한 처우와 카탈루냐 코르테스 미소집, 특권 미확정에 불만을 품었다.

우르젤 백국 계승 위기 상황에서, 페드로 3세는 1278년 에르멩골 10세와 협정을 맺어 영토 회복을 돕고 종주권을 인정받았다.[1]

1280년, 페드로 3세는 발라게르에서 반군을 포위, 진압했다. 로제-베르나르 3세를 비롯한 반군 지도자들은 례이다에 투옥되었으며, 로제-베르나르는 1284년까지 수감되었다.

3. 1. 왕위 계승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페드로 3세는 1262년 6월 13일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딸이자 상속녀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2세와 결혼했다.[1] 젊은 시절 페드로는 아버지의 레콩키스타 전쟁에 참여하여 무어인과의 전투에서 많은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2]

1276년 아버지 하이메 1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관의 영토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카탈루냐 공국은 장남인 페드로 3세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 왕국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백작령은 차남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아갔다.

페드로 3세와 콘스탄스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타라고나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3]

3. 2. 국내 반란 진압

페드로 3세가 왕위에 오른 후 처음 한 일은 아버지 하이메 1세가 죽기 전부터 진행되던 발렌시아 왕국 영토의 평정 작업을 완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탈루냐 공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카르도나의 자작이 주도했고,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3세, 팔라르스 소비라 백작 아르노 로제 1세, 우르젤 백작 에르멩골 10세가 부추겼다.[1] 이들은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페드로 3세가 가한 가혹한 처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또한 페드로 3세가 카탈루냐 코르테스를 소집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 후 특권을 확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우르젤 백국에서는 토지 상속 문제가 발생했다. 1268년 알바로 데 우르젤이 사망하자, 그의 두 아내 가문(베아른 백작 페드로 몬카다,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2세)이 상속을 두고 நீண்ட 싸움을 시작했다. 우르젤 백작령의 상당한 토지는 하이메 1세가 압류해 1276년 페드로 3세 즉위 시 상속되었다. 1278년, 알바로의 장남 에르멩골 10세는 페드로 3세와 협정을 맺고 잃었던 토지의 대부분을 회복했으며, 그 대가로 페드로 3세를 영주로 인정했다.[1]

1280년, 페드로 3세는 발라게르에서 반군을 한 달 동안 포위한 후 로제-베르나르 3세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했다. 대부분의 반군 지도자들은 1281년까지 례이다에 투옥되었고, 로제-베르나르는 1284년까지 투옥되었다.

4. 대외 팽창

페레 3세는 아버지 하이메 1세처럼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지만, 산문을 좋아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운문을 선호했다. 그는 트루바두르를 좋아했으며, 스스로 시르벤테스 두 편을 썼다. 하나는 페레 3세와 페이로네 사이의 대화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페레 3세, 베르나트 다우리아크, 페레 살바게,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3세 등의 작품을 모은 편집본의 일부이다.

프랑스의 필리프 3세 및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와의 전쟁은 새로운 ''시르벤테스''의 소재를 제공했으며, 이 시기에 ''시르벤테스''는 각 진영의 주장을 펼치고 지지를 얻는 정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1]

4. 1. 튀니지 원정

(빈칸)

4. 2. 시칠리아 만종과 시칠리아 왕 즉위

아라곤의 페드로 3세 알현; ''Usatici et Constitutiones Cataloniae''에서 발췌한 중세 미니어처.


1266년, 나폴리의 샤를 1세교황 클레멘스 4세의 승인을 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페드로 3세의 아내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체 2세의 가문이었으며, 콘스탄체는 아버지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사촌 콘라딘이 샤를의 침공군과 싸우다 죽은 후 시칠리아 왕위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이로 인해 페드로는 아내의 권리로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상속자가 되었다.[2]

