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라스페 폰 튀링겐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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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라스페 폰 튀링겐 방백은 1204년경 튀링겐 방백 헤르만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26년 형의 사망으로 조카 헤르만 2세의 섭정이 되었으며, 이후 튀링겐 백작위를 차지했다. 1241년 몽골 제국 군을 격퇴하고, 프리드리히 2세를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콘라트 4세와의 대립 끝에 1247년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루도빙 가문의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고, 튀링겐 방백령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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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라스페 폰 튀링겐 방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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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인리히 라스페 |
원어 이름 | Heinrich Raspe |
작위 | 테ュー링겐 방백 로마 왕 (대립왕) |
출생 | 1204년경 |
사망 | 1247년 2월 16일 |
사망 장소 | 바르트부르크 성, 테ュー링겐 방백국, 신성 로마 제국 |
가문 | |
왕가 | 루도빙거 가문 |
배우자 | |
배우자 | 엘리자베트 폰 브란덴부르크 게르트루트 폰 바벤베르크 베아트릭스 폰 브라반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헤르만 1세 |
어머니 | 조피 폰 바이에른 |
2. 생애
튀링겐 방백 헤르만 1세와 비텔스바흐의 소피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인리히 라스페는 튀링겐 백작령의 계승권이 없었으나, 1226년 형 루트비히 4세가 제6차 십자군 전쟁 중 사망하면서 5살 난 조카 헤르만 2세가 백작직을 계승, 하인리히 라스페는 조카의 어머니 헝가리의 엘리자베스와 함께 섭정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와 조카를 몰아내고 튀링겐 백작이 되었으나, 1231년에 이르러서야 인정받았다.
1241년 몽골 제국 군을 격퇴했고, 1242년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 콘라트 4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포, 하인리히 라스페와 보헤미아 왕 벤체르 1세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리드리히 2세에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 하인리히 라스페는 교황의 지지를 받는 유일한 독일 왕이 되었다.
1246년 8월 니다에서 콘라트 4세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지만, 울름과 로이틀링겐을 빼앗기면서 전세는 불리해졌다. 결국 전투 중 치명상을 입은 하인리히 라스페는 1247년 2월 아이제나흐 근처 바르트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 1. 가문 배경
하인리히 라스페는 튀링겐 백작 헤르만 1세 폰 튀링겐과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 비텔스바흐의 딸 소피아 폰 비텔스바흐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그의 가문은 친가와 외가 모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후손이었다. 할머니 쥬디스 폰 호엔슈타우펜은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의 이복 여동생이었으므로, 하인리히 라스페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의 외조카손자가 된다.[2]하인리히 라스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친할머니 쥬디스 폰 호엔슈타우펜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딸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와 아그네스 폰 살리어의 아들이었다.
- 외할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 비텔스바흐의 어머니 헬리카 폰 페텐도르프는 페텐도르프 경 프리드리히 3세와 헬리카 폰 슈바벤의 딸이었다. 헬리카 폰 슈바벤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와 아그네스 폰 살리어의 딸이었다.
이와 같이 하인리히 라스페는 친할머니쪽과 외증조모 쪽 모두 하인리히 4세의 후손이다.[2]
2. 2. 튀링겐 방백 즉위
1226년 형인 튀링겐 백작 루트비히 4세가 제6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 도중 성지로 가던 길에 전사하면서, 5살인 조카 헤르만 2세가 백작직을 계승하였다. 하인리히 라스페는 헤르만 2세의 모후 헝가리의 엘리자베스와 함께 섭정이 되었고, 다른 동생 콘라트 라스페는 영토의 일부를 지분으로 받았다. 얼마 뒤 하인리히 라스페는 형수 엘리자베스를 추방하고, 조카 헤르만 2세를 몰아낸 뒤 튀링겐 백작직을 차지했으나, 1231년에 가서야 백작으로 인정받았다.[2]1239년까지 헤르만 2세의 후견인을 맡았지만, 실권은 하인리히가 장악하고 있었다. 헤르만 2세는 1241년에 급사했는데, 후세의 역사가들은 독살을 의심했지만, 하인리히가 조카의 독살에 관여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중요한 문헌 속에 그러한 언급은 없고, 헤르만 2세 자신이 1234년부터 튀링겐 방백으로서 문서를 작성하고 있으며, 숙부와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에 따르면, 엘리자베스와 하인리히 라스페는 불화한 관계였으며, 엘리자베스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추방당한 것은 하인리히 라스페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
2. 3. 몽골 격퇴 및 독일 왕 선출
1241년, 하인리히 라스페는 독일을 침공한 몽골 제국 군을 격퇴했다.[2]1242년 독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 대주교 지크프리트 3세를 내치고 자신의 아들 콘라트 4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포했으며, 하인리히 라스페와 보헤미아의 왕 벤체르 1세를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2] 그러나 같은 해, 하인리히 라스페는 프리드리히 2세를 반대하는 독일 귀족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를 추대한 근거는 하인리히 4세의 후손이라는 점이었다.[2]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자, 하인리히 라스페는 다시 독일 왕으로 대관받고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2] 1246년 5월 독일의 일부 귀족들은 그를 대립 황제로 재추대했으나, 일부 귀족들은 그를 "사제 왕(Pfaffenkönig)"이라고 조롱했다.[2]
2. 4. 콘라트 4세와의 대립 및 죽음
1246년 8월, 하인리히 라스페는 헤센 남부 니다에서 콘라트 4세와 교전하였다. 주교들은 프랑크푸르트 공회와 뉘른베르크 공회를 열어 양자를 소환했지만 불응하고 계속 교전했으며, 1246년 8월 5일 프랑크푸르트 근처에서 콘라트 4세를 꺾었다.[2] 그러나 울름과 로이틀링겐 지역이 함락되면서 패하였다. 교황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전투 중 치명상을 입은 라스페는 바르트부르크로 퇴각했다가, 1247년 2월 튀링겐 백작령의 바르트부르크 근처 아이제나흐에서 사망하였다.[2] 시신은 아이제나흐의 성 카트린느 수도원의 자신의 부모 곁에 안치되었다.[2]3. 결혼과 후계 문제
하인리히 라스페는 세 번 결혼했으나 모두 자녀가 없었다. 1228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베르트 2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처음 결혼했다.[1]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의 딸 게르트루데와 재혼했다.[2] 게르트루데가 사망한 후에는 브라반트 공작 헨리 2세의 딸 브라반트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다.
1247년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면서 루도빙 가문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의 사후 튀링겐 방백령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황제는 튀링겐을 하인리히 라스페의 누이 유타의 아들인 마이센 변경백 헨리 3세에게 봉토로 주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라스페의 조카딸인 브라반트의 조피 (루트비히 4세와 엘리자베트의 딸이자, 브라반트 공작 앙리 2세의 아내)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 나아가 베틴 가문과의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4. 평가 및 영향
하인리히 라스페는 중세 독일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에 휘말린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죽음 이후 독일은 대공위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인리히 라스페의 생애는 당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중세 유럽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면서 루도빙 가문의 남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이로 인해 하인리히의 조카인 브라반트의 조피 (브라반트 공작 앙리 2세의 아내이자 루트비히 4세와 엘리자베트의 딸)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 및 베틴 가문과의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홀란트 백작 빌럼 2세가 다음 대립왕으로 옹립되어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부자 사후 단독 왕이 되었지만, 1256년에 허무하게 전사하면서 독일은 대공위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참조
[1]
서적
中世ドイツ再発見
近代文芸社
1998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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