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프단 라그나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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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프단 라그나르손은 9세기 잉글랜드를 침략한 이교도 대군세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노섬브리아를 침략하여 요크를 정복하고, 웨식스, 머시아 등지를 공격하며 잉글랜드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더블린 왕국을 공격했으나 전사했으며, 노섬브리아를 장악하여 요르비크의 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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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버트는 9세기 초 웨섹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 후 머시아 왕국을 정복하고 험버 강 이남 지역을 지배하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할프단 라그나르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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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작위 | |
노섬브리아 왕 | "재위: 876년–877년" "전임자: 리크시게" "후임자: 구스프리스" |
더블린 왕 | (논란) "재위: 875년–877년" "전임자: 에위스테인 올라프손" "후임자: 바르드 이바르손" |
덴마크 공동 통치자 | (아마도 유틀란트 반도) "재위: 871년–877년" "전임자: 바그세크" "후임자: 시구르드 스네크오이예" |
가문 | |
왕가 | 해당 없음 |
아버지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또는 그의 전설적 기반이 된 역사적 인물 |
어머니 | 아슬라우그, 또는 전설적 인물의 역사적 기반 |
기타 정보 | |
출생일 | 해당 없음 |
출생지 | 해당 없음 |
사망일 | 877년 |
사망 장소 | 스트랭퍼드호 |
매장지 | 해당 없음 |
2. 생애
할프단은 865년에 앵글로색슨계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을 침략한 이교도 대군세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65][66] 노르드 사가들에 따르면, 이 침입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할프단 포함)이 노섬브리아의 앨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한다. 앨라는 865년에 라그나르를 뱀굴에 넣어 처형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처형의 진위는 불분명하다.[67][68]
865년 가을, 이교도 대군세는 이스트앵글리아에 상륙하여 겨울을 나고 말을 확보했다.[70] 이듬해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섬브리아 왕국을 침입했는데, 당시 노섬브리아는 왕위를 두고 앨라와 노섬브리아의 오스버흐트 간의 내전 중이었다.[71] 866년 말, 요크를 정복했다.[72] 이듬해 앨라와 오스버흐트는 요크 탈환을 위해 동맹을 맺었으나 실패했고, 전투 중 둘 다 사망했다.[71] 지도자가 없어진 노섬브리아의 저항은 무너졌고, 데인인들은 에크버흐트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웠다.[73]
867년 말, 남쪽으로 이동해 머시아 왕국을 공격하여 노팅엄을 점령하고 겨울을 보냈다.[72] 머시아 왕 부르구레드는 웨스트 색슨인 왕 애설레드와 동맹, 연합군으로 노팅엄을 공격했으나 도시 탈환에 실패했고, 데인인들이 요크로 철수하는 조건으로 강화 조약이 맺어졌다.[74] 데인인들은 요크에서 1년간 힘을 비축했다.[71]
869년, 데인인들은 이스트앵글리아로 돌아와 정복을 목표로 테트퍼드를 공격했으나 이스트앵글리아 군대와 맞닥뜨렸다.[75] 이스트앵글리아 군은 패배했고, 에드먼드 왕도 죽임을 당했다.[76] 중세 전승은 에드먼드를 순교자로 묘사한다.[77] 뼈 없는 이바르와 우바는 데인인들의 지휘관이자 에드먼드를 살해한 자들로 여겨지지만, 할프단의 역할은 알려진 바 없다.[78]
이바르는 이스트앵글리아 정복 이후 이교도 대군세를 떠났고, 870년 이후 잉글랜드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는 873년에 사망한 더블린의 왕 이바르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79] 할프단은 대군세의 주요 지휘관이 되었고, 870년에 웨식스를 침입했다.[74] 바그세크가 이끄는 대규모 바이킹 전사들이 합류하여 할프단의 병력을 보강했다.[80] 데인인들은 애시다운 전투 등 웨스트 색슨인들과 아홉 차례 전투를 벌였다.[81] 그러나 웨스트 색슨인들은 패배하지 않았고, 할프단은 앨프레드와 강화를 맺었다.[82]
대군세는 런던으로 물러나 871/872년 겨울을 보냈다.[83] 이 시기 런던 발행 주화에는 할프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81] 872년 가을, 노섬브리아 반란 진압을 위해 돌아갔다.[82] 그러나 이 설명에는 이의가 제기되었고, 머시아와의 전쟁 결과라는 의견도 제시되었다.[84] 토크제이에서 겨울을 보내고, 1년 뒤 렙턴에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874년, 머시아를 정복했고, 부르그레드는 폐위되어 케오울프로 대체되었다.[85]
이후 대군세는 둘로 나뉘었다. 구스룸 부대는 남쪽으로 이동해 웨식스와 전투를 계속했고, 할프단 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해 픽트족 및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브리튼족과 싸웠다.[81] 얼스터 편년사에 따르면, 더블린 왕 에위스테인 올라프손은 875년에 "Albann"(할프단)에게 살해당했다.[86][87] 할프단의 형제 이바르는 873년 죽기 전 더블린을 다스렸고, 할프단의 원정은 형제의 왕국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81] 876년 노섬브리아로 돌아와 옛 데이라 왕국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지역에 정착했다. 노섬브리아 북부는 앵글인 지배하에 남겨졌다.[81] 사료들은 때때로 876년부터 할프단을 요르비크의 왕으로 칭한다.[88]