이탈리아 의사 프로치다의 조반니는 시칠리아에서 페드로 3세를 대신하여 활동했다. 조반니는 샤를이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라곤으로 도망쳤다. 조반니는 페드로 3세를 지지하는 불만을 일으키기 위해 시칠리아로 갔고,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미카엘은 교황의 승인 없이는 아라곤 국왕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고, 조반니는 로마로 가서 교황 니콜라 3세의 동의를 얻었다. 니콜라 3세는 메초조르노에서 샤를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했다. 그 후 조반니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지만 교황이 사망했고, 프랑스인으로 샤를 1세와 앙주 왕가의 확고한 동맹이었던 교황 마르티노 4세로 교체되었다. 이것이 다가오는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

콘스탄체는 남편의 지원을 받아 아버지의 왕위를 주장했지만, 샤를이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 그의 권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 주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277년 새로운 교황 니콜라 3세의 선출은 아라곤 국왕에게 희망을 비추었지만, 니콜라가 1280년에 사망하고 친 프랑스적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즉위하면서 희망이 사라졌다.

페르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의 사절단을 만나 앙주 백작 샤를 1세와의 전쟁에 개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누오바 크로니카''.


페르 3세는 시칠리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국왕은 시칠리아로 항해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려는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사절인 두 명의 도미니크 수도사로부터 방문을 받는다. ''누오바 크로니카''.


페르 3세의 함대가 트라파니에 상륙하고 있다. 국왕은 아내 콘스탄스와 함께 상륙을 지휘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누오바 크로니카''.


마리아노 발바산의 『페드로 3세』


튀니지에 상륙한 페드로 3세의 함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드로 3세는 이웃 군주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1279년 동생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페르피냥 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마요르카 왕국을 페드로 3세의 봉건 왕국으로 인정하게 했다. 페드로는 1283년 2월까지 칼라브리아 해안 대부분을 점령했다. 샤를은 절망하여 페드로 3세에게 개인적인 전투로 분쟁을 해결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였고 샤를은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두 국왕은 6명의 기사를 선택하여 6월 1일에 보르도에서 결투를 하기로 했다. 각 진영에는 100명의 기사가 동행할 예정이었으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경기를 판결할 예정이었지만, 교황의 지시를 받은 잉글랜드 국왕은 참가를 거부했다. 페드로 3세는 프로치다의 조반니에게 시칠리아를 맡기고 보르도로 돌아갔는데, 프랑스 매복을 피하기 위해 변장하고 들어갔다.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페드로 3세는 아라곤으로 돌아왔다.

페드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1281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왕자 산초와 캄필로 및 아그레다 조약을 체결하여 강력한 동맹을 맺었다.

포르투갈 왕국과의 관계에서 페드로는 장녀 아라곤의 엘리자베스를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와 결혼시켜 결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어, 상속자 아라곤의 알폰소 3세를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딸과 약혼시켰다. 이러한 동맹에도 불구하고 페드로는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가 나빴다.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왕국에서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앙주 백작 샤를 1세의 정부에 대항했다. 시칠리아 귀족 반란군은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내 콘스탄체를 정당한 여왕으로 여기면서 그에게 왕관을 제안했으며, 알코이에서 팔레르모의 사람들로부터 사절단을 받은 후,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9월 4일 팔레르모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샤를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도망쳐 나폴리 왕국에 만족해야 했다.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60000o 금화를 제공한 혐의로 페드로 3세와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모두를 파문했다.

카탈루냐 지상군은 기옘 갈세란 데 카르텔라가 지휘했으며, 알모가바르, 쇠뇌병, 창기병으로 구성되었다. 페드로 3세의 함대는 라우리야의 로제르가 지휘했으며, 앙주군의 섬 공격을 격퇴했다. 로제르는 몰타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에서 샤를 1세의 아들 살레르노의 샤를을 포로로 잡았다.

시칠리아 정복은 유대인의 기부와 ''알하마''에 부과된 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알폰소 왕자는 1282년에 200000s의 할당을 요구했다. 발렌시아 왕국의 ''알하마''는 25000s를, 아라곤 왕국 ''알하마''는 75000s를, 카탈루냐 공국의 ''알하마''는 100000s을 부과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이후 5세기 동안 아라곤 왕가와 그 상속자들에게 추구되는 유산이 될 것이었다.

