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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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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4세는 1050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056년 황제 즉위 후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을 받았다. 성장 후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서임권 투쟁으로 파문당하고, 작센 공작 등 제후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카노사의 굴욕을 통해 파문을 해제했으나, 이후에도 대립이 지속되었고, 결국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폐위되어 1106년 사망했다.

2. 어린 시절

하인리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고슬라르에서 태어났다. 원래 기독교에서 세례는 태어난 직후 받는 유아세례가 일반적이지만 클뤼니 수도원의 우고를 대부(代父)로 맞이하기 위해 이듬해 봄 부활절까지 세례를 연기했다. 세례를 받기 전이었지만,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아들을 계승자로 대우하며 크리스마스에는 궁정에 모인 제후들에게 충성을 요구했다.[5]

1055년 크리스마스에는 사보이아 백 오도네의 딸 베르타와 취리히에서 약혼했다.[6]

1056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가 급사했을 때, 어머니 아그네스가 섭정으로 통치했다.[7][8]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와 바이에른 공 오토 폰 노르트하임이 이끄는 귀족들에게 납치당했다.[9] 하인리히 4세는 라인 강에 뛰어들어 도망치려 하지만, 구조되어 쾰른으로 끌려갔다.[10] 어머니 아그네스는 은퇴를 강요당했고, 정부는 안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9][10] 안노는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에 대항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지원했다.[9]

하인리히 4세의 교육은 안노가 맡았지만, 마인츠 대주교지크프리트와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아달베르트와 권력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달베르트는 하인리히 4세의 보호자 같았지만, 하인리히 4세의 교육은 방치되었고, 그의 제멋대로이고 완고한 성격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1064년 아달베르트는 권력을 빼앗겼지만, 1066년 추방되었다.[11][12] 1065년 성년이 된 하인리히 4세는 안노의 영향력을 성직계에만 머물게 하고, 속세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해 나갔다.

2. 1. 즉위

1053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어린 아들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귀족회의를 열었고, 11월 11일 로마의 왕(하인리히 3세 시대부터 독일 국왕을 칭하는 칭호)으로 선언되었다.[34] 1054년 7월 17일 쾰른 대주교 베르만에 의해 왕관을 수여받았다.[6] 이로써 정식 후계자 수속을 밟았기 때문에 1056년 아버지 하인리히 3세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특별한 문제없이 왕위를 계승하였다.[7][8]

3. 서임권 투쟁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 대한 의존도가 줄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에버하르트 백작을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교황의 봉신인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사제인 테달드를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하여 교황의 이전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격분한 교황은 하인리히 4세에게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경고를 왕권의 신성한 본질에 대한 명백한 부정으로 간주하고, 1076년 1월 24일 웜스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두 명의 대주교, 독일 주교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4명의 독일 주교, 한 명의 부르고뉴 주교, 한 명의 이탈리아 주교, 그리고 곱추 고드프리드가 참석했다. 하인리히 4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교황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의 퇴위를 요구했다. 2월 5일 피아첸차에서 열린 롬바르디아 주교와 귀족들의 집회도 비슷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카노사 성에서 마틸다와 클뤼니의 휴고에게 빌고 있는 하인리히 4세 (1115년 바티칸 도서관에 보관된 섬유사본의 미니어처)


그러나 하인리히 4세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었던 곱추 고드프리드는 2월 22일에 살해되었다. 고드프리드는 자신의 조카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아들 콘라트에게 하부 로렌을 주었다.

로마의 사순절 공의회에서 이 소식을 접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그의 신하들을 충성에서 해방시키는 공개 기도를 성 베드로에게 했다. 교황에 의한 군주 폐위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교황은 하인리히 4세의 오만함을 다른 방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하인리히 4세는 위트레흐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했지만, 현지 주교인 빌헬름 1세만이 교황을 파문할 의향이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사제인 고트샬크를 통해 오직 신만이 군주를 심판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편지를 독일 전역에 배포했다. 이 편지는 교황을 "거짓 수도사 힐데브란트"라고 칭하며, "내려와라, 내려와라!"라는 극적인 경고로 끝맺었다.

