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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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석진은 186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고 언더우드 신학반에서 공부한 후,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되어 장대현교회를 설립하는 등 초기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대동군과 일본 도쿄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했으며,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국 교회 자립과 연합을 위해 노력하며, 선교사들의 간섭에 반대하고 교파주의를 지양했다. 193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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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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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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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1월 6일 |
사망 | 2009년 11월 2일 (92세) |
직업 | 역사학자 |
분야 | 한국사 |
학력 | |
학력 |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
경력 | |
경력 | 서울대학교 교수 |
경력 |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
경력 | 한국사연구회 회장 |
경력 | 진단학회 이사 |
경력 | 문화재위원회 위원 |
수상 | |
수상 | 대한민국 학술원상 (1993) |
수상 | 국민훈장 모란장 |
저서 | |
저서 | 한국사상사 |
저서 | 한국개화사연구 |
저서 | 조선후기 사회사상연구 |
2. 생애
1868년 평안북도 의주읍에서 아버지 한지운(韓祉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북 지역의 전통적인 유교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유교의 형식적인 도덕관념에 실증을 느끼던 중 백홍준과 서상륜 등에게 전도를 받았다. 1891년 의주를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새뮤얼 오스틴 모펫(S. A. Moffett)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 신학반에서 성경과 교리를 배웠고, 1893년 새뮤얼 오스틴 모펫과 함께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받았다.[1]
평양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서 집회를 시작하여 장대현교회를 세웠고, 평양 외곽에도 전도하여 융진교회, 자덕교회, 남창교회, 소우물(장천)교회, 구동창교회, 추빈리교회, 미정리교회, 무진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회 규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애국적' 연설을 듣고 안창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1]
1903년 소우물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4년부터 신학 수업을 받았다. 1907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대동군 소우물교회, 미림교회, 이천교회 등을 담임하였고, 1909년 일본 도쿄 유학생들 중심의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고, 1910년 『예수교회보』를 창간하였다. 1911년 서울 안동교회, 1917년 마산 문창교회, 1921년 신의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12년 경기충청노회장,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총회장으로서 중단 위기의 산동선교를 재개하고, 1918년 초교파 연합 기구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개칭) 창설을 추진했다. 1926년 연합공의회 회장으로서 「종교단체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1]
한석진은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반대하며, 한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1925년 존 모트 박사가 방한했을 때,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교회는 한국인들에게 맡겨두고 선교사들은 떠나라."고 발언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교파주의를 반대하여 1909년 도쿄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 초교파 연합교회로 조직하였고, 1915년 자신이 속했던 경기충청노회에 "교단 명칭을 조선예수교회로 바꾸자."고 헌의하기도 했다. 1930년 강원도 통천군 온정리에 장로교인들의 헌금으로 수양관을 지으면서 '장로교수양관'이라 하지 않고 '기독교수양관'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 이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였고, 1934년 평양 장대현교회 분규 수습위원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1939년 8월 20일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개종
1868년 평안북도 의주읍에서 아버지 한지운(韓祉云)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북 지역의 전통적인 유교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유교의 형식적인 도덕관념에 실증을 느끼던 중 백홍준과 서상륜 등에게 전도를 받았다. 1891년 의주를 방문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새뮤얼 오스틴 모펫(S. A. Moffett)에게 세례를 받았다.2. 2. 초기 선교 활동
백홍준과 서상륜에게 전도를 받고, 1891년 새뮤얼 오스틴 모펫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상경하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신학반에서 성경과 교리를 배웠다.[1] 1893년 새뮤얼 오스틴 모펫과 함께 평양 선교 개척자로 파송되어 평양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서 집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후에 장대현교회가 되었다.[1] 그는 평양 외곽에도 전도하여 융진교회, 자덕교회, 남창교회, 소우물(장천)교회, 구동창교회, 추빈리교회, 미정리교회, 무진교회 등을 설립하였다.[1] 1898년 독립협회 관서지회 규칙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애국적' 연설(설교)을 듣고 도산 안창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1]2. 3. 목사 안수와 활동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이기풍, 양전백 등과 함께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그해 9월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대동군 소우물교회, 미림교회, 이천교회 등을 담임하였고,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유학생들 중심의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10년 2월 초교파 연합신문 『예수교회보』를 창간, 발행하였다.2. 4. 교단 활동과 독립운동
1912년 경기충청노회장을 역임하였고,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이 되었다. 한석진은 총회장으로서 중단 위기에 놓였던 산동선교를 재개하였다.[1] 1918년에는 초교파 연합 기구인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개칭)의 창설을 적극 추진하였다.[1] 1926년 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 무렵 일본 제국의회에서 입법 추진하고 있던 「종교단체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1]2. 5. 한국 교회 자립과 연합 운동
한석진은 민족적 자의식이 강하여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를 반대했다. 평양, 서울, 마산, 신의주에서 목회하며 예배당을 건축할 때마다 한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짓겠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1925년 12월, 미국 해외선교운동가 존 모트(J. R. Mott)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朝鮮基督敎奉役者議會)에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하여 동석한 원로 선교사들을 향해 "한국교회는 한국인들에게 맡겨두고 선교사들은 떠나라."고 발언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하였다.그는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교파주의'도 반대하였다. 1909년 도쿄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 초교파 연합교회로 조직하였고, 1915년 자신이 속했던 경기충청노회에 "교단 명칭을 조선예수교회로 바꾸자."고 헌의하기도 했다. 1930년 강원도 통천군 온정리에 장로교인들의 헌금으로 수양관을 지으면서 '장로교수양관'이라 하지 않고 '기독교수양관'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 6. 은퇴와 사망
한석진은 금강산 기독교수양관 건축 이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였고, 1934년 평양 장대현교회 분규 수습위원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1939년 8월 20일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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