5. 아라곤 십자군

페드로 3세는 프랑스아라곤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국내 불안에 직면했다. 알바라신을 반역 귀족 후안 누녜스 1세 데 라라로부터 빼앗았고, 카스티야의 산초 4세와 동맹을 갱신했으며, 나바라의 필리페 1세의 침공을 막기 위해 투델라를 공격했다. 1283년 타라고나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 회의를 열었고, 새롭게 결성된 아라곤 연합에게 ''프리빌레히오 헤네랄''을 부여해야 했다.

1283년, 페드로 3세의 형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는 프랑스에 가담하여 몽펠리에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루시용 백국을 통해 카탈루냐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고, 발레아레스 제도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페드로 3세는 카탈루냐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1284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아라곤 왕국을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주었다. 샤를은 프랑스 왕의 아들이자 앙주의 샤를 1세의 증손자였다. 교황은 샤를 드 발루아를 위해 아라곤을 정복하는 전쟁에 승인을 내렸다.[1]

5. 1. 프랑스와의 전쟁

페테르 3세는 프랑스가 아라곤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국내 불안에 직면했다. 그는 반역 귀족 후안 누녜스 1세 데 라라로부터 알바라신을 빼앗았고, 카스티야의 산초 4세와 동맹을 갱신했으며, 나바라의 필리페 1세가 그 전선에서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투델라를 공격했다. 페테르는 1283년 타라고나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 회의를 열었다. 그는 새롭게 결성된 아라곤 연합에게 ''프리빌레히오 헤네랄''을 부여해야 했다.

1283년, 페테르의 형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는 프랑스에 가담하여 몽펠리에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루시용 백국을 통해 카탈루냐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되었고, 발레아레스 제도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10월, 페테르는 카탈루냐의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1284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아라곤 왕국을 프랑스 왕의 또 다른 아들이자 앙주의 샤를 1세의 증손자인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주었다. 샤를 드 발루아를 위해 아라곤을 정복하는 전쟁에 교황의 승인이 주어졌다.[1]

5. 2. 전쟁의 경과

1266년, 나폴리의 샤를 1세교황 클레멘스 4세의 승인을 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페드로 3세의 아내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체 2세의 가문이었으며, 콘스탄체는 아버지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사촌 콘라딘이 샤를의 침공군과 싸우다 죽은 후 시칠리아 왕위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이로 인해 페드로 3세는 아내의 권리로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상속자가 되었다.[1]

이탈리아 의사 프로치다의 조반니는 시칠리아에서 페드로 3세를 대신하여 활동했다. 조반니는 샤를이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라곤으로 도망쳤다. 조반니는 페드로 3세를 지지하는 불만을 일으키기 위해 시칠리아로 갔고,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2] 미카엘 8세는 교황의 승인 없이는 아라곤 국왕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고, 조반니는 로마로 가서 교황 니콜라 3세의 동의를 얻었다. 니콜라 3세는 메초조르노에서 샤를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했다. 그 후 조반니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지만 교황이 사망했고, 프랑스인으로 샤를 1세와 앙주 왕가의 확고한 동맹이었던 교황 마르티노 4세로 교체되었다. 이것이 다가오는 갈등의 배경이 되었다.[2]

콘스탄체는 남편의 지원을 받아 아버지의 왕위를 주장했지만, 샤를이 교황청의 지원을 받고 그의 권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 주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1277년 새로운 교황 니콜라 3세의 선출은 아라곤 국왕에게 희망을 비추었지만, 니콜라가 1280년에 사망하고 친 프랑스적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즉위하면서 희망은 사라졌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드로 3세는 이웃 군주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1279년 동생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페르피냥 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마요르카 왕국을 페드로 3세의 봉건 왕국으로 인정하게 했다(아라곤 왕관을 불가분적인 통일체로 만듦). 페드로 3세는 자신의 이점을 활용하여 1283년 2월까지 칼라브리아 해안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샤를은 절망감을 느꼈는지, 페드로 3세에게 개인적인 전투로 분쟁을 해결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페드로 3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샤를은 결투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두 국왕은 각자 6명의 기사를 선택하여 장소와 날짜를 정했고, 6월 1일에 보르도에서 결투가 예정되었다. 각 진영에는 100명의 기사가 동행할 예정이었으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경기를 판결할 예정이었지만, 교황의 지시를 받은 잉글랜드 국왕은 참가를 거부했다. 페드로 3세는 프로치다의 조반니에게 시칠리아를 맡기고 자신의 왕국을 거쳐 보르도로 돌아갔는데, 프랑스 매복을 피하기 위해 변장하고 들어갔다. 결국,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페드로 3세는 매우 혼란스러운 아라곤으로 돌아왔다.[3]