그러나 3월 27일 낙뢰로 인한 화재로 위트레흐트 대성당이 파괴되고, 4월 27일 주교 빌헬름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인리히 4세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그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로 간주했다.

독일 귀족과 주교들은 10월 16일부터 11월 1일까지 트레부르에서 회의를 열고 하인리히 4세에게 교황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그들은 하인리히 4세가 파문된 지 1년이 되기 전에 사면을 받지 못하면 새로운 왕을 선출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1077년 2월 2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집회를 열도록 교황 그레고리우스를 독일로 초청했다.

''폭스의 순교자록''이 그린 그림으로, 카노사 성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앞에 맨발로 서 있는 하인리히의 모습을 가족과 함께 부정확하게 묘사한 그림.


하인리히 4세는 슈파이어로 이동하여 참회자로 살았다. 그는 교황이 자신의 사건을 듣는 것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12월에 몽세니스 고개를 넘어 1077년 1월 25일 카노사 성에 도착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3일 동안 성에서 맨발로 마대를 걸치고 있었다. 토스카나의 마틸다, 토리노의 아델라이데, 그리고 클뤼니의 휴고는 교황이 후회하는 왕을 사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득했다. 사면을 받기 전에, 하인리히 4세는 그의 신하들과의 갈등에서 교황의 판결을 받아들일 것을 맹세해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는 사면 후에도 이탈리아에 머물렀고, 이에 독일의 반대자들은 포르하임에서 회합을 열어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왕으로 선출했다. 교황 특사들은 루돌프의 선출을 인정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중립을 유지하며 분쟁을 해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왕 선출 소식을 듣고, 헨리 4세는 루돌프의 주요 동맹자인 체링겐의 베르톨트를 에펜슈타인의 리우톨트로 카린티아 공작으로 대체하고 프리울리를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 지게하르트에게 주었다. 그는 루돌프로부터 슈바벤을, 벨프로부터 바이에른을 몰수하여 두 공국 모두를 자신의 직접 통제하에 두었다. 4월에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헨리 4세는 세 살 된 아들 콘라트를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파문당한 이탈리아 고위 성직자들인 밀라노의 테달드와 피아첸차의 데니스에게 콘라트의 보호를 맡겼다. 헨리 4세의 귀환을 막을 수 없었던 라인펠덴의 루돌프는 작센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 4세는 울름, 웜스, 뉘른베르크, 마인츠, 스트라스부르, 흐트레흐트,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하여 자신의 왕권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반대자들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지지자들에게 보상했지만, 수혜자들은 무력으로 실제 소유권을 획득해야 했다.

교황 특사인 베르나르도 추기경은 1077년 11월 12일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세력이 약해지고 있던 교황과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오스나브뤼크의 주교 베노 2세와 베르됭의 주교 테오데리히를 로마로 보냈다. 교황은 독일을 대표할 새로운 특사를 임명했지만,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교황 특사는 1078년 4월 8일 쾰른에서 헨리 4세와 함께 부활절을 축하했는데, 이는 교황이 헨리 4세의 파문을 유효하다고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080년 엘스터 전투에서 오른손을 잃고 죽은 라인펠덴의 루돌프 (베르나르트 로데의 1781년 판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8년 11월 모든 성직자들이 왕으로부터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을 받는 것을 금지했다. 왕의 임명권은 왕실 행정의 기본 요소였다. 고위 성직자들이 임명식에서 군주로부터 받은 반지와 감독장은 상호 의존성을 상징했다.

하인리히 4세는 1079년 5월 12일 레겐스부르크에서 교황 특사인 알바노의 주교 페트루스 이그네우스와 파두아의 주교 우달리히를 만났다. 그들은 그를 설득하여 사절들을 프리츠라로 보내 그들의 중재로 라인펠덴의 루돌프와 협상을 시작하도록 했다.