할프단의 더블린 통치는 안정되지 못했고, 요크에 있는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다.[65] 877년 더블린 탈환을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왔으나, "금발의 이교도" 군대와 마주쳤다.[89]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충돌했고, 할프단은 전사했다.[90] 살아남은 할프단의 병력들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노섬브리아로 돌아왔고, 이 과정에서 픽트족 왕 컨스턴타인 1세가 살해당한 전투를 벌였다.[91] 노섬브리아 바이킹들은 구드뢰드가 왕위에 오른 883년까지 왕이 없었다.[92]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할프단은 865년에 앵글로색슨계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을 침략한 이교도 대군세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65][66] 노르드 사가들에 따르면, 이 침입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할프단도 그중 하나)이 노섬브리아의 앨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한다. 앨라는 865년에 라그나르를 뱀굴에 집어던져 처형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처형의 진상에 대한 역사성은 불분명하다.[67][68]대군세 침입자들은 주로 데인인들이라고 여겨지며, 10세기 교회인 아세르는 이 침입자들이 "다뉴브강 출신"이라 번역되는 "de Danubia"에서 왔다고 하였다. 다뉴브강이 라틴어로 다키아라고 알려진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았을 때 아세르는 덴마크에 대한 라틴어인 Dania를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69]
2. 2. 이교도 대군세의 잉글랜드 침공 (865년 ~ 874년)
할프단 라그나르손이 이끄는 대 이교도 군은 865년에 동앵글리아 왕국을 침공했다.[33][34] ''사가''에 따르면, 대 이교도 군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를 뱀 구덩이에 넣어 죽인 노섬브리아 왕앨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들들이 조직한 군대였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35][36] 앵글로색슨족 측에서는 이 침략자를 일반적으로 데인족이라고 불렀다. 10세기의 성직자 애서는 "도나우의 사람들"(''de Danubi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라틴어로 덴마크를 의미하는 다니아(''Dania'')를 쓰려다 다키아 (Dacia)와 혼동한 결과라고 한다.[37]865년 가을, 대 이교도 군은 동앵글리아에 상륙하여 겨울을 보내면서 동앵글리아 왕에게 말을 바치게 했다.[38] 이듬해, 대 이교도 군은 북쪽의 노섬브리아로 향했다. 당시 노섬브리아는 앨라와 오스버트 사이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있었다.[39] 866년 후반, 대 이교도 군은 노섬브리아의 요크 등 중요 지역을 정복했다.[40] 이듬해, 앨라와 오스버트는 힘을 합쳐 요크에서 바이킹을 몰아내려 했으나 참패했고, 두 사람 모두 전사했다.[39] 노섬브리아 내의 저항 세력은 궤멸되었고, 대 이교도 군을 유지하기 위한 징세 역으로 괴뢰 왕 에그버트 1세가 옹립되었다.[41]
그해 후반, 대 이교도 군은 남하하여 머시아 왕국을 침공하여 노팅엄을 점령하고 겨울을 보냈다.[40] 머시아 왕 부르그레드는 웨섹스 왕애설레드와 동맹하여 노팅엄을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데인족과 화평을 맺어 요크로 돌려보냈다.[42] 대 이교도 군은 요크에서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침략을 위해 체제를 정비했다.[39]
869년, 대 이교도 군은 동앵글리아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이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 이교도 군은 세트퍼드를 공략하고 겨울을 보냈다. 동앵글리아 군은 대 이교도 군에 저항[43]했지만 패배했고, 에드먼드 왕은 사로잡혀 학살되었다.[44] 후의 잉글랜드에서는 에드먼드가 데인족의 기독교배교 요구를 거부하고 살해당한 순교자로 여겨져 성인이 되었다.[45] 이 사건에 대해서는 뼈 없는 이바르와 우바가 대 이교도 군의 지도자이며 에드먼드를 죽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할프단이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불분명하다.[46]
동앵글리아 정복 후인 870년부터 뼈 없는 이바르는 대 이교도 군을 떠나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를 더블린 왕 이마르(873년 사망)와 동일시하는 연구자도 있다.[47] 대 이교도 군의 중심 인물이 된 할프단은 870년에 웨섹스를 침공했다. 이바르가 대 이교도 군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바그세크가 이끄는 많은 바이킹이 대 이교도 군에 합류했다.[48]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대 이교도 군과 웨섹스 왕국은 871년 사이에 애시다운 전투 등 9번이나 전투를 벌였다.[49] 대부분 전투에서 바이킹이 승리했지만, 앨프레드를 멸망시키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앨프레드와 휴전을 맺었다.[50]
대 이교도 군은 런던으로 철수하여 871년부터 872년 겨울을 보냈다.[51] 이 시대에 발행된 동전에는 군단의 지도자로서 할프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49] 872년 가을, 대 이교도 군은 노섬브리아로 돌아가 괴뢰 왕 에그버트 1세에 대한 반란을 진압했다. 다만, 이 기동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오히려 머시아에서의 전투 결과였다는 설도 있다.[52] 어느 쪽이든, 대 이교도 군은 872년 겨울을 톡시에서, 873년 겨울을 렙턴에서 보냈다. 874년에는 머시아 왕국을 정복하고, 부르그레드를 추방하여 괴뢰 왕 케올울프 2세를 왕위에 앉혔다.[53]
