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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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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길선주는 어린 시절 종교에 관심을 갖고 선도와 무속을 수련하다 개신교에 입교한 인물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으며, 숭실학교 운영에도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1919년 3·1 운동에 연루되었으며, 3·1 운동 당시에는 시력 문제로 집회에 불참했음에도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평양 대부흥 운동의 중심 인물로, 한국 개신교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1935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2009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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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길선주
인물 정보
이름길선주
출생일1869년 3월 15일
출생지조선 평안남도 안주군 성내면 후장동
사망일1935년 11월 26일 오전9시
사망 장소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고창동교회
국적조선→대한제국→일본제국
거주지평안남도 평양부
종교대한예수교장로회
가족 정보
부모아버지 길봉순, 어머니 노씨
배우자신선행
자녀장남 길진형
차남 길진경
삼남 길진섭
학력 및 경력
모교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노회평양노회
접미어목사
직함대표회장

2. 생애

길선주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선도무속에 심취하여 입산 수행을 하기도 했다. 이후 선교사의 영향으로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등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나, 안질로 시력을 잃어 집회에 불참한 사실이 확인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2009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1년 7개월간의 투옥 사실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3]

2. 1. 어린 시절

평안남도 안주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시화에 능했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11살에 당시 관습에 따라 신선행과 혼인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종교에 심취하여 19세에 관우를 섬기는 관성교에 입문했다.[5] 힘이 장사였으나 한때 병을 얻어 이를 치료하고자 기와 차력술 등을 연마하던 중, 25세 때 친구로부터 선도(仙道)를 수련하면 장사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입산하여 3년을 노력했으나, 뜻한 바를 얻지 못하고 29세에 하산하였다.[6]

2. 2. 기독교 입문

1897년(29세)에 그레이엄 리(Gram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11]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하산 후 선도를 권했던 김종섭(金鍾燮)을 만나, 그로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이야기와 그가 권하는 한문 기독교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천로역정(天路歷程)』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898년에는 교회의 영수(領袖)가 되었다.[12]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되고,[13] 1902년에 모펫 선교로부터 조사(助事)의 임무를 받고 평안도황해도 지방을 맡아 전도하였다.[6]

입교 전 관우를 섬기는 무속인으로서 한 무리의 제자들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력을 인정 받았었던 그는 타고난 영적 감응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부흥회를 이끄는 데 자질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선도무속에 관심을 가지고 입산 수행을 했으며, 선교사에 의해 개신교에 입교했다.

2. 3. 평양 대부흥 운동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 열강들의 다툼 속에 있었고, 한반도는 조선 조정의 무능함 속에 혼란스러움이 겹치며 조선의 개신교 교인들의 신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종교 활동이 아닌 정치 활동으로 변질된 양상을 띠고 있었다.[14] 조선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은 이를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당시 영미 기독교에서는 강력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한국을 방문한 부흥사들의 영향을 받은 하디(R. A. Hardie) 선교사가 부흥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먼저 크게 회심한 후, 1903년에 원산에서 사경회와 집회를 진행하였는데, 이를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15]

이에 평양 교계에서 1906년 여름에 그를 초청하여 사경회를 개최하였다.[16] 그러던 중 당시 선교사들과 함께 사경회를 이끌던 길선주 장로가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중에 대중 앞에서 공개 회개를 하는 일이 있었다.[17] 그의 공개 회개를 계기로 다른 사람들의 회개도 빗발쳐 나왔고 이 사건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18][19][20][21]

사경회와 집회를 통해 회심자가 속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 개종하는 이들이 많이 발생하여 크게 부흥하였으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으로 삶을 바꾸는 이들도 많았다. 그때까지 유교적 관념 속에 죄라고 생각지 않았던 축첩, 노비 소유, 음주, 흡연, 아편 복용, 아동 구타 등을 멀리하는 이들이 많이 생긴 것이다.[22] 또한 이때에 있었던 집회로 인해 한국 개신교에만 있는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라는 독특한 신앙 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23] 평양대부흥운동이 성공한 이후 길선주는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 운동을 주도하는 한 명의 열성적인 사역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2. 4. 목회 활동

1907년 6월 20일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으나[24] 노회가 없어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미국,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와 논의하여 한국노회 설립을 추진한 끝에, 같은 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졸업생 7명이 함께 안수를 받음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된 7명 중 한 명이 되었다.[25]

길선주 목사는 한국 교회의 현대화와 토착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당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해 교회당 안에 설치된 남녀 좌석 사이의 휘장을 철거하기도 했다. 아악(雅樂)을 교회 음악으로 도입하여 행사 때나 교회 명절에 연주하게 하였고, 찬양대와 교회 음악단을 조직하여 교회 선교 활동을 활성화시켰다. 연극과 성화(聖畵)에도 관심을 두어 ‘성극의 밤’을 열기도 하였다.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하여, 국권 상실의 수치와 비운에 빠진 민족을 구령으로 위로하고 민족의 최후 보루를 교회에 구축하고자 하였다.[6]

2. 5. 독립 운동

1897년 안창호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되었고,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17년 사망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여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도장을 이승훈에게 맡기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었다.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와 함께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19년 당시 평균 연령이 40대였던 시기에 이미 51세였고, 안질로 인해 시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3월 1일 당일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체포되어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된 이후, 체포된 민족대표 32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11년 105인 사건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나, 시력을 잃어 집회에 불참한 사실이 확인되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1년 7개월간의 투옥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되었다.[3]

2. 6. 신학

배덕만 교수는 그가 미국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수용하여 장로교내에 보수적 신학을 대한민국에 대중화시킨 인물로 꼽고 있다.

제임스 게일은 길선주 목사의 스승으로 그의 책 Jesus is Coming|주님이 오신다영어로 길선주 목사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의미에서 길선주 목사는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다.

저서로 『해타론』과 『만사성취』가 있고, 유고로 『말세학』, 『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을 남겼다.

3. 사망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소천했다. 민족대표 33인최린, 박희도, 정춘수는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였으나,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아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되어 대한민국 정부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26]

4. 가족 관계

구분이름비고
장남길진형신민회 회원,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
2남길진경목사, 1980년 평전 《영계 길선주》 출간
3남길진섭화가


5.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101)해평 길씨 https://www.joongang[...] 1984-03-10
[2] 웹사이트 http://japan.donga.c[...]
[3] 웹사이트 고 길선주 목사 90년만에 애국지사 되다 http://missionlife.k[...]
[4]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5] 서적 한국 메시아운동사 연구 3 아우내
[6] 웹사이트 길선주 [吉善宙] https://terms.naver.[...]
[7]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8] 웹사이트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는 어떻게 시작됐나? https://kr.christian[...]
[9]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0] 웹사이트 길선주 [吉善宙] https://terms.naver.[...]
[11]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2] 웹사이트 영수 [領袖, leader] https://terms.naver.[...]
[13]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4] 웹사이트 천구백칠년 대부흥운동 [千九百七年大復興運動] https://terms.naver.[...]
[15]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6]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7] 문서 길선주의 공개회개 내용
[18] 웹사이트 평양 대부흥운동 [平壤 大復興運動] https://terms.naver.[...]
[19] 서적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삼인
[20]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21] 웹사이트 대부흥운동 [大復興運動, The Great Awakening] https://terms.naver.[...]
[22]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3]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4]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5]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6] 뉴스 고 길선주 목사 90년 만에 애국지사 되다 http://www.kukinews.[...] 국민일보 200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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