하인리히 4세는 로마의 사순절 시노드에 사절을 보내 교황에게 루돌프를 파문하라고 요구하며,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교황을 임명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암시했다. 대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폐위시키고 루돌프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하인리히 4세의 두 번째 파문은 이전의 파문보다 그의 지위에 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1080년 5월 31일 마인츠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19명의 독일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신성하고 인간의 법을 어지럽히는 혐의자"라고 규정하며 폐위시켰다. 하인리히 4세는 두 번째 브릭센 공의회를 열었다. 19명의 이탈리아 고위 성직자, 7명의 독일 고위 성직자, 그리고 부르고뉴 고위 성직자 1명은 6월 25일 교황의 폐위를 확인하며 그를 시몬, 이단 및 기타 죄로 고발했다. 공의회는 라벤나의 위베르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위베르트는 헨리 4세의 아버지의 개입으로 선출된 최초의 개혁 교황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2세를 언급하여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의 군대는 1080년 10월 14일 호헨뫼르젠에서 만났다. 헨리 4세의 군대는 패배했지만, 오른손을 잃고 죽은 루돌프에게는 불필요한 승리였다. 하인리히 4세는 루돌프의 죽음을 맹세 위반에 대한 처벌로 묘사하며 상황을 최대한 이용했다.

헨리 4세(왼쪽)와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오른쪽 중앙)의 황제 대관식 모습 (오토 프리징의 ''두 도시의 연대기 또는 역사'' 1157년판에서 발췌)


1081년 3월, 하인리히 4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의 이탈리아 지지자들은 전년 볼타 만토바나 전투에서 마틸다 공녀의 군대를 격파하여, 헨리 4세가 아무런 저항 없이 로마에 도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여전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충성했고, 헨리 4세는 6월 말 이탈리아 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 위해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비잔티움 황제의 사절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마틸다의 영주권에서 벗어나 루카와 피사에 특권을 부여했다.

헨리 4세는 1081년 가을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로 돌아갔지만, 1082년 2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로마를 포위 공격했지만 로마 시민들의 저항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대립교황 클레멘스에게 로마 포위 공격을 명령하고 마틸다의 영토를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헨리 4세는 1082년 말 로마 포위 공격에 다시 돌입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우정의 표시로 144,000골드를 보냈고, 로베르 기스카르에 대항하는 지원에 대한 대가로 216,000골드를 더 약속했다. 이 보물 덕분에 헨리 4세는 로마 귀족들을 매수할 수 있었고, 그의 군대는 1083년 6월 3일 로마의 레오니나 도시를 점령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계속 저항했다.

헨리 4세는 1084년 2월과 3월에 로베르 기스카르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의 부재 중에, 대립교황은 10명이 넘는 추기경들이 그레고리우스 7세를 버리도록 설득했다. 다른 성직자들과 교황청 관리들도 그 뒤를 따랐다. 헨리 4세에 대한 저항이 무너졌고, 그는 3월 21일 로마에 입성했다. 클레멘스가 교황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4월 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헨리 4세를 황제로 대관했다. 헨리 4세는 6주 동안 라테라노 궁전에 머물렀다. 그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5월 24일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구출하기 위해 오기 전에 로마를 떠났다. 로베르의 군대는 로마를 약탈하여 로마 시민들을 격분시켰고,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로 피신해야 했다.