2. 3. 노섬브리아와 아일랜드 원정 (875년 ~ 877년)
할프단은 874년에 머시아 정복을 완료한 후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픽트족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브리튼족과 싸웠다.[81] ''얼스터 편년사''에 따르면, 더블린 왕 에위스테인 올라프손이 875년에 "Albann"에게 "기만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했는데, 이 인물은 일반적으로 할프단으로 여겨진다.[86][87] 할프단의 형제 이바르는 873년에 죽기 전까지 더블린을 다스렸었고, 할프단의 원정은 형제의 잃어버린 왕국을 되찾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81]할프단은 아일랜드에 머물지 않고 876년에 노섬브리아로 돌아와 옛 데이라 왕국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지역에 정착했고, 노섬브리아 북부 지역은 앵글인들의 지배에 놔둔 채였다.[81] 이따금 사료들은 876년부터 할프단을 요르비크의 왕이라는 직함을 주었다.[88]
할프단의 더블린 통치는 안정되지 못했고, 그가 요크에 가 있는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다.[65] 그는 877년에 더블린을 탈환하러 아일랜드로 돌아왔으나, "금발의 이교도"(할프단이 속해있던, 새롭게 도착한 바이킹들인 "흑발의 이교도"와 반대되는, 아일랜드에 장기간 있었던 바이킹들을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논란의 용어)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89] 양측의 병력들은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할프단은 전사하고 만다.[90]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할프단 병력들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노섬브리아로 돌아왔고, 이 과정에서 픽트족의 왕 컨스턴타인 1세가 살해당한 전투를 벌였다.[91] 노섬브리아의 바이킹들은 구드뢰드가 왕위에 오른 883년까지 왕이 없이 지냈다.[92]
2. 4. 요르비크의 왕 (876년 ~ 877년)
할프단은 876년에 군대를 이끌고 노섬브리아로 돌아와 옛 데이라 왕국과 거의 일치하는 지역에 정착시켰다. 노섬브리아 북부는 앵글족의 지배하에 남겨두었다.[18] 사료들은 때때로 할프단을 876년부터 요르비크의 왕으로 칭하기도 한다.[25]할프단은 더블린 왕국을 통치했지만 안정적이지 못했고, 그가 요크에 있는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다.[2] 877년, 할프단은 더블린을 되찾기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왔지만, "금발의 이교도"(오랫동안 아일랜드에 있었던 바이킹을 의미하며, 새롭게 도착한 "흑발의 이교도"와 대조됨) 군대와 마주쳤다.[26] 양측 군대는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격돌했고, 할프단은 전사했다.[27]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할프단의 부하들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노섬브리아로 돌아왔고, 그 과정에서 픽트족의 왕 컨스턴타인 1세가 살해당한 전투를 벌였다.[28] 노섬브리아의 바이킹들은 구드뢰드가 왕위에 오른 883년까지 왕이 없었다.[29]
3. 역사성 논란
할프단과 그의 형제들은 역사상 실존 인물이라 여겨지지만, 그의 추정상 아버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힐다 엘리스 데이비드슨은 1979년에 "최근 몇 년 간 일정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라그나르의 이야기를 최소한만 받아들였다"라고 언급했다.[93] 다른 한편 캐서린 홀먼은 "라그나르의 아들들이 실제 역사 인물이라 하더라도, 라그나르라는 인물이 살았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몇몇 다른 역사적 인물들 및 순수한 문학적 발명의 혼합물로서 보인다."라고 결론 내렸다.[94]
할프단과 그의 형제라고 여겨지는 인물들은 개별적으로는 역사적 인물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관련이 있다는 동시대의 언급은 없으며,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힐다 엘리스 데이비드슨은 1979년에 저술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학자들은 라그나르의 이야기 중 적어도 일부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30] 반면, 캐서린 홀먼은 "그의 아들들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라그나르 자신이 실제로 살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그는 여러 다른 역사적 인물과 순수한 문학적 창작물의 혼합으로 보인다"라고 결론 내렸다.[31] [62]
4. 대중문화
2020년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에서 할프단은 형제인 이바르, 우바와 함께 등장한다. 게임에서 그는 노섬브리아에서 픽트족과 전쟁을 벌이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게임의 주인공인 에이보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에이보르는 그를 도와 반역자를 색출하고, 이후 할프단이 노섬브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할프단은 노르웨이 배우 예페 베크 라우르센이 연기했으며, 게임 내에서 토르 역도 맡았다.
5. 족보
할프단 라그나르손의 족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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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어머니 아슬라우그 |
조부모 | 할아버지 시구르드, 할머니 알프힐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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