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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부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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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동부대부인은 조선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과 혼인하여 하동군부인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1530년에 태어나 1567년에 사망했으며, 셋째 아들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하동부부인으로 추존되었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고, 생모인 하동부부인을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이후 하동부대부인의 작위는 여러 차례 혼용되어 불리다가, 왕의 사친에 대한 부대부인 봉작 관례에 따라 현대에는 하동부대부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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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부대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정보
이름하동부대부인
칭호조선의 부대부인 (사후, 대원군 부인)
재임 기간? – 1567년 6월 24일
유형재임
전임경양군부인
후임용성부대부인
대원군 부대부인
전임승평 부대부인
후임용성 부대부인
개인 정보
출생일1522년 9월 23일
출생지한성부, 조선
사망일1567년 6월 24일 (46세)
사망지도정궁, 사직동, 한성부, 조선
묻힌 곳(덕릉)
가문하동 정씨 (출생 시)
가문 (결혼 후)이씨
종교한국의 유교
가족
아버지정세호, 효간공, 하동부원군
어머니광주 이씨 부인
배우자덕흥대원군 (1542년 결혼, 1559년 사망)
자녀이정, 하원군
이명순
이인, 하릉군
이연, 하성군

2. 생애

셋째 아들 선조의 어필


하동부대부인은 정인지의 증손녀이자 정세호의 딸로, 1530년(중종 25년) 9월 24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나 덕흥군과 혼인하여 하동군부인이 되었다. 3남 1녀를 두었으며, 1567년(명종 22) 6월 24일(음력 5월 18일) 46세로 사망하여 왕비의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례를 치렀다.[5]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1569년(선조 2) 영종의 생부 복왕 추존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덕흥대원군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을 하동부부인으로 추존하였다.

2. 1. 초기 생애

하동부대부인은 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증손녀이며, 판중추부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정세호의 딸로 1530년(중종 25년) 9월 24일(음력 9월 4일)에 태어났다. 중종의 서자[5] 덕흥군과 가례를 올리고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6월 24일(음력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였다.

2. 2. 혼인

이초와 결혼하여 '''하동부부인'''(河東郡夫人)이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효간공 하동부원군(孝簡公 河東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결혼 생활 동안, 1545년에 첫 아들을, 1546년에 둘째 아들을, 1548년에 딸을, 1552년에 셋째 아들을 낳았다.[1]

1567년 6월 24일, 명종 재위 22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묘는 남편의 묘 근처에 있다.[1]

2. 3. 자녀

작호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장남하원군정|鋥한국어[5]1545년 - 1597년남양군부인 홍씨
신안군부인 이씨
차남하릉군인|鏻한국어[5]1546년 - 1592년평산군부인 신씨
장녀이씨|李氏한국어[5]명순|明順한국어[5]1548년 - 1637년안황
3남선조대왕
하성군
균|鈞한국어[5]----연|昖한국어[5]1552년 - 1608년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제14대 국왕   



하동부대부인은 덕흥대원군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하원군 이정, 차남은 하릉군 이인, 장녀는 이명순, 3남은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이다.

2. 4. 사망

1567년(명종 22년) 6월 24일(음력 5월 18일)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하였다. 왕비 부모를 장사지내는 예로 장사지냈으며, 같은 해 8월 9일 신주를 대원군 옆 이실(異室)에 모셨다.[5] 묘소는 남편 묘소 근처에 있다.

3. 추존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 이초(李岧)의 셋째 아들인 선조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즉위 후 생모인 하동부부인 정씨를 추존하였다.

1569년(선조 2년) 음력 11월 1일, 선조의 생모 정씨는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존되었다.[4] 그러나 이후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3. 1. 부부인 추존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른 선조는 예종의 양자로 즉위했다가 즉위 직후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이 없었고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였기에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절충으로, 공신 정1품 작위이자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던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바꾼 대원군(大院君)이라는 새로운 작위가 만들어졌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4]

이후 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연주부부인으로 책봉했다가[6]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영조 즉위년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이다.[7]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경종 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 것에서 시작한다.[8]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 확인 없이 진달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경종의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 유지를 위해 고의로 잘못 진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정씨의 작위는 본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기도 하고,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 등으로 혼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 14년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따라,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뒤늦게 인식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9][10]

이를 바탕으로 철종 즉위 후 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11] 이후 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이 왕의 사친 작위로 정의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3. 2. 부대부인 추존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른 선조는,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한 직후 스스로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이 없었다. 또한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이자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바꾼 대원군(大院君)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4]

이러한 전례를 바탕으로 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6],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영조 즉위년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이다.[7] 그러나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경종 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8]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따라서 경종의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기도 하였으나,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 등으로 혼용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 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으로 짐작된다.[9][10]

이를 바탕으로 철종 즉위 후 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11], 이후 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4. 작위 논란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른 선조는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이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로 왕비의 아버지의 작위로도 쓰여진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대원군(大院君)이다. 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이를 전례로 삼아 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6],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영조 즉위년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7],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경종 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8]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 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9][10]

이를 바탕으로 철종 즉위 후 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11], 이후 고종의 생모 여흥 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본관생몰년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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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이명순전주1548년 - ?
삼남이연 (하성군)전주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참조

[1] 웹사이트 (중종) 덕흥궁 - 덕흥대원군, 하동부대부인 정씨 https://m.blog.naver[...]
[2] 서적 조선왕조실록 선조 총서
[3] 웹사이트 덕흥대원군 묘(德興大院君墓) http://encykorea.aks[...]
[4] 서적 조선왕조실록 인조 13권 1626-07-27
[5] 문서 창빈 안씨 소생으로 중종의 서9남
[6] 웹사이트 연주부부인 http://sjw.history.g[...]
[7] 서적 조선왕조실록 영조 1권 1724-09-21
[8] 서적 조선왕조실록 경종 9권 1722-07-17
[9] 웹사이트 하동부부인, 하동부대부인, 대원군부인 http://sjw.history.g[...]
[10] 서적 조선왕조실록 영조 117권 1771-08-09
[11] 서적 조선왕조실록 철종 1권 1849-06-17
[12] 문서 정인지의 아들
[13] 문서 세종의 딸 정의공주의 손녀
[14] 문서 이극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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