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
1. 개요
필승은 11세기 북송 시대의 평민 출신 발명가로, 점토 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술을 발명했다. 그의 발명은 심괄의 『몽계필담』에 기록되어 있으며, 비성은 점토로 활자를 만들어 불에 구워 쇠판에 배열하는 방식으로 인쇄했다. 비성의 활판 인쇄술은 널리 사용되지는 못했으나, 이후 금속 활자 발명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식의 대량 생산과 보급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비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과 라이베리아에서 기념 시설과 우표가 발행되었다.
| 이름 | 필승(畢昇) |
|---|---|
| 출생 | 972년 |
| 사망 | 1051년 |
| 국적 | 중국 |
| 직업 | 발명가 |
| 주요 업적 | 가동 활자 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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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인쇄업자 -
왕정 (원나라)
왕정은 원나라 시대의 농학자이자 기술 혁신가로, 농서 저술과 목활자 인쇄술 개량, 수력 풀무 개발 등을 통해 농업 기술 발전과 지식 확산에 기여했다. -
990년 출생 -
차으르 베이
차으르 베이는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족 지도자로서 형 투으룰 베이와 함께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고 가즈나 왕조, 비잔틴 제국 등과의 대립 속에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단다나칸 전투 승리를 통해 제국 영토 확장과 내정 안정화에 기여했다. -
990년 출생 -
미에슈코 2세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는 볼레스와프 1세 용감공의 아들이자 1025년부터 1034년까지 폴란드 국왕이었으나, 즉위 초부터 왕조 내부 갈등과 이웃 국가들의 견제, 잦은 전쟁, 이복형의 침공 등으로 왕위를 잃고 되찾는 등 혼란스러운 통치기를 보냈다. -
중국의 발명가 -
제갈량
제갈량은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유비의 삼고초려로 촉한에 합류하여 승상이 되었고, 섭정으로서 남정을 통해 촉한의 기반을 다졌으며, 북벌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으며, 법치주의와 인재 등용을 중시하고 경제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 -
중국의 발명가 -
심괄
심괄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 예술가, 문인으로, 천문학, 지리학, 약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저서 《몽계필담》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보여준다.
2. 비성의 활판 인쇄술 발명
11세기 북송 시대의 평민 출신 발명가 비성은 교니 활자(膠泥活字)를 이용한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비성의 발명은 심괄(沈括)의 『[[몽계필담]』에 기록되어 있다.
비성은 쇠판에 송진, 밀랍, 종이 재를 섞은 재료를 덮고, 끈적한 점토로 만든 글자를 동전 가장자리처럼 얇게 새겨 불에 구워 활자를 만들었다. 인쇄할 때는 쇠틀을 쇠판 위에 놓고 활자를 빽빽하게 배열했다. 틀이 가득 차면 하나의 단단한 활자 덩어리가 되었고, 불에 데운 후 뒷면이 녹으면 널빤지로 눌러 숫돌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
비성은 각 글자마다 여러 개의 활자를 만들었고, 자주 쓰이는 글자는 20개 이상 만들어 반복 사용에 대비했다. 사용하지 않는 활자는 종이 라벨을 붙여 나무 상자에 보관했다.
2.1. 『몽계필담』에 기록된 비성의 활판 인쇄술
북송 시대의 학자 심괄이 저술한 『[[몽계필담(夢溪筆談)|몽계필담]』에는 비성의 활판 인쇄술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몽계필담』에 따르면, 비성은 끈적끈적한 점토에 글자를 새겨 불에 구워 활자를 만들었다. 그는 송진, 밀랍, 종이 재를 섞어 만든 판에 활자를 배열하여 인쇄했다. 심괄은 비성이 각 글자마다 여러 개의 활자를 만들었으며, 특정 글자는 20개 이상 만들어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사용하지 않는 활자는 종이 라벨을 붙여 나무 상자에 보관했다고 전한다.
2.2. 비성 활판 인쇄술의 한계와 의의
비성의 교니 활자는 나무 활자보다 제작하기 어렵고 쉽게 깨지는 단점이 있어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비성의 활판 인쇄술 발명은 이후 금속 활자 발명에 중요한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지식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성의 발명은 중국 학자이자 다방면의 전문가인 심괄(1031~1095)의 『[[몽계필담(夢溪筆談)|몽계필담]』에만 기록되어 있다. 심괄은 비성이 발명한 활판 인쇄의 기술적 세부 사항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비성은 끈적끈적한 점토를 가져다가 동전 가장자리만큼 얇게 글자를 새겼다.
* 각 글자는 마치 하나의 활자를 형성했다.
* 그것들을 불에 구워서 단단하게 만들었다.
* 송진, 밀랍, 종이 재의 혼합물로 쇠판을 덮었다.
* 인쇄 시 쇠틀을 쇠판 위에 놓고 활자를 빽빽하게 배열했다.
* 틀이 가득 차면 전체가 하나의 단단한 활자 덩어리가 되었다.
* 불 가까이에 두어 데웠다.
* 뒷면의 풀이 약간 녹으면 매끄러운 널빤지를 가져다가 표면 위에 눌러 활자 덩어리를 숫돌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
각 글자마다 여러 개의 활자가 있었고, 특정한 흔한 글자의 경우 같은 페이지에 나오는 글자의 반복을 대비하여 각각 20개 이상의 활자가 있었다.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종이 라벨을 사용하여 각 운율 그룹에 하나씩 라벨을 붙여 나무 상자에 보관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활판 인쇄는 거의 언급되거나 설명되지 않았다. 청나라(1644~1912)에 목판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었지만, 많은 조각을 만드는 비용이나 필사자의 저렴한 비용 때문에 목판 인쇄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정부 관리인 왕증은 나무를 이용한 혁신을 통해 비성의 점토 활자를 개량했는데, 그의 방법은 활자 조판 속도를 높였다. 1490년까지 부유한 인쇄업자인 화숭(1439~1513)에 의해 청동 활판이 개발되었다.
3. 비성 이후의 활판 인쇄술 발전
송나라 심괄의 『[[몽계필담(夢溪筆談)|몽계필담]』에는 비성이 활판 인쇄를 발명했다는 기록과 그 기술적 세부 사항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비성은 끈적한 점토에 글자를 새겨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활자를 사용했고, 송진, 밀랍 등을 섞어 만든 판에 활자를 배열하여 인쇄했다. 각 글자마다 여러 개의 활자를 만들었고, 흔한 글자는 20개 이상을 준비하여 반복 사용에 대비했다. 사용하지 않는 활자는 종이 라벨을 붙여 나무 상자에 보관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활판 인쇄술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청나라(1644~1912)에 목판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었지만, 목판 인쇄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