페드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1281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왕자 산초와 캄필로 및 아그레다 조약을 체결하여 강력한 동맹을 맺었다.[1]

포르투갈 왕국과의 관계에서 페드로 3세는 장녀 아라곤의 엘리자베스를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와 결혼시켜 결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어, 그의 상속자 아라곤의 알폰소 3세를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딸과 약혼시켰다. 이러한 모든 동맹에도 불구하고 페드로 3세는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는 나빴다.[1]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왕국에서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앙주 백작 샤를 1세의 정부에 대항했다. 시칠리아 귀족 반란군은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내 콘스탄체를 정당한 여왕으로 여기면서 그에게 왕관을 제안했으며, 알코이에서 팔레르모의 사람들로부터 사절단을 받은 후, 페드로 3세는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2] 그는 9월 4일 팔레르모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샤를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도망쳐 그의 나폴리 왕국에 만족해야 했다.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금화를 제공한 혐의로 페드로 3세와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모두를 파문했다.

카탈루냐 지상군은 기옘 갈세란 데 카르텔라가 지휘했으며, 유명하고 두려운 알모가바르, 쇠뇌병, 그리고 창기병으로 구성되었다. 페드로 3세의 강력한 함대는 라우리야의 로제르가 지휘했으며, 앙주군의 섬 공격을 끊임없이 격퇴했다. 라우리야의 로제르는 몰타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에서 샤를 1세의 아들인 살레르노의 샤를을 포로로 잡았다.[1]

시칠리아 정복은 유대인의 기부와 ''알하마''에 부과된 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알폰소 왕자는 1282년에 ''수''의 할당을 요구했다. 발렌시아 왕국의 ''알하마''는 ''수''를 제공했고, 아라곤 왕국 ''알하마''는 을, 카탈루냐 공국의 ''알하마''는 을 부과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이후 5세기 동안 아라곤 왕가와 그 상속자들에게 끈기 있게 추구되는 유산이 될 것이었다.[1]

6. 국내 문제와 죽음



페드로 3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아라곤의 하이메 1세가 시작한 발렌시아 왕국 평정 작업을 완료했다.

페드로 3세는 주변 군주들과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1279년 동생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와 페르피냥 조약을 체결하여 마요르카 왕국을 페드로 3세의 봉건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1283년 2월, 페드로 3세는 칼라브리아 해안 대부분을 점령했다. 나폴리의 샤를 1세는 페드로 3세에게 개인적인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제안했고, 페드로 3세는 이를 수락했다. 1281년, 카스티야 왕국의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 왕자 산초와 캄필로 조약 및 아그레다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강화했다. 포르투갈 왕국과는 장녀 아라곤의 엘리자베스를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와 결혼시켜 혼인 동맹을 맺었다. 잉글랜드 왕국과도 동맹을 맺어, 후계자 아라곤의 알폰소 3세를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딸)와 약혼시켰다.

1266년, 나폴리의 샤를 1세교황 클레멘스 4세의 승인을 받아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통치하는 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페드로 3세의 아내 시칠리아의 콘스탄체 2세의 가문이었고, 콘스탄체 2세는 아버지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와 사촌 콘라딘이 샤를 1세의 침공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후 시칠리아 왕위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이탈리아 의사 프로치다의 조반니는 시칠리아에서 페드로 3세를 대신하여 활동했다. 교황 니콜라 3세는 샤를 1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페드로 3세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니콜라 3세가 사망하고, 친 프랑스파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6. 1. 귀족과의 갈등

페드로 3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카탈루냐 공국에서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카르도나의 자작이 주도했으며,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3세, 팔라르스 소비라 백작 아르노 로제 1세, 우르젤 백작 에르멩골 10세가 지원했다.[1] 이들은 페드로 3세가 아버지 하이메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자신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페드로 3세가 왕위에 오른 후 카탈루냐 코르테스를 소집하지 않고 귀족들의 특권을 확정하지 않은 것에 반발했다.

우르젤 백국에서는 계승 분쟁이 계속되었다. 1268년 알바르 데 우르젤이 사망한 후, 그의 두 아내 가문 사이에 백국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백국의 상당 부분은 하이메 1세에게 넘어갔고, 1276년 페드로 3세에게 상속되었다. 1278년, 알바르의 장남 에르멩골 10세는 잃어버린 재산 대부분을 되찾고 페드로 3세를 종주로 인정했다.[1]

1280년, 페드로 3세는 발라게르에서 한 달 동안 반군을 포위하여 로제-베르나르 3세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했다. 대부분의 반군 지도자들은 1281년까지 례이다에 투옥되었고, 로제-베르나르는 1284년까지 갇혀 있었다.

6. 2. 죽음과 유산

페드로 3세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1] 1262년, 페드로는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딸이자 상속녀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2세와 결혼했다.[2] 페드로는 젊은 시절 무어인에 맞선 아버지의 레콩키스타 전쟁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3]

1275년 6월, 페드로는 반역을 일으킨 이복 형제 페르난도 산체스 데 카스트로를 포마르 데 친카에서 포위, 점령, 처형했다.

1276년 아버지 하이메 1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관의 영토는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카탈루냐 공국은 장남인 페드로 3세에게, 마요르카 왕국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백작령은 차남에게 돌아가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가 되었다.

페드로 3세와 콘스탄스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타라고나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왕국에서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앙주 백작 샤를 1세의 정부에 대항했다. 시칠리아 귀족 반란군은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내 콘스탄스를 정당한 여왕으로 여기면서 그에게 왕관을 제안했다. 알코이에서 팔레르모의 사람들로부터 사절단을 받은 후, 페드로 3세는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그는 9월 4일 팔레르모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60,000 금화를 제공한 혐의로 페드로 3세와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모두를 파문했다.

카탈루냐 지상군은 기옘 갈세란 데 카르텔라가 지휘했으며, 알모가바르, 쇠뇌병, 그리고 창기병으로 구성되었다. 페드로 3세의 강력한 함대는 라우리야의 로제르가 지휘했으며, 앙주군의 섬 공격을 끊임없이 격퇴했다. 라우리야의 로제르는 몰타 해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1284년 나폴리 만 해전에서 샤를 1세의 아들인 살레르노의 샤를을 포로로 잡았다.

시칠리아 정복은 유대인의 기부와 ''알하마''에 부과된 세금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알폰소 왕자는 1282년에 200,000 ''수''의 할당을 요구했다. 발렌시아 왕국의 ''알하마''는 25,000 ''수''를 제공했고, 아라곤 왕국 ''알하마''는 75,000 ''수''를, 카탈루냐 공국의 ''알하마''는 100,000 ''수''를 부과했다. 시칠리아 왕국은 이후 5세기 동안 아라곤 왕가와 그 상속자들에게 끈기 있게 추구되는 유산이 될 것이었다.

7. 가계도

페드로 3세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욜란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1] 그는 1262년 6월 13일에 시칠리아의 만프레디의 딸이자 상속녀인 시칠리아의 콘스탄스 2세와 결혼했다.[2]

참조

[1] 뉴스 news on discovery of mummy of Peter III at Monastery of Santes Creus http://cultura.elpai[...] El País
[2] 서적 The King of Sicily's Testaments: Hidden, Falsified and Forgotten Brepols 2023
[3] 뉴스 news on discovery of mummy of Peter III at Monastery of Santes Creus http://cultura.elpai[...] El Paí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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