3. 1. 배경

하인리히 4세는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아그네스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정치적으로 무능하여 왕권의 기반이던 바이에른, 슈바벤, 케른텐 등을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실수를 저질렀다.[35][36] 자치권을 얻은 귀족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왕권은 약화되었다. 1062년, 쾰른 대주교 안노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납치하고[35][36] 모후의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아그네스는 섭정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잡은 안노 2세는 개혁파 교황을 옹호했다.[37]

1065년, 하인리히 4세는 친정을 시작했지만 왕권은 불안정했다. 독일 군주의 힘이 약해지는 동안 로마 교회는 교황권을 강화하여 세속 군주가 교황 선출과 성직자 서임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했는데, 카롤링거 왕조 때부터 약 300년간 독일 군주가 행사해왔던 권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75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의사를 무시하고 밀라노에 대한 서임권을 행사하여 자신의 뜻에 맞는 사제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그레고리오 7세는 1076년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황제가 교황을 폐위하는 일은 많았지만, 교황이 세속 군주를 직접 파면하고 폐위하는 일은 4세기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38][39][40] 하인리히 4세가 파문을 당하자 작센 선제후 등의 독일 지역 제후들이 반기를 들었고, 하인리히 4세에게 상황이 매우 불리해졌다.

하인리히 4세는 1024년부터 1125년까지 살리안 왕조가 통치한 독일의 세 번째 군주였다. 11세기 독일 국왕들은 이탈리아와 부르고뉴도 통치했으며,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에 대한 강력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모든 기독교인의 수장으로서 행동하고 로마에서 교황 선거를 통제할 권리를 각자에게 부여한다고 확신했다. 로마는 실제로 투스쿨리 가문과 크레센티 가문과 같은 지역 귀족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은 교황 자리에 자신들의 후보를 세웠다. 그들의 경쟁은 스캔들을 일으켰고, 1045년에는 베네딕토 9세, 실베스터 3세, 그레고리오 6세 세 명의 교황이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인 헨리 3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가서 1046년 12월 20일 수트리에서 교회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는 세 명의 교황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독일의 고위 성직자인 방베르크의 주교 수이드거를 클레멘스 2세라는 이름으로 임명했다.

헨리 3세는 왕권의 사제적 성격을 강조하며, 이를 왕의 성유로 인한 기름 부음에 귀속시켰다. 개인적으로 매우 경건했던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여기며 국가와 교회 모두를 다스릴 권한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그에게 집정관의 세습 칭호를 수여하여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교황 선거에서 첫 번째 투표를 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 새로운 칭호를 통해 그는 독일 성직자들을 교황 자리에 임명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독일 교황인 레오 9세는 개혁 성직자들의 중요한 중심지였던 로타링기아 출신이었다. 그들은 교회법의 고대 (또는 추정되는 고대) 법전을 재실시하여 교회를 정화하고자 했고, 레오 9세는 그들의 생각을 로마에 열정적으로 도입했다. 그는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성직 독신제를 장려했다. 교회 문제에 대한 황제의 통제는 장기적으로는 교회 기관이 오직 교황청의 권위에만 복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자유"라는 개혁적 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다. 두 사상 간의 갈등은 하인리히 4세 통치 기간 동안 정점에 달하여 서임권 투쟁으로 알려진 대립으로 발전했다.

독일, 이탈리아, 부르고뉴는 각각 고위 성직자나 속인 귀족이 다스리는 반독립적인 여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교와 수도원장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부유한 토지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매년 선물을 하고 세금 징수와 환대를 포함한 명확하게 정의된 정기적인 봉사를 제공해야 했다. 공작들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속인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군 사령관이었지만 사법 행정에도 책임이 있었다. 국왕들은 때때로 공작직을 자신이나 가까운 친척에게 유지했지만, 조만간 그들은 가장 강력한 귀족들의 지원에 의존했기 때문에 비어 있는 공작령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헨리 3세는 생애 말기에 영향력 있는 공작들과 갈등을 빚었다. 수염달린 고트프리트, 상 로타링기아 공작은 황제의 동의 없이 부유한 과부인 투스카니의 베아트리체 공녀와 결혼했다. 헨리 3세는 또한 사크센 공작의 주요 라이벌인 함부르크 대주교 함부르크의 아달베르트를 지지하여 일부 사크센 백작령을 탈취했기 때문에 사크센 공작 베르나르트 2세를 분노케 했다. 사크센에서 오토 왕조의 전임자들의 영지를 상속받은 살리안 국왕들은 이 지역을 자주 방문했다. 그들의 장기간 방문은 제국의 다른 지역의 귀족들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직접적인 왕실 통제에 노출된 사크센 귀족들을 짜증나게 했다. 사크센 사람들의 살리안 군주에 대한 불만은 하인리히 4세 통치 기간 동안 일련의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제국의 이웃들은 그 못지않게 우려를 낳았다. 헨리 3세는 반란을 일으킨 공작 브레티슬라프 1세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내기 위해 보헤미아에 대한 응징 원정을 시작했다. 헨리 덕분에 왕위에 오른 헝가리의 페테르 왕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1046년 폐위되었다. 헨리는 헝가리를 침략했지만 안드라시 1세 왕을 복종시킬 수 없었다. 안드라시는 그의 동생인 벨라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안드라시와 벨라, 그리고 나중에 그들의 아들들 사이의 갈등은 하인리히 4세 통치 초기 수십 년 동안 절정에 달하여 헝가리에 대한 독일의 군사 원정을 야기했다. 헨리 3세는 1047년 노르만 아베르사 백작과 아풀리아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제후들에 대한 그의 권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부재중인 황제는 노르만 모험가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이익을 대표하는 임무를 교황에게 맡기기로 선택했다.

3. 2. 카노사의 굴욕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고 파문 철회를 요청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다. 하인리히 4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가 군대를 이끌고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카노사성으로 급히 도피한다.[41][42][43][44] 1077년 1월 25일 카노사성에 도착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 밖에서 3일 동안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고, 파문의 해제를 간청했다. 이때, 흔히 말하는 눈 속에서 맨발로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서 있었다는 묘사는 각색된 것이라고 한다.[23]

이것이 그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 권력이 황제 권력보다 우위에 서게 되는 전환기이자 과도기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45] 제후의 초청을 받고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고 있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접근을 알고 위험을 느껴 카노사 성으로 피신했기 때문에,[21] 하인리히 4세는 용서를 구하며 파문 해제를 간청했다.[22] 충성을 맹세한 하인리히 4세에 대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파문을 해제했다.[24]

3. 3. 복수

카노사의 굴욕으로 파문이 철회된 하인리히 4세에 반발한 독일 지역 제후들은 1077년 3월, 슈바벤공 루돌프를 새로운 대립왕으로 추대했다.[46] 하인리히 4세는 즉각 바이에른 공작령과 슈바벤 공작령을 몰수했고, 내전이 벌어졌다. 1080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루돌프를 독일 왕으로 승인하고 하인리히 4세를 다시 파문했으나,[47][48][49] 이 파문은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50] 1080년 10월 전투에서 하인리히 4세는 패배했지만, 루돌프는 오른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51]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손이 잘린 것은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51] 반란군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반대파 귀족들은 구심점을 잃고 무너졌다. 독일 내 권력을 장악한 하인리히 4세는 복수의 기회를 엿보았다. 1080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패퇴시켰다. 1081년 로마로 진격하여 3년 동안 노력한 끝에 1084년 3월 21일 로마를 점령했다.[47] 하인리히 4세는 로마 정복 후 가장 먼저 산탄젤로성[52]으로 피신[53]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켰다. 그 후 라벤나 주교 클레멘스 3세[54]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고 1084년 3월 31일에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3. 4. 로마 약탈(1084년)

하인리히 4세의 수중에 로마가 넘어가자 그레고리오 7세는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한 후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지배자인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084년 5월 로베르가 노르만족과 사라센 출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오자 하인리히 4세는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독일로 퇴각하였다. 로베르가 교황을 구출하러 로마 시내로 진입하자 반-교황파(그레고리오 7세에 반대하는 무리)가 이에 저항하였다.[55]

로베르의 군대는 저항 세력을 진압하며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로베르의 군대는 시가전을 벌이며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3일간 벌어진 약탈과 방화의 피해는 심각했다. 약탈 책임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원망과 분노가 극도에 달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의 군대와 함께 로마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망명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1085년에 그곳에서 객사하였다.[55]

4. 장남 콘라트의 반란

1090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주선으로 43세의 토스카나 여후작 마틸다가 17세의 벨프 5세와 결혼했다.[56] 이 정략결혼으로 독일 남부와 북이탈리아의 하인리히 4세 반대 세력들이 혼인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흐름에 하인리히 4세의 장남 콘라트도 동참했다. 하인리히 4세는 1087년에 장남 콘라트를 독일 공동 왕위에 봉했으나, 콘라트는 부왕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57] 1093년 콘라트는 마틸다를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인, 독일 남부 귀족들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거사 전에 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받았다.

이 반란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충동질도 있었다.[58] 교황은 콘라트에게 충성 서약을 받는 조건으로 황제 자리를 약속했다. 우르바노 2세는 과거 추기경 시절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했으며, 황제가 옹립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약해진 상황이었다. 교황은 황제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 독일 내 지배력을 저하시키고, 로마 교회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반란을 책동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하인리히 4세의 두 번째 부인 유프락시아는 남편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고발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를 지지하며 콘라트의 반란을 정당화했다.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반란을 진압했다.[59] 1095년 벨프 5세가 마틸다와 헤어졌고, 1096년 벨프 4세가 바이에른을 봉토로 받으면서 반란 귀족 세력은 와해되었다. 1097년 독일로 귀환한 하인리히 4세는 1098년 마인츠 왕국 회의에서 장남 콘라트를 폐위하고,[60] 차남 하인리히 5세를 독일 왕위 계승자로 지정했다. 또한 하인리히 4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생전에 제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시켰다.

5. 사망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투옥될 위기에 처하자 1106년 2월 초 쾰른으로 도망쳤다. 쾰른 시민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그는 죄를 뉘우치는 의미로 모든 의식을 거절했다. 리에주 주교 오트베르트는 림부르크의 헨리와 화해하여 하인리히 4세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하인리히 4세는 리에주에서 림부르크의 헨리와 남르의 알베르트 3세의 화해를 중재했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도 그를 돕겠다고 약속했다.[62]

하인리히 4세는 클뤼니의 휴고에게 편지를 보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용서를 구했고,[62] 아들, 독일 제후들, 프랑스의 필리프 1세에게도 편지를 보내 왕위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62]

1106년 3월 22일, 하인리히 5세가 로렌을 침공했지만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들이 비즈에서 하인리히 5세의 군대를 물리쳤다.[62] 림부르크의 헨리와 쾰른, 리에주 시민들은 하인리히 4세에게 황제 직무를 다시 맡으라고 설득했다.[62] 하인리히 5세는 7월 초 쾰른을 포위했지만, 몇 주 뒤 물러나야 했다.[62]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을 배신자이자 위선자라고 비난했다.[62]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1106년 8월 7일 리에주에서 세상을 떠났다.[62] 그는 죽기 직전 아들에게 자신의 지지자들을 용서하고, 슈파이어 대성당에 있는 조상들 곁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부탁했다.[62]

오트베르트 주교는 하인리히 4세를 리에주 대성당에 묻었지만, 파문당한 황제의 시신은 성스러운 장소에 있을 수 없었다.[62] 8일 뒤 시신을 파내 리에주 근처의 성별되지 않은 예배당에 다시 묻었다. 8월 24일,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다시 시신을 파냈다.[62] 리에주 시민들이 반대했지만, 시신은 석관에 담겨 슈파이어로 옮겨졌고, 9월 3일 슈파이어 대성당의 성별되지 않은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5년 후,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아버지의 유언대로 대성당에 안장하는 것을 허락했고, 하인리히 4세는 1111년 8월 7일 헨리 3세 옆에 묻혔다.[62]

6. 가족 관계

하인리히 4세는 첫 부인인 사보이 백작녀 베르타와 3남 3녀를 두었다. 베르타는 1087년에 사망하였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아델하이트1070년1079년요절
하인리히1071년1071년요절
아그네스1072/73년1143년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와 결혼, 이후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와 재혼
콘라트1074년1101년독일 공동 국왕, 이탈리아 국왕으로 선출 후 아버지에게 반란, 폐위
마틸데??미상
하인리히 5세1086년1125년신성로마제국 황제



세 명의 왕관을 쓴 남자와 세 명의 홀을 든 남자를 묘사한 미니어처
헨리 4세와 그의 두 아들, 헨리와 콘라트(윗줄)(11세기 성 에메람 수도원의 복음서에서)


헨리 4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사보이의 베르타(11세기 그림)


두 번째 부인인 키예프 공주 유프락시아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유프락시아는 1109년에 사망하였다.

참조

[1] 문서 로마 왕
[2] 문서 하인리히 4세
[3] 문서 신성 로마 제국
[4] 문서 테우토네스족
[5] 서적 瀬原, p. 283
[6] 서적 成瀬他, p. 181
[7] 서적 成瀬他, p. 182
[8] 서적 瀬原, p. 285
[9] 서적 成瀬他, p. 183
[10] 서적 瀬原, p. 293
[11] 서적 成瀬他, p. 183-184
[12] 서적 瀬原, p. 294
[13] 서적 瀬原, p. 298
[14] 서적 瀬原, p. 302
[15] 서적 成瀬他, p. 187
[16] 서적 瀬原, p. 304
[17] 서적 成瀬他, p. 189
[18] 서적 瀬原, p. 314
[19] 서적 瀬原, p. 318
[20] 서적 瀬原, p. 318-319
[21] 서적 瀬原, p. 319
[22] 서적 成瀬他, p. 190
[23] 서적 菊池, p. 79
[24] 서적 成瀬他, p. 191
[25] 서적 瀬原, p. 322
[26] 서적 成瀬他, p. 192
[27] 서적 瀬原, p. 324
[28] 서적 瀬原, p. 325
[29] 서적 瀬原, p. 326
[30] 서적 成瀬他, p. 193-194
[31] 서적 成瀬他, p. 195
[32] 서적 成瀬他, p. 196
[33] 서적 瀬原, p. 332-333
[34] 웹사이트 하인리히 4세
[35]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36] 서적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37]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38]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39] 문서 자카리아 교황과 힐데리히 3세 관련 내용
[40] 논문 The Investiture Controversy: Church and Monarchy from the Ninth to the Twelfth Century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0
[41] 서적 교황의 역사 도서출판 길
[42] 문서 그레고리오 7세의 카노사 이동에 대한 논의
[43] 문서 그레고리오 7세 유골 검사 결과
[44]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45] 문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 대한 분석
[46] 서적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47]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48]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08-05
[49]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50] 서적 세계사의 명장면 그 이면의 역사 도서출판 달과소 2005-11-28
[51]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52] 문서 산탄젤로성에 대한 설명
[53] 웹사이트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하드리아누스 영묘 https://100.daum.net[...] 21세기북스
[54] 문서 대립교황에 대한 논의
[55] 서적 로마제국 쇠망사 10권 대광서림
[56] 문서 벨프 가문과 바이에른 공작에 대한 정보
[57] 문서 하인리히 5세의 어린 시절
[58] 문서 우르바노 2세의 교황 재위 시절 활동
[59] 문서 우르바노 2세의 이탈리아 원정
[60]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61] 문서 1차 십자군 원정에 대한 설명
[62] 네이버 지식백과 하인리히 4세 [Henry IV